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정령사 소녀 라헬(5)
* * *
위기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무기의 정령이라 주장하는 생명체.
어떤 정령이든 간에 정령이라면 나와 서로 친숙함을 느끼게 되어 있다. 정령이 주위에 있으면 내 마음이 안정되고, 정령들 또한 나를 잘 따랐다.
예전에 계약했던 정령들 말에 따르면, 나에게서 정령들을 홀리는 미혹적인 향기가 났다고 한다.
《인간에게 나 필요하다! 내게 인간 필요하다! 빨리 계약!》
처음 보는 종류의 정령이다. 무기의 정령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저 정령의 격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급, 중급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격. 무기의 정령 ‘아르마’는 상급 정령이었다.
“모든 정령은 나의 친구. 나, 로헨은 무기의 정령 아르마와 계약한다.”
“캬아아아악!”
뱀이 그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내게 달려온다. 한꺼번에 집어삼키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지만,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계약 완료. 아르마(?), 금강의 방패》
쿠콰과과쾅!
순간 아르마(?)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내 팔목에 묶인 거대한 방패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방패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뱀 쪽을 향했고, 그것의 돌진을 방어했다.
“캬아아아악!”
뱀은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대며 방패를 뚫기 위해 애썼지만, 아르마의 방패는 그렇게 쉽게 뚫리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 뱀이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방패 평범하지 않다. 남에게 칼을 겨누는 자, 자신도 칼에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뱀이 공격하는 그 데미지가 역으로 다시 뱀에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일종의 반사 공격.
그럼에도,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지만 밀리는 건 나뿐이다. 발을 고정했는데도 몸무게의 차이 때문인지 땅이 파이면서까지 밀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 내가 그나마 가장 잘 다루는 무기.
상황을 뒤집을 무기는 이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저 피부를 박살낼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를 믿어라, 인간. 무슨 무기를 원하냐. 네가 상상한다면 난 어떤 무기라도 될 수 있다.》
“생각을 다 읽고 있구나?”
《응. 다 듣고 있다. 말만 해.》
“나의 주먹이 되어 줘. 아르마.”
《계약자의 명령, 따른다. 아르마너클, 그 힘이 무엇이든 너클 주위에선 그 위력이 배가 될 것이니.》
“좋았어. 방금 부여된 특수 효과도 대충 알겠다.”
《계약자 똑똑하다!》
이상한 미사여구를 붙여서 말하지만, 아르마가 말한 것은 간단하다.
“이프리트(?). 내 주먹에 깃들어라.”
화르륵!
너클을 고열의 화염이 둘러싼다. 하지만 그 위력은 대충 봐도 이전에 검에 두른 불꽃과 비슷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 온도, 그 파괴력. 이전보다 몇 배 강해진 화염을 너클에 두르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불꽃 펀치다, 뱀 새끼야!”
《권투 소녀. 멋지다. 엉엉.》
말 그대로 내 주먹이 울었다. 불타는 주먹이 뱀의 피부를 가격했다. 콰르르, 소리를 내며 돌이 깨져 나가듯이 그 피부가 부서졌다.
“피부가 찢겨 나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그래도이제 속살 보인다.》
아르마의 말 그대로였다. 피부가 ‘부서진’ 곳에는 뱀의 야들야들해 보이는 분홍빛 속살이 빤히 드러났다.
“불태워주마.”
나는 그곳을 정확히 노려, 다시 한번 불꽃 주먹을 꽂았다.
《때린 데 또 때린다. 계약자 무자비.》
“마물한테 자비 따위는 없다는 신조라.”
그때였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라헬! 사람들은 구조했다!”
무명 스승님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티론을 등에 메고 있었고, 다른 모험가들과 광부들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역시, 믿을 만한 사람이라니까.”
《저 남자. 대체 뭐냐?》
나는 뱀에게 계속 불꽃 펀치를 날리면서 아르마와 대화했다.
“내 동료이자 스승님이야. 왜?”
《저 남자, 오른쪽 길로 갔던 거냐?》
“어? 응. 난 왼쪽 길로 갔고, 스승님은 오른쪽 길로 갔어.”
퍼억, 쾅!
내가 내지른 주먹의 데미지가 쌓이고 쌓여, 결국 뱀의 피부가 전부 바스라지고 그 속살에 화염이 옮겨붙었다.
지옥의 업화를 몰래 가져온 듯한 위력의 화염.
지금의 불 정령은 이프리트. 고작해야 중급 정령이지만, 아르마(?)의 강화 효과 덕에 위력이 몇 배 강화된 화염이다.
