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어? 오빠 가려고요?”
“어, 너희도 등교 잘해. 항상 차 조심하고.”
“어어? 잠깐만요~!”
아쉬운 듯 소녀들이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태진은 상관하지 않고 빠르게 지훈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무서울 정도로 단어장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 순간 비어있던 차선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빠르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앞쪽에 박힌 차량 넘버가 익숙했다. 그게 지훈의 목숨을 앗아갔던 차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진은 힘껏 내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지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지금!’
이 손만 닿으면 구할 수 있다. 악몽이었던 시간들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돼.”
순간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덜컥 멈췄다.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붙잡았다는 걸 인지한 건 조금 후였다.
“뭐……!”
끼이이익―!
콰앙!
흠칫 몸을 굳힌 그 짧은 사이에 요란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태진은 눈앞에서 날아가는 지훈의 모습을 망연히 응시했다. 맥없이 허공에 떠오른 몸이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철퍽 쓰러지는 것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이어졌다.
“꺄아악!”
호흡이 돌아온 건 바로 옆에서 터진 비명을 듣고 났을 때였다. 태진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조금 전 태진에게 말을 걸었던 소녀 중 하나였다. 그걸 인식하자 그때부터 한꺼번에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고다! 학생이 차에 치였어!”
“누가 구급차를!”
멍하니 서 있는 태진을 제치고 사람들이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운전자가 혼비백산하여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쓰러져 있는 지훈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까지 지훈에게선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현장에서 즉사.
태진은 언젠가 의사에게서 들었던 소견을 상기했다. 그러자 다리에서 한꺼번에 힘이 풀려나갔다. 그는 비틀거리다 털썩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현장을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지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막지 못했다.
내 눈앞에서 지훈이 죽었다.
단 한 번뿐이었던 기회를 날려버렸다.
난 이번에도…… 그를 구하지 못했다.
현실을 깨닫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앞에 일어난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지훈을 구하지 못한 거야? 난 그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었나? 꿈일 뿐이라도 좋으니까, 일어나고 나면 다 사라져도 좋으니까, 그래도 그를 구하고 싶었는데.
망연자실한 태진은 소리 내어 신음을 흘리지도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물었다.
“괜찮아?”
“……!”
태진은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았다. 그였다. 지훈을 구하려던 그때, 그를 뒤에서 붙잡은 그 사람!
모든 것이 이 사람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날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치솟는 살의를 느끼며 태진은 고개를 들었다. 당장 주먹을 날리지 않으면 속이 역겨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태진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린 긴 푸른색의 머리칼, 선명하게 반짝이는 물빛의 눈동자. 마주친 시선이 흔들리자 조금은 어색한 듯, 난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라있었다.
“내가 진짜 미쳐.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이런 짓 하래?”
눈앞의 아름다운 이가 책망하듯이 그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친구가 사고 치기 전에 얼른 가서 막으라고 하기에 그게 대체 뭔 소린가 했더니……. 나 참, 아주 잘하는 짓이다, 하태진. 설마 그 이상한 형이 너였을 줄이야. 너 때문에 시공간이 완전히 엉켜 들었잖아. 신계가 발칵 뒤집혔다고. 하긴 지금은 이게 뭔 소린지도 모르지? 아무튼 여기서 멈춰서 정말 다행이야. 너 진짜 엄청난 사고를 칠 뻔했다고. 알아?”
쏟아지는 말들을 태진은 정말로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니 그리운 감정이 솟았다. 태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가만히 심호흡했다.
“……강지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이 없음에도, 태진은 그가 지훈인 것 같았다. 그 말에 푸른색의 눈동자가 조금 놀란 듯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하태진.”
“……!”
멈춰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태진은 손을 내밀어 눈앞의 얼굴을 천천히 감쌌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태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거친 손바닥 안에 부드러운 피부의 느낌이 와닿았다. 마치 잔잔한 물의 표면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지훈이야?”
“그래, 내가 강지훈이다. 죽어서 귀신이 된 친구를 본 소감이 어떠냐?”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태진은 울고 싶어졌다. 그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지훈의 얼굴을 더듬었다.
“지훈아.”
“응.”
“강지훈…….”
