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4화 (4/40)

〈 4화 〉 검은 머리 사나이(3)

* * *

“조용히 하거라.”

남자가 칼을 뽑으면서 저렇게 말해 나는 살짝 긴장했지만, 그가 곧 엎드려서 바닥에 귀를 대자 그 긴장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저, 저기… 갑자기 바닥은 왜…?”

“…놈들이 오고 있다. 어제보다 많은 것 같군.”

설마. 어제 그렇게 많은 수를 박살 냈는데 그건 그저 탐색전이었을 뿐인가. 오늘 오는 것이 본대라면 진짜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검은 머리 남자를 슬쩍 흘겨봤다.

“저기, 같이 싸울 거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어제 당신이 조금 빨리 왔었다면 내가 그렇게 고생할 필요도….”

남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칼을 뽑은 채로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어이! 기다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소녀여. 이 시체 병사들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것은 알겠지?”

“소녀라고 하지 마!! 아마 있겠지, 네크로맨서라던가 그런 놈들이.”

“난 그것들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소녀가 길을 안내할 수 있겠나?”

“소녀라고 하지 말라고… 찾을 수 있지. 마나를 쫓으면 가능해. 하지만 언데드들이 엄청나게 많을 텐데?”

“내가 너를 호위할 테니 배후에 있을 그자를 찾아라. 음… 아가씨.”

“하… 아가씨라고도, 아니다. 일단 그쪽 검사분이 언데드들을 해치워 주면 길을 안내해 드리죠.”

“알겠다. 따라오도록. 음….”

“그냥 부르지 마!”

그렇게 그날 밤 의문의 검술 고수와 전(?) 최강 정령술사 콤비가 결성됐다.

목표는 마을을 지키고, 숨어 있는 네크로맨서 놈을 잡아 족치는 것.

* * *

“길이 어둡네. 밝혀줘, 프라이어(光).”

콤비라고는 했지만, 내가 힘을 쓸 상황은 거의 없었다.

그냥 남자가 아무렇게나 검을 휙, 휙 휘두르면 언데드들 몇십 마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정령들도 많이 모아놨는데, 아끼면 좋지, 뭐.’

나설 일 없어서 좋긴 한데, 너무 다 시키고 혼자 놀고 있는 거 아닌가 해서 살짝 눈치도 보인다.

프라이어 소환해놓고 걷기만 하면 난 그냥 인간 횃불이잖아….

“저기. 피곤하거나 그러진 않으신가?”

“…? 괜찮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 화려한 정령술로 전장에서 모두의 이목을 끄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었는데 나설 기회가 없어서 살짝 아쉽다.

‘정령들 반드시 다 찾고 만다….’

“얼마나 가까이 왔지?”

“응? 아, 아마 저 산속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적을 쫓는 방법은 간단하다. 네크로맨서 같은 놈들의 마나는 어둠의 마나. 내가 비록 전문 마법사는 아니고 정령술사지만, 놈들의 마나 정도는 구별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까이 갈수록 언데드들에게서 나는 악취가 강해진다. 어둠의 마나의 악취… 지독하다.

“이제 보이는군.”

“적이 보여? 아직 산까지 가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키예에에엣!”

뼈다귀 인간이 무딘 날의 칼을 들고 우리 쪽으로 돌진한다. 남자는 검을 뽑고, 그걸로 해골을 베는 대신 해골의 머리 위쪽으로 칼을 휘둘렀다.

휘잉.

분명 검에 직접 맞지 않았는데, 해골이 우르르 무너지며 그냥 뼈 무덤으로 되돌아갔다.

“그냥 허공에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아니, 설마….”

네크로맨서와 그의 권속들은 희미한 마나의 실로 연결되어 있다.

인형사들이 얇은 실로 그 인형을 조종하는 것처럼, 이런 나약한 언데드들은 네크로맨서에게 아주 조금의 마나만 받는다. 그래야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 남자 네크로맨서 마나 못 느낀다 하지 않았나?

“마나 못 본다고 하지 않았어?”

“마나를 본 게 아니다. 그냥 느낌상 휘두른 거지.”

마나 자체나 마법을 벨 수 있는 검사들은 소드 마스터, 혹은 검성이라고 불릴 정도의 강자들이다.

물론 그들은 그 마나의 흐름을 이해하고 검을 휘두르는, 어느 정도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본인 말대로라면 마나의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서 마나를 벤다? 눈을 가리고 표적을 베는 것이 그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갈수록 믿음이 가는걸.’

역시 사람을 제대로 봤다. 내 계획에 순순히 따라와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남자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이 동굴 안에서 어둠의 마나가 느껴져. 안에 이 사건의 주동자가 있는 게 분명해.”

“흠.”

나와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굴로 진입했다.

“으, 으아아아악!”

뭐야. 저 허접해 보이는 놈은.

엄청난 악의 화신이 있을 줄 알고 들어왔건만, 안에 있던 녀석은 까만 로브를 둘러쓴, 평범해 보이는 30대 남자 마족이었다.

