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8화 (8/40)

〈 8화 〉 정령사 소녀 라헬(3)

* * *

“히야아압!”

검조차 빼지 않은 무명(無名). 나는 솟아오른 지면에서 점프하고, 하늘에서 화염을 두른 검을 휘두르며 낙하했다. 실프 덕에 낙하 속도가 가속되어 검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리지만…

퍽!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가볍게 막혀 그대로 맨땅을 3바퀴 정도 굴렀다.

“쿨럭! 쿨럭!”

곧바로 나이아스가 긁히고 까진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한다. 그보다 나는 뭐에 막힌 거지? 무명은 검을 빼지도 않았는데…?

무명은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하, 나뭇가지?”

너무나도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길이는 팔꿈치에서 손바닥까지 정도의 길이. 두께는 너무나도 얇아서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거 같은 그런 나뭇가지였다.

“어이가 없네요. 나뭇가지라니.”

“칼을 들 수는 없었다. 목검도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지.”

나름 일주일 전에 용사와 함께 마왕에게 도전했던 몸이, 고작 나뭇가지에게 당해?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질 수 없다. 날 무시했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불사신 괴물.

이미 나는 무명을 불사신 초인으로 생각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능력이라지만 나뭇가지는 선 넘지.

“에잇! 이얍! 하압!”

무명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공격 하나하나를 받아쳤다. 혹자는 초보 상대로 진지하게 하냐고 그에게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가볍게 상대하면서 무시하는 게 더 기분 나쁘다.

“어스웜(?), 데스(?)”

상대의 발밑을 흔들리게 해 균형을 잃게 하고, 어둠의 정령으로 상대의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움직임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시야가 없어도 다른 감각 기관으로 충분히 전투가 가능한 모양이다.

“진짜 괴물이시네요.”

“그 전투법, 나쁘지 않군.”

어둠으로 시야를 가리는 게 통하지 않는다면 빛의 정령으로 눈부시게 만드는 것도 효과가 없겠지? 정말 답이 안 나오는 괴물이다.

“정령술과 검술을 융합해 봤죠.”

“둘 다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인간은 아마 너 이외에는 없겠지. 너만의 기술이다. 하지만 아직은 미숙해.”

그리고 그 후,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신명 나게 처맞았다.

마구 때려서 아예 못 덤비게 만든 것도 아니고 나한테 큰 상처는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여서 분했다.

사실 그것보다, 이렇게 압도적인 강함을 가지고 함께 마왕을 해치우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더 짜증 났다.

“이런 힘을 가지고서 왜 숨어만 있는 겁니까!”

홧김에 소리 질러 버렸다. 하지만 본심이다. 마왕이 전력을 다한다면 우리가 본 것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지만, 이 자가 있다면 혹시, 혹시 모르니까…

“마왕을 해치울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요!”

“얘기할 수 없다. 정령을 찾는 일이라면 협력할 의향이 있다. 엘프 궁수를 되찾기만 하는 일이라면 역시 협력할 의향이 있다.”

“왜, 마왕만…”

“하지만, 결단코 마왕은 안 된다.”

내 몸의 비밀을 알 방법은… 지금까지는 마왕 말고는 답이 안 보이는데.

그리고 마왕은 반드시 해치워야 할 악이다. 물론 나도 며칠 전까지는 그냥 도망가고 싶었지만, 앞으로 있을 재앙들을 생각하면 힘이 있는 자가 나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앞의 힘이 있는 자가 나서 줬으면 하는 것이다.

“강요할 수 없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디, 힘을 빌려주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 돌아가라.”

“으….”

여전히 그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 * *

그 이후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3주일이 지났다.

그 악몽 같았던 날로부터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난 것이다.

“이프리트(?), 운디네(?), 노움(?), 벤투스(風), 잭(光), 셰이드(?).”

3주일 만에 나의 하급 정령들은 전부 중급 정령들로 성장했다. 보통 일반 정령사들이 하급 정령과 계약해 중급 정령까지 키우는 데는 약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중급에서 상급까지 가는 건 평생이 걸려도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하고.

애초에 인간이 정령과 계약하는 경우 자체가 흔치 않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정령술은 거의 엘프들만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 출신인데다가, 내가 키운 정령들은 하급 정령에서 중급 정령까지는 길어도 한 달이면 충분, 중급에서 상급 정령까지도 몇 년이면 성장하더군.

단지, 살짝 아쉬운 게 있다면 불, 물, 땅, 바람, 빛, 어둠의 원천적인 정령들하고만 계약한 것이다. 전에는 감정과 관련된 정령들, 특이한 정령들도 많았는데.

한편, 무명 설득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말이라도 붙여 보려 하면 바로 오두막 안으로 돌아가 버려 얘기를 꺼낼 틈조차 없었다. 아주 완강히 거부하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아니, 이쯤이면 그냥 나 혼자서라도 떠날까. 아니면 마왕을 포기하고 메리엘과 정령들 찾기부터 우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정도는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그가 마왕 토벌을 도울 가능성이 없다는 걸 슬슬 느끼고 있었다. 메리엘도 지금 어떤 상황일지 모르는데, 최대한 빨리 구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들고…

“라헬 누나! 시간 괜찮아요?”

