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5.
신계의 시간은 균일하지만, 각 궁처에 주어진 환경은 저마다 다르다. 시간대와 날씨는 물론 계절까지 전부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정할 수 있었다. 일례로 태양신의 궁처는 언제나 화창한 대낮이며, 반대로 밤의 신의 궁처는 늘 짙은 어둠을 유지했다. 주인이 느끼는 그날의 기분, 취향, 변덕에 따라 한순간에 해가 뜨거나 밤이 되기도 하고, 봄처럼 따스한 날씨였다가도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가지각색 궁처들 속에서도 신계의 흐름에 그대로 맡겨둔 유일한 궁처가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새하얀 성채.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천칭과 뱀의 문양. 형벌의 신 엘뤼엔의 궁처였다.
“엘뤼엔 님.”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엘뤼엔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조각처럼 섬세한 얼굴에 시린 물색의 눈동자가 똑바로 응시하자 그를 불렀던 수행 천사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지시하신 부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 어땠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은 최근 새로운 계약자를 맞이하신 듯했습니다.”
그제야 엘뤼엔은 들고 있던 깃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명백한 관심의 표현에 보고하던 수행 천사는 한층 더 긴장했다.
“엘이 새로운 계약을 했다고?”
“예, 현재 그 계약자와 동행 중이신 걸로 파악됩니다.”
“……계속 계약자가 하나뿐인 걸 불만스러워하긴 했었지. 새 계약자가 누군지는 알아냈나?”
“죄송합니다. 아직 그에 관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소환된 시기는?”
“한 달쯤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엘뤼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엘의 행동이 부쩍 수상해진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동행인의 정보가 어느 곳이든 퍼졌을 시기였다. 그런데도 수행 천사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거나, 외출을 극도로 삼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둘 다 해당할 수도 있었다.
엘은 첫 계약자와 다닐 때도 숨어다녔다. 이번에 만난 계약자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들, 나다. 대답해.”
손짓으로 천사를 물린 엘뤼엔은 곧장 그의 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약간의 시간을 두고 맑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앗, 아버지! 또 무슨 일이야?>
또라니. 달갑지 않은 표현에 엘뤼엔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매번 연락할 때마다 당황하는 게 섭섭해서 더 자주 연락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엘뤼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는 말은 들었다. 대체 요즘 뭘 하고 지내기에 행적을 감추고 다니는 거지?”
<어? 아, 아니.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는데?>
“그런 적이 없다? 그럼 내가 그저 무능해서 네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 근데 뭐야, 아버지. 아직도 내 뒤를 캐고 다녀?>
“뒤를 캐다니, 불쾌한 표현이군. 아버지가 아들의 일과를 알아보는 게 뭐가 잘못됐지?”
<그치만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너무 과보호야.>
“내게 넌 늘 어린애다.”
그리고 실제로도 어린애가 맞았다. 몸의 시간은 삼백 년이 지났다지만, 엘이 실제로 살아온 시간은 지구에서 머문 시간까지 다 합쳐도 삼십 년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고뭉치가 과보호에 토를 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그래서 네 새로운 계약자는 누구지? 행적을 감추는 건 그 계약자와 관련된 일인가?”
<으음, 그게, 그렇긴 한데…….>
“그런데?”
<으으, 아니야. 아버진 그냥 몰라도 돼.>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엘뤼엔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이럴 때의 그는 동급의 신들조차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들어했다. 예전이었다면 엘 역시 그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말을 바꿔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애정으로 다져진 아들은 아버지의 분노 앞에서도 용감했다.
<에잇, 몰라!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아무튼 당분간은 연락하지 마! 알았지? 이제 불러도 대답 안 할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 이봐, 엘! 대답해! 엘?”
그러나 당황한 엘뤼엔의 부름과는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것이다. 연거푸 울리는 목소리가 신경 쓰일 텐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신호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
역시 사춘기가 아닐까.
엘뤼엔은 이번에야말로 심각해졌다.
* * *
“우와, 용감한데.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들어도 돼?”
