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엘프, 루시엘의 이야기
* * *
나는 엘프의 왕가 엘피디아 가문의 둘째 딸 루시엘이다.
원래라면 여왕이 될 사람은 내 언니 메리엘이고, 나는 그저 엘프 기준에서는 한참 어린 철없는 둘째 공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그 모든 것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 * *
“메리엘이…?”
모르는 인간 병사가 와서 나의 어머니, 클라우디아 엘피디아를 알현했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쉽게 나서서 여쭤보지 못했다. 그야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항상 언니에게만 모든 기대를 쏟으셨고 나는 항상 2순위였으니까.
갑자기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워졌고, 나는 뭔가 분위기가 무서워져서 아무도 없는 내 방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잠시 동안 방에 숨어 있다 보니, 밖이 조금 잠잠해졌다.
이럴 때는 사서 비비안 언니한테 가면 늘 친절하게 무슨 일인지 얘기해 주신다.
나는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이자, 정령술과 궁술을 가르치는 데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우리 학교. 엘피디언 아카데미의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비비안 언니는 그곳의 사서. 무려 200년 동안 관리를 하셨다고 한다. 200살이 넘으셨으면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는데, 왠지 비비안 언니는 내게 자꾸 언니라고 부르라고 한다.
딱히 큰 문제는 없으니, 그냥 비비안 언니라고 부르고 있는 편이다.
“어? 어… 루시엘 왔구나?”
항상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나를 반겨 주던 비비안 언니가 왠지 오늘은 좀 많이 심각해 보였다. 아니,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저, 저기… 오늘 엄청 시끄럽던데, 무슨 일 있나요?”
비비안 언니는 내 말을 듣자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턱 막았다.
“듣지 못했구나…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미리 얘기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늘 밝고 쾌활하던 비비안 언니마저 이렇게 우울해지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엘프 여왕, 어머니가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고 싶었다.
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모르고 있고 싶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네 언니… 메리엘 엘피디아가, 마왕 토벌 중에 실종됐다고 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메리엘 언니는 엘프들의 본보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엘프였다. 엘프들의 자존심인 궁술은 대륙 최강의 경지였고, 정령술과 검술 역시 뛰어날 뿐 아니라 사교 관계나 지혜까지 완벽한 언니였다.
아마 언니가 엘프 여왕이 되었다면 엘프들의 전성기를 다시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언니는 어느 날, 용사와 성녀, 그리고 천재 정령사와 파티를 이뤄 마왕을 토벌하겠다며 마을을 떠났다.
어머니는 슬퍼하셨지만 나는 언니가 넓은 세상을 보고 온다면 더 뛰어난 식견과 지혜를 얻을 것이라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사실은, 그저 내 열등감 유발의 원인 제공자가 사라져서 좋았을 뿐이지만…
“언니가, 실종이요…?”
“응. 용사도 쓰러지고, 성녀는 사망하고, 정령사 인간만 살아남아서 메리엘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한 모양이야.”
“정령사…”
나 역시 그 파티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지. 그만큼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용사 에반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시대에 한 명 태어나는 용사. 이 세상 모든 종족, 모든 개체 중에 신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한 명.
성녀 아리아? 누구보다 어린 나이에 신성력을 각성하고 마족 군세와 맞서 며칠 밤 동안 한 도시를 혼자서 막은 신의 대리인.
정령사 로헨. 이 남자는 상상 이상의 인간이다. 애초에 정령술은 엘프들의 전유물이었고, 인간 중에 정령술을 쓰는 자는 드물었다.
그 와중에 이 남자는 전혀 교육받은 것도 없이 자신이 키운 하급 정령들을 모두 정령왕 직전의 단계까지 스스로 올려놓은 괴물이었다.
소문으로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 ‘서약’이라는 복잡한 절차 없이 무언의 의사 표시만으로 계약을 맺는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여담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정령술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몹시 좋아해서…
“그런데, 이 대단한 사람들이 전부…”
이 4명이 마왕한테 지다니, 마왕은 대체 어떤 괴물인 걸까.