“다, 당신들은 대체 뭐야! 어떻게 몇 년간 모아온 내 시체들을… 언데드들을! 단 이틀만에 다 소멸시켜 버린 거냐고오!”

허접해 보이는 네크로맨서가 우리를 보면서 울부짖었다.

“흐응.”

나는 썩은 미소를 흘리며 그를 비웃었다.

“저기, 대체 무슨 이유로 이 마을을 공격한 거야?”

솔직히 이 정도 세력의 언데드 군세라면,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은 가볍게 함락당하는 게 정상이다. 아마 대도시 몇 개쯤은 더 함락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둘이 가볍게 해치웠으니 당황할 만도 하지.

“용사 파티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내 세상이다 해서 공격하려 했건만, 이런 괴물들이 있을 줄이야….”

“하핫. 죽을 각오는 됐겠지? 마지막에 남길 말이라도?”

“내 이름은 마족 드리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빨리 죽여라…!”

“하하하, 검사님!”

“…….”

“검사님?”

“……나는 살아있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

“네에…?”

뭐야, 불살주의야?

* * *

흑마법사, 네크로맨서, 마족 드리엘은 원대한 야망을 가진 남자였다.

비록 미천한 마족 가문 출생이었지만, 힘들게 배운 흑마법과 사령술로 수 년간 모은 시체들을 단련시켜 언데드 군세를 만들었다.

그의 장점이라고는 뛰어난 인내력뿐. 오랫동안 군대를 준비해 전부 마무리한 다음, 용사 파티가 마왕에 의해 몰락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며칠간 가장 가까운 마을의 주변을 탐색하면서 최고의 타이밍을 노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하하하! 자, 가라! 내 어둠의 군세여!”

마왕님 같은 말투로 대사도 한번 읊어주고.

그런데…

“뭐야. 저 정령사는? 정찰할 때 없었잖아?”

이상한 여자 정령사가 나타나서 여기저기 빛과 화염을 던지면서 드리엘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래도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 공격에 투입한 병사 수는 25% 정도. 한 40% 정도까지 보내서 순식간에 상황을 종료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검사가 나타났다.

원래대로라면 검 따위 단순한 무기로 언데드들을 벨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검기는 빛 혹은 화염 그 이상의 위력으로 40%의 군세를 소멸시켰다.

“크으으윽….”

평소의 드리엘이라면 한 수 물렀다가 정찰을 좀 더 한 뒤 침착하게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2명한테 자신의 군세가 전부 박살 났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은 60%를 전부 쏟아부어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물량으로 밀어붙이겠다!”

하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다. 두 남녀는 드리엘의 군대를 물리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 그의 마나를 감지해서 은신처인 동굴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도망갈 수는 없겠지.’

도망갈 수 없으면 싸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뒤와 옆, 그리고 위에서 정예 언데드들이 덮치도록 이미 준비는 완료했다.

드리엘 자신이 죽더라도, 마왕님에게 위협이 될 자는 미리 제거할 것이라는 그의 포부였다.

“……나는 살아있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

그 거만한 태도. 남자가 불살을 선언한 지금이 기회였다.

“으아아아! 여기서, 함께 죽자!”

천장과 벽이 무너지고, 언데드들이 뛰쳐나온다.

“흐응.”

그런데 어째서일까. 정령사 소녀의 눈빛은 얼어버릴 듯이 차가웠다.

* * *

‘고작 준비한 게 이 정도 수?’

드리엘이라는 이 마족 네크로맨서가 도망도 가지 않은 채 이 동굴에서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다는 건 대충 예상했지만…

‘동귀어진 작전일 줄이야.’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드리엘을 쳐다봤다.

사실 드리엘보다는, 옆의 남자가 불살주의였다는 사실이 짜증나서 눈빛이 차가워진 거겠지만.

‘죽이지 못하는 인간은 마왕군을 이기지 못해.’

이 남자만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일사천리라고 생각했었건만, 갑자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하긴 지금까지 남자가 해치운 것은 이미 죽은 자들, 언데드뿐. 살아 있는 것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면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일단, 어스웜(?).”

무너지던 동굴 벽 틈 사이사이로 바위 지렁이들이 들어간다.

‘어스웜. 땅의 정령. 바위 지렁이들.’

그들 여럿이 이리저리 움직이자, 무너지려 하던 동굴은 곧 진정됐다.

뛰쳐나온 언데드들은 뭐, 검사님이 다 해치워 주셨고.

“크윽.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니….”

“검사님이 불살주의자시라니까 어쩔 수 없네. 당신 때문에 내 고향과 가족들이 사라질 뻔했는데 그냥 넘길 수는 없지.”

“미안하다! 제발, 제발 살려줘! 네 가족일지는 몰랐어!”

마지막 수단이 사라지니까 추잡해지네. 하여간 마족들은 다 저렇게 추악한 자식들이다. 전부 이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해.

“너 같은 새끼들은 불태워 버려야 해. 샐러맨더(?).”

“크아아아악!”

시체도 남기지 않고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 추악하고 더러운 마족 새끼들.

“…….”