이마 위에 새겨진 문양이 뜨거운 열기를 품었다. 일방적으로 신호를 차단한 탓에 엘뤼엔 쪽에서 보내온 기운이 강제로 역류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엘뤼엔의 통신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쯤이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만두지 않는 걸 보면 단단히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나중에 사과하면 풀어지긴 하려나? 이마의 열기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쉰 엘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낯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자, 그의 계약자이기도 한 사람. 카노스의 환생체인 노엘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음, 나 때문이던가?”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낮게 이를 가는 소리에 배시시 웃는 얼굴이 화답했다. 열이면 열 용서하고 말 것 같은 순진한 웃음이라 엘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그에게 휘둘리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새삼 확인한 기분이었다.
‘외모까지 어려지니까 더 화를 못 내겠네.’
파스텔로 칠한 것 같은 연녹색의 머리칼과 황금빛 눈동자. 길쭉하게 솟은 특이한 형태의 귀. 한때 전 차원을 호령했던 검은 머리칼의 마신은 이젠 영락없이 아름다운 엘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부드러운 선을 지닌 얼굴도, 마르고 가는 편인 체구도. 무엇하나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엘의 눈엔 그가 그냥 카노스로 보였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빛이라든가, 사람을 골리는 듯한 방만한 말투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외모가 아닌 다른 부분들은 전부 다 그대로였다. 억양은 물론 사소한 습관도 똑같아서 대화하다 보면 그가 환생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었다. 그냥 여느 때의 그처럼, 잠시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나타난 것 같았다.
“근데 정말 의외네. 엘뤼엔을 피하면서까지 비밀을 지켜주다니. 난 바로 고자질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처음엔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후환이 두렵더라고요.”
“하하! 정령왕이 고작 엘프의 눈치를 본다고?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소리인데.”
“카노스가 어디 그냥 평범한 엘프예요?”
“또 그 이름으로 부르네. 지금은 노엘이라니까.”
“하나도 안 어울려요.”
“왜? 귀엽잖아?”
……여기서 뭐라고 대답하든 평범한 반응이 돌아오진 않겠지. 아니라고 하면 귀엽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드러누울 게 틀림없었고, 마지못해 그렇다고 하면 더 말해보라며 귀찮을 정도로 채근할 게 분명했다. 차마 입을 열 수 없던 엘이 아예 침묵하는 쪽을 택하자 노엘은 사악하게 웃었다.
“현명해졌네. 피할 줄도 알게 되고.”
“……부탁이니 제발 일부러 괴롭히지 좀 마세요.”
“매정해라. 이것도 다 애정인데.”
노엘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 봤자 명백하게 웃고 있는 입술 때문에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냥 엘뤼엔에게 전부 다 실토해버릴 걸 그랬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후회 속에서, 엘은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판단을 보류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서 고생하는 성격은 버리질 못하는 것 같았다.
현재 그들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숲에서 노숙하는 중이었다.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긴 하지만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노엘이 엘프인 탓이었다.
이종족들이 다시 인간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도 발생했다. 몇천 년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왔던 종족들은 개방의 시대가 열린 후에도 선뜻 어울리지 못했다. 이종족만이 아니라 인간 쪽도 마찬가지였다. 엔딜이 살던 마을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섞이게 된 영지도 있었지만, 결사적으로 거부한 영지도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머무는 영지가 그 대표적인 곳이었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성격의 영주는 제 영지 안에 이종족이 들어오는 것조차 거부했다. 높은 방책을 세우고 불시 검문까지 거쳐 발견하는 족족 내쫓을 정도였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만큼은 폐쇄 정책을 펼치기 전보다 종족 간 사이가 더 나빴다. 물론 두 사람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이 지역을 택했다. 적어도 이곳에선 살벌한 추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으니까.
‘그래. 살해 위협보다야 노숙이 백번 낫지.’
고향을 떠났지만 노엘을 향한 엘프 일족의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집요하고 섬뜩한 형태로 변했다. 그들은 저주의 증거가 엘프 일족을 파멸시키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곧장 살수대를 조직했다. 심지어 다른 엘프 마을에까지 협력을 요청해서 연계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제 갓 성인이 된 엘프 하나를 죽이기 위해 백 명이 넘는 엘프 전사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온순하고 평화롭다고 알려진 엘프들은 일족을 위한다는 명분 앞에선 죄 없는 이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잔혹한 살육자였다. 덕분에 엘은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뜬 눈으로 주변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정령인 그에겐 수면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잠을 안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까지 무시하긴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 고결한 마신이, 모두를 구하고 소멸한 카노스가, 환생한 이후엔 이런 처참한 대접을 받는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 그거. 내가 너무 놀아서 그래.”
