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아무튼 전 카노스가 다시 신이 됐으면 좋겠어요.”
정말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멈칫한 노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야…… 그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
노엘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설마 이런 대답을 내놓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첫 번째 엘퀴네스이자 태초의 마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 막힐 듯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던 이였다. 마치 신으로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렇게 뻔히 엘프가 된 그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신이 아닌 그를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제법 기특한 소리를 하네. 뭐, 그만큼 나를 좋아했다는 말 같아서 기분은 나쁘지 않은걸.”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
이번엔 당황한 건 엘 쪽이었다. 무심결에 흘려들었다가 뒤늦게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노엘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였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딘지 공허한 것 같은 그 눈동자를 보며 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본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 것 같았다.
그건 일말의 희망이기도 했다. 엘은 노엘이 지금 이렇게 된 걸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자신만 아쉬워하는 게 아니길, 그에게 돌이키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그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면 비록 아쉽다 해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카노스는 이런 삶을 바랐구나, 그가 이제야 온전히 평온해졌구나,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건 아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다시 신이 될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거예요?”
그가 다시 빛나는 곳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극히 태평하고 제멋대로지만 진지할 땐 누구보다도 진지한. 그래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 드높은 위치에 다시 서기를 바랐다. 염원을 품게 된 엘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꾸 뭔가 기대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현재까진 없는데 어쩌지?”
“현재까지라는 건, 나중에는 생길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이런, 그렇게 나오는 거야?”
그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엘이 물러날 기미가 없자 한숨처럼 대답했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지.”
“……! 정말요? 그게 정말이에요?”
“응, 뭐. 아마 지금의 내가 죽고, 너도 죽고, 세대가 몇십 바퀴쯤 빙글빙글 돌고 나면?”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언젠가라고 했잖아.”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응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엘.”
“……왜요.”
또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엘은 일부러 불퉁하게 대꾸했다. 서로 바라는 점이 극명하게 다른 이상 어차피 무슨 대화를 하건 평행선을 이룰 게 뻔했다. 그러니 그가 무슨 말을 하건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드래곤의 도움을 받고 나면 넌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네?”
“나를 만났다는 사실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냥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노엘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에도 엘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이 온통 혼란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한참 만에야 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노엘은 여전히 느긋하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서 엘은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니었는지 의심했다. 물론 부질없는 착각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노엘의 대답이 그 현실을 일깨웠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계약을 해지하자는 거야.”
“카노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그냥 잠깐 어울리는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거든. 설마 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줄은 몰랐어.”
“그게 무슨…….”
그 순간 마주친 노엘의 눈빛이 슬퍼 보여서 엘은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노엘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다음, 천천히 길을 앞질러 나갔다. 쓸쓸한 뒷모습 위로, 그의 연녹색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넌, 나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돼.”
* * *
“이해할 수 없어요!”
엘의 외침에 노엘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 소리야?”
“아직도라뇨! 카노스 혼자 일방적으로 선언한 거잖아요! 계약을 해지하다니! 멋대로 소환해서 계약하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그냥 만나지 않은 거로 하자니까.”
“말도 안 돼요! 카노스라면 이미 만난 사람을 만나지 않은 거로 치부할 수 있겠어요?”
“응.”
“이익! 아무튼 전 싫어요! 불가능하다고요!”
단지 감정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계약 해지는 그의 생명과도 직결하는 문제였다. 지금 노엘은 쫓기는 처지였고, 자연과의 교감이 뛰어난 엘프는 추적에 월등했다. 그가 지금까지 붙잡히지 않았던 건 엘이 비호한 덕분일 뿐, 계약이 해지되면 발각되는 건 말 그대로 시간문제였다. 머리칼을 염색해봤자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그건 누구보다 노엘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카노스 옆에 있을 거예요!”
노엘은 ‘그린 듯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누가 보더라도 만들어진 표정이라 엘은 더 갑갑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할 수 없지.”
마침내 노엘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그가 마음을 돌린 거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노엘은 단념한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카노스?”
“응?”
“죄송하지만, 지금 뭘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설마 저걸로 위협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처구니없는 짓이지만 카노스라면 그러고도 남을 자라서 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엘 역시 생긋 웃었다.