검은 머리 사나이가 나를 쳐다봤다. 왜, 뭐요… 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다 끝났군. 내가 죽이는 건 상관없지?”

“내가 불살주의일 뿐이지, 남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래 봬도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아서, 죽고 죽이는 건 익숙해.”

전장에 있는 동안 수많은 아군이 죽고, 또 수많은 적군을 죽였다.

이 정도는 뭐… 가뿐했다.

그나저나, 이젠 이 남자를 설득해야겠지.

“당신… 아니, 딱 봐도 나보다 나이가 몇백, 어쩌면 몇천 살은 넘은 거 같으니 존댓말을 하겠습니다.”

“…….”

“저는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정령사 로헨입니다. 용사 파티는 얼마 전 마왕에게 패배했고, 용사는 쓰러졌고 엘프 궁수를 마왕에게 납치당했어요.”

“…….”

“정령사인 저는 저와 계약한 정령들을 전부 잃고,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기까지 했죠. 저는 엘프 궁수를 구하고, 제 정령들을 찾고, 마왕에게 다시 도전하려고 합니다. 절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마왕이라.”

“네.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정령사 로헨.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무명(無名)이다.”

하긴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이름 따위는 크게 상관이 없겠지. 한 몇십 개 있을 수도 있고, 아예 까먹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계획에는 함께할 생각이 없다.”

“네???”

아, 뭐 쉽게 되는 일이 없네.

* * *

무명(無名)은 얼마 전부터 벨크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딱히 그에게 돈이 필요했던 건 아니지만, 용병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을의 치안 명목으로 벨크 마을에 고용돼서 오두막까지 받아서 거주하게 된 것이다.

촌장 파헬이라는 남자도 썩 괜찮아 보였고, 변방에 있는 마을이라 잠시 동안 지내기엔 나쁘지 않은 곳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시체 병사 군대가 마을을 침공했다.

‘나서야 할까.’

지금 무명이 나서서 시체 병사들을 전부 쓰러트리는 게 제일 피해가 적긴 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무명의 힘이 남들에게 발각될 것이고, 그에 따른 소란스러움은 또 무명이 견뎌야 할 몫이다.

그래서, 잠시 후에 나서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다 도망쳤으려나.’

아마 지금쯤이면 전선이 깨지고 시체 병사들이 마을에 막 들어올 시간. 그렇게 예상하고 무명은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파란색 머리, 파란색 눈의 소녀가 그 싸움터 쪽에서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대피하는 아이인 줄로 알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니 정령사인 것 같다고 무명은 판단했다.

‘이런 아이마저 죽을 뻔하게 놔뒀던 건가.’

자신의 사정을 위해 남들이 죽을 것도 고려하지 않은 무명 자신에 대해 살짝 혐오감을 느끼고, 시체 병사들이 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쾅! 쾅! 쾅!

무명은 칼을 휘둘러 시체 병사들을 전부 도륙냈다. 이 정도 숫자와 이 정도 강함은 그에게는 큰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 그 소녀가 다시 돌아왔다.

다른 젊은 남자들은 이 공포스러운 시체 병사들에게서 도망쳤는데, 이 소녀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영웅.’

그 소녀에게서, 무명은 영웅의 자질을 보고 말았다.

“나, 나이아스(?).”

“…….”

무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들켜버렸군. 제발 퍼뜨리지 않으면 좋겠건만….’

“저, 괜찮으세요?”

무명은 어찌할지 몰라 애써 소녀를 무시하고 마을로 돌아갔다. 몸의 상처는 어차피 곧 나으니 치료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소녀가 무명의 집으로 쳐들어와 그의 정보를 찾아본 듯 꼬치꼬치 캐물었다.

‘곤란하군.’

추궁을 회피할 방법이 없어 곤란해진 찰나, 그는 땅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용히 하거라.”

그렇게 말한 뒤, 시체 병사의 수장을 잡으러 소녀의 안내를 받아 길을 떠났다. 왜 소녀라고 부르는 걸 극도로 꺼리는지가 의문이었다.

‘어차피 이 정령사는 내 힘과 정체를 대략 알고 있으니….’

무명은 힘을 숨길 필요도 없이 해골들 머리 위의 실을 끊고 그들의 육체를 부수며 산속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제약이 있었다. 시체 병사들의 수장은 살아 있는 생명체, 마족이라고는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벨 수 없다.

망설이는 사이 그 마족이 함정을 발동시켰고, 살짝 당황한 그와 달리 옆의 정령사는 가볍게 받아친 뒤 마족을 불태워 죽여버렸다.

‘아직은 하급 정령사지만 역시, 영웅의 자질이 보인다.이 소녀라면, 언젠가 마왕을 해치울지도 모른다.’

무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용사 파티라는 것의 일원이었고, 이미 한 번 마왕에게 패배해서 다시 도전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심지어 남자… 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 무명을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정령을 찾는 것, 좋다. 엘프 궁수를 되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마왕을 해치우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무명은 한때 남자였던 소녀 정령사, 로헨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네 계획에는 함께할 생각이 없다.”

“네???”

소녀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무명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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