〈 11화 〉 정령사 소녀 라헬(6)
* * *
그 이후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모두를 구하고 나와서 병사들에게 사건에 대해 설명을 했고, 다들 크게 다치지 않아 약간의 치료를 받은 뒤 곧바로 생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처벌받을 자들이 남아 있었다.
네델 광산 소유주는 뱀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숨기고 모험가들을 보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았다.
“병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안전을 위해 한동안 광산이 봉인 당해 수익을 낼 수 없어서 모험가들을 고용했던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설마 마주치겠어 하는 생각에 그만….”
그것만이라면 몰라도, 그는 그가 고용한 모험가들조차 믿지 못해 거대 뱀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
그 결과, 수많은 광부와 모험가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부디 자비를!”
“당장 잡아가라!”
고용주가 그의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은 반면, 난 이번 여정에서 신기한 것을 얻었다.
《계약자를 얻었다♪ 신난다♬》
내 머릿속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무기의 정령, 아르마(?).
이전에 계약했던 정령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종류의 녀석이었다. 하지만, 아르마의 격은 분명히 하급, 중급의 것은 아니었다.
상급 무기의 정령. 살짝 경박한 녀석이지만 아르마의 능력은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다.
상상하는 어떤 형태의 무기로도 변신할 수 있고, 그 무기의 강도는 강철 이상. 게다가 무기에 마법과 유사한 특수 효과까지 부여한다.
근데 이 녀석은 왜 광산에서 살던 거지?
“너 뭐 하다가 거기 있던 거냐?”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었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정령들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물이 많은 곳에 물의 정령이 많고, 바람이 세게 부는 곳에 바람의 정령이 많다.
그것과 같은 이치라면, 무기의 정령은 왜 그 광산 안에서 나타난 것일까. 광산이 아니라 대장간에서 살았어야 할 것 같은데.
매우 궁금하지만, 지금은 아르마(?)의 탄생보다 거대 뱀들의 출몰을 알아내는 것이 더 급했다.
혹시 마왕이나 악(?)의 누군가가 개입해 일상적인 장소에 두려운 마물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라면 썩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이 한창인 세계 사이의 경계, 최전선뿐만이 아니라 나의 집에서, 나의 일터에서, 나의 침대 밑에서 언제 괴물이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알아내야 할 것이, 하나 더….”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혼자 헤르네를 거닐었다.
“저기, 정령사 라헬 피스본 님 맞습니까?”
“맞는데요. 누구시죠?”
갑자기 누군지 모를 청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내가 라헬 피스본이 맞는지 확인했다.
“저는 헤르네 일보에서 일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라헬 양의 모험담을 듣고 싶어 하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신문? 신문이라.
이전에는 정령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냈을 때나 마왕군의 강한 적들을 처치했을 때 신문에 내 이름이 종종 오르고는 했다.
물론 그 신문들은 헤르네 일보보다 훨씬 큰 국가 규모의 신문들이었다. 헤르네도 나름 대도시였지만, 헤르네 일보는 기껏해야 헤르네 주민들만 보는 신문이었다.
작은 신문에 이름을 올려도 딱히 문제는 될 것 같지 않지만, 나중에 신분을 숨겼다는 것이 들켜버리면 엄청난 흑역사가 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아, 아… 알겠습니다. 어찌됐던네델의 영웅 라헬 님! 저희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저, 광산 안쪽을 조사했더니 불에 탄 뱀 사체가 3마리 있었다고… 전부 정령사 님이 처치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마무리는 내가 하긴 했지만, 또 업적이 다 내게 쏠린 건가?
무명은 업적이 뺏기든 말든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고. 여기서 구태여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힘드니 그냥 긍정하기로 했다.
“네. 맞습니다. 제가… 다 처리했죠.”
“으으, 이건 정말 기삿감인데 말이죠. 안 그래도 인간 정령사는 엄청나게 희귀한데, 심지어 중급의 정령사가 변방의 마을에서 갑자기 나타나다니.”
“아, 하하하….”
“그리고 등장하자마자 언데드 무리와 그를 조종하는 네크로맨서를 퇴치, 그 일이 있고 한 달 만에 조난된 시민들을 구하고 거대 괴수를 처치하기까지.”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그 정령사가 아름다운 소녀?! 이건, 이건 정말… 마치 몇 년 전 천재 정령사 로헨의 등장을 보는 것만 같아요.”
뭐라고?
살짝 열받았다. 내 데뷔 초창기 때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들을 세웠는데 어디 그때를 지금하고 비벼.
“제가 어떻게 세계 정상의 정령사 로헨 님께 감히….”