“네가 아직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직접 보여주려고.”
“……네?”
무슨 말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다음 순간 노엘이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팔을 내리그었다. 피부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간 멍해 있던 엘이 곧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깨닫고 경악했다.
“카노스!”
“아야야. 좀 아프네…….”
“미쳤어요?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단검을 빼앗을 정신도 없이 엘은 다급히 상처부터 살폈다. 하얀 팔에 모질게 그어진 상처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깊었다. 동맥을 건드렸는지 쏟아지는 피도 상당했다. 그대로 놔두면 출혈 과다로 죽을 수 있을 양이었다. 보통 자해를 하면 마지막 순간 조금이라도 힘을 빼기 마련인데, 이 전직 마신이자 무자비한 엘프에게는 그런 감정도 없었던 것 같았다. 울컥한 나머지 손에 힘이 들어가자 노엘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파, 엘. 너무 세게 쥐는 거 아니야?”
“그러게 누가 이런 짓 하래요? 자해공갈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기겁해서 물러나 줄 알았나 본데! 미안하지만 이런 협박 전혀 안 통하거든요?”
“어머나~ 무서워라.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겠어요? 일단 가만히 있어요. 바로 치료할 테니까.”
노엘은 얌전히 지시에 따랐다. 어차피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말끔히 나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걸 알면서도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지만 엘은 묵묵히 환부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치유력이 스며든 그의 팔에 새하얀 물거품이 일어났을 때였다.
“엘.”
“왜요.”
“미안해.”
처음엔 자해한 것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엘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갑자기 반발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마어마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한 느낌과 함께 속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시야가 빠른 속도로 흐려지고 있었다. 엘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건 역소환의 징후였다.
“이게 뭐…….”
왜 갑자기 역소환이 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하던 엘은 눈을 크게 떴다. 원래대로라면 치유력을 불어넣자마자 나았어야 할 노엘의 팔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피부가 아물기는커녕 피조차 멈추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그는 씁쓸하게 웃고 있는 노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가서 머리나 식히고 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 *
“……엘.”
깊게 잠긴 의식 속에서 엘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다. 차분하면서 낮은 호흡.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한 목소리.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무척 낯익은 기분이었다.
“……어나, 엘.”
거듭되는 부름에 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뿌연 시야 사이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황금을 섬세하게 조각한 듯한 눈동자.
“엘! 정신이 들어?”
“트로웰……?”
환한 웃음에 반사적으로 따라 웃으려던 엘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주위를 돌아봤다. 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공간에서 깊은 물 속 특유의 질감이 느껴졌다. 물의 영역이었다.
‘맞아. 나 방금 역소환 된 거였지…….’
물론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상처를 치료했을 뿐인데 역소환이 일어났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령계에 있다는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찌르는 듯한 온몸의 격통도 생생했다.
“괜찮아? 잠깐 본계에 와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역소환 돼서 돌아오기에 깜짝 놀랐어.”
“아, 괜찮아. 좀 놀랐을 뿐이야.”
엘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트로웰이 곧바로 부축했다.
“더 누워 있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
“그치만…… 계약자가 다쳐서 치료해야…….”
“이 몸으로 중간계에 내려가겠다고? 말도 안 돼.”
“하지만…….”
“한 시간, 아니 몇 분이라도 좋으니까 좀 더 회복한 후에 가. 어차피 이 상태로는 내려간다고 해도 금방 다시 역소환 될 거야. 정령왕이 역소환 되면 계약자한테도 타격이 커. 지금도 내상을 크게 입었을 텐데, 오히려 더 악화시킬 생각이야?”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엘은 입술을 가만히 악물었다. 겨우 얌전해진 걸 확인한 트로웰이 안도하며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네가 역소환이 되다니. 중간계로 소환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계약자의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그게……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상처가 나서 그냥 치료하려고 했을 뿐이거든.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됐어.”
“자세히 말해봐.”
트로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엘은 그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계약자가 크게 다쳐서 상처를 치료하는데 강한 반발력을 느꼈다는 것. 그와 동시에 역소환의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 정작 상처는 하나도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 본인이 설명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트로웰의 얼굴도 같이 심각해졌다. 그는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로 엘을 바라보았다.
