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정령사 소녀 라헬(1)
* * *
비록 한 번 거절당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상급 정령들과 계약할 때도 몇 번씩 실패했는데 이 정도는 양반이지.
하긴, 평온하게 사는 사람한테 마왕 토벌하러 가자고 하면 흔쾌히 승낙하는 게 더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당장 어제까지는 은퇴하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엘프 여왕님과 루시엘을 보니까, 메리엘을 내버려 두고 혼자 편하게 지낸다는 게 엄청나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신전의 교황님도 해제하지 못한 저주.
이젠 지금 이걸 저주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가 마왕 이외에는 더 이상 없으니…
“읏차.”
어제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바로 잠에 빠진 뒤, 낮까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드디어 일어났다.
한 번 더 설득하러 가 볼까.
끼익.
“어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벨크 마을의 소녀 정령사 만세!”
“로헨에 이어 또 정령사가… 우리 마을에 경사가 났어!”
“근데 우리 마을 사람 맞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게, 파헬 촌장 양녀래!”
“허허, 그 양반은 정령사 아이들만 입양하는구만.”
이게 무슨 일이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기억에 없는 남자다. 누구지… 아! 떠올랐다.
《아녀자는 어서 대피하십시오!》
물싸대기를 날려버릴까 고민하게 했던 그 기사 흉내 내는 남자다. 내 기억에는 이 사람, 언데드 침공 첫날 밤에 도망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녀자는 대피하라고 큰소리쳐놓고, 정작 적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자 쥐새끼처럼 내빼기나 했죠. 부끄럽습니다.”
“아, 괜찮아요. 뭐 도망칠 만했고…”
어차피 있어도 큰 도움 안 되는데 도망치는 게 맞긴 하지.
“그런 의미에서, 레이디의 존함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그대의 업적과 이름은 널리 퍼질 것입니다.”
고향 마을이라고는 해도 원래 알던 사람도 파헬 아저씨나 몇몇 어른들 빼고는 딱히 없고, 내가 로헨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아무래도 엄청 소란스러워지겠지. 국왕님도 용사 파티가 패배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제2의 신분을 제시해야겠다.
“저는 라헬. 하급 정령사, 라헬입니다.”
짧은 시간에 생각한 이름이었다. 좀 더 괜찮은 이름을 생각하지 못한 게 아쉽네.
“라헬…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정령사 라헬 님께 축복을!”
“축복을!!”
그 청년이 나의 가명을 부르며 찬양하자, 뒤의 마을 주민들도 전부 그것을 따라 했다. 왠지 쑥스러운데.
“아, 아니에요. 됐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저번에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해서 살짝 쪽팔렸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사건의 흑막인 네크로맨서를 나 혼자 처치했으니 칭찬받을 만한가?
“크흠, 크흠! 그럼 전 이만 파헬 아저씨께…”
너무 부담스러워져서 조용히 빠져나와 파헬 아저씨의 집으로 갔다. 어제 밥 먹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지켜야지.
“오오! 로헨 왔구나!”
“이젠 라헬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네요….”
“엉? 성별이 바뀌었다고 개명이라도 한 거냐?”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그냥 가명 만들었어요. 파헬의 양녀이자 하급 정령사인 라헬 피스본으로.”
이미 파헬 아저씨가 전부 준비해놓은 점심 식탁 앞에 앉으면서 대략이나마 설명했다.
원래는 무명(無名)의 집에 들러서 설득 좀 해보고 오려 했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 원.
우리는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푸하하하! 라헬이라니, 묘하게 네 원래 이름하고도 비슷하구나.”
“그러게요. 하하.”
입꼬리가 미동도 하지 않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파헬 아저씨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야. 로헨. 우리 마을의 병력을 어떻게 생각하냐?”
“솔직히요? 음… 버러지 수준이죠.”
그것이 전쟁터에서 몇 년 동안 구른 내 솔직한 평가였다. 용병 무명과 내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마을은 멸망했을 테니까.
“작은 마을이라 모험가들과 기사는 당연히 없고. 마을 방위 전력이라고 해 봤자 젊은 장정들 몇십 명이 전부잖아요. 궁수나, 마법사도 없고.”
“그렇지. 으으음… 정령술이란 건 가르칠 수 없는 거냐?”
