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검은 머리 사나이(1)
* * *
끼익.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철갑옷을 입은 남자가 내 침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웃을 뻔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저, 저기….”
“응?”
“오랜만이다. 데이브…. 혹시 나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다른 파티원들은 어디에….”
제발 지금 내가 여자로 변한 상황을 데이브가 인지하고 있기를 바라며 질문을 던졌다.
“…….”
‘제발….’
데이브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반문했다.
“소녀는, 누구인가…? 혹시 여기 누워있던 파란색 머리의 청년을 봤는가? 아니, 애초에 이런 소녀는 궁에서 본 적이….”
마지막 희망으로, 혹시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해서 볼을 꽉 꼬집었다.
얼얼했다.
“하, 씨발.”
아무래도 앞으로 꽤나 피곤해질 것 같다.
* * *
“그래서, 소녀가 로헨 님이라는 겁니까…?”
“어, 응. 그렇게 된 거 같아.”
일단 상황 설명을 마쳤다. 일어나 보니 여자가 되어 있었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바란다고 데이브한테 얘기했다.
“으음… 분명 제가 로헨 님을 눕힐 때, 8시간쯤 전만 해도 분명히 그땐 남자셨는데….”
“그러니까, 그 전에 대체 무슨 일이….”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으윽.
억지로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우리 용사 파티는, 마왕을 만나고….”
데이브는 크게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마계에 있던 용사 파티가 갑자기 수도 근처 초원에 쓰러져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용사, 에반 님은 현재 혼수상태.”
심장이 쾅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 인간을 초월한 육체의 소유자인 용사 에반이 혼수상태라니….
“메리엘 님은… 실종.”
차기 엘프 여왕이 실종…?
“……아리아는?”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하, 하하.”
믿기지 않았다.
그 강인하던 용사가?
그 착한 아리아가?
그 냉철하던 엘프, 메리엘이?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 전부 쓰러지거나, 사라지거나,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은 인간이 나라고?
전부, 아리아 덕분이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반 님은, 어디에 있나.”
“옆 방에 계십니다.”
나는 당장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루 만에, 고작 하루 만에 몇 년간 함께한 동료 중 1명이 죽고, 1명은 실종이라고는 하지만, 마왕에게 붙잡힌 거면 사실상…
“좆같은 생각 하지 마.”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작아진 주먹을 꽉 쥐고, 벽을 세게 쳤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주먹이 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기사, 데이브는 정령사 로헨의 벗이었다.
물론 데이브가 나이는 더 많지만, 싹싹한 로헨의 성격과 실력지상주의인 데이브의 성격 탓에, 오히려 데이브가 로헨한테 존댓말을 하고 로헨은 반말을 하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이번에 로헨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분명 이번에 용사 파티는 멀리 떠났을 텐데?’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용사 파티는 마왕에게 패배했고, 마왕이 메리엘을 뺀 3명을 수도 앞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이건 마치….’
지금은 놓아줄 테니, 강해져서 돌아오란 듯한 시건방진 태도.
“크윽….”
데이브는 초원에서 운송된 로헨의 몸을 침대에 누이고, 혹시라도 자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방문을 조심히 닫고 나왔다.
그래. 분명 그때까지 로헨은 남자였다.
그리고 8시간쯤 뒤, 지금쯤이면 깨어났을까 하고 들어갔는데 로헨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냥 본인이 나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메리엘이 사라진 상황을 고려하면 마왕이 납치해 갔을 가능성도 있다.
“로헨 님이 사라지셨다…! 자는 동안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나간 것이건만, 그 사이에….”
그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휴, 그냥 화장실에 가셨던… 어?’
데이브의 기억상으로는 왕궁에서 처음 보는 소녀였다.
‘나 대신 로헨의 간호를 위해 들여보낸 하녀인가?’
청발 청안, 데이브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이미지가 상당히 비슷했지만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저, 저기….”
“응?”
“오랜만이다. 데이브…. 혹시 나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다른 파티원들은 어디에….”
데이브에게 낯선 소녀는 친한 듯이 말을 걸어왔다. 이 소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데이브는 일단 로헨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소녀는, 누구인가…? 혹시 여기 누워있던 파란색 머리의 청년을 봤는가? 아니, 애초에 이런 소녀는 궁에서 본 적이….”
“하, 씨발.”
“…?”
그 후로 이야기를 나눠 보니, 데이브는 이 소녀가 진짜 로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저주를 당한 건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당신이, 로헨이라는 증거는?”