“……엘, 너 대체 뭐랑 계약한 거야?”
“뭐라니. 그냥 평범한…….”
아무 생각 없이 답하려던 엘은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엘프와 계약한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한 게 아니었다. 입을 다문 엘의 모습에서 동요를 감지한 트로웰의 시선이 진득해졌다.
“평범한…… 그다음 말은?”
“펴, 평범한 계약이었다는 뜻이지.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짙어진 눈길에 엘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결국 먼저 물러선 건 피식 웃은 트로웰 쪽이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사라진 것에 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엔 다시 얼굴이 굳었다.
“엘, 아무래도 지금 계약은 해지하는 게 낫겠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엘이 고개를 들었다.
“넌 평범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자는 절대 평범하지 않아. 치유술을 썼는데 역소환이 됐다는 건 그자의 육체가 네 힘을 거부하고 튕겨냈다는 소리야. 엘, 너도 알겠지만, 이건 절대 정상이 아니야.”
냉정한 말이었으나 부정할 수 없었다. 엘퀴네스의 치유는 신관의 신성력보다 상위 능력이다. 체질이나 종에 관계없이, 살아 숨 쉬는 이라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기도 했다.
“그치만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평소엔 전혀 이상한 거 못 느꼈거든. 애초에 내 힘에 반발한다면 소환할 수도 없잖아.”
“나도 그게 이상하긴 해. 하지만 엘, 우연히 기연이 닿을 순 있어도, 역소환은 결코 우연히 일어날 수 없어.”
이번에도 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이게 우연일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될 걸 카노스는 알고 있었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평소에 치유 받는 걸 거부했던 것도. 치료하던 순간 사과하던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아. 엘퀴네스의 치유력에 반발한다는 건 주신의 체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해. 도저히 정화할 수 없을 만큼 혼이 더러운 거야. 이런 존재는 권능이 없어도 질 자체는 거의 그것에 가까워.”
“그것?”
“악신 말이야.”
“……!”
“그날의 일을 기억해봐, 엘. 악신에게 당한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잖아.”
맞아, 그랬었다. 엘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인간이 됐을 때도 그 순간만큼은 잊지 못했다.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엘뤼엔이 쓰러져 있는데, 아무리 치유력을 써도 상처를 조금도 낫게 할 수가 없었다. 악신의 힘이 정령왕보다 상위였던 것도 있었지만, 그 기운 자체가 정화되지 않는 ‘부정한 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기운이 스며든 것만으로도 그럴진대, 독 그 자체인 악신이라면 치유력을 쓰는 순간 강력히 반발했을 것이다. 송두리째 기운이 역류해서 치유하려던 쪽이 오히려 큰 타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왜? 어째서 카노스가?’
악신과 함께 소멸하면서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불안해진 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던 트로웰이 말을 이었다.
“그만큼 부정한 존재라는 소리야. 어쩌다 그런 존재와 계약하게 된 건진 몰라도 너무 깊게 얽히는 건 좋지 않아. 그건 이미 주위에도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을 거야.”
“안 좋은 영향?”
“가까이 지내기만 해도 병에 걸린다든가, 사고를 당하는 것 같은 악운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거야. 그런 존재는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라고 보면 돼.”
<그건 혼돈과 재앙의 씨앗입니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이 육신을 입었습니다!>
<나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돼.>
머릿속이 멍해지는 가운데, 엘은 그동안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지만 속은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만 더 깊어졌다.
“말도 안 돼. 대체 왜 그런…….”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거 알아. 하지만 자칫하면 너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지 몰라. 그만큼 위험한 존재야.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계약을 해지하는 편이…….”
“아니, 그건 싫어.”
“엘.”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그건 확실해. 그렇다면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위험하다면 더더욱, 그런 걸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어.”
분명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엘은 그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단호한 표정을 본 트로웰은 할 말을 억지로 삼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대로 해.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미안해, 트로웰.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아냐, 난 너만 무사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엘? 네가 위험해진다면 그땐 그냥 지켜만 보지 않을 거야.”
단호한 말에 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트로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엘은 참 평범한 계약을 못 하는구나.” 착잡한 시선으로 건네는 말엔 엘도 같이 착잡해졌다.
