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혼탁한 어둠을 품었으니, 몰락으로 이끄는 저주의 씨앗이라.
노엘이 잉태되었을 때, 예언가이자 제사장인 원로가 예지했다는 말이었다. 노엘을 품은 어미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다들 찜찜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인가 싶어 처음엔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나쁜 운명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하면 바꿀 수 있었다. 다들 노엘도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노엘의 남은 가족들도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아이를 그저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그게 거북함과 증오심으로 뒤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부친의 사망이었다. 마물이 나오는 곳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해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다. 평생 건강하게 잘 지냈던 조부모들은 처음 보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노엘을 돌봐주기 시작한 친척마다 사고를 당하거나 죽었다. 이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노엘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잘해주려는 사람일수록 더 처참하게 죽었다. 결국 나중에 가선 아무도 노엘을 가까이하지 않게 되었다.
머리로는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지의 힘 앞에 느껴지는 절망적인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사랑스럽다면 미안하기라도 할 텐데, 찜찜할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지닌 것도 원인이었다.
“너도 우리가 원망스럽겠지. 하지만…….”
“아뇨, 원망 안 하는데요. 그냥 차라리 날 죽이는 게 더 나을 텐데 싶긴 하지만.”
“……뭐?”
“역시 엘프라 그런가, 아직 어린애를 죽이는 건 좀 그런가 봐요? 그런 예언까지 받고 이미 실태도 확인도 했으면서. 기껏해야 욕만 하지 굶기지도 않고 돌팔매질도 안 하잖아. 하다못해 멀리 쫓아내지도 못해. 참 너무들 고상하시다니까.”
“너, 너란 아이는 도대체…….”
“뭐, 나도 선뜻 죽어줄 생각이야 없지만요. 어쨌든 딱히 피해를 주고 싶어서 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 서로 조심합시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거리를 두고 대하자고요. 애꿎은 귀한 생명 일찌감치 반납하지 말고요.”
바라보는 시선에 적대감과 혐오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 중 누구도 노엘과 눈을 똑바로 맞추지는 못했다. 그들은 곧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게 된 후에야 노엘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 옆에 놓인 빵 바구니를 응시했다. 오전에 우물쭈물 다가왔던 셀라가 후다닥 건네주고 간 거였다.
“받지 말 걸 그랬네.”
아니, 고맙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나.
앞으론 더 조심해야겠다. 그는 조금 후회했다.
“……스! 카노스!”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노엘은 문득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를 이루고 있는 새파란 물의 색을 확인하고서야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엘?”
아직 공기가 차분한 걸 보니 새벽이었다. 왜 벌써 깨웠지? 의아해서 눈을 깜빡이니 자신을 가만히 살피던 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응? 뭐가?”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어? 그래?”
그제야 노엘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유난히 무거운 느낌이 든다 싶더니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오, 왜지? 딱히 악몽 같은 건 안 꿨는데.”
“몸이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게 숲 엘프가 자꾸 고기 같은 걸 먹으니까 그렇죠.”
“참나. 네가 뭘 모르는데, 숲 엘프의 채식은 그냥 종교 생활 같은 거거든? 먹어도 되는데 자기들이 몸 정결하게 하려고 안 먹는 거라고.”
“어휴, 어쨌든요. 치유술 써줄까요?”
“아냐, 아냐. 뭘 이런 걸 가지고. 찝찝하니까 그냥 가볍게 씻기만 할래.”
“하지만…….”
“진짜 괜찮아.”
웃으며 손을 저으니 치유술에 미련을 두던 엘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쾌한 감각이 몸을 감싸고 나자 시야도 한결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정령 친구가 참 좋네. 이래서 다들 정령과 계약하려고 하는 건가 봐.”
“그러고 보니 엘프는 어릴 때 정령 계약 많이들 하던데. 카노스는 왜 지금껏 안 했어요? 정령왕과 계약해서 한큐에 해결하려고?”
“음, 그건 아닌데. 사실 나도 그냥 해 본 거라. 진짜 네가 소환될 줄은 몰랐거든.”
“헐, 진짜요?”
노엘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저주받은 아이는 정령 소환도 못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가 빈정거리는 말에, 그런가? 하고 호기심이 든 것뿐이었다. 진짜 정령이 소환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할 것 같아 일부러 실패를 노리고 정령왕을 택했다. 소환 의식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덜컥 엘이 소환되는 바람에 오히려 그가 더 놀랐다. 덕분에 떠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엘프 마을을 생각보다 더 빨리 나오게 됐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긴 했다.
“나야 좋은 거지만, 넌 이렇게 운이 없어서 어떡하냐.”
“……? 뭐가 운이 없는데요?”