“그래, 하태진.”
와락 끌어안자, 지훈은 짧게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혼자 외롭게 둬서 미안해.”
따스한 품이 너무도 선명해서, 귓가에서 속삭이는 음성이 믿을 수가 없어서 태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눈물을 터트렸다.
One runs the risk of weeping a little, if one allows himself to be tamed.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건 눈물을 흘릴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지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언젠가 다 알게 될 거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꺼리는 기색을 읽었기에, 태진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모습이 변하든,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훈이 살아서 그 앞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을 뿐.
“이제 그만 가봐야 해.”
딱 한 시간만 허용됐다며 설명하는 얼굴이 시무룩했다. 애초에 죽은 사람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 과정에 제약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담담히 받아들인 태진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왜 네가 더 울 것 같은 표정이야?”
“그치만…….”
“됐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며.”
“그거야 그렇지만.”
“어, 난 그거면 돼.”
선뜻 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지훈은 더 미안한 표정을 했다. 그 모습에 태진은 다시 웃었다.
“자책할 필요 없어. 네가 날 길들인 게 아니라, 내가 네게 길들여진 거니까.”
“뭐야, 그게…….”
“즉, 이 기다림에 대한 책임 역시 온전히 나한테 있다는 거야.”
비록 아주 많이 지루하겠지만, 이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할 수만 있다면 일생이라는 시간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나중에 보자, 강지훈.”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지훈이 곧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중에 보자, 하태진.”
말간 대답과 함께 지훈의 모습이 스러지듯 사라졌다. 연기처럼 희뿌옇게 변한다 싶더니 수증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태진은 잠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여전히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단지 조금 전까지와는 광경이 완전히 달랐다. 교통사고로 웅성거리던 공간은 어느새 사라지고, 도로 위엔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옛 건물들 사이에서 최신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는 것도 보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 비슷한 기종의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뒤엉켰던 시간의 흐름이 돌아왔다. 멈췄던 그의 시간도 다시 흘렀다. 분명 며칠이 지났을 텐데, 휴대폰에 떠올라 있는 날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새로 사서 갈아입었던 옷도 사라지고 다시 코트 차림으로 돌아왔다. 과거에 떨어지기 직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광경을 확인하니 지금까지 경험했던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꿈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태진은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 마지막 통화기록이 남아 있는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올 거면서 왜 자꾸 전화질이냐는 규현의 신경질에 갈 거라고 답했다.
―진짜지? 또 변덕 부리지 않고 진짜로 오는 거지?
“그래, 정말 간다니까.”
―그래, 믿는다, 너! 기다린다!
통화를 끊은 후 숨을 내쉰 태진은 흐트러진 머플러를 가볍게 정돈했다. 모임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왠지 눈물이 났다. 손수건을 꺼내 급히 닦아 내는데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날 태진은 친구의 장례식에서조차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아주 오래도록 흘렸다.
“아, 나 울 것 같아.”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니 여우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야. 난 널 슬프게 할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네가 길들여 달라고 했어.”
“그 말이 맞아.”
“그런데도 넌 울려고 해.”
“그래.”
“그럼 넌 아무것도 얻은 게 없구나.”
어린 왕자의 말에 여우가 답했다.
“있어. 밀 빛깔을 얻었잖아.”
* * *
엘이 그 장소를 발견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꽃이 피는 계절도 아닌데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났다. 홀린 듯이 따라가 봤더니 작은 오솔길 너머로 새하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에 신전이 있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건물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최근에 영업(?)을 개시한 모양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엘은 주위를 기웃거렸다. 때마침 마당을 쓸러 나오던 젊은 사제가 서성이는 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아, 여기에 신전이 있는 줄 몰라서요. 어느 분의 신전인가요?”
“축복과 은사의 신 라세크 님의 신전입니다.”
‘라세크?’
처음 들어보는 신이었다. 기운을 봐선 상급신 같은데, 그런 이름이 있었던가? 엘은 사제의 하얀 옷에 새겨진 붉은 문양을 확인했다. 네 장으로 펼쳐진 꽃잎 문양은 아름다웠지만, 역시 생소했다.
‘축복과 은사라니. 굉장하네.’