“아, 그보다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는데.”
“응? 뭔데?”
“실은 조금 전에 엘뤼엔이 찾아왔었어. 네게 꼭 알려야 할 일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면서. 혹시 네 위치를 알고 있느냐고.”
“헉! 그, 그래?”
엘은 낭패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간 너무 연락을 피하긴 했었다. 아무리 아들에게 관대한 엘뤼엔이라도 슬슬 인내심이 마모할 때였다. 그래도 설마 정령계까지 찾아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미네가 정령들을 풀어서 너를 찾았거든. 그러니까, 네가 역소환 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바로 그 장소 말이야.”
“……어?”
이어진 말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멀뚱히 눈을 깜빡인 건 잠깐이었다. 들키면 곤란하니 행적을 가려두긴 했지만 같은 정령왕이 작정하고 찾으려면 피하기 힘들다. 상대가 바람의 정령왕이라면 더욱 그랬다. 엘은 곧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럼 설마…….”
트로웰이 조금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엘뤼엔이 거기로 갔을 거야.”
* * *
무모한 행동을 벌인 대가는 상당히 컸다.
노엘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본인이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정령왕의 역소환은 계약자인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외상에 이어 내상까지 더해진 탓에 그는 지금 약간의 기력도 내기가 어려웠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보다 아린 현기증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제때 지혈하지 못한 팔은 지금도 대량의 혈액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엘이 역소환 되면서 한 움큼 토해낸 피 때문에 입가부터 상체도 전부 엉망이었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본다면 기함할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쓰러져 있는 당사자는 태연하게도-
‘오, 피를 많이 흘리면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이거 제법 묘하게 힘이 쭉쭉 빠지는 것이 기분이 좀 이상한데? 이런 게 바로 빈혈? 우와, 신. 세. 계~’
따위의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성이 가벼운 성격은 목숨이 긴박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역시 너무 많이 찢었나. 하지만 이 정도 상처가 아니면 역소환 시키기 힘드니까 할 수 없지.’
지금쯤 정령계로 돌아간 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바보같이 마냥 걱정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엘퀴네스답지 않게 착하니까. 노엘은 희미하게 미소 짓다가 다시 울컥 피를 토해냈다. 콧속의 점막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숨을 쉴 때마다 피 냄새가 타고 들어왔다. 역하고 비릿한 냄새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피 냄새가 이렇게 역한 거였다니.’
고작 이런 거에 영향받는 자신을 예전에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노엘은 자조하며 웃었다. 생명을 품고 있는 혈향은 신이었을 땐 향기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엘프가 된 지금은 빠져나가는 생명만큼 틈타 들어오는 죽음을 더 크게 느꼈다. 피 냄새를 거북하게 느끼는 건 살기 위한 본능이 발동한 탓이었다. 그런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직접 실감하는 기분은 남달랐다.
머리로 알고 있는 신의 지식과 그렇지 않은 육체에서 생겨나는 괴리감은 생각보다 더 컸다. 마치 깊은 땅속에 파묻혀 작은 구멍 틈으로 간신히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인간보다 뛰어난 하이 엘프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꼴이라니. 한때 그와 대적했던 신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기가 막혀서 웃지도 못할 것 같았다.
크르르.
그때쯤 노엘은 낮게 울리는 짐승의 신음을 들었다.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두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접근하는 괴수를 보면서도 노엘은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을 뿐.
“그래. 이번엔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어차피 태어난 순간부터 평화로운 죽음은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싸게 치는 게 아닌가. 그는 속으로 태연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악신을 위해 희생하는 자.
그 죄업을 대신 받으리라.
엘과 계약을 맺을 당시, 왜 전생을 기억한 채 태어났냐고 묻는 것에 모른다고 대답했던 건 거짓말이었다. 그건 이미 약속된 저주의 증거였다.
그에게 걸려 있는 저주는 그를 위하는 모든 이들을 불행으로 빠트리며, 종래에는 본인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지독한 저주다. 그 어떤 정화나 축복으로도 풀리지 않는, 악신을 향한 징벌이자 절대자 주신이 내리는 저주.