그 위력은 원래 나와 함께하던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의 화염에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캬아아아아아…”
뱀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른쪽 길에는 인간들이 식량으로 저장돼 있었다.》
“식량이라고? 그런… 근데 이 녀석은 왜 식량을 다른 방에 놔둔거지?”
《방금 우리가 해치운 뱀은 새끼.》
…뭐?
《저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단단하고, 훨씬 더 강한 뱀 두 마리 있다.》
아르마의 말대로라면 이 동굴은 뱀 가족의 거주지이고, 우리가 방금 애써서 해치운 뱀은 고작 아기 뱀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부모 뱀은 어디에?”
나는 순간 가능성을 깨닫고, 뒤를 돌아본 다음 무명에게 소리쳤다.
“스승님! 다른 뱀들을 보셨나요?!”
“아니, 보지 못했다!”
취르르르륵.
무명과 사람들 뒤로,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다.
내가 방금 해치운 뱀의 크기가 집 한 채만 하다고 했었나?
저 뱀 두 마리는, 어림잡아도 그 3배는 되어 보였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우리 방금 계약했다. 아직 계약 불안정. 내구도 부족. 아르마 굉장히 피곤한 상태다.》
근데 어째서인지, 나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노움(?), 사람들을 지켜!”
노움이 땅을 융기시켜 바위와 흙으로 무명을 제외한 사람들을 지킬 보호막을 만들었다. 이거면 몇 번의 공격은 버티겠지.
《저 녀석. 어차피 목표 정했다.》
“…뭐?”
아르마의 말이 맞았다. 뱀 두 마리는 확실히 내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저들의 새끼를 죽여서겠지?”
《정확히 알고 있다.》
“라헬! 티론을 지켜라!”
“노움!”
무명이 티론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노움으로 티론을 보호할 방어막을 만들었다. 완전히 사방을 막은 것은 아니라, 혹시 모르니 내 쪽으로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스르릉.
티론을 내려놓은 무명이 드디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뒤로 몸을 돌려 그의 뒤에서 나를 주시하는 거대 뱀 두 마리를 직시했다.
“제자 두 명도 지키지 못하면 스승이라고 할 수 없겠지.”
무명은 살짝 한숨을 쉰 다음, 검을 가볍게 두 번 휘둘렀다.
휙, 휙, 소리가 나고, 뱀의 꼬리가 깔끔하게 절단됐다. 당근을 썬 것처럼 아주 깨끗한 절단면이었다.
내가 펀치를 몇십 번을 날려서 새끼 뱀의 피부를 겨우 깼는데, 성체 뱀의 피부를 이렇게 간단하게 베어버린다니.
역시 괴물같은 남자다.
《죽을 만한 공격은 아니다!》
“알고 있어. 저 양반 불살주의거든.”
“캬아아아아아!”
뱀 두 마리가 광산이 무너질 만큼 강렬하게 포효했다. 꼬리가 잘려 그들의 자식을 죽인 인간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일까.
“근데 너희도, 내 소중한 친구를 앗아가려 했잖아.”
《끝을 내!》
“이프리트(?), 깔끔하게 불태워 버려.”
“라헬! 위험해! 거대한 뱀 마수가 이곳에!”
티론이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나는 그런 티론을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넌 내가 구해.”
화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명이 자른 절단면에 불이 붙었다.
“캬오오오오오!”
뱀 마수 둘 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저대로 날뛰게 냅두면 광산이 무너진다.
“스승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너까지 데리고 나간다. 그게 내 목적이다.”
무명은 그렇게 말한 뒤, 좁은 통로에서 몸부림치는 뱀 두 마리를 전부 내가 있는 크게 뻥 뚫린 공간으로 던졌다.
“어어! 위험하잖아요!”
“빨리 이쪽으로! 달려라!”
“키야아아아아아!”
새끼 뱀은 이미 죽었고, 남은 두 뱀도 죽어간다.
나는 무명 쪽으로 달려가다가 잠깐 뒤를 돌아봤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이프리트(?), 노움(?).”
점점 까지는 피부밑 속살에 전부 불을 붙이고, 아예 큰 공간 자체를 노움으로 붕괴시켰다. 혹시 불로부터 살아남아도, 압사로 죽인다.
“대단하군.”
다 같이 광산 밖으로 달려가는 중, 티론과 닮은 어떤 모험가가 내게 말했다. 아마 이 남자가 티론의 아버지. 듀크 세드릭이겠지.
“라헬 누나, 스승님. 정말… 고마워요.”
티론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말했다. 설마 우냐? 여기서 운다고 놀리면 완전히 삐지겠지. 다음에 놀리고 일단은 봐주자.