“글쎄? 아무튼 뭐 먹을 거 없어? 자다 깼더니 배고파.”
“지금 새벽인데요. 아직 열린 식당도 없을 텐데.”
“하지만 배고픈데.”
“어휴, 잠깐 기다려 봐요. 가벼운 취사는 할 수 있는 방으로 잡길 잘했네요. 뭐 좀 만들어 볼게요.”
“와, 엘이 직접 만들어주는 거야? 너무 좋긴 한데 먹을 수는 있는 거지?”
“저 이래 봬도 시벨한테 칭찬도 받은 실력이거든요?”
툴툴거리며 요리할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하는 엘을 보면서, 노엘은 문득 하늘에 있는(?) 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 나눴던 대화의 끝에서, 그가 자신을 향해 보냈던 미묘한 눈빛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아마도 후회하지 않겠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냉정하고 무신경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을 알아봐 주는 자였다. 엘퀴네스를 아들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리고 자신을 끝내 밀어내지 않은 것도.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것 보라며 얼굴을 찌푸리는 친우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외롭다고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스스로 더 고독한 길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이 바로 그런 어리석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부터가 자신은 글러 먹었다. 지독한 공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는 뭐가 됐든 아무래도 좋았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어서라도 살아 숨 쉬는 감각을 느껴보고 싶었다.
엘뤼엔은 아마 평생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강하다. 한 번도 자신이 절대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타인의 본질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맡은 바 일은 하되, 책임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본 엘뤼엔은 자유롭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가 부러웠다. 그렇다. 그 감정이 맞을 것이다. 그는 엘뤼엔이 부러웠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와 같은 방식을 취할 수는 없었지만.
“카노스, 매운 거 먹을 수 있어요?”
“이제 노엘이라니까.”
“아무튼요. 이거 좀 매콤한 요리인데 괜찮겠어요?”
“음, 아마 괜찮을걸?”
“진짜죠? 나중에 뭐라 하기 없기에요?”
고춧가루를 집어 드는 엘은 왠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뻔히 보였다. 저런, 진짜 괜찮을 텐데 아쉽겠네. 전직 마신을 골탕 먹이려고 들다니 아직 멀었다. 피식 웃은 노엘은 턱을 괴고 앉아 엘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운은 나빴지만 태생이 축복 그 자체인 정령왕이니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조금만 평화를 누릴 생각이었다. 아주 조금만. 이 몸에 속한 저주가 그를 갉아먹으려 들기 전에. 노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라 그런가. 신기할 정도로 아늑한 기분이었다. 그날 엘뤼엔이 끝내 묻지 못하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아, 엘뤼엔.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4.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삶은 햇빛처럼 밝아질 거야.
난 다른 모든 발걸음과는 다르게 들리는 소리를 알게 될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는 날 땅속에 숨게 하겠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처럼 날 굴에서 불러낼 거야.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멋질 거야.
금빛 밀이 너의 금발을 생각나게 해줄 거야.
난 밀밭에 부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되겠지.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서로가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어린 왕자 中>
“으음…….”
태진은 덥수룩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습관적으로 진통제부터 찾으려던 그는 문득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셔츠와 청바지, 손목에 찬 시계까지. 모두 어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무리 평소 주량을 넘겼다지만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쓰러지다니. 체력이 어지간히도 떨어졌다 싶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친김에 확인한 손목시계는 정확히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이 평일이었다면 꼼짝없이 지각을 면하지 못할 시각이다. 태진은 낮게 혀를 찬 다음 몸에 걸친 것들을 차례로 벗어 던졌다. 갑갑하게 죄이던 감각이 사라지자 한결 숨통이 트였다.
디링, 그대로 욕실에 직행하려는데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에서 소리가 울렸다. 태진은 닫힌 케이스 안에서 하얀 빛을 요사하게 뿜어내고 있는 액정을 들어 올렸다. 평면의 화면 속엔 주로 사용하는 메신저 어플의 표시가 떠 있었다. 발신자 이름은 김규현, 중학교 시절부터 질기게 이어온 십년지기 친구이자 어젯밤 그의 술동무였다.
[어젠 무사히 들어갔냐?]
귀찮은데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태진은 표정 없는 얼굴로 휴대폰을 심각하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망설이는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화면이 까맣게 꺼지기 무섭게 다시 번쩍 빛이 터졌다.
[봤으면서 왜 대답 안 해. 잘 들어갔냐고.]
집요한 새끼.
태진은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화면을 눌렀다.
[ㅇ]
[아씨, 좀 성의 있게 대답해라. 너 오늘 뭐 해? 일 있냐? 아니다. 그냥 일 있어도 시간 내라.]
[왜.]