나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나는 무언가 더 무서운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제가…”
비비안 언니는 평소에 짓던 마음 편한 미소가 아닌,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응. 실종된 메리엘이 돌아오기 전까지 네가 차기 여왕이 되겠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지금까지 차기 여왕을 위한 교육은 전부 언니가 받아왔고, 나는 그저 아카데미에서 수업만 열심히 들었을 뿐이다.
그 결과 아카데미에서 수석이라는 영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이건 언니도 당연하게 해냈던 일이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 친구도 없다. 학교에서 대화하는 사람은 사서 비비안 언니뿐. 언니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놀 시간 따위는 없다.
가끔 견디기 힘들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언니도 이랬을 테니까.
“제가, 차기 여왕…”
언니라는 내 평생의 경쟁 상대이자, 내 우상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져서 그녀의 자리를 내가 차지한 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걸까?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슬프기만 했다.
슬픈 이유가 가족이자 혈연인 언니가 실종돼서냐고?
…끝까지 언니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그 이유 때문이겠지.
그렇게 우리 마을의 평소 한가롭고 즐겁던 분위기는, 일주일 내내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평소에는 이렇게 많은 엘프들에게 기대받고 걱정받는 언니가 부럽기도 했지만…
난 일주일간 차기 여왕으로서 교육을 받고 그 부담감을 느끼니, 생각이 달라졌다.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중압감을 견딘 언니가 더 대단해 보였고, 더 무서워졌다. 나 같은 건 평생 노력해봤자 언니를 대체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낸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마을에 그 남자. 로헨이 찾아왔다.
…여자가 되어서 말이다.
* * *
정령사 로헨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다른 용사 파티원들과도 전부 안면이 있었다. 이젠 로헨밖에 남지 않았지만… 언니가 자주 우리 마을에 데리고 왔으니, 친숙한 이들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선생님들, 심지어 어머니께도 교수직을 여러 번 권유받았지만, 자신은 그런 교육을 잘 못 한다며 매번 거부하셨다.
그런데도 난 그분이 너무나도 좋아서, 언니에게 빌고 빌어서 단 하루 로헨 님한테 정령술 개인 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음… 그니까 그게, 이게 딱 이어져서 정령들을 쾅 하고 폭발시킨다는 느낌으로 함께 싸우면, 빨리 성장한단 말이지…”
“아하! 그런 거군요! 역시 로헨 님…!”
“내가 지금 뭘 가르치는지 나도 모르겠다….”
…로헨 님의 수업은 나 따위가 듣기에는 살짝 높은 수준이었는지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
그 외에도 로헨 님이 방문하시면 자주 정령술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로헨 님이 어릴 적 정령들과 계약한 이야기, 하급 정령이 중급 정령이 되고, 중급 정령이 상급 정령이 되던 순간의 감동, 용사 파티가 이번에는 어떤 적을 해치웠고, 거기에 자신이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그런 로헨 님의 자랑을 듣다 보면, 나도 자존감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자신을 치켜세우면서도, 마지막에는 항상 동료들 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내가 이그니스로 화염 폭발을 펑~!”
“와아! 불의 상급 정령이라니, 대단해요…”
“근데 뭐, 메리엘과 아리아, 에반 님이 다 만들어 놓은 거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지. 나 말고 누가 이 자리에 와도 꿀 빨 수 있을걸?”
모두가 자신을 찬양하는데 이렇게 겸손하다니, 그런데도 자신을 너무 낮추지는 않고 유쾌하게 자기 자랑을 한다.
거기에 확실한 실력, 뛰어난 인성과 센스있는 말솜씨까지. 나는 어느샌가 로헨 님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성으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로헨 오빠… 라고 할 정도로 친해졌다.
물론 나보다 어리지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면 아무튼 오빠다!
