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정령사 소녀 라헬(4)
* * *
“상황 설명을 부탁한다.”
자신의 말을 가지고 와 나랑 나란히 달리고 있는 무명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티론의 상황이 어떤지 자세히 물어보지만,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떡해.
“저도 잘 모릅니다. 3일 전 광산으로 떠났는데, 고작해야 하루 이틀 걸릴 예정이었던 호위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네요.”
“으음. 네델 광산이었지.”
“네. 제가 알기로는 거기에 위험한 마물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이?”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려 헤르네 마을에 도착했다. 혹시 정령 검술을 이용할지도 모르니 진검 한 자루를 샀고, 무명은 이미 칼을 소지하고 있어서 간단한 식량들을 구매했다.
그곳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발견하면 물과 식량을 공급해야 할 테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후, 우리는 바로 네델 광산으로 향했다.
아침에 출발하고 전력으로 달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저녁쯤에 도착했다. 광산 입구는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저기, 지금 못 들어가나요?”
“최근에 이 광산에서 모험가 단체 실종 사건이 발생해서, 광산의 출입을 금하고 지금 수색 작업을 준비 중입니다.”
병사들이 먼저 나서 준다면 확실히 우리가 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수색 작업을 시작할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하나요?”
“이 정도 규모의 모험가 파티가 실종됐다면 사건의 크기가 꽤 큽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고,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늦어. 너무 늦는다. 그때쯤이면 이미 마물에게 먹힌 후 소화까지 다 되어 똥으로 나오고도 충분한 시간이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실종된 모험가가 저와 친분이 있어서.”
경비병은 들고 있던 창으로 나를 막았다. 어이도 없다. 원래 같았으면 넙죽 엎드려서 열어 줬을 텐데.
그냥 바로 신분 증명하고 꺼지라고 하면 되지만, 그놈의 체면… 국왕님 어명인데 개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녀 혼자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옆의 분이 같이 가신다고 해도 무리입니다. 걱정되시는 건 알겠지만, 조금 기다려 주시죠.”
나름 검 한 자루는 차고 있었는데 그냥 소녀라니, 답답하네.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고, 들어갈 자격은 증명해야 하고. 뭐 방법이 없나?
나는 가만히 서 있는 무명을 빤히 쳐다봤다. 그 역시 자격을 증명받을 만한 뭔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긴 힘을 숨기면서 사는 양반이니 그런 것이 있을 리 없겠지.
“으으음.”
방법이 없을까, 음…
아, 그게 있었지.
나는 로브 안쪽에 손을 넣어 뒤적거린 다음, 뱃지 하나를 꺼냈다.
정령사는 다루는 정령의 수준에 따라 하급, 중급, 상급으로 나뉜다. 정령왕 급을 다루는 정령사들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인물들은 역사적으로도 몇 없으니까 제외한다.
대륙 유일의 정령술 교육 기관 엘피디언 아카데미에서 그 정령사들의 수준을 관리하고, 그에 맞는 뱃지를 선물한다.
물론 정령사들의 대부분이 그 학교 출신이라 뱃지가 있지만, 나는 극히 예외인 경우라 최근까지도 뱃지가 없었다.
하지만 명예교수직을 준다면서 뭐라 뭐라 해서 하급, 중급, 상급, 그리고 엘피디언 아카데미 교수직 뱃지도 선물 받았는데, 이게 지금 도움이 될 줄이야.
옷 위에 달고 다니면 건방 떠는 것 같아서 버리고 싶었지만, 나름 선물이니까 쉽게 버리지도 못해서 어디 처박아 뒀던 게 드디어 제값을 해낼 시간이다.
근데… 상급 뱃지를 들이대도 되려나?
극히 적은 수의 정령사들만이 상급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심지어 그 90%는 엘프고, 인간 상급 정령사는 진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는 건, 내가 상급 뱃지를 보여준다면 내 신분이 들통날 수도 있다는 건데… 중급 뱃지로 충분하겠지?
