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604화 (604/608)

외전. 11화

‘어디 보자. 이 근처에 편의점이…….’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든 태진은 이내 멈칫 굳었다. 근처에 있던 건물의 상호가 눈에 박혔기 때문이다. <무지개 떡볶이> 단순한 글자만 박힌 간판은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강지훈이 제일 좋아하던 분식집이었다.

“…….”

태진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저편에서 활기찬 음성이 들려왔다. 주위가 시끌거리는 것을 보니 이미 상당수 모여 있는 듯했다.

―어, 태진이냐? 어디까지 왔어?

“야, 나 도저히 안 되겠다.”

―뭐?

“미안한데 그냥 돌아갈게. 나중에 보자.”

―뭐?? 야! 너, 지금 어딘데! 야! 하태진!

꽥꽥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통화를 종료한 태진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누가 붙잡으러 달려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초조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다시 운전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라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내버려 둔 채 가장 가까운 정류장으로 뛰듯이 걸었다. 이런 기분에 운전했다간 대형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최악의 선택이었다. 정류장에 이르자마자 태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정류장은 예전보다 세련되어졌지만 구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 앞과 이어진 4차선의 도로와 횡단보도. 바로 그 앞에서 지훈이 죽었다.

“……!”

태진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울렁거리다 못해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때 영어 성적을 올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내기를 걸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여행 따위 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기요, 괜찮으세요?”

희미한 의식 저편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태진은 자신이 주저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하게 어지럽다 싶더니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교복을 입은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까만 눈동자, 조금은 부스스 해 보이는 검은 머리칼은 누군가와 꼭 닮아 있었다. 이젠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바로 그 녀석과.

이제 환상까지 보는 건가. 진짜 가지가지 한다, 하태진.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태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더 심각해 보였는지 소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소년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덮었다. 따스한 촉감이 기분 좋았다. 소년처럼 지훈도 늘 체온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아마 그마저도 그의 환상이 만들어낸 착각이겠지만.

“…난 괜찮아, 강지훈.”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당연히 의아해할 거라 생각한 소년이 조금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뭐?”

“아, 명찰을 보신 거구나. 아무튼 식은땀이 엄청난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일단은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면 구급차를 불러드릴까요?”

종알종알 떠드는 목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와닿기 시작했다. 들을수록 똑같은 목소리였다. 소년의 상체를 바라본 태진은 흡 하고 짧게 숨을 삼켰다. 강지훈. 노란색 자수로 새겨진 이름이 똑똑히 보였다.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휴대폰이 없어서요. 도와줄 사람을 부를…….”

소년이 일어나려는 순간, 태진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돌아본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서렸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년은 여전히 바둑알처럼 까만 눈동자를 지닌 강지훈이었다. 환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가?

“……정말로 강지훈?”

“네?”

“너 정말 강지훈이야?”

“아, 네. 맞는데요.”

낯선 일이 벌어지면 순해빠진 녀석은 화를 내는 대신 난처하게 웃었다. 그것마저 똑같았다.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그는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짚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때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순간 태진은 다시 얼어붙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훈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영어 단어장이었으니까.

내가 그때 영어 성적을 올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내기를 걸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여행 따위 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태진은 멍하니 물었다.

“……미안한데, 오늘이 날짜가 며칠이야?”

“네? 오늘요?”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날짜를 들은 태진은 그대로 숨을 삼켰다. 8년 전 4월 20일이었다.

* * *

과거로 돌아왔다.

태진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지훈은 학교에 지각한다며 날듯이 사라졌다. 그대로 홀리듯이 어기적어기적 따라가다가 교문 앞에 서 있던 낯익은 선생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고 쫓겨날 뻔했다. 그 선생이 몇 년 전에 다른 학교로 전근 갔다는 사실은 학교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에야 깨달았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예전의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실감하지 못한 건 휴대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분명 미래의 물건이어야 하는 최신형 스마트폰. 그것이 여전히 멀쩡히 구동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규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씩씩거리며 받기까지 했다.

―왜 이 새꺄! 토낀다더니 왜 전화질이야!

“……야, 김규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치? 나도 그게 궁금해.”

―뭐? 그게 뭔 소리야, 대체! 너 미쳤냐?

“그러게. 나도 내가 미친 것 같다.”

―야, 하태진? 하태진!

다급하게 부르는 음성을 무시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대로 설렁설렁 주차장으로 가봤더니 그곳에도 자신이 세워둔 차가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것은 훨씬 협소해진 주차장 환경과 낯선 복장을 한 안내원뿐이다.

“진짜 미친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태진은 주머니 안에서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건 지훈을 다시 만났다. 이런 이상한 세계라도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머물러 줄 것이다.

만약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도 상관없었다. 가짜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살아 있는 지훈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세상이 환상이라면 자신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환상일 게 틀림없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안녕.”

해가 저물기 시작한 길목에서 태진은 지훈을 다시 만났다. 그가 하교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결과였다. 낯선 남자의 인사에 어리둥절해하던 지훈이 곧 그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늘 아침에 정류장에서 봤던 형 맞죠?”