그러던 어느 날은, 아카데미 시험에서 2등을 하고 로헨 님 앞에서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부끄럽네…
“흐,흐흑! 전 여기서도 1등 못하면, 흑! 언니한테는 물론이고, 왕가의 자존심조차, 흐흑!”
로헨 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너 자신과 다른 이를 지나치게 비교하지 마.”
“흐흑, 네?”
“어느 정도의 비교는 좋아. 너 자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발전의 원동력이 될 만한 정도는 좋다 이거야. 근데 그 정도를 넘어서서 저 사람이 되고 싶다,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하는 나는 쓰레기다. 이렇게까지 가면…”
“…….”
“그러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너니까.”
그 별거 아닌 몇 마디에,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날 밤 집에 가서 저 말을 종이에 받아 적어 늘 책에 끼우고 다닐 정도로 로헨 님은 내 마음속의 스승님이자 롤모델이었다.
언니가 사라지고 일주일 동안 차기 여왕으로서의 태도를 위해 힘들게 교육받을 때도, 늘 로헨 님의 명언을 읽으면서 힘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모르는 여자가 찾아왔다.
* * *
파란색 머리에 파란색 눈.
로헨 님과 엄청 비슷한 느낌이라 혹시 가족이 아닌가 했지만, 그분은 분명 어릴 때 입양돼서 진짜 가족은 없을 게 분명했다.
“언니, 누구시죠? 뭔가 엄청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으으, 실수했다. 이제 차기 여왕으로서 언니, 오빠 같은 호칭은 친한 사이에만 붙이고 처음 보는 분들한테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라고 했는데…
“아, 나는 미리 약속하고 온 건데, 혹시 아시는 분이….”
왕가의 손님인 듯했다. 누구지?
“로헨 님 맞으십니까? 여왕 폐하가 뵙고자 하십니다. 같이 가시죠.”
로헨? 로헨 오빠?
로헨이라고 불린 여자가 내 쪽을 슬쩍 봤다. 그 장난스러운 푸른 눈빛은 분명히 로헨 님이 틀림없었다.
“다, 당신이 로헨 오빠…? 거짓말…!”
“미안, 루시엘… 하하.”
그 아름다운 소녀는 살짝 미소 짓고 병사들과 함께 떠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유일하게 멀쩡히 돌아왔다던 정령사, 로헨도 성별이 바뀌어 버리는 저주를 받은 걸까.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다른 감정도 들었다.
‘엄청 귀여웠지. 로헨… 님? 언니?’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분명하게 여성이고, 언니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좀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는데 죄송하다. 님이라고 칭하는 게 제일 낫겠지?
오늘은 일정이 없는 겸, 로헨 님의 뒤를 따라다니기로 했다.
* * *
대도서관으로 들어가서 잠시 동안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거리더니, 뭔가 깨달은 듯 황급히 뛰쳐나갔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게 들킬까 두려워 빠르게 숨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운전수 아저씨! 벨크 마을로! 빨리!”
안돼! 얼마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빨리 이별이라니!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려가서 그분을 불러세웠다.
“저, 저기! 로헨 님!”
“루시엘…?”
살짝 당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헨 님의 표정.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이건 첫 번째 진심.
“…당연하지, 루시엘. 너도 힘내서 살아라.”
그 한 마디에, 지난 나의 일주일이 통째로 꿰뚫어져 버린 느낌이라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두 번째 진심을 전했다.
“네?! 넵…! 그, 그리고…?”
“…?”
“여자아이로 변하신 거, 엄청 귀여워요!”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얘기는 꼭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전하고 나니 엄청 부끄러워져서, 나는 뜨거운 얼굴을 가리고 로헨 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내 우상이자, 나만의 정령사, 로헨.
언젠가 언니를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엘프 여성이 된다면, 로헨 님과 동등한 위치에 설 만한 인물이 된다면…
‘그 귀여운 볼을 한번 어루만져 보고 싶네.’
그런 작은 소망을 빌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