듣기만 해도 굉장히 다정하고 따뜻한 신일 것 같았다. 굳이 알아볼 것도 없이 천의 속성의 신인 건 확실했다. 축복 계열 신은 언제 어디서나 인기가 높다. 심지어 상급신이라니. 지금이야 한산하지만 곧 수많은 방문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뤄 발 디딜 틈도 없어질 게 분명했다. 고즈넉한 신전을 구경할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소리였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축복의 신이라 그런지 사제의 성격도 자애로웠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사제는 친절하게 엘을 신전 안으로 안내했다. 신전 밖에서도 느꼈던 은은한 꽃 향기가 안으로 들어가니 더 진해졌다. 따로 장식된 생화나 향초가 없는 걸 보면 신전 자체에 배인 기운이었다. 라세크라는 신의 기운일 터였다. 그 증거로 안내하는 사제에게서도 미세하지만 같은 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실제 향기는 아닐 것이다. 꽃의 신전에서도 사시사철 향기가 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유니콘들이 영혼의 기운을 향기로 느낀다고 했던가. 그게 이런 식이겠구나 싶으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여기서부터 본당들입니다. 전부 편히 돌아보셔도 괜찮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물러나는 사제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엘은 본격적으로 신전 안을 돌아보았다. 정결하게 잘 꾸며진 예배당을 확인하고, 상담실과 휴게실도 둘러봤다. 신전은 대체로 다 비슷한 구조지만 그래도 각 신전만의 특징은 있었다. 라세크의 신전은 유리 질감으로 이뤄진 조각 장식들이 많았다. 창문 역시 색유리를 이어붙여 만든 화려한 판유리로 이뤄져 있었다.
전시회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돌아보던 엘이 마지막으로 향한 건 기도실이었다. 정숙한 기도를 위한 공간은 다른 장소보다 조금 어두웠다. 대신 은은한 조명들이 별처럼 흩뿌려져, 이세계에 발을 들인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공간을 돌아보며 엘은 아까부터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을 정의했다.
“……조금 지구식인가?”
아크아돈에서도 조명을 활용한 장식 연출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구에서 봤던 방식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쩌면 지구를 잘 알거나 관심이 많은 신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아, 그게 티가 나?”
“……!”
불쑥 들려온 음성에 엘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제법 키가 큰 남자였다. 엘은 조금 숨을 삼킨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은색과 녹색이 반씩 섞인 눈동자가 무척 다채로웠다. 섬세한 장식으로 꾸며 내린 은발 또한 꽃물을 들인 것처럼 중간부터 붉은 색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고전풍 동양 복식에 가까웠는데, 그래서 더 전체적으로 화려한 분위기였다.
정령왕인 그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짙어지다 못해 온 공간을 장악한 듯한 향기만 해도 뻔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맙소사, 엘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프리트…….”
무심코 중얼거린 것을 들은 남자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웃었다.
“내가 이프리트였던 건 어떻게 알았대?”
경쾌한 대답에 엘은 다시금 숨을 삼켰다. 장난스러운 말투도, 웃는 표정도 전부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았다. 이프리트의 얼굴이지만, 표정을 짓는 버릇은 다른 친구를 더 많이 떠올리게 했다. 그렇기에 이 순간이 더 믿겨지지 않았다.
“너…… 진짜 태진이야?”
간신히 내뱉은 질문에 상대의 웃음이 진해졌다.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땐 엘은 왠지 울고 싶어졌다.
“형님이 오셨다. 잘 지냈냐, 강지훈?”
얼마 전 엘은 갑자기 신계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공간에 오류가 생겼다면서 다급히 찾아온 신들은 그 원인이 엘의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엘이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상황이 시급하다는 말에 당황한 엘은 자세한 상황은 듣지도 못하고 얼결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떨어진 장소는 매우 눈에 익은 곳이었다. 건물들이며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들까지. 한때는 매일 같이 오가던 등굣길이었다. 강지훈이 죽었던 사고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 태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알던 모습보다 훌쩍 크고 어른스러워졌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강지훈일 땐 왜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로. 태진이가 분명했다. 더불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알아차렸다. 그가 강지훈을 살리려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두고 볼 것도 없이 막아섰다.