그는 앞으로 영원히 모든 기억을 가진 채 떠돌며, 불행한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를 낳아준 부모를 죽이고, 친우를 고통스럽게 하며, 그가 태어난 나라와 일족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끊임없이 피로 얼룩지는 삶.
물론 자처한 일인 만큼 그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다. 늘 단조로운 신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육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지내는 게 아직까지는 재미있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런 삶에도 미치게 되는 날, 드디어 완전히 소멸하게 되겠지.’
그때는 정말로 쉬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그날이 조금 빨리 오면 좋을 것 같다고, 노엘은 속으로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괴수의 기척은 이제 바로 지척까지 닿아있었다. 가까이 이른 괴수의 숨결에서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늑대를 닮은 주둥이가 피 냄새를 맡고, 엷게 내쉬는 노엘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크르르…….”
괴수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목울대를 울렸다. 표적에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만족스러운 신음이었다. 하이 엘프는 맛보기 힘든 최상위 식량이니 그럴 만도 했다.
노엘은 다가올 통증을 얌전히 기다렸다. 이제 곧 우악스러운 손톱이 피부를 찢고, 날 선 이빨이 뼈를 씹어 부술 것이다. 가능하면 괴수의 취향이 고상해서 단번에 목을 꿰뚫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빨리 죽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된 통증은 없었다. 그 대신 이어진 건 기척이 단숨에 걷히는 감각이었다.
“키엑!”
“……?”
날카로운 비명에 노엘은 영문을 놀라 눈을 떴다. 주변엔 한때 몬스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형체가 흩어져 있었다. 절단된 단면에서 흘러내리는 녹색 액체만 봐도 방금 일어난 일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그 앞에 꼿꼿이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를 발견한 노엘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남자는 빛을 담아낸 듯한 백금발과 물처럼 시린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세상엔 수많은 금발 벽안이 존재하지만 그 어떤 이도 그와 같지는 않았다. 같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존재감을 감추고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엘뤼엔, 틀림없는 그였다.
“뭐야, 이건.”
엘뤼엔은 발치에 늘어진 몬스터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온 장소인데 정작 찾는 아들은 안 보이고 엉뚱한 것들만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이 직접 알아내서 알려준 위치니 장소가 틀렸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이곳에 있는 건 조금 전 그가 처리한 몬스터 하나와 피투성이가 된 엘프가 전부였다.
설마 그새 길이 엇갈린 건가. 짧게 혀를 찬 엘뤼엔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는 엘프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으로선 저 엘프만이 아들의 행방을 알려줄 유일한 이였다.
“하이 엘프로군.”
“…….”
엘뤼엔은 굳어 있는 엘프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붉은 피로 범벅이 된 그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 신음은커녕 가쁘게 몰아쉬는 숨조차 조절하려 애쓰고 있었다. 정신력 하나만은 좋아 보였다.
“이봐, 내 말 들리나?”
“…….”
말을 걸자 시선을 든 엘프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차분한 표정이었으나 눈빛에선 숨기지 못한 동요가 엿보였다. 조금 전 상황으로 봐선 분명 목숨을 구제받은 것일 텐데,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던 엘뤼엔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엘프의 이마에 새겨진 물의 인장을 발견한 탓이었다. 자연과 친화적인 엘프가 정령과 계약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 인장의 등급에 있었다. 별처럼 흩뿌려진 다수의 눈꽃 결정. 물의 정령왕만이 새길 수 있는 엘퀴네스의 증표였다.
“……너 설마 엘의 계약자인가?”
돌아올 답을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예상대로 엘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화의 종족이 정령왕을 소환하다니. 엘뤼엔은 낮게 탄식했다. 그동안 엘이 자신을 피한 이유를 알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엘이 이 자리에 없는 이유도 짐작했다.
‘상태가 안 좋군. 엘은 역소환 된 건가?’
그는 짧게 혀를 차며 만신창이에 가까운 몸을 살폈다. 이제 갓 성년이 되어 보이는 엘프는 한눈에도 죽어가고 있었다. 팔의 상처도 상처지만 내상을 크게 입은 상태였다. 기운이 역류한 흔적이 역력한 걸 봐선 계약자가 역소환되면서 얻은 내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데. 누가 엘을 역소환 시킨 거지?’