한번은 투덜거렸더니 노엘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본연의 업무에 방만했던 신이 내세로 들어가면 그게 전부 업이 되어 삶이 고달파진다고. 그래서 게을렀던 신일수록 어지간하면 신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그러니 자업자득인 거지.”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엘은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들어주기조차 역겨운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공격하는 엘프들을 볼 때마다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너희가 뭔데! 너희가 지금 이 땅에서 멀쩡히 숨 붙이고 살아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너희가 감히 어떻게 그를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끝내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볼 카노스의 표정을 돌아볼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가 정말로 소멸했단 사실을 새삼 재확인하는 것도 싫었다. 이런 생각들만 하니 피곤이 쌓일 수밖에 없지, 엘은 한숨과 함께 자조했다.
“비품이 거의 다 떨어져서 내일은 다시 이동할 거예요.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음, 글쎄. 아무 데나 상관없긴 한데, 바다가 보고 싶긴 하네.”
“바다요?”
“숲에서만 살아서 바다 구경한 지 오래됐거든.”
그럼 다음 장소는 해안 마을로 정해볼까. 엘은 근방에 가볼 만한 해안 마을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나니 어느새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피워둔 모닥불을 살피는 엘에게 침낭째로 굴러온 노엘이 투정을 부렸다.
“엘, 나 심심해.”
“잠이나 자요.”
“별로 안 졸린데.”
“졸리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자둬요. 내일 이동하려면 체력이 필요할 거예요. 지구력 단련에 방해된다고 치유술 받는 것도 싫다면서요.”
“어머, 너무해. 이 시간까지 잠도 못 자게 한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기야?”
“……그러니까 그런 모호한 말투 좀 쓰지 말라고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귀여운 척 두 눈을 깜빡이는 노엘을 보며 엘은 머리를 짚었다. 예전의 카노스완 다르게 저런 행동이 외모와도 어울린다는 게 문제였다.
노엘의 이런 행동은 딱히 장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마을에 있을 때도 이런 식으로 말해서 묘한 눈길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누가 정말 오해하기라도 하면 어쩌지? 심란해진 엘의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물론 눈치 빠른 노엘이 그걸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걱정 마, 걱정 마. 네가 워낙 헷갈리게 생겨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일 테니까.”
“……그것참 친절하신 위로 감사한데요. 바로 그게 싫은 거거든요?”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나? 싫어하니까 하는 거야.”
생긋 웃는 얼굴엔 대꾸할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 남자를 말로는 당할 사람이 없다는 걸 잊었을까. 엘은 자신의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좋아요. 당장 잘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의 계획이나 짜요.”
“지금까지 짠 게 계획 아니야?”
“그건 단기 계획이고요. 더 장기적인 계획이요. 계속 이렇게 다닐 순 없잖아요.”
목적지 없이 유람하는 거야 상관없었다. 하지만 매번 추격자들에게 쫓겨 다니는 형국이라는 게 문제였다. 마음 같아선 오는 족족 처리해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카노스가 일족을 파멸시키는 존재가 돼버릴 것 같아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따돌리거나 기절시키는 방법만 썼더니 상대도 추격을 그만두지 않았다. 여러모로 악순환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엘프는 수명이 긴 종족인데, 그리 넓지도 않은 대륙에서 평생 도망만 다니며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엘과는 달리 노엘은 그저 느긋하기만 했다.
“음, 난 이런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데. 스릴 있고 재밌잖아. 누가 열심히 지켜주는 모습에 감동도 받고 말이지.”
“카노스.”
“노엘.”
“네에, 노엘. 아무튼 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그제야 장난기를 거둔 노엘이 진지한 얼굴로 응시했다.
“좋아, 엘.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글쎄요, 일단 노엘의 외모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외형만 달라져도 추격에 큰 혼선을 줄 거예요.”
외모를 바꾸는 건 이사나 때도 썼던 방법이었다. 제법 효과가 좋았다는 엘의 설명에 노엘은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바꿔도 상관없어. 그런데 어떻게 바꾸려고?”
“으음. 가장 좋은 방법은 드래곤에게 마법을 걸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겠지만…….”
“겠지만?”
“제 드래곤 계약자가 지금 잠들어 있거든요. 완전히 잠든 건 아니고, 가수면이지만요.”
“그럼 깨우면 되잖아?”
