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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 잃어버린 정령사-7화 (7/40)

〈 7화 〉 정령사 소녀 라헬(2)

* * *

실프(風)를 전투에 응용한다면 상당한 효과가 있다.

고작 하급의 바람 정령일 뿐이지만, 전투할 때 내 몸 이곳저곳을 바람으로 받쳐 주어서 신체 능력을 급상승시킨다.

물론 이러한 전투 방법은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지만… 전장에서 여러 번 해 본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정령 다루는 기술은 자신 있거든.

‘재능충이니까.’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분개할 만한 대사를 마음속으로 읊으며, 달려오는 티론을 자세히 관찰했다.

‘오른쪽 위.’

두 목검이 맞부딪힌다.

지금 나의 몸은 여성의 몸. 힘 싸움을 한다면 내가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실프가 뒤에서 받쳐 준다면?

바람의 힘으로 오히려 역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크윽! 뭔 여자가 힘이 이렇게 강해!”

살짝 양심에 찔리는군. 그러게 입 털지 말았어야지.

입 털면 더 확실하게 밟아주고 싶어지거든.

목검과 목검이 계속해서 맞부딪힌다. 처음에 티론이 돌격해서 공격한 첫 충돌 이후로, 나는 바람의 힘을 받아 빠르게 목검을 휘둘렀고, 티론은 계속해서 수비 태세만 취했다.

“으윽…”

“계속 가드만 올리고 있을 거야? 푸훗!”

나는 이제 그를 비웃기까지 하면서 여유롭게 상대하고 있었다.

적당한 실력, 적당한 재능, 적당한 피지컬.

뭐 하나 뛰어난 점이 없었다. 지루했다. 단련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나 보다.

물론 나도 검술이라고는 기본기도 안 된 상태지만, 그냥 마구 목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버티지 못하는 저 녀석도 딱히 수련이 잘 되어 있지는 않아 보인다.

“히얍!”

나는 살짝 힘 빠지는 기합을 넣으며 티론의 검 옆면을 세게 가격했다. 티론의 검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며… 땅바닥에 푹 하고 꽂혀 버렸다.

“후. 어때. 아직도 까불 마음이 들어?”

나는 티론을 겨누던 목검을 거둔 다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승리자의 태도를 보였다.

“크, 크흑… 제기랄!”

티론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저 멀리 도망쳤다.

내가 좀 심했나? 아무리 그래도 모험가 지망생 소년인데, 조금 살살할 걸 그랬나…?

아니 근데, 이렇게 쉽게 이길 줄 몰랐지. 나도….

힘이 약해지고, 정령들을 잃고, 검술도 모르지만, 전쟁터에서의 짬이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의 소년과는 애초에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뭐, 실프를 안 썼다면 이 정도로 비참해하진 않았겠지만.

살짝 미안해졌다. 나중에 사과해야겠어.

“으음. 로헨 승.”

무명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의 승리를 공언했다.

“저, 사람들 있으면은 로헨 말고 라헬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았기도 하고… 아니, 그 전에 그쪽이 계속 저를 피하고 있잖아요.”

내 앞의 남자가 몇백 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예의를 갖추게 된다. 그래도 그동안 피한 것에 대한 보답은 톡톡히 받아 내야겠다.

“피한 것이 아니라….”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마왕 토벌에 함께하실래요?”

“크, 크흠!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 내일 티론을 데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저기요. 무명 님! 네?! 또 무시하시는 겁니까!”

나는 방방 뛰며 따라갔지만, 그는 믿기 힘든 속도로 빨리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으으.”

오늘만 날은 아니지. 내일 꼭 다시 시도한다.

근데 티론 저 아이, 괜찮겠지?

* * *

티론 세드릭은 어릴 적부터 모험가가 되고 싶었다.

용병으로 잠깐 바뀌었던 적도 있지만, 미지의 영역을 모험하고 마물들과 싸우며, 힘든 사람들의 의뢰를 들어주는 모험가.

그것이 티론 세드릭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듀크 세드릭은 그런 모험가였고, 듀크는 항상 티론의 우상이었다.

듀크가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다가 오랜만에 와서 모험 이야기와 의뢰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모험담들을 들으면, 티론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있는 모습을 상상하느라 쉽사리 잠이 들 수 없던 것이다.

그래서 때마침 언데드들이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 티론은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라며 신이 났었다.

하지만 검으로는 그 해골들과 좀비들을 막을 수 없었고, 어느새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위기까지 찾아왔다.

“쳇, 일단 후퇴한다! 마을 밖으로 피신해!”

마을에서 가장 강한 형이 그렇게 말했을 때, 티론은 안도했다.

치열한 전장에서 악의 화신 마왕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 그런 죽음을 꿈꿨지, 여기서 시체들 따위에게 죽고 싶지 않았다.

꼴사납게 죽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었던 걸까.

티론은 다른 전사들과 함께 도망치면서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네? 여자애 한 명이 그 언데드들을 다 물리쳤다고요?”

그런데 다음 날, 정령사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수많은 언데드들을 다 불태워서 죽여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러웠다. 질투 났다. 아마 영웅담의 주인공은 그런 녀석들이겠지.

심지어 다음 날에는 그 소녀가 용병 한 명만을 대동하고 적의 본거지까지 가서 무려 마족 네크로맨서를 처치했다는 소식까지 듣자, 티론은 열등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방문한 용병님이 직접 검술을 가르쳐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아버지에게 기본 정도는 배우긴 했지만, 진짜 용병에게 배우면 훨씬 빨리 늘겠지, 하고 갔는데… 그곳에는 그 소녀 정령사도 와 있었다.

갑자기 티론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어이! 여자!”