“아뇨, 정말입니다. 저도 정령술에 관심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언제 같이 술이라도 한잔… 제가 사겠습니다!”
그가 사겠다는 말에 솔깃했지만, 그의 눈빛을 보자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났다. 전형적인 유형. 여성을 꼬시려는 남성의 눈빛이었다.
“됐습니다.”
나는 싸늘하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몸은 여성이지만 남자의 정신으로 내게 호감을 표하는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는 건 무리다. 절대 불가능.
티론과 무명을 만나 벨크 마을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아까 탔던 말을 구해서 그 둘을 찾아다녔다.
“라헬! 이쪽이다.”
마을 입구에서 무명과 티론, 듀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런데 왠지 티론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고, 듀크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뭐, 별거 아니겠지.
* * *
티론이 깨어났을 때, 눈앞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새끼 뱀의 사체가 라헬 앞에 쓰러져 있었고, 자신 뒤에는 온몸에 불이 붙은 거대한 뱀 두 마리가 날뛰고 있었다.
정신이 없던 티론은 라헬에게 빨리 자신이 봤던 위험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크게 소리쳤다.
“라헬! 위험해! 거대한 뱀 마수가 이곳에!”
그러나 라헬은 이미 전투 상태였다. 그녀에게 보호받고 있는 자신이 뭐라도 아는 양 떠드는 것을 보며 비웃지는 않을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후, 어때.아직도 까불 마음이 들어?」
까불다가 대련에서 패배해 버린 나약한 티론을 비웃었던 그녀와의 첫 만남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를 덮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와 달랐다. 이번에는 그 어여쁜 얼굴로, 천사 같은 미소와 함께 상냥하게 말해 준 것이다.
“괜찮아, 넌 내가 구해.”
티론, 그 어리석은 소년을 구해주겠다고.
그 자리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로 그때,
소년은 소녀에게 반해 버렸다.
* * *
그리고 일이 다 마무리된 후, 티론은 그의 아버지 듀크와 무명과 모여서 벨크 마을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근데 라헬 누나는 어디 계시죠?”
“라헬은 잠시 생각 좀 하다가 온다고 했다. 미리 준비를 끝내놓자.”
“무슨 생각을… 네.”
무명이 티론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에도 티론은 보이지 않는 라헬이 걱정됐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멋진 누나인 걸 아는 데도 불안했다.
“왜, 어디 다른 남자하고 만나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 킬킬.”
듀크가 티론을 짓궂게 놀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티론의 얼굴이 붉어졌다.
티론은 부정하면서도 듀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은 대도시, 티론보다 멋진 남자들이 훨씬 많을 테고 그보다 강한, 어쩌면 라헬보다 강한 남자를 만나서…
그런 고민을 하는 티론을 보며 진실을 아는 무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라헬! 이쪽이다.”
"네!"
모험가를 꿈꾸던 시골 소년, 티론의 말 못 할 연정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 * *
나와 티론, 무명은 듀크가 모는 마차에 타서 벨크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네겐 전부 얘기하겠다. 어차피 다 들켰으니.」
우리가 광산으로 진입할 때 무명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비밀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이곳에는 티론과 듀크가 있다. 아직은 기다려야 했다.
“라, 라헬 누나.”
근데 얘는 아까부터 왜 계속 몸을 배배 꼬고 얼굴을 붉히는 거지? 병이라도 걸렸나?
“왜. 티론?”
“저 돌아가서 할 말이 있는데… 내일 그곳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그곳?”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요.”
“스승님의 집 앞 아니야?”
“아, 그곳 말고 제가 도망쳐서 주저앉아 있던 곳이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래. 딱히 할 일도 없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빨개지다 못해 아주 얼굴이 터질 지경이었다.
마차 운전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겠지?
끼이익!
“도착했네. 다들 수고했어, 정말.”
듀크가 운전석에서 내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표했다.
벨크 마을을 떠난 지 고작 하루 이틀도 되지 않았지만, 고된 여정 뒤여서 그런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이 말을 한 건 티론이었을까, 나였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저도 정령술에 관심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언제 같이 술이라도 한잔… 제가 사겠습니다!」
아까 나를 꼬시려 하던 남자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가 그립다거나 좋아서 생각난 건 당연히 아니고, 이제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20년 동안 남자로 살았던 내게 여자로서의 삶은 너무 낯설었다.
“끄응.”
나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갔다.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나의 얼굴과 몸을 살펴봤다.
그때 그 왕궁 화장실 이후로 제대로 직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달라진 나 자신을 보면 뭔가 어색해서 거울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쁜 편이긴… 하지.”