[너 진수 알지? 고등학교 동창 박진수 있잖아. 걔 다음 달에 결혼한댄다. 완전 초스피드 대박사건! 우리 중 첫타를 설마 걔가 끊을 줄 누가 알았겠냐? 아무튼 부인 될 사람 소개해 준다고 애들 다 불러 모으래. 특히 하태진, 너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더라.]
[안 가.]
[야, 그러지 말고. 너 어제 만난 것도 장장 몇 달 만이었는지 알아? 새끼가 왜 갈수록 점점 더 무심해지냐?]
[야, 하태진 진짜 안 가?]
[야아아아~~~~!!]
항의하듯 연달아 울리는 알림음을 무시하고 태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 술기운이 남은 탓인지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한 다리가 가까이에 있던 선반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차 할 사이도 없이 위에 있던 물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아,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태진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엉망으로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천천히 집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떨어져 있는 것들 중에서 작은 탁상 달력을 발견했다. 스마트폰이라는 편리한 기계가 생긴 뒤로 잘 들여다보지 않게 된 것들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달이 지날 때마다 장을 넘기는 건 잊지 않는 편이었다. 무심코 훑게 된 달력 안에서 자연스레 오늘 날짜를 확인한 태진은 왜 자신이 평소보다 과음했는지를 상기했다.
4월 26일.
그 녀석이 죽은 날이었다.
* * *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태진에게는 8년 전 4월 26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날 그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너 이 영어점수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지 않냐?”
빗금이 소나기처럼 내리고 있는 시험지를 들이밀자 지훈은 머쓱하게 웃었다.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평균을 맞추던 그는 영어만은 유독 취약했다.
“대체 관사를 묻는 문제에 왜 명사를 집어넣냐? 해석은 하면서 쓴 거야?”
“……그냥 찍었다.”
“그럴 줄 알았다. 너 이런 실력으로 나중에 해외여행 갈 수 있겠냐? 졸업하면 같이 유럽 여행 가자며. 어? 강지훈 씨. 말씀 좀 해보세요.”
“내가 알아봤는데 의외로 유럽권에선 영어 잘 안 쓴다더라. 그러니까 배워봤자 소용없지 않을까?”
“그래도 관광지에선 다 써. 세계 공용어를 무시하냐?”
“아하하, 괜찮아. 넌 영어 잘하잖아.”
“됐거든? 이게 어딜 나 같은 고급인력을 날로 부려먹으려고.”
한껏 노려보자 지훈은 맹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태진은 순간 마음이 약해지려는 자신을 얼른 추슬렀다. 사내놈의 미소 따위에 무너진다면 천하의 하태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내기하자.”
“무슨 내기?”
“이번 영어 시험에서 평균 넘으면 유럽여행 경비 내가 다 쏜다.”
“헐? 님 진심임?”
“이 형님 그런 걸로 농담은 안 한다. 대신 호텔 같은 호사스러운 숙박은 꿈도 꾸지 마라. 가끔은 노숙도 해야 할 거다.”
웃으며 대답하자 지훈의 바둑알처럼 까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솔깃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판돈이 너무 큰 탓인지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야, 됐어. 그게 어디 한두 푼도 아니고.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네가 이 형님의 위력을 아직 모르는구나. 너 하나 책임질 돈은 충분히 벌 수 있단다.”
“됐다니까. 괜히 부담 주기 싫어.”
“전혀 부담 안 되는데? 사실 딱히 내가 질 것 같진 않거든. 내가 언제 손해 보는 내기 하는 거 봤냐? 내가 보기엔 네 영어 성적이 오르는 건 하루아침에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는 것만큼이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본다.”
“허, 잠깐만요, 하태진 님. 그건 왠지 절 무시하는 발언으로 들립니다만?”
“세상에, 그걸 아직도 모르셨어요? 이제 이해하셨다니 유감입니다.”
“……젠장, 그러다 진짜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땐 닥치는 대로 알바 해서 돈 모으는 거지.”
싱글싱글 웃으며 답한 말에 지훈의 눈동자에 오기가 맺히는 것이 보인다. 태진이 원하던 반응이었다.
“좋아, 까짓 거 한다. 내기에 이겨서 하태진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어주지.”
“오올, 패기는 좋은데. 진짜 가능하시겠어요?”
“이거 왜 이러셔.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거든?”
사나운 시선을 교류하길 잠시간, 두 사람은 이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죽음이라는 건 TV나 신문에서만 보던 남의 이야기였다. 그게 그리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그는 가장 지독한 방법으로 깨달았다. 개인의 비극이 아무리 커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단어장 보느라 차가 오는 걸 못 본 모양이야.”
망연하게 서 있던 영안실 앞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에게 유품이라는 걸 건네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태진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지훈이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는 그것은,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영어 단어장이었다.