저질러 버렸다. 이런 예의 없는 짓은 기사는 물론이고 모험가, 용병도 하지 않겠지만… 티론은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검술마저 진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에.

“미리 항복해도 좋아. 여자는 휼륭한 검사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하고 만 것이다. 말한 뒤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은 되돌릴 수 없다.

대련의 결과는 처참했다. 티론은 그 정령사, 라헬이라는 소녀에게 압도당하고 도망쳤다.

“질질 짜지나 말라고 해놓고… 겁쟁이처럼 도망쳤네.”

티론은 떨어진 목검을 줍지도 않고 냅다 뛰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비참하게 주저앉은 뒤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 10분쯤 있었을까, 티론과는 달리 모든 것에 재능있는 소녀, 정령사 라헬 피스본이 그를 찾아냈다.

“야. 여기서 뭐 하냐?”

* * *

‘아무리 그래도 꿈을 짓밟은 건 너무 심했나.’

나는 도망친 티론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승리한 다음 서로 풀지도 않으면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아서… 딱히 사이가 나빠져도 상관은 없지만, 누군가와 척지는 것이 좋지는 않으니.

“어, 저깄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숲 입구에서 주저앉아 있는 티론이 눈에 보였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지?

“야, 여기서 뭐 하냐?”

“그냥, 쉬는 중.”

단단히 삐진 듯이 말하는 티론. 조금 풀어줘야겠지?

“아까는 미안했다.”

“뭐가… 미안해?”

“사실 너랑 싸울 때 정령술을 사용했거든. 시작부터 불공평했던 싸움이었어.”

단순한 녀석. 솔직히 말하자 갑자기 안색이 좋아진다.

“나도, 미안… 모험가라고 자칭해 놓고, 처음 보는 여성을 대놓고 무시하다가 털리기나 하고. 추하지. 하하.”

“좀 추하긴 했는데, 내일은 제대로 대련해 보자. 어차피 우리 둘만 수업받는데 제대로 배워가야 하지 않겠어?”

“으응… 고맙다, 라헬!”

“연상.”

“…?”

“너 18살이잖아. 나 20살. 내가 연상.”

“아, 죄송해요. 라헬 누나라고 부르면 될까요? 동갑인 줄 알았어요!”

누나라고? 누나는 좀 그런데. 근데 형이라고 부르라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으… 시발. 그래, 맘대로 불러라. 누나든 뭐든.”

“음…? 어쨌든, 라헬 누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티론은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을 한 뒤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기분 풀어주기는 성공한 것 같다.

“어어, 그래. 티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집으로 가며 정령술 이야기, 티론의 아버지 이야기 등을 하면서 더 친해졌다. 파티원들과 헤어진 이후로 동갑내기의 친구와 얘기하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가? 나름 재미있었다.

* * *

“하아, 하아.”

다음 날 정령술을 쓰지 않고 한 대련은 꽤 팽팽했다.

결국 내가 이겼지만 어제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아서 그런지, 티론의 표정도 그닥 나쁘지 않았다.

“음, 라헬 승.”

근데 무명 이 남자는 대체 뭘 가르치는 거지. 그냥 대련만 붙이고 놀고 있는 거 아냐?

“이제부터는 내가 개인 교습에 들어가겠다. 일단 티론 먼저…”

드디어 일을 하는군.

무명이 티론을 가르치는 동안, 나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티론과의 전투 중에 실프를 활용하면서 얻게 된 깨달음.

‘정령술의 활용.’

난 지금까지 정령술을 아주 단순하게 이용했다. 상급 정령들이 있을 시기에는 그저 정령들을 소환해서 나 대신 싸우게 하는 게 끝이었다.

근데 내 본연의 격투술도 나쁘지 않고, 이번에 검술도 배운 후 두 가지 전투법에 정령술을 섞는다면 훨씬 발전할 수 있겠는데?

검에 불꽃을 두른다. 바람으로 몸을 빠르게 한다. 상처가 난다면, 물의 정령으로 자가 수복하면서 전투를 계속한다. 땅의 정령으로 내게 유리하게 지형을 조작한다.

정령술과 검술의 융합, 정령 검술.

한 번쯤 시험해 보고 싶은데… 티론 녀석 상대로 쓰기에는 좀 미안하다. 그렇다면?

“라헬 차례다. 이쪽으로.”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라헬 누나도 내일 봐!”

“응. 내일 보자~”

이제 방해꾼도 갔겠다, 어디 한번 도전해 볼까?

“저기, 스승님. 저랑 대련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 나는 그냥 무명을 스승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무명 님이라고 하기도 뭔가 좀 그렇고, 무명씨라고 하자니 좀 예의 없는 거 아닌가 싶고… 아무튼 지금은 내 검술 스승님이니까.

“…대련?”

“물론 스승님 실력은 잘 알아요. 근데 제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무명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검을 가져간 후 내게 진검을 건넸다.

“안될 것 없겠지. 시작해라.”

"그리고 하나 더. 대련에서 제가 이기면 마왕 토벌 가는 걸로."

무명은 말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지금의 나와 무명의 실력 차가 크다는 뜻이겠지.

“샐러맨더(?), 실프(風), 나이아스(?), 어스웜(?).”

검에는 불꽃이, 팔과 다리에는 바람이, 몸 주위에는 나이아스가 나를 지키고 어스웜이 땅 속으로 들어가 내가 서 있는 지면이 솟아오른다.

무명은 여전히 검조차 뽑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잠시 무릎을 굽혀 땅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뭔지 추측할 시간도 없다.나는 공중에서 검을 휘두르며 낙하하면서 생각했다.

…자, 어디 한번 해 보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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