나와 친했던 여성인 성녀 아리아, 엘프 메리엘이나 루시엘과 비교해봐도 밀리지 않는 외모였다. 이런 여자가 주위에 있었다면 나 자신도 설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계약자, 자아도취냐? 혼자 거울 보면서 뭐하냐.》
“꺄, 꺄아악!”
씨발. 꺄악이라니, 꺄악? 완전 여자애가 돼버린 것 같아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크흠.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잖아.”
《자고 있었다. 정령들도 잠 많이 자.》
이전의 정령들도 가끔 잠을 자긴 했지만, 고작해야 몇 분 정도였지 아르마만큼 오래 잠을 자진 않았다.
“넌 좀 오래 자는 것 같은데.”
《소환될 때마다 여기저기 다치고 부딪힌다. 어쩔 수 없다.》
다른 정령들은 내 마력만을 이용하면서 싸우지만, 아르마는 내 마력도 이용하면서 자신의 몸도 다쳐 휴식 시간이 오래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내일 그 소년 만나냐?》
“응. 그렇겠지?”
《크크. 기대된다.》
뭐가 기대된다는 건지 물으려 했지만,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암. 나는 잘란다. 내일 봐.”
《계약자 안녕. 나도 더 잔다.》
침대에 누워서 여자가 된 몸, 무명의 비밀, 사라진 정령들, 무기 정령 아르마, 마왕의 저주, 죽은 아리아, 실종된 메리엘, 쓰러진 용사…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나는 평소와 똑같이 정령사용 로브, 가죽 장화, 그리고 주머니의 정령사 뱃지를 확인하고 집을 나왔다.
첫 만남 때 내가 도망간 그를 발견했던 그곳. 거기서 티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누나… 아니, 라헬.”
“어쭈, 라헬? 다시 대련해서 위아래를 가리자는 거냐?”
“그런 게 아니고… 자, 이걸 봐요.”
티론이 내 앞에 내민 건 꽃으로 이루어진 화관이었다.
“열심히 만들었어요. 받아주세요.”
불쌍한 꽃들. 왜 꺾어서 이런 장식품을 만든 거야?
공예품 장인으로 전직이라도 하려는 건가?
“어, 응… 근데 이건 왜?”
티론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응?”
“라헬, 당신을 좋아합니다.”
…뭐라고?
그냥 친한 남동생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 연인이 되고 결혼까지 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옛날 동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그 상황과 지금 내 상황은 많이 달랐다.
그야… 난 원래 남자였으니까.
아무리 여자의 몸이 됐다 하더라도, 정신은 남자였을 때 그대로다. 티론은 분명 좋은 녀석이지만… 그와 연애를 할 수는 없다.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거절해야 한다. 어떻게 거절하지? 남자 고백을 거절하는 건 처음인데…
그때처럼 해야 하나?
남자였을 적, 루시엘이 내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로헨 님, 정말 머쉬써요! 조아해요! 사귀어요!」
용사 파티와 루시엘까지 섞여 술을 마셨을 때였다. 술에 취한 루시엘은 혀가 꼬인 상태로 어버버대며 내게 고백을 했었다.
아마 그녀는 기억 못 할 테지만.
그때 어떻게 거절했더라… 맞아.
“미안. 티론,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연애할 생각이 아직….”
“아! 그럴 수 있죠! 누나는 엄청난 정령사니까, 할 일도 많을 테고. 음, 저 같은 애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당연히 지금 연애는 힘들겠죠! 이해해요. 답변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티론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티가 나서 더 안타까웠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사실 남자였다는 걸 이 녀석한테는 절대 밝힐 수 없겠지. 미안하다, 티론…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도, 우리는 아직 친구 맞죠?”
“으, 으응. 물론이지.”
왠지 분위기가 엄청 어색해졌다. 으으….
티론이 그의 집 쪽으로 뛰어갔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여태까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생겨 당황스러웠다.
《계약자, 매정하다.》
“넌 내가 남자였던 거 알았지?”
《당연. 그 천재 정령사의 향기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전에 들었던 모습하고는 달랐지만, 대충은 알았다.》
“하, 이렇게 되면 결국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찾는 방법밖엔 없겠군. 돌아가야겠어. 최대한 빨리….”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스승님의 집으로 향했다. 듣기로 했던 이야기가 있었지.
수백 년간 살아오며 많은 역사책에 나타났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인간의 수준을 넘은 검술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그 진가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온갖 비밀로 가득한 불사신 남자, 무명.
이젠 진실을 물어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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