“자, 이걸 보시오.”
나는 중급 뱃지를 꺼내 그 경비병 앞에 들이밀었다.
중급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마을 병사 수십 명 정도보다 전장에서 훨씬 많은 활약을 하는 것이 중급 정령사다. 저들 수십 명이 가는 것보다 나 혼자가 훨씬 낫다는 거지.
애초에 난 지금 중급 정령사가 맞기도 하고… 돌아와 줘, 얘들아.
“중, 중급 정령사님이셨군요. 그 정도면 가능할 듯싶습니다만, 잠시 대장님께…! 근데 존함이?”
“라헬. 중급 정령사 라헬입니다.”
경비병은 황급히 대장이라는 자에게 달려가 얘기를 전했다. 설마 중급 정령사 목록에 라헬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본다든지 하려나… 그렇게 빡빡하게 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네, 다만 혼자서는 위험할지도 모르니 호위를 할 전투원 한 명을 데려가라고 충고하시더군요.”
“그건 이 자면 충분해요. 용병이거든요. 그것도 아주 오~래 싸운 용병.”
나는 미소를 짓고 무명을 툭툭 치며 말했다. 불살 주의라는 치명적 단점이 있지만,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뿐이라면 제 역할을 다하고도 남을 남자다.
“그럼 정령사님, 건투를!”
“네~네~”
“…….”
그렇게 나와 무명은 둘이서만 티론과 동료들을 삼켜버린 그 공포의 광산으로 들어갔다. 각자 한 자루씩 검을 빼 들고.
* * *
저벅저벅.
광산 안은 어둡고 축축했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직업이 정령사이기도 하다.
“이프리트(?), 잭(光).”
불의 중급 정령 이프리트로 축축한 대기를 조금 데우고, 빛의 중급 정령 잭으로 어두운 동굴을 밝혔다.
“근데, 얼마나 깊이 가야 하는 걸까요.”
“언제 적이 나올지 몰라. 긴장해라.”
무명은 꽤 긴장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 광산에서 진짜 위험한 녀석이 나올 리가 있을지는 아직도 의심스럽기는 한데, 이 괴물까지 긴장한다고?
“긴장하셨어요?”
“……티론을 찾아야 한다.”
설마 티론을 걱정해서…?
수단은 알 수 없지만 몇백 년을 산 괴물은 누가 죽든 말든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편견이었네. 죄송해요.
그런데 무명에 대해서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마왕만은 결사반대하는 이유, 인간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거의 몇백 년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왜 불살 주의인지.
“근데, 저기.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는데.”
“……?”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시는지, 마왕만은 결사반대하는 이유라든지, 불살 주의를 지키는 이유라든가….”
“이 일이 끝나면, 네겐 전부 얘기하겠다. 어차피 다 들켰으니.”
드디어 내 말을 들어줬어!
빨리 티론을 구하고 나가서 이야기를… 어라?
“이건… 난감하군.”
“그렇네요.”
두 갈래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왔다.
“정석적인 방법은 한 길에 한 명씩 가는 거겠죠?”
“네가 정해라. 왼쪽? 오른쪽?”
원래라면 정령을 보내서 탐사하고 가겠지만, 상급 정령이 아니면 내 몸에서 멀리 떨어지면 사라지고 만다. 즉 시험삼아 먼저 보내 볼 수는 없다는 거지.
“제가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감이다. 하지만 평소에 내 감은 좋은 편이다. 내가 왼쪽으로 가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럼 내가 오른쪽으로 가지. …무사히 돌아오거라.”
훈훈한 인사와 함께 우리는 헤어졌다.
똑.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린다. 광산 안은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하다.
그렇게 얼마 정도 더 걷다 보니, 뻥 뚫린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하."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자고 있었다. 거의 집 한 채만 한 크기의 뱀이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꽤 진풍경이었다.