정령왕이 역소환 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엘프의 상태도 그렇고,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럴 만한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몬스터가 있긴 했으나 고작 그런 것들이 정령왕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조금 전 엘프 앞을 기웃거리고 있던 몬스터도 그저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뿐이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자세히 알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중간계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벌기 위해 모든 감각을 극도로 제어하고 있는 상태다 보니 여의치가 않았다.
“쯧, 어쨌든 일단 치료부터…….”
“……놔두십시오.”
치료하려고 뻗은 손을 피투성이가 된 손이 붙들어 제지했다. 엘뤼엔은 미간을 좁히고 치료를 거부하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부상이 심하다. 이대로 죽을 생각인가?”
“어차피…… 치료되지 않습니다. 당신만…… 다칠 겁니다.”
“뭐?”
뜻밖의 대답에 엘뤼엔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상처로 시선을 내렸다. 치료되지 않는다니, 뭔가 특이한 체질인 건가? 엘뤼엔은 시험 삼아 약하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반발하듯 날카롭게 튀어나온 기운이 곧바로 그의 팔에 붉은 상흔을 남겼다. 따끔한 통증에 엘뤼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당황한 엘프의 입에서 거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 바보가! 다친다고 했잖아!”
“했잖아?”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러게 다치신다고 했잖습니까.”
엘뤼엔은 급히 사과하는 엘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무례한 언사에 기분은 상했지만 어쨌건 엘의 계약자였다. 벌을 줄 땐 주더라도 지금은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게다가 이 육체가 지닌 특이한 반발력에도 흥미가 일었다. 그는 품 안에서 맑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들었다.
“무슨…….”
“천상수라는 거다. 일종의 성수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신의 몸까지 회복시키는 천상수는 인간이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불사에 가까운 몸으로 만들기는 했다.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 몸에 바르는 것뿐이라면 상관없었다. 안심시키기 위한 설명이었으나 엘프의 얼굴은 더 파랗게 질렸다. 엘뤼엔이 알 리가 없지만, 그의 육체에 천상수는 가장 치명적인 액체였다.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
“아, 잠깐…… 큭!”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생명수는 닿자마자 그의 피부를 벌겋게 태웠다. 엘뤼엔은 혀를 차며 곧장 병의 마개를 닫았다.
“아, 미안하군. 이것도 아닌 것 같다.”
“…….”
말과는 달리 전혀 미안한 얼굴은 아니었다. 졸지에 실험 대상이 된 엘프가 눈으로 욕설을 뱉었지만, 그 정도쯤은 상처의 고통 때문이라 생각한 엘뤼엔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신성력도, 천상수도 안 통하다니, 골치 아픈 체질이군. 설마 축복의 기운에 전부 다 반발하는 건가.’
이제 보니 엘도 그를 치료하려다 역소환 된 모양이었다. 크레아의 제사장 일족인 하이 엘프가 축복에 저항하는 체질이라니. 이 정도로 혼이 더럽다는 건 전생의 업보가 너무 크거나, 강력한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리였다. 업보라면 엘프로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런 주제에 정령왕을 소환한 것도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왜 걸려도 이런 골치 아픈 놈들에게만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치료할 최후의 수단으로 그는 신의 능력을 쓰기로 했다. 중간계에 머무는 시간이 단축되긴 하겠지만, 계약자를 잃고 서글퍼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엘프가 지닌 육체의 시간을 부상을 입기 이전으로 되돌렸다. 이 방법은 효력이 있었는지 엘프의 몸이 빠른 속도로 나아지기 시작했다. 피가 멈추고 다쳤던 내장이 복원되며, 찢긴 피부가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엘뤼엔은 그의 몸이 완전히 원상태를 되찾는 것을 확인하곤 말했다.
“이제 됐나?”
“…….”
엘프는 담담했다. 한순간에 멀쩡해진 몸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 뚜렷한 시선에 엘뤼엔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왠지 그가 싫어하는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눈빛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엘프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곤 수다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와아~ 나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짜 아파서 죽는 줄 알았거든요! 성수를 부으실 땐 이제 정말 죽었구나 했었죠. 그런데 이렇게 말끔하게 낫게 하시다니! 굉장해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상황 파악이 다소 느렸던 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