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내 기운을 정면으로 받고도 표정 하나 안 변하는 애는 처음이야. 자신감 넘칠 만하네. 조금 자극해 보려다가 내가 된통 당했어.”
“자극이라고?”
“아, 조금 전 유비아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니까 용서해줘. 그거 전부 내가 시킨 거야. 쟤 원래 그런 식으로 말 안 해.”
시선을 받은 유비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천사를 시켜 일부러 무례한 말들을 하게 했다는 사실에 엘뤼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상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말들 또한 그랬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빨리 왔네.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내심이 짧은가? 아니면 그만큼 성실한 건가. 앞으로 뭘 더 해 보면 좋을지 궁리 중이었는데 조금 맥 빠졌어. 하지만 이런 반전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아. 난 허를 찌르는 애들이 좋더라.”
“……내가 찾아오길 기다렸다는 말인가?”
“그 귀한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무슨 소리지?”
“일대에 네 소문이 자자한데 몰랐어? 역대 최강의 엘퀴네스. 최고신과 견줄 만큼 강대한 신력을 타고난 형벌의 신. 게다가 신이 된 이후로는 궁처에 틀어박혀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만남에 응하지도 않는 신비주의라지? 그러면 밖으로 끌어내 보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심리잖아?”
엘뤼엔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자신에 관해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는 일부러 은거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신이 된 이후로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들에 쉴 틈 없이 바빴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중한 업무의 원인 대다수는 눈앞의 마신에게 있었다.
“근데 정말 마속성인 거 맞아?”
“무슨 뜻이지?”
“이런 식으로 햇빛을 담아 만든 듯한 머리칼, 이쪽 계열에서는 흔치 않거든.”
엘뤼엔은 제 머리카락을 그러쥐는 손길을 바로 쳐냈다. 너무하다는 표정을 짓는 마신을 보니 일정을 쪼개어 여기까지 온 것에 회의가 일었다.
“난 매우 바쁘다. 이런 시시껄렁한 장난질에 어울려줄 시간 따위 없어. 네가 만든 그 미친놈들 관리 똑바로 해라.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최소한의 범죄인 인도 조치에도 협조를 못 하겠다면 나도 더는 그냥 지켜볼 생각 없다.”
“지켜보지 않으면? 진짜 마계로 직접 쳐들어가려고?”
“못 할 거 없지. 이참에 마계를 대차원에서 지워버리는 방법을 쓰는 것도.”
“우와, 무섭네. 점점 더 마음에 들려고 해.”
“닥쳐.”
“정말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엘뤼엔. 내가 아무래도 너한테 한눈에 반한 것 같거든.”
“그건 네 사정이고. 난 너랑 친하게 지낼 생각 없다. 확실히 말해두지.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예우를 갖춰라. 네 일부터 제대로 해.”
싸늘히 대꾸한 뒤 엘뤼엔은 그의 멱살을 틀어잡고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거친 행동에 주위에서 지켜보던 천사들은 물론 카노스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뤼엔은 코앞에 둔 검은 눈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그때까진 내 이름도 부르지 마라. 태생부터 존귀한 놈에게 불리자니 부담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까.”
멱살을 놓은 후 휙 떠밀었다. 그리곤 벙쪄 있는 마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발길을 돌렸다.
“유리엘, 이만 돌아간다.”
“예, 엘뤼엔 님.”
엘뤼엔은 처음 들이닥쳤던 태도 그대로 당당하게 마신의 궁처를 떠났다. 뒤쪽에서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는 원래 자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신의 궁처를 찾아온 것만은 드물게 후회했다. 대면 항의에 따른 일말의 성취감도 없이, 그저 오물을 밟았다는 불쾌감뿐이었다.
하지만 마신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신의 궁처에서 범죄를 저지른 마족의 신병 인도에 협조한다는 공문이 도착했다. 앞으로 형벌의 신이 요청하는 마족 인도 요청은 무조건 수락하며, 마계에서 직접 체포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허가서까지 실린 공문이었다.
이제 엘뤼엔이라고 불러도 되지?
“미친놈인가.”