“우리 전장에서 그 언데드 마녀 년 잡은 다음 날에 축제 분위기였던 거 기억해? 그때 술 먹지 말랬는데 우리 둘만 몰래 숨어서 마셨잖아.”
“허억.”
저것은 분명 데이브와 로헨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로헨이 사라지고 나타난 소녀, 로헨만이 알고 있을 것도 다 알고 있다.
‘아마 마법사들이 곧 마나를 이용해 확실한 본인 증명까지 마치겠지. 이로써 신빙성은 충분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데이브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고 소녀, 아니 로헨이 애써 침착해 하려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도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했는데, 사람 어리게 만들어버리는 저주도 있는데 성별 바꾸는 저주가 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더라.”
아, 그도 그런가.
데이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나와 데이브는 함께 용사가 잠들어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에반 님….”
몇 년간 용사 에반과 같이 다니면서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그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은 꼭 지켜왔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라지도 않은 용사라는 운명에 선택되었는데도, 항상 남들 대신 자신을 희생하며 끊임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그는 그야말로 용사의 정석이라 불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눈물이 고였다.
왠지, 이 몸이 되고 나니 자주 울컥하는 것 같다. 지금 상황이 울컥할 만하긴 하지만….
“로헨 님. 일단 폐하를 뵈러 가야 합니다. 지금 네 분 중 유일하게 소통이 가능하신 분이라….”
“아, 응. 바로 갈게.”
화려한 복도를 한 걸음, 두 걸음 걷는다.
“저기, 데이브. 좀만 천천히….”
“아, 죄송합니다.”
키가 줄어들고 다리가 짧아지니 보폭도 줄어들었다. 이전이었다면 무리 없이 따라갔을 데이브의 속도에 맞추기가 버거웠다.
‘진짜 어이가 없네.’
혹시 신전에 가면 해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리아의 유언도 있으니, 조만간 근처에 있는 신전을 들러야겠다.
“들어가시지요. 여자가 된 저주는 대략 얘기를 해 놓았습니다.”
데이브의 안내가 끝났다. 여기부턴 나 혼자 가서 왕과 대화를 해야 한다.
“고마워. 다녀올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왕과 대면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래. 편하게 있도록.”
늙은 왕.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왕은 왕이니, 뭐.
“으음. 일단, 어째서 그 저주를 받은 거지? 천재 정령사가 귀여운 여자아이가 돼버렸구먼.”
“알지 못합니다. 저도 조사를 해 볼 예정입니다.”
“그래. 그건 사소한 일이고… 마왕을 마주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처음부터 전부 얘기했다.
마왕을 마주한 것,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 암흑 파동을 내뿜으니 전멸하고 공간이동된 것, 자신이 아리아의 보호 덕에 살아남은 것 등 전부 다 보고했다.
“흐으음….”
늙은 왕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이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들고 신음했다.
“혹시 용사가 깨어나면, 마왕을 처치하기 위한 여행을 다시 떠날 마음이 있는가?
……네?
떠나겠냐? 전투가 10분도 채 못 가서 성녀, 신궁, 용사 등이 다 전투불가 상태가 돼버렸는데?
대체 누가 나설까, 이제?
”일단 용사 파티의 패배는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한다. 그대들이 졌다는 사실이 퍼지면 마물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고, 인간들의 사기는 낮아질 것이야.“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나는 이제 질렸다.
전장에서 사는 삶은 끔찍하다. 이제는 겪고 싶지 않다.
”전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합니다.“
”허어. 정령술 연구나 교육도 하지 않고 말인가. 엘프들의 학교에서도 그대를 정령술 교수로….“
”관심 없습니다.“
”허허, 그래. 아무튼 가장 심각한 건 그것뿐이 아니지. 용사와 신궁, 성녀가 전선에서 빠지면 선과 악의 균형이 깨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 싸울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아서 내 집이랑 내 땅 구해서 살란다.
“알겠네…. 고향으로 갈 마차를 지원해 줄 테니, 그걸 타고 가도록.”
나는 고개를 숙여 절을 한 뒤, 한 마디 말했다.
“지금까지, 은혜 감사했습니다.”
“잘 가게. 정령에게 사랑받는 아이여.”
* * *
용사 파티의 천재 정령사, 로헨이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비밀로 유지됐다.