“맞아, 기억하는구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것과는 다르게 손안엔 식은땀이 맺혔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잡아볼 수도 없었다. 이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게 될까 봐.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서,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강지훈? 또 너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 빈 껍데기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번에도 그 끔찍한 일을 견딜 수 있을까?

잠시간 수많은 생각의 파도처럼 태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러나 그의 불안한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지훈은 해맑게 웃었다.

“여기서 또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 그땐 고마웠어.”

“아니에요. 괜찮으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녁은 먹었어?”

“네? 아뇨, 아직…….”

“그래?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아침 일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할 겸, 내가 살게. 아, 혹시 부모님이 저녁 차려두고 기다리시려나?”

담배를 사면서 현금 사용도 문제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태진은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하고 질문했다. 지훈은 한 번도 자신의 가정환경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태진은 그의 부모가 막내 아들을 학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용돈을 주기는커녕 알바비까지 갈취하는 모양인데 따뜻한 저녁 밥상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지훈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쪽이 자신의 사정까지는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껄끄러운 게 분명했다.

“으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잘됐네. 가자, 마침 나도 혼자 먹기 따분한 참이었거든.”

“아뇨, 저 진짜 괜찮은…….”

“저긴 어때? 얼마 전에 가봤는데 저기 분식이 꽤 맛있더라고.”

태진이 가리킨 곳을 본 지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 역시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무지개 분식점. 지훈이 꿈에서조차 찾을 정도로 좋아하는 분식점이다. 오전에 봤을 때만 해도 그의 숨을 막히게 했던 그 장소를 이렇게 이용하게 되다니 기분이 미묘했다.

“떡볶이랑 김말이랑 주먹 만두, 그리고 꼬마 김밥.”

메뉴를 하나씩 읊을 때마다 지훈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태진은 지훈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알았다. 그가 어떤 노래를 즐겨 듣는지, 좋아하는 가게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또 무슨 메뉴를 가장 좋아하는지.

힐끔 보니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 역시 낯선 사람이랑 밥 먹는 건 거북한 건가? 이럴 거라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결국 태진은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쫄면도 사줄게.”

“……잘 먹겠습니다.”

드디어 원하던 반응이 떨어졌다. 태진은 빙긋 웃었다.

“그래.”

* * *

그날 이후 태진은 종종 등교 시간이나 하교 시간에 맞춰 우연인 척 지훈과 만났다. 초면엔 낯을 가리되 한번 친해지면 쉽게 마음 문을 여는 지훈은 금세 태진을 친근하게 대하게 되었다. 더불어 사람을 잘 믿는 성격답게, 그와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치는 걸 의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하릴없이 동네를 전전하는 한가한 백수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자.”

“매번 감사합니다.”

지훈은 그가 건네는 햄버거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몇천 원짜리 싸구려 햄버거지만 수제 햄버거보다 지훈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비싼 건 사주려고 해봤자 부담스러워할 게 뻔해서 지훈이 좋아하는 것 위주로만 공략하고 있었다.

“진짜 신기해요. 형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아는 것 같아요. 취향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나?”

“좋은 거 아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잖아.”

“항상 형이 사주니까 문제죠. 저도 사드리고 싶은데….”

“이게 뭐 얼마나 한다고. 그리고 얌마. 내 나이가 몇인데. 고딩한테 얻어먹어서야 체면이 서겠냐?”

“그래도 담엔 제가 사드릴게요.”

“…그래. 그럼 나중에.”

스스로 내뱉은 말에 조금 감동스러웠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관계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잃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태진은 울고 싶은 기분을 감추기 위해 햄버거를 입에 억지로 깨물어 삼켰다. 그러자 옆에서 빤히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훈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형, 혹시 태진이 몰라요?”

“…어?”

순간 당황한 나머지 태진은 바보같이 반응했다. 다행히 지훈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전부터 생각했는데 형이랑 되게 닮았거든요. 태진이한테 친형이 있으면 딱 형처럼 생겼을 것 같아요. 음, 근데 그 녀석은 외동이라서…… 혹시 사촌이라든가, 그런 거 아니죠?”

“……아냐, 그런 거.”

“흠, 역시 그렇구나. 전혀 다른 타인이 이렇게 닮을 수도 있다니 처음 알았어요. 되게 신기하네요.”

“……그래, 그거 진짜 신기하네. 내 친구도 너랑 닮았는데.”

“어? 정말요? 저랑 닮은 친구가 있어요?”

“어, 나랑 제일 친한 친구.”

“와, 그것도 똑같네? 진짜 신기하다. 하하, 근데 전 좀 흔한 얼굴이긴 해요. 한국인 표준 얼굴이잖아요. 지나가는 사람 열에 일곱은 저처럼 생겼을걸요.”

“아냐, 안 흔해.”

“우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태진이랑 형뿐이에요. 이제 보니 성격도 닮은 것 같아요.”

태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훈을 응시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바로 그 태진이라고 말하면, 넌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이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넌 이 자리에서 또 사라져 버리게 될까?