그날부터 태진은 매일 악몽을 꿨다. 자신은 늘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있었고, 지훈만이 홀로 걸어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소리치고 불러도 지훈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쪽의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영어 성적을 올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내기를 걸지 않았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여행 따위 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질없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일상도 그를 힘들게 했다. 자신의 세계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는데, 주변의 풍경은 똑같았다. 그와 함께 슬퍼하고 울던 친구들도 어느덧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었다. 오히려 그들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방황하는 태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편하게 응시했다. 그 평온한 삶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오직 하태진, 그 하나뿐이었다.
“친구 하나 죽는다고 세상 끝나는 거 아니다.”
그의 상태를 늘 걱정하던 담임 선생은 태진을 불러다 놓고 그렇게 말했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네가 이러면 죽은 지훈이 오히려 힘들어할 거라고, 하늘에서 잘 살고 있는 친구는 그만 생각하고 이제 다시 행복해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적어도 지훈이 죽었을 때, 그날부터 태진의 평범한 일상은 끝났다. 그는 예전처럼 마음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봐도, 어떤 걸 경험해도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색채로 가득하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흑백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빈 껍데기가 된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이런 날 보면 하늘에서 힘들어할 거라고? 오히려 잘됐다. 나만 괴로우면 그게 더 억울하잖아.
미안해, 강지훈. 난 이렇게 이기적이야. 네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난 네가 날 잊는 것보다는 기억하면서 아파했으면 좋겠어. 바로 내가 지금 그렇거든.
그거 알아? 지금도 길을 걷다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그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너를 찾아. 혹시 그들 중에 네가 있을까 봐. 너와 함께 찾던 골목길의 분식점, 자주 걷던 거리, 주로 나누던 화제들. 우연히 길에서 너와 즐겨듣던 음악 소리라도 들리면 미친 듯이 눈물이 쏟아져서 그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해. 댄스 곡을 듣고 우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을걸?
비가 내리는 날에도 널 생각해. 네가 유난히 좋아하는 날씨였잖아. 일기 예보에 비 표시가 뜨면 네가 좋아하겠다고 실없이 생각하다가 미친놈이라고 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넌 이런 거 하나도 모르겠지. 떠난 세상은 뒤로하고 나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겠지. 난 이렇게 지독하게 네게 길들여져 버렸는데.
* * *
봄이 사라진 한국 날씨는 4월에도 여전히 겨울처럼 쌀쌀했다. 뉴스에서는 벚꽃의 개화시기를 예년보다 빠를 거라고 예측했지만, 만개할 거라고 여겼던 날짜가 찾아들었음에도 아직 개화조차 하지 못한 꽃이 태반이었다. 기상청의 예측에 맞춰 꽃놀이 이벤트를 준비하던 회사들마다 줄줄이 죽을 쑤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심지어 오늘은 유난히 춥다 싶더니 아침부터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 순식간에 쌓인 눈덩이가 그나마 푸릇하게 돋아나던 거리의 가로수를 하얗게 묻어버렸다.
미친 날씨 같으니. 태진은 코트의 앞섶을 여미고 머플러를 둘러맸다. 외출하기 싫은 날이었지만 약속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주차를 마친 다음 차에서 내리자 싸늘한 한기가 뺨을 찔렀다. 그가 부득이하게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긴 건 전날에 걸려온 규현의 전화 때문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전화를 받자마자 규현은 다짜고짜 사과를 건넸다. 일전에 모임에 나오라는 걸 일방적으로 무시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과를 받으니 태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날이 지훈이 놈 기일이라는 걸 깜빡했지 뭐냐? 진수 놈도 그 얘기 듣고 아차 하더라. 그래서 날을 다시 잡기로 했어.
“아…….”
―다음 주 토요일 괜찮지? 미안해, 태진아. 날 봐서 한 번만 얼굴 좀 비춰주라. 응?
“…….”
사실은 날짜가 바뀌든 말든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아직 지훈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적어도 그의 친구들은 죽은 친구의 기일 날 축하 행사를 할 정도로 양심을 상실한 놈들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모임 장소를 선택하는 센스만은 없었다. 주위에 펼쳐진 낯익은 풍경을 돌아본 태진이 쓴 한숨을 삼켰다.
젠장, 왜 하필이면 여기야.
모임 장소는 태진이 졸업한 고등학교와 가까운 위치였다.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동창이다 보니 일부러 옛 추억의 장소로 불러들인 것 같았다. 물론 태진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악몽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의식적으로 피하던 장소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고 나니 숨이 턱 막혔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던 태진은 어느새 갑이 텅 빈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시기엔 유독 흡연과 음주량이 늘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이 피웠다. 곱게 죽긴 틀렸군, 중얼거리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담배를 안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