“하하, 그렇긴 한데 말이죠…….”
엘은 차마 웃지 못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머릿속에선 언젠가 라미아스가 외쳤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엘퀴네스가 왕자님의 키스로 날 깨우기 전까진 절대 일어나지 않겠어!”
그건 대화 중에 벌어진 작은 헤프닝이었다. 랑시의 소설을 계기로 책 수집에 흥미를 느끼게 된 라미아스는 특히 동화에 관심을 보였다. 기존에 출간된 것들을 전부 쓸어모은 건 물론이고, 아직 책으로 엮이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조사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알고 있는 동화가 있다면 뭐든지 좋으니 알려달라는 말에 엘은 강지훈일 때 읽은 동화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설마 그 이야기에 라미아스가 완전히 반해버릴 줄은, 그것도 모자라 어처구니없는 선언까지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 큰 고룡이 정령왕의 키스를 받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꼴이라니. 당연히 엘은 그 뒤로 라미아스를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조차 창피해서 어디 가서 사실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처음엔 얼마간 외면하고 있으면 그쪽에서 먼저 항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정말로 그 방식으로 깨우기 전까진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영원히 그대로 있으라지.’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깨어난 게 백 년 후였던가. 물론 엘은 백 년이든 천년이든 굳이 깨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막상 이런 상황이 생기니 속이 쓰리긴 했다. 차라리 아예 수면기에 들어간 거면 편하게 무시할 수 있을 텐데, 그건 또 싫다고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게 더 얄미웠다.
“……아무튼 그런 사정이 있어요. 그 드래곤이 독점욕도 좀 강해서, 다른 드래곤한테 부탁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차라리 화를 내면 상관없는데 울며불며 징징거리는 쪽이라 좀 감당이 안 돼요.”
“왜 그러고 살아? 그런 애랑은 그냥 계약을 끊어.”
“어떻게 그래요…….”
예전이었다면 엘도 고려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이 끊기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를 알아버리는 바람에 웬만해선 그런 방법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노엘이 제 팔자를 제가 꼰다는 표정으로 바라봐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우선 지금 당장은 머리 모양이랑 색만 바꿔도 어느 정도 눈속임은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머리색?”
“네, 어차피 모든 엘프가 노엘의 얼굴을 아는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지금 머리색이 튀는 편이기도 하고요.”
봄날의 새순을 연상시키는 노엘의 연녹색 머리칼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은 색이었다. 지금까지는 두건 등을 이용해 가려왔으나, 그것만으론 완벽한 변장이 될 수 없었다. 시선을 완전히 분산시키려면 완전히 새로운 머리색으로 바꾸는 게 더 나을 거란 의견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이 머리칼 염색 안 돼.”
“네? 왜요?”
“하이 엘프는 나름의 고귀한 피랍시고 체질적으로 변질되는 걸 거부하거든. 그래서 염색약이 안 들어.”
“……카노스, 하이 엘프였어요?”
“응.”
엘은 염색이 안 된다는 것보다 그가 하이 엘프라는 사실에 더 경악했다. 그렇다는 건 마을에서 본 그 살벌한 엘프들도 전부 다 하이 엘프라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엔딜 남매를 쫓아낸 일족도 하이 엘프였다. 이쯤 되면 종족 특성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마신이 엘프로 태어난 게 이상하다 싶더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방금 상당히 무례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아하하, 그, 그럴 리가요. 오해십니다.”
“그래?”
“그럼요. 맹세코. 절대로.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빤히 바라보던 노엘이 생긋 웃으며 ‘그럼 그런가 보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믿어주는 척을 하는 거였고, 그걸 엘도 모르진 않았다. 이거 절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텐데.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골탕 먹일 거라 생각하니 좀 아득해졌지만, 엘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그보다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을 못 했네요. 염색이 안 되는 체질이라니. 그럼 마법도 안 되는 거예요?”
“아니, 그건 가능해. 단, 마법사의 등급이 좀 높아야 할 거야. 하이 엘프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그게 어느 정도죠?”
“역시 드래곤 정도?”
그렇다는 건 결국 해답이 라미아스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엘은 암담한 기분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뭐든 쉽게 가는 게 없었다. 한눈에도 피로해 보이는 엘의 모습을 노엘 역시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굳이 무리할 거 없는데.”