“그거 배우려면 저기 엘피디언 아카데미라도 가야죠. 거기는 근데 이미 할 줄 아는 사람들만 받아서. 참고로 말하는데 전 못 가르쳐요~”
“하긴, 너도 배운 적이 없으니.”
나는 순수독학. 그냥 혼자 굴러가면서 깨져가면서 배웠다. 모두 나를 천재, 미친 재능이라고는 하지만 재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재능에 노력이 겸비돼야 성공하는 거지.
“근데 갑자기 왜요?”
“이번에 있었던 일들 때문이지 뭐. 이틀 연속 위험했잖니. 사실 네가 없었다면 이미 이 벨크 마을은 멸망했겠지만.”
“아….”
“그래서, 이번에 젊은 놈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검술 교육이라도 하려 하는데, 가르칠 만큼 실력이 좋은 검사 있나?”
“검사 교육? 음….”
순간, 내 머릿속에서 엄청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저번에 말했던 용병 있잖아요. 검은 머리 용병, 그 남자한테 제안해 보는 건 어때요?”
“실력 괜찮아? 싸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확실해요. 제가 보증하죠.”
“마을을 구한 라헬 님 보증이라면 무조건 믿을 수밖에! 하하하!”
무명(無名)이 벨크 마을의 검술 선생님이 된다면, 내가 그 수업에 참여하는 계획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빌미 삼아 수업 때마다 매번 얼굴을 보면 마왕 토벌에 참여하라고 계속 조른다면…?
그렇게 지독하게 매달린다면 언젠가는 수락하겠지.
그리고 사실, 검술에도 꽤나 흥미가 있다.
이번 전투에서 상급 정령을 잃은 내 한계를 많이 느꼈거든.
하급 정령들은 무한정으로 쓸 수 없으니, 지속적인 전투를 가능하게 하려면 검술이나 무투술 이런 것들을 배워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원래대로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상급 정령들이 바글바글할 때는 전투술을 익히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직접 싸우는 법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럼 내가 용병 군한테 말해 두마. 얼마나 올지 기대되는군. 나 젊을 때와 달리 요즘 것들은 게을러빠져서… 모험가가 되려는 열망도 없고… 그저 상인이 돼서 편하게 살려고만…”
꼰대의 잔소리 시간은 대충 흘려듣고, 나는 밥을 다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수업 첫 번째 날에 불러요. 나도 참여할래요. 그 수업.”
“오, 너도? 알았다. 미소녀 정령사가 수업을 함께한다면 따라오는 녀석들도 많겠지! 기대되는군.”
얼마나 올지 궁금하다. 옛날처럼 마왕에 도전하고, 모험가가 되어 의뢰를 해결하는 건 이 시대에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린 걸까?
“낭만이 없어, 낭만이.”
겉보기에는 10대 후반 소녀, 속은 20살 남자인 나는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무명의 오두막을 몇 번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자리에 없거나, 혹은 문이 잠겨 있거나 했다.
아무리 설득을 위해 전력을 다하려 한다지만 잠긴 문을 억지로 따면서 들어갈 생각은 없다.
‘아쉽네.’
갈 때마다 자리에 없는 우연이 어쩌다가 계속 겹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방문하는 걸 꺼리고 있는 걸까?
100% 후자겠지.
“여, 로헨! 아니… 라헬?”
파헬 아저씨가 찾아왔다. 검술 수업 일정이 잡혔나 보네.
“둘만 있을 땐 로헨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혹시 모르니까 남들 있을 땐 라헬이라고 불러요.”
“알고 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거지?”
“네….”
마왕한테 지고 숨어있는 걸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돼서 가명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걸 말할 수는 없어요. 죄송해요, 아저씨.
“그것보다, 당장 오늘 검술 수업 일정이 잡혔는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요? 뭐가 문제라도 딱히 상관없는데?”
“그, 그게….”
파헬 아저씨는 다음 말을 하기까지 살짝 망설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원자가 너랑, 18살 남자애 둘밖에 없어….”
“으악. 참여율 저조하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뭐.”
“근데 그 남자애가 좀 골때리는 녀석이거든… 알아서 잘 받아넘겨라, 그냥. 하하하! 참고로 수업 장소는 그 용병의 오두막 앞이다.”