그런데 사실, 여자가 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령들과의 연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국왕이 더 싸울 수 있느냐, 마왕에게 다시 도전하자 하는 것을 거절한 이유가 이제는 너무 힘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곳곳에 널려있는 많은 하급 정령들은 느껴졌다. 정령에게 인기가 많은 내 기질 덕에 그들과 쉽게 계약을 맺고 마음대로 해지할 수도 있다. 정령사로서의 재능은 건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상급 정령들이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들 하급 정령 때부터 하나하나 내가 키운 녀석들인데….
“찾아야 한다.”
스륵.
정령 생각에 몰두하다가 귀에 걸린 머리를 무의식적으로 넘기고, 나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머리 잘라야 하나.
머리는 절대 자르면 안 됩니다! 하던 데이브 녀석 때문에 그냥 두고는 있긴 한데.
뭐, 어차피 신전에 가면 저주 풀어 줄 테니까 그냥 놔둬야지.
* * *
고향으로 가는 마차 위.
향긋한 풀 내음과 잘 정돈된 도로.
평소에 보고 느끼던 곳과는 매우 다르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다.
평화롭다. 안정적이다. 생명의 위협이 없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은 변방의 벨크 마을. 내가 자란 곳이다.
왜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냐고?
그야 나는 갓난아이일 적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고, 파헬 아저씨가 날 데려와 이 마을에서 키워주셨으니까.
파헬 피스본.
작은 벨크 마을의 촌장이자, 많은 마을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는 어른이다. 내게는 양아버지 같은 남자이기도 하다.
‘이번에 보는 건 1년만인가.’
마차의 덜컹거림이 멈췄다.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군.
“로헨 님,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마차로 6일 정도 걸리는 꽤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그동안 여자의 몸에 적응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웠지만… 어찌어찌 적응해냈다.
어차피 곧 남자 몸으로 돌아갈 테니 뭐.
‘이 마을에서 조금만 위로 가면 신전이 있으니까….’
신전에 가서 아리아의 유언을 전하고 이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찾는다.
그 후, 잃어버린 정령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다 같이 정령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했는데.’
고작 20살의 나이에 모든 종류의 상급 정령들과 계약했다. 아마 그대로 몇 년만 더 지났으면 다들 정령왕의 반열에 가까이 들지 않았을까.
혹자는 정령들을 그저 공격 수단으로만 여길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특별히 애착이 있었다.
가족 없이 자란 내게, 형이자, 누나이자, 동생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은 항상 정령들이었으니까.
내게 정령들은 가족이자 친구였다.
반드시 그들과 다시 만날 것이다.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 * *
“네가, 로헨…?”
“으응… 오랜만이네요.”
파헬 아저씨가 변해버린 나를 보고 경악했다.
“아저씨가 늘 딸이 갖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냐!”
그것도 잠시, 짐짓 쾌활하게 말하며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는 파헬 아저씨.
아마 자신이 진지하게 대하면 내가 불편해할 걸 알고 저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겠지. 나름대로의 배려인 것이다.
“시끄러워. 그나저나, 제가 지낼 집 하나 정도 없나요?”
“응. 마침 최근에 집 하나가 비어서. 거기 쓰면 되겠구먼.”
“고마워요. 파헬 아저씨. 내일 밥이나 같이 먹자고.”
“그래. 푸하하! 귀엽구나, 너. 그렇게 변하고 보니.”
쾅!
문이 부서질 듯이 세게 닫고 나왔다.
어차피 다들 저주를 해제하면 쉽게 풀릴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나도 그렇고 모두 내가 여자가 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긴, 오히려 이게 편하지.
“으윽. 청소 좀 해야겠군.”
파헬이 내 집이라고 알려준 곳의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날렸다.
간단히 청소한 뒤,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왕궁의 침대만큼 편하진 않지만 나름 편안했다. 뭔가 옛날 생각도 나면서 정감이 가는 집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지난 일주일간 너무 힘들었으니.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하암,”
하품을 한 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 * *
파헬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양아들이 여자가 된 것에 몹시 놀란 상태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데이브한테 편지로 로헨이 많이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난 결과 용사 파티의 끝이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쌍한 아이구만, 늘….”
재능이 충만한 아이.
그래서 그만큼 늘 고초를 겪는 아이가 로헨이었다.
“오늘 밤은 무사히 지나가길.”
파헬이 하늘을 보며 그렇게 기도했다.
하지만, 모두가 안심할 때 재앙은 찾아온다.
* * *
일어나 보니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뭐야, 자고 일어났는데 밤이라니. 이거 다시 원래대로 맞추려면 오래 걸릴 텐데.
땡! 땡! 땡! 땡!
“뭐야, 이 밤중에 시끄럽게….”