“…아니에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죠. 갑시다. 일단 가보자고요.”
그래, 일단 찾아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정 안되면 억지로 깨우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깨어난다 해도 순순히 협조해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오히려 다른 계약자에게 맹렬한 질투심을 느낀 라미아스가 노엘을 해코지하려고들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그것도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수를 쓰진 못할 테니 어떻게든 잘 보호하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엘이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엘프도 만만치 않은 계약자라는 점 말이다.
“아, 생각해 보니 머리를 물들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어.”
“앗, 그래요? 뭔데요?”
반색하며 고개를 드는 엘을 향해 노엘이 방긋 웃었다.
“드래곤의 피엔 마력이 있다는 거 알아?”
“그야 당연히 알지만요?”
“그럼 그 피로 웬만한 건 다 염색할 수 있다는 건?”
“……네?”
이어질 말을 예상한 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엘은 더 환하게 웃었다.
“괜찮지 않아? 넌 계약에서 해방되고 난 머리칼을 염색하는 거야. 덤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도 얻게 되는 거지. 이런 걸 보고 일타삼피라고 한다지?”
아니,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울고 싶어진 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자신은 정말 계약자 운이 없었다.
* * *
라미아스가 사는 곳은 드마티시라 불리는 거대한 산맥 안이었다. 원래는 심해에 터전이 있었는데 육지로 옮긴 거였다. 그 이유를 본인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는데, 그냥 어느 날 문득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장소에서 살고 싶었다고 했다. 어느 종족이든 아무 때나 선뜻 찾아올 수 있을 만한 곳이었으면 했다고.
엘은 그것도 어쩌면 4천 년 전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엘’을 레어로 초대했던 경험이 무의식중에 이사할 마음을 들게 한 건지도 몰랐다. 물론 이상한 감동에 빠질까 봐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의 둥지는 접근이 수월한 평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흔히 걸어두는 위험한 함정이나 마법 장치 같은 것도 깔아두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든 쉬어가도록 의자도 놓고 과일나무와 꽃도 심었다. 그 나름대로 자신이 인간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을 표현한 거였다.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건 드래곤의 둥지 주변엔 몬스터가 몰린다는 사실이었다. 조무래기들도 아니고 굵직한 상급 몬스터 위주로 몰렸다. 덕분에 엘은 산맥으로 향하는 입구에서 다음과 같은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의※
매우 흉포한 드래곤이 살고 있음.
접근 시 목숨 보장 못 함.
라미아스가 봤다면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할 문구였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엔 자초한 부분이 큰 만큼 엘은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표지판을 제작해서 세워두었을 어느 이름 모를 용자를 더 안타까워했다. 아마도 그는 저 표지판을 세워둔 뒤 드래곤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흉포한 드래곤’이라는 글자 옆에, 나중에 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님’이라는 글자가 작게 덧붙여 있었다. 저렇게라도 써두면 그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덜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흉포한 드래곤이라…….”
간판을 바라보는 노엘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불길한 표정을 보면서, 엘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잠깐 있었던 실랑이를 떠올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에잉.”
아직도 드래곤의 피로 머리를 물들인다는 해괴한 계획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엘은 두 계약자를 만나게 해도 괜찮은 건지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심했다. 설마 엘프가 장로급의 드래곤을 해칠 순 없겠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존재가 카노스라면 얘기가 좀 많이 달랐다.
“그치만 순순히 부탁하러 가는 건 마음에 안 들어. 강제로 쟁취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데 그걸 포기해?”
“지금 대사 되게 악당 같다는 건 알고 있죠?”
“아니지, 엘. 여전히 순진하긴. 악당과 영웅의 차이가 뭔지 알아? 그게 사실 알고 보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야. 대중이 원하는 걸 이뤄주는 쪽이 영웅인 거지. 수단과 방법은 그냥 이차적인 문제야. 그런 의미에서 대중에게 드래곤의 인식이 어떻게? 드래곤 슬레이어의 인식은?”
전자는 위험, 후자는 영웅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한 엘이 입을 다물었다. 반대로 노엘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하이 엘프이자 드래곤 슬레이어 노엘! 그리고 그 계약자인 물의 정령왕! 이 얼마나 멋진 조합이야? 안 그래? 그 드래곤 하나만 없어지면 우리가 세상의 영웅이 되는 거라고!”