어떤 녀석이길래? 그래봤자 뭐, 시골 꼬맹이 중에 악동일 뿐이겠지.
나는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고 무명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무명(無名)은 뜻밖의 상황에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촌장이 많은 젊은 남자들이 무명 자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한다고 말하며, 마을을 지키기 위한 검술 수업의 선생을 맡아주길 제안했다.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감흥에 그는 그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근데 왜 이 둘밖에 없는 건가.’
그런데 지금 무명(無名)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10대로 보이는 한 소년과 마찬가지로 10대쯤으로 보이는 한 소녀뿐이었다.
심지어, 저 소녀는…
‘질리지도 않나 보군.’
마왕을 잡으러 가자는 제안을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포기를 모르는 아이다. 무명은 그 열정을 기특하게 생각했지만… 승낙할 생각은 없었다.
‘검술 수업만. 검술 수업만 한다.’
최대한 설득당하지 않고, 촌장과 약속한 검술 수업만 하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칼을 뽑았다.
* * *
“오랜만이네요. 용병님.”
나는 무명에게 딱딱하게 인사를 건넸다.
옆 소년의 표정이 뭔가 언짢아 보이긴 했지만, 내가 신경 쓰는 건 어차피 마왕 토벌을 위해 무명을 설득하는 것뿐.
“어이! 여자!”
뭘까. 이 싸가지없는 것은.
물론 내가 여자가 아닌 것은 제쳐 두더라도,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저렇게 말을 하면 아마 사회 생활하기 꽤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그리 잘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 내 앞의 이 소년은…
‘사회 부적응자?’
거의 그 정도의 첫인상이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먼저 인사를 하고 이름을 묻는 게…”
최대한의 인내심을 참으면서 착하게 말을 건넸다.
일단은 촌장 파헬 피스본의 양녀니까, 예의는 지켜야지.
“네 이름은 알고 있다! 정령사 라헬!”
잘 알고 있네. 근데 왜 저러는 거야?
“정령사인 것은 대단하지만 어디 여자가 검을 들어!”
“푸훗!”
“뭘, 뭘 웃어!”
기사도 정신과 양아치 정신이 반쯤 섞인 혼종인가. 아까 그 기사 흉내 내는 인간이 훨씬 나아 보일 정도였다.
“나는 헤르네의 모험가 듀크 세드릭의 아들! 티론 세드릭이다!”
헤르네? 헤르네라면 분명 벨크 마을에서 조금 나가면 있는 대도시였다.
헤르네는 흔히 모험가들의 도시로 불린다.
헤르네 모험가 길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곳에 의뢰를 맡기는 사람도 많고, 역시 그 의뢰를 해결하는 모험가들도 많다.
근데 헤르네의 모험가 듀크 세드릭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별로 안 유명한 인간인가 보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표하는 존경을 깨뜨리기 싫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듀크 세드릭의 아들이라, 반가워. 티론.”
“하하! 네 년도 우리 아버지의 명성을 들었나 보군!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휼륭한 모험가가 될 것이다!”
티론이 까부는 걸 보기 힘겨워졌는지, 이제야 무명이 나섰다.
“그만 거기까지 하고, 일단 기초 실력을 봐야겠다.”
“넵! 용병님!”
무명은 용병이라고 또 곧잘 따르네.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니까 용병이나 모험가에 엄청난 환상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뭐, 실전에 가면 다들 맥없이 죽어버리지만.’
그게 수없이 많은 용병들과 모험가들을 본 내 소감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뛰어난 녀석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돈을 보고 시작한 녀석들은 금방 죽어버리더라고.
“시작이니 둘 다 목검으로 시작한다.”
무명이 목검 두 자루를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미리 항복해도 좋아. 여자는 휼륭한 검사가 될 수 없다고!”
“이기고 나서 말씀하시지?”
으, 살짝 말이 세게 나갔나? 근데 착한 척 코스프레 이제 좀 힘든데.
“두들겨 맞고 나서 질질 짜지나 마시지! 으아아!”
도발이 아주 잘 먹힌 모양이다.
‘멧돼지처럼 달려오네.’
물론 나는 검술에는 문외한이다. 반면 저 소년은 어느 정도 단련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한테 어느 정도 배운 거려나?
하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실프(風)”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영창했다.
뭐, 들키지만 않으면 반칙 아니잖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