“별거 아닌걸요. 뭐.”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 * *
모험가 듀크 세드릭은 널리 이름을 떨친 유명 모험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모험가 생활을 하며 살아남은 나름 베테랑 모험가였다.
물론 그는 엄청난 모험을 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마을 사람들을 돕거나, 호위 혹은 소규모 사냥 같은 간단한 임무만 해서 살아남았다고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집에 가서 아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줄 때만큼은 그는 용사 파티에 못지않은 걸출한 모험가가 됐다.
“그래서 아빠가 그때 동료를 공격하려는 고블린을 단칼에!”
“와아, 그래서 그다음엔? 그다음엔?”
“하하, 그래서…”
그렇게 아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 듀크 세드릭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 티론이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길은 그가 선택하는 것이니까.
어떤 용병한테 검술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도 아이 엄마에게 들었다. 그래서 듀크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광산 호위 의뢰를 받게 되었다.
놀라울 만큼 보수도 좋고, 고작 개발된 광산 호위인데 6명을 모집하는 등 안전하기까지 했다.
이 의뢰라면 티론의 모험가 데뷔 의뢰로 가장 완벽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근데 아버지, 마물은 나오지 않네요?”
티론이 듀크에게 물었다. 듀크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티론은 아직 혈기왕성한 신입 모험가. 적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듀크는 알고 있었다. 모험가의 가장 성공적인 의뢰 해결법은 애초에 마물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라는 걸.
광부들이 열심히 채굴할 동안, 듀크와 티론을 비롯한 호위들은 주변을 살피고 소형 마물들을 처리한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재앙이 찾아왔다.
“저, 저기 거대한 뱀이…”
동료 중 한 명이 그놈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 높은 천장에 닿을 듯이 거대한 몸집, 그리고 딱 봐도 기사들의 갑옷보다 두꺼워 보이는 피부, 그리고 자신들을 그저 식량으로밖에 보지 않는 그 악랄한 눈.
그랬다. 고용주 놈들은 저 녀석이 나타난 걸 알고 비싼 돈을 줘 고용한 것이다. 저놈을 해치우라고.
하지만 사전에 저 놈들이 있다는 사실을 공지하지 않았다. 그야… 저 뱀이 있단 것을 알고 누군가 공권력을 부르면 한동안 이 광산은 폐장되고 돈을 벌 수 없게 될 테니까.
듀크는 그들의 속셈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저 뱀을 그들만으로 해치우는 건 역부족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꼬리에 맞아 기절했고, 눈을 떴을 때는 그 뱀들의 식량 창고 같은 구덩이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이제 곧 죽겠다고 생각했을 때, 뱀 두 마리가 식량 창고가 있는 방을 떠나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티론의 스승, 검은 머리 용병.
그는 지친 사람들에게 서둘러 물과 음식을 먹였다. 그리고 다른 쪽 길에 자신의 제자가 같이 왔다며 혼자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듀크를 비롯한 모험가들과 광부들도 동행했다.
그를 돕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커다란 뱀 두 마리가 다시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컸기 때문에 동행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살짝 작지만 그래도 거대한 뱀 한 마리의 시체와 작은 소녀가 있었다. 아마 저 여자아이가 혼자 해치운 거라고 추측하고 듀크는 감탄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티론이 평소에도 자주 얘기하던 천재 누나였다. 그리고 마을을 구한 정령사가 저 소녀라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이름이 라헬, 이었지.’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커다란 뱀 두 마리가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들은 저 새끼 뱀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러나 그런 듀크의 걱정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용병 남자와 정령사 소녀는 너무나도 가볍게 그 괴물 뱀 두 마리마저 해치웠다.
그는 소리내어 감탄했다.
“대단하군.”
그것이, 듀크의 솔직한 평가였다.
‘물론 단칼에 저 뱀들을 벤 용병도 대단하지만, 불로 지지고, 더 센 화염으로 불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동굴을 붕괴시켜 뱀을 확실하게 죽이려는 저 소녀는… 정녕 인간이 맞는 것인가?’
애초에 모험가들은 변변찮은 공격도 하지 못하고 당해서 뱀들의 피부가 얼마나 단단한지 몰랐기에 무명보다 라헬을 더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마을을 구했다는 정령사로서의 명성, 그리고 무명에 대한 과소평가가 합쳐져 초래한 착각이었다.
“라헬 누나, 스승님. 정말… 고마워요.”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티론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거리고 있었다.
“별거 아닌걸요. 뭐.”
겸손을 떠는 소녀의 볼은 발그레해져 있었다.
‘장가보낼 때가 온 건가.’
듀크는 티론과 라헬을 번갈아 보면서, 라헬이 알게 된다면 굉장히 분노할지도 모를 생각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