태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보다 지훈의 푸념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보다 정말 큰일이에요. 내일이 모의고사거든요.”

“……모의고사?”

“태진이랑 영어시험 성적을 갖고 내기했어요.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아무리 공부를 해도 무슨 소린지를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죠.”

그 순간 태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훈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형?”

행복한 꿈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이 4월이고, 그가 죽었던 날짜에서 불과 얼마 전이라는 것을. 애초에 자신이 과거로 가고 싶어 했던 단 하나의 이유를.

극심한 충격 때문에 태진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무섭게 굳어져 있는지 잘 몰랐다. 지훈이 겁먹은 걸 알았지만 쉽게 평소대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런 내기 하지 마.”

“아, 역시 좀 그렇죠? 사실 저도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태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그 녀석, 제 성적 때문에 걱정 많이 하거든요.”

“실망 안 해. 그러니까 그냥 공부하지 마.”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정말이야. 해외여행 같은 거…… 그냥 영어 필요한 건 다 태진이 시켜. 괜찮아. 그래도 돼. 네가 무리해서 공부할 필요 없어.”

“에이, 꼭 그것 때문에 하려는 게 아니라요…… 어, 근데 제가 해외여행 내기라는 걸 말했던가요?”

“…….”

태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지훈은 바로 몸을 털고 일어났다.

“으음,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전 이만 가볼게요, 형.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봐요.”

“지훈아.”

얼른 인사를 하고 사라지려는 걸 태진이 불렀다. 지훈은 걸음을 내딛다 말고 엉거주춤 돌아보았다.

“네?”

“공부는 그냥 학교에서만 해. 괜히 단어장 같은 거…… 들고 다니면서 외우지 말고.”

“……?”

지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찍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태진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사고가 났던 장소는 이미 알고 있다. 시간과 위치까지 전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8년 전 4월 26일, 언제나 다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왔던 날이다. 바로 그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 지금이라면 그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걸 위해 이 세상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이해됐다.

“강지훈, 널 구할 거야.”

태진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기만족이라도 상관없었다. 이 손으로 지훈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운명을 바꾼 죄로 벌을 받더라도 기쁠 것 같았다.

* * *

이른 새벽 버스 정류장은 첫차를 기다리는 학생들과 직장인들로 길게 줄지어 있었다. 여느 때와 변함없는 풍경이었지만 한 가지 이색적인 광경도 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쭉 뻗은 키, 보기 좋게 단련된 체구를 지닌 청년은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 한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타고 가야 할 버스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이미 몇 번이나 같은 번호의 버스들이 연달아 도착했지만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에는 담배 대신으로 삼은 듯한 막대 사탕을 문 채였다. 그마저도 거의 다 먹었는지 막대 부분 끝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조금 못나게도 보일 행동이 그는 그린 듯이 멋있어서 근처의 여자들이 모두 얼굴을 붉혔다. 진짜 잘생겼다. 혹시 모델인가? 뭐야, 연예인이라고? 추측이 확신으로 순식간에 번져가면서 작은 소란도 일었지만 그마저도 청년에겐 관심 밖의 일인 듯했다.

“저기요. 버스 안 타세요?”

그때 용감한 학생들이 청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감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긴장했던 소녀들은 빙긋 미소 짓는 얼굴에 심장을 와락 부여잡았다.

“응, 안 타. 너흰 학교 가는 길이니?”

“네, 네! 오, 오빠는 어디 가는 길이세요?”

“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호, 혹시 여자친구?”

“아니, 남자친구.”

“에이, 그게 뭐예요~”

소녀들은 별 농담을 다 한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그게 그렇게 재밌는 말인가?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나이라더니,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태진은 피식 웃었다.

“한 가지만 확인해도 될까? 오늘 4월 26일 맞지?”

“네, 맞아요. 근데 진짜 친구 기다리는 거예요? 친구는 언제 오는데요?”

“음, 아마 이제 곧 올 거야.”

태진은 손목시계의 시간을 느긋하게 확인하며 대답했다. 현재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7시 42분. 지훈의 사망추정시간이 이쯤이었으니 정말 곧 도착할 시각이었다.

짐작하기 무섭게 인파 속에서 낯익은 모습이 잡혔다.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차림으로 허둥지둥 걸어오고 있는 강지훈이었다. 졸음이 가득한 얼굴이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손에 들린 단어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저러니까 사고가 나지. 단어장 보면서 걷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태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툭하면 비꼬아대는 부모에 익숙해진 지훈은 때때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 그가 한 충고 역시 그렇게라도 공부하라는 뜻으로 인식했을 게 분명했다. 쓰게 웃던 태진은 다음 순간 미친 생각에 얼굴을 다시 굳혔다.

‘잠깐, 그럼 설마 지금의 내가 녀석의 사고에 일조했다는 건가?’

불현듯 불길한 상상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강지훈은 단어장을 보면서 걸었을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태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고만 막으면 된다. 그를 구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사이 지훈은 횡단보도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신호가 바뀌려는 것을 보고 태진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