구렁이인지 뱀인지, 딱 봐도 이 동굴에서 나타날 정도의 마수는 아니었다. 이런 녀석이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광산 허가도 열리지 않았겠지.
그렇다는 건, 이 마수는 최근에 나타났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 규모의 마수가 소리소문없이 갑자기 동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일단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사람들을 찾아서 구출해야 한다.
“…어딨지?”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오른쪽 방에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거나, 혹은 이미, 다…
제발, 그런 일만은 없어야 한다.
일단 저 뱀을 깨우지 않고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서 오른쪽 길로 가야겠다. 저 뱀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하기도 힘들고, 일단 싸운다면 시간이 끌린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사람들을 구하는 게 최우선.
작전상 후퇴다.
똑!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지.
저벅.
왜 신발이 바위를 밟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스르르륵.
아, 짜증 나게 하네.
뱀이 깨어나 버렸다.
“캬아아아!”
“이프리트(?), 운디네(?), 노움(?), 벤투스(風).”
이전에 무명 스승님과 대련했을 때는 전부 다 하급 정령들이었지만, 지금은 다 중급 정령들이다. 하급과 중급 정령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에 화염을 두르고, 노움으로 지면을 솟구치게 한 다음 점프 공격. 단순한 원 패턴 공격이긴 하지만 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셰이드(?).”
뱀의 시야도 차단한다. 아, 잠깐만.
휘익!
“허억, 허억.”
초고속으로 날아오는 꼬리 공격. 시야를 차단했음에도 정확히 날아왔다. 어떻게,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적외선 감지.
뱀은 애초에 시력이 좋지 않다. 대신 눈 아래 구멍으로 적외선을 감지해 감각으로 사냥감을 사냥한다고 하지. 그걸 깜빡했네.
벤투스의 힘을 빌려 공중에서 몸을 움직여 뱀의 꼬리를 밟은 후, 다시 돌격했다.
“히야압!”
화염을 두른 검이 뱀의 피부를 뚫고…
“어라?”
팅!
칼이 들지 않는다.
저 피부 어떻게 되먹은 거냐. 강철보다 단단하다고?
하지만 나는 숙련된 실전 전투원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몸 어딘가에 약점이 있다는 걸 잘 알지.
그리고 이 경우에는 대부분…
눈.
다시 한번, 칼에 화염을 두르고 눈을 찔러 보지만.
“씨발.”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칼이 다가오자 커다란 뱀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무슨 눈꺼풀이 피부만큼 단단해? 칼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
팅!
대체, 어디를…
팅!
분명 약점이 있을 것이다.
어디지, 대체 어디…?
계속 칼과 뱀의 꼬리가 부딪혔다. 나는 아직 검술에 있어서는 초짜. 지금 나의 검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챙그랑!
결국, 사단이 났다.
“하하, 되는 일이 없네.”
계속 부딪혀 상해버린 검에 뱀의 꼬리가 직격하고, 방금 산 검이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이제 나에게 무기는 없다.
정령 검술은 아직 미숙했으니 어쩔 수 없지. 이제는 순수화력으로 갈 수밖에.
나의 두 손 위에 이프리트의 화염이 타오른다. 뱀의 저 두꺼운 피부조차 불태워서 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면 승산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 와중에 슬쩍 뒤를 봤다. 벤투스의 바람을 타고 달리면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좀 쪽팔리긴 하지만, 사는 게 먼저잖아.
…근데 저건 뭐지?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물체가 그곳에 있었다. 내 허리만큼도 오지 않는 키. 오른손엔 작은 검을 들고 있었고,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것의 외형은 우리가 흔히 아는 골렘. 하지만 엄청나게 작은 것이 차이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반갑다! 인간!》
“취르르르륵!”
앞에는 집채만 한 뱀, 뒤에는 칼과 방패를 든 채 말하는 아기 골렘. 이게 대체 무슨 상황…?
《나, 무기의 정령 아르마(?). 너, 마음에 드는 냄새 난다!》
얘는 대체 뭐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