그래, 이제 알았어. 파이어 버스터한테 이상한 사상들을 주입한 게 바로 당신이었지! 엘은 정령계에서 지내는 지금도 툭하면 용사를 모시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불의 검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중의 바람이 전부 옳은 건 아니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영웅들의 말로가 어땠는지도 알려드려요?”
“앗,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는데. 알았어,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그런 표정 하지 마.”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요.”
“마족들이 괜히 그런 성격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달은 표정?”
그렇게까지 티가 났던가. 차마 아니라고 답하지 못한 엘은 먼 산만 응시했다. 노엘이 피식거리는 게 느껴져서 어쩐지 더 민망했다.
“이 안으로 쭉 들어가면 되는 거야?”
“네, 근데 좀 오래 걸어야 해요. 산세가 험한 편은 아니지만 비탈진 길이라 금방 지칠 거예요. 피곤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괜찮아, 괜찮아. 공기도 좋고 햇살도 좋고. 딱 걷기 좋은 날씨잖아. 내가 그래 봬도 엘프인데, 이 정도 산도 못 타면 말이 안 되지.”
그렇게 대답하는 노엘은 천하 태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엘프라도 단련하지 않은 일에 처음부터 적응할 수는 없었다. 스쳐 들었던 말에 의하면 그는 마을에서 살 때 거의 집안에서만 지내던 편이었다. 멀리 나와본 것도, 오래 걸어보는 것도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여행 초반엔 자주 지쳐 있곤 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치유술은 안 받으려고 한단 말이지.’
편한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며 단련해서 체력을 키우겠다는 이유였지만 왠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워낙 본심을 잘 숨기는 성격은 지금도 여전해서, 그냥 가볍게 하는 말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음? 이건 나무 형태가 좀 특이하네. 오, 저기 봐, 엘. 다람쥐가 있어! 헉, 저건 벌집인가? 건드리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러다가도 평범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좋지 싶었다. 쓰게 웃은 엘은 자신이 유난히 그한테 약하다는 점도 인정하기로 했다. 얄미울 땐 한없이 얄미운데, 도저히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이야, 산에도 재밌는 게 참 많네. 내가 그동안 너무 실내에서만 지냈나 봐.”
“근데 카노스는 이미 오래 살았잖아요.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아요?”
“음? 아아, 그렇긴 한데, 신일 때와는 와 닿는 느낌이 좀 달라. 같은 것도 더 재밌게 느껴지거든.”
“예를 들면요?”
“이렇게 시야가 좁을 수가 있다니 신기한 느낌? 투시도 되지 않고, 멀리 있는 건 잘 보이지도 않고. 하다못해 눈앞에 있는 벌레들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잖아. 심지어 그런 작은 벌레의 독에도 다칠 수 있어서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한다니까? 정말 굉장해.”
“……그건 전부 다 단점이잖아요.”
어이없어하는 엘을 향해 노엘은 그래서 재밌는 거라며 다시 즐거워했다. 엘은 그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육체를 바꿔본 경험이라면 그에게도 있었다. 인간이었다가 정령이 되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험도 해봤다. 그래서 중간계의 육신이라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신기함보다는 분명 답답함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도 현 상황을 편하게 즐기고 있는 그가 무척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속이 상했다.
“그것 말인데요.”
“음?”
“카노스가 다시 신이 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돌아본 노엘이 의외라는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것 같아서요. 카노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악신 때문에 희생한 거잖아요. 그런데 신의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요?”
“억울하니까 ‘희생’이라고 하는 거야. 대가가 있다면 그건 희생이 아니지.”
“그거야 그렇지만…….”
“게다가 난 지금 생활이 별로 나쁘지 않아. 신의 삶은 좀 지루하거든.”
“……만날 놀러 다녔으면서.”
“바보구나. 당연히 지루하니까 놀러 다닌 거지.”
“…….”
묘하게 설득력이 높은 말이라 엘은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당장 엘뤼엔이나 크로아첸만 봐도 온종일 주야장천 일만 했다. 그런 게 신계의 삶이라면 확실히 지루해 보였다. 어쩌면 카노스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이고, 그로 인해 놀러 다니게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엘뤼엔도 나중에 그렇게 될 것 같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을 하는데 왜 지루하지?”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일 중독자인 엘뤼엔이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 같긴 했다. 엘은 그냥 생각을 멈췄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자꾸만 쓸데없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