자신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 기묘한 기분이었다.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놓치게 한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태진을 막지 못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졌을 게 뻔했기에 안도감이 더 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시공간에 영향을 준거였다. 신의 영혼들은 가끔 터무니없는 기적을 일으키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사례였다.
강지훈이 죽은 지는 이미 몇백 년이나 지났는데 지구에선 아직도 태진이 살아가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시공간은 워낙 변칙적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아크아돈이 멸망하기 전에 자신이 무사히 귀환했던 게 정말 운이 좋았던 거였다. 악운과 행운을 동시에 거머쥐었다는 평을 괜히 듣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덕분에 보고 싶던 친구와 재회할 수 있던 건 좋았다.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성인이 된 모습을 확인하게 된 것도 기뻤다. 그만큼이나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못난 친구를 잊지 못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그 친구가 다시 눈앞에 있었다. 이번엔 또 다른 익숙한 모습을 지닌 채로.
“와, 너, 진짜. 이게 뭐야. 네가 왜 여깄어? 얼마 전에 만났는데, 그새 죽은 거야?”
“뭔 소리야. 아, 너한텐 그게 얼마 전이었나 보네. 나한텐 엄청 오래전 일인데.”
“그, 그래? 아무튼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 사람 놀라게 할래?”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네가 놀라도 나보다 더 놀랐겠어?”
기가 차단 얼굴로 웃은 태진이 엘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푸른 빛을 머금은 머리칼과 눈동자하며 풍기는 기운까지. 영락없는 물의 정령왕이었다.
“다시 봐도 당황스럽네. 그때 그건 그냥 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다니. 허참, 네가 어떻게 엘퀴네스야? 누가 비만 내리면 똥강아지처럼 신나던 강지훈 아니랄까 봐.”
“그러는 넌 왜 이렇게 화려해졌어? 축복과 은사의 신이라니, 완전 출세했네.”
“아, 맞아! 나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 있어! 아무튼 책임져, 너. 네가 환생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았잖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어진 설명에 엘은 대강의 상황을 이해했다. 하태진의 삶을 끝내고 명계로 도착한 그는 아레히스를 만나자마자 강지훈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리곤 자신도 거기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묘한 표정을 짓던 아레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원래 하려던 절차를 본인이 자청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있을 리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설명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눈 떠 보니까 내가 신이라잖아. 사기 당한 줄 알고 처음엔 얼마나 황당했는데.”
“아레히스 전적이야 원래 화려하지.”
“뭐야, 설마 너도 당했어?”
“아니, 아버지가.”
“아버지? 그건 또 뭐야? 정령왕이 아버지가 어딨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은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동기였던 엘퀴네스가 신이 되었다는 것도, 그가 엘의 아버지가 됐다는 것도, 이프리트였던 시절에 그들 셋이 이미 인연을 맺었다는 것 역시 모르는 상태였다. 또 한바탕 폭풍이 일겠구나, 엘은 훤히 보이는 미래를 짐작하며 웃었다. 이유를 모르는 태진도 엘이 웃으니 따라 웃었다.
“아무튼 진짜 신기하다. 널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
“그러게 말이야. 다시 봐서 너무 좋다, 태진아. 아 이제 새 이름으로 불러야겠네. 라세크라고 했지?”
“난 태진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데. 새 이름은 라세크 맞아. ‘라세크 마네 에테르니타스’라는 엄청 긴 이름인데, 보통 첫 이름을 주 이름으로 쓴다더라고. 그냥 편한 쪽으로 불러.”
“어, 그럼 나도. 지훈이라고 불러도 돼. 원래 애칭은 엘인데, 너한텐 특별히 지훈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할게.”
“와, 그거 참 영광이네요.”
키득거리며 웃은 둘은 새삼스럽게 악수를 나눴다. 전혀 다른 모습에 전혀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어제 만났던 사람을 보는 것처럼 신기할 정도로 서로의 모든 게 여전히 익숙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어울리던 시절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시 잘 부탁해.”
얽히고설켰던 인연 하나가 다시 서로를 향해 맞닿았다. 잃었던 단짝을 되찾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