누군가 시끄럽게 종을 울리고 왠지 사람들의 말소리로 밖이 소란스러웠다. 이 시간에 누가….
“언데드다!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힘을 쓸 수 있는 남자들은 모여!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여기로!”
…언데드?
여기가 물론 변방 마을이긴 하지만 여기에까지 언데드들이 몰려온다고?
뭔가 이상하다. 이 근방에 네크로맨서가 자리잡기라도 한 건가?
지금 잡다한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작은 마을의 병력으로는 네크로맨서를 막지 못해. 내가 나서야 한다.
“이그니스(?).”
…….
아, 씨발. 나 손절당했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파헬 아저씨를 찾는다.
“파헬!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언데드들이 마을 바로 앞까지 침입한 것 같다. 고용된 용병들과 젊은 남자들이 나서기는 했는데… 속수무책이야. 낮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언데드들은 밤에만 활동한다. 낮이 되면 태양빛에 소멸해 버려 방어 인원이 적더라도 시간만 끌면서 버티면 되는 일이기는 하다.
“어쩔 수 없지, 제가 나설게요.”
“저, 정말 고맙다! 로헨! 저쪽으로 쭉 가면 마을 밖이란다!”
“제 고향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아저씨는 마을 주민들이나 잘 대피시켜 놔요.”
“물론이지! 너만 믿으마!”
자신만만하게 말은 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는 내 정령들을 전부 잃은 상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계약할 수 없는 건 아니지.
일단 마을 밖으로 가는 길에 하급 정령들이라도 계약해놔야 한다.
“샐러맨더(?), 나이아스(?), 어스웜(?), 실프(風), 프라이어(光), 데스(?).”
급한 대로 뛰어가면서 보이는 화염, 물, 땅, 바람, 빛, 어둠의 하급 정령들과 모두 계약을 맺었다. 원래 정령 계약에는 긴 절차가 필요하다던데, 난 그냥 바로 되더라고.
오히려 지들이 먼저 계약해 달라고 달라붙던데?
“크아아악.”
“키야얏.”
좀비들이 괴성을 내며 마을로 몰려온다. 해골들이 뼈를 덜그럭대면서 걸어온다.
막는 남자들의 수는 고작 이십 명 남짓. 언데드들의 숫자는 대충 봐도 수백 마리에 달한다.
이십 명 남짓의 남자들도 무장이라고는 고작 가벼운 갑옷에 한손검뿐. 어떻게 봐도 승산은 없다.
“샐러맨더(?).”
“저, 저건, 불꽃…!”
“정령사 님이다!”
“오오, 살았어!”
승산은 없다.
만약 내가 없었으면 말이지.
종종 중급 정령 대신에 하급 정령과 계약하는 정령사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잘 이해 못하지만, 그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질보다 양, 이란 거지.’
중급 정령 1마리 대신에 하급 정령 여러 마리와 계약하는 부류들. 어떤 경우에는 하급 정령 여러 마리가 중급 정령 한 마리보다 유용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그 질보다 양 이론을 증명해 보려고 한다.
“상급 정령 한 마리가 더 나을까, 하급 정령 100마리가 더 나을까?”
수많은 불꽃 도마뱀들이 실체화해서 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불태워라, 샐러맨더.”
* * *
으음,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조달할 정령들이 이 주변에 없다.
그런데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의 수는 줄어도 주는 것 같지가 않다.
‘하급 정령들을 아껴 썼어야 했나….’
언데드들의 근원을 파괴할 수 있는 건 화염 혹은 빛 정령뿐.
폭탄 던지는 것처럼 샐러맨더(?)랑 프라이어(光)를 마구 던지고 나니까 어느새 정령들이 전부 소모되어 버렸다.
“나이아스(?), 어스웜(?), 실프(風), 데스(?)!”
물대포를 쏘고 나이아스 한 마리가 사라진다.
좀비 한 마리가 밟고 있는 곳이 움푹 패이고 어스웜 한 마리가 사라진다.
강풍을 불러일으켜 스켈레톤을 뼈다귀로 해체시키고, 실프 한 마리가 사라진다.
데스는 언데드들의 시야를 가려 혼란을 주고 사라진다.
하급 정령들은 계약을 맺은 파트너라기보단 소모품의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하급 정령들로만 주로 계약하는 정령사는 정령에게 애착이 없다.
계속해서 피해를 준 결과 화염과 빛으로 절반 정도는 소멸시켰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죽어도 죽어도 계속 되살아난다. 이곳에 나 외에 불과 빛을 쓰는 정령사나 마법사는 없다.