티론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 검술 수업에 의의가 있다면 아마 티론과 친해진 것 하나뿐이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알면 알수록 괜찮은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저, 의뢰를 받아서 모험을 떠나게 됐어요!”

“정말? 무슨 의뢰인데?”

드디어 모험가 데뷔인가? 풋풋할 때네. 내가 처음 전장에 나설 때가 기억난다. 그때 이그니스랑 같이 전장을 휩쓸었는데…

“아버지가 이번에 네델 광산에서 하루, 이틀 정도 호위 임무를 맡으셨는데, 저도 따라가기로 했어요. 그리 어려운 임무는 아니라서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그냥 호위 임무면 괜찮긴 하겠네. 개발된 광산이면 마물들도 많이 나오지는 않을 테고. 해봤자 코볼트나 고블린 정도?”

“그렇겠죠? 아버지도 같이 가시고, 다른 모험가분들도 대여섯 명 정도 가는 꽤 규모 있는 의뢰라 안전할 것 같아요.”

고작 광산 채굴 호위에 모험가 6명이라니, 돈이 썩어빠지게 많은가 보네. 아니면 그 광산이 그만큼 돈이 잘 벌린다는 건가.

아니면…

에이, 설마. 개발이 다 된 광산에 위험한 마물이 있을 리가 없다.

“언제 가는데?”

“오늘! 좀 있으면 헤르네로 출발해요. 거기서 아버지의 동료분들과 모여서 다 같이 광산으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에 인사하려고 왔어요.”

“영원한 작별 인사가 되지 않기를 빌게.”

“으으. 겁주지 마요. 다녀와서 또 대련하죠.”

“물론이지. 실전 경험 제대로 쌓아 오라고. 기대되는걸.”

그렇게 티론은 웃으면서 헤르네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나는 그런 티론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사히 돌아와라.’

첫 원정에 죽는 모험가는 수없이 많다. 대부분 자신의 수준을 잘 파악하지 못했거나, 돈에 눈이 멀어 무리한 의뢰를 받았거나, 혹은 갑자기 뜻밖의 사태가 생기거나. 셋 중 하나다.

티론의 경우에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으니, 분명 별일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티론을 걱정하는 건, 그냥 이 몸으로 변한 뒤 처음 생긴 친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돼서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던가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오늘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나는 오늘도 역시 스승님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똑똑똑.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 * *

그 후로 3일이 지났다. 이번 주 안까지 설득되지 않는다면 그냥 혼자 떠나거나, 적어도 그를 마왕 토벌에 끌어들이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늦게 일어나서 파헬 아저씨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아저씨를 찾아왔다.

음, 병사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지? 범죄라도 저질러 잡혀가는 건가요. 아저씨?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힐끗 보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파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병사가 떠나고, 그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못하는 것처럼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병사가 오네. 우물우물."

나는 보리빵 조각을 집어 먹고 잔에 담긴 우유를 마시며 무슨 일인지 그에게 태연하게 물어봤다. 그런데, 아저씨가 그 다음에 말한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티론과 그의 아버지 듀크, 그리고 그 일행이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쨍그랑!

나는 파헬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들고 있던 우유잔을 떨어뜨렸다.

고작 사흘 만에 실종? 그냥 개발된 광산에서 호위 임무를 하는 것뿐인데?

“하루 이틀 정도 호위를 한다고 했는데 3일째 광산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는 모양이야. 광부들은 물론이고 호위들도.”

이건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해 생긴 문제가 아니다. 네델 광산은 몇 년째 사람들이 드나드는 개발이 완료된 광산이다. 티론을 포함한 다른 모험가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이 생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구하러 가야 한다.’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파헬 아저씨. 네델 광산은 여기서 먼가요?”

“음, 말을 타고 가면 하루도 안 돼서 도착할 거다. 구하러 가려는 게냐?”

“네. 설마 저도 감당 못 할 일은 아니겠죠. 그 정도 일이라면 정말 왕국 기사단이라도 소집해야 할 테고.”

“다녀오렴. 최대한 빨리 가야 할 테니, 내 말을 빌려주마. 탈 줄은 알지?”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말 따위는 전장에서 몇 번이고 타 봤다. 여자가 되고 말을 타는 건 처음이지만… 그걸 가릴 때가 아니지. 나는 황급히 뛰쳐나와 아저씨의 집 마구간에 묶여 있는 말에 올라탔다.

다그닥 다그닥.

마을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쯤, 동네 가게에서 사과를 사고 있는 무명(無名)이 내 눈에 띄었다.

이건 도와주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제자잖아.

“무명! 티론이 위험에 빠졌어요! 도우러 가야 해요!”

“티론이…? 그게 무슨. 아, 그 의뢰 말인가?”

티론이 가기 전에 무명에게도 얘기해 놓았던 모양이다. 의뢰를 받게 됐다고 신나서 여기저기 자랑했겠지. 녀석답다.

“네! 티론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도, 광부들도 전부 연락이 끊어졌다고 해서… 광산에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요.”

“가자. 내 말을 가져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다오.”

무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를 따라오겠다고 나섰다.

히히힝!

가자, 네델 광산으로.

내 친구, 티론을 구하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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