‘아무래도 상급 정령이 월등히 좋은 것 같네. 양보다 질이다.’
아직 해가 뜰 때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남았다. 계약한 하급 정령의 수는 바닥난 상태.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점점 지쳐 쓰러져간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잠깐만 시간을 번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조금만 힘을 내요! 저는 잠시 전선 이탈을!”
“저희가 버티겠습니다! 아녀자는 어서 대피하십시오! 아무리 정령사라지만 위험합니다!”
아녀자라고? 지금까지 내가 다 했는데?
순간 저 남자에게 나이아스로 물을 쏟아버릴까 생각했지만, 일단 참고 정령들을 찾기 위해 전선을 이탈했다.
“샐러맨더랑, 프라이어만 찾으면….”
몸이 변해서일까. 달리는 속도도 느려지고 숨도 원래보다 훨씬 빨리 가빠온다.
“허억, 허억.”
“크아아악!”
“좀, 좀비가 내 팔을!”
“화살에 맞았다! 얼른 치료를!”
내가 이탈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 마왕에게 패배해 동료들을 잃고, 성별도 바뀐 데다가, 결국 언데드들에게 고향까지 잃는다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때였다.
터벅. 터벅. 터벅.
덥수룩한 검은 머리의 남자가 갑옷조차 입지 않은 채로 검 한 자루를 들고 내가 왔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데드들이 몰려오는 쪽으로 말이다.
“이봐요! 거기는 위험해요! 용병이시면, 최소한 갑옷이라도…!”
“…….”
“저기, 제가 정령사인데, 혼자 다 해결할게요. 지금 검사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
“저기요, 듣고 계세요?”
남자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냥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 몰라!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 남자를 뒤로하고, 하급 정령들을 찾으러 빠르게 움직였다.
* * *
일출까지 1시간 40분.
“샐러맨더 10마리, 프라이어 8마리.”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끼고 아끼면 1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잘 버텨 줬어!”
…어라? 왜 아무도 없지?
시체조차 없다. 다들 마을을 버리고 도망을 친 것이다.
“이, 비겁한 자식들….”
이렇게 말하지만 자신의 고향을, 마을을 버리고 도망친 청년들을 책망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숙련된 병사가 아니고, 그만큼 두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마을이 뚫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공격당한다면….
‘아니다.’
이것은 다 일주일 전 내가 마왕을 해치우지 못한 탓이다.
내가 마왕을 해치웠더라면 저런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조잡한 네크로맨서 따위 진작 도망쳤겠지.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기묘하게도 사람 한 명 없는 전선이 붕괴하지 않았고,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이 전부 한 지점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끼리 뭉쳐서 발이 꼬이고 몸이 엮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마치 시체들이 모여 생긴 거대한 산 같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시체들의 산이 붕괴되며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 후,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그것은 빛과 화염, 그 외에 언데드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검기였다. 그것도 지금까지 거의 본 적 없는 거대한 위력의 검기.
“에반…?”
난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용사의 검기를 떠올렸다. 저 검기는 마치 에반이 성검을 휘둘렀을 때 생기는 거대한 충격파와 비슷했다.
시체들의 산 사이에, 살아 있는 팔 한 짝이 보였다.
콰앙! 콰앙! 콰앙!
거대한 굉음이 몇 번 더 들리며 시체들의 산은 완전히 붕괴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좀비에게 물어뜯기고 스켈레톤에게 화살을 맞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검은 머리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아까 그 갑옷조차 입지 않은 검사였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남자가 칼을 아무렇게나 몇 번 더 휘두르니 남아 있던 언데드들조차 가볍게 쓰러져 소멸했다.
“나, 나이아스(?).”
치유 마법을 써 줘야 한다. 일반적인 인간이 저렇게 다친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남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 괜찮으세요…?”
몸에 화살이 4개 정도 꽂혀 있고, 팔다리는 물어뜯겨 살이 뭉텅이째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몸이 성한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
남자는 이번에도 역시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마 그 남자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 * *
그렇게 용병 남자 단 한 명이 단신으로 언데드 수백 마리에게서 마을 하나를 구한 것은 전설로 남기에 충분했지만…
“위대한 정령사님께 축복을!!”
“소녀 정령사님 덕에 마을이 살아남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헨, 마을 사람들은 네가 그 로헨인 줄 전혀 모르고 있구나. 하하! 세계 최강의 정령사가 우리 마을 출신인데 말이야.”
“아, 하하… 고마워요, 파헬.”
어…
내가 한 게 아닌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