하단에 적힌 장난스러운 글을 보며 엘뤼엔은 서류를 와락 구겼다. 그와 카노스의 본격적인 악연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 * *
최근 엘뤼엔에겐 고민이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 엘에 관해서였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른 데다가 일정이 바쁜 탓에 그가 엘과 만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통신하는 시간도 겨우 낼 정도였다. 그걸 잘 아는 엘도 연락하면 어떤 상황에서건 늘 반겼다. 그런데 요즘은 당황하는 반응이 더 앞섰다.
<미안해, 아버지!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말이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나중에 봐, 아버지!>
“엘? 잠깐만, 아들?”
오늘도 역시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를 돌아보는 엘뤼엔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원인을 헤아리던 그의 머릿속이 이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사춘기인가?”
“그렇겠냐?”
맞은 편에 있던 크로아첸이 황당해하며 쏘아붙였다.
“네가 생각해도 멍청한 말인 거 알지? 농담이어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치유의 신에게 가봐. 너 지금 아픈 거야.”
“닥쳐.”
“조언을 해줘도 난리야. 어쨌든 너 이럴 때마다 좀 무섭기까지 하거든? 천하의 형벌의 신이 자기 아들한텐 이런 팔불출이라니 누가 믿어.”
“그게 뭐가 문제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한 크로아첸이 씩 웃었다.
“너 근데 그건 기억나? 4천 년 전에는 걔한테…….”
“닥치라고 했다.”
트로웰이 지금도 종종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비해 엘뤼엔은 그 당시 일이 거의 기억에 없었다. 축제를 구경하다 머리끈을 사줬던 광경이 스치듯 떠오르긴 했지만 그뿐. 그렇기에 더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 시절이 잠재의식에 남아 엘을 아들로 삼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처음 엘을 봤을 때 미묘한 끌림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부분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확실히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언급했던 것처럼, 엘을 아들로 삼은 후에 아끼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선후 관계를 고려해봤을 때, 4천 년 전의 자신은 아마 그리 좋은 계약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어떤 식으로 대했을지도 훤히 읽혔다. 그렇다고 그걸 제삼자가 거론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넌 엘에게 뭔가 들은 말 없나?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없어, 아무것도. 물어보는 족족 피하기 바쁘던데? 걔 지금 뭐 숨기는 거 있다니까?”
쓸데없는 사족에 엘뤼엔의 미간이 구겨졌다. 몇 년 새 부쩍 성장한 아들은 이제 정령왕의 능력을 더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예전이었다면 문장을 통해 그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문장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때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걸 내버려 둘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감추려고 하니 오히려 더 수상했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생각의 방향이 안 좋은 쪽으로 튀었다.
“아직 엘은 아무것도 모르지? 말이라도 해두는 게 좋지 않아?”
이어진 크로아첸의 말에 엘뤼엔은 잠시 멈칫했다.
“무슨 말이지?”
“알면서 뭘 물어. 너도 지금 그거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냐?”
“주어를 분명히 해라.”
“마신 카노스 말이야.”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더 낮게 가라앉았다. 크로아첸은 어깨를 으쓱였다.
“명계에서 그의 혼을 추적한 기록은 나도 봤어. 아크아돈에서 태어났을 확률이 가장 높다던데. 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지 않겠어?”
“…….”
“그 녀석 성격에 모르는 척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안 그래도 마신을 잘 따랐잖아. 미리 주의를 줘야…….”
“그래서, 뭘 설명하라는 거지?”
“뭐냐니.”
“악신을 위해 소멸하는 신은 그를 대신해 모든 죄업을 짊어지고 저주받게 된다는 것? 망각의 자유도 없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출생으로 태어나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살다 죽는 것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는 것?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악운이 미치는 저주 덩어리나 다름없다는 것?”
이에 관해선 신계에서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얼마 전 악신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던 중 섀넌이 당시 해석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문자로 된 기록이 아닌 주신이 남긴 의지를 읽어내는 형식이라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었던 탓이었다.
악신의 소멸에 상급신 하나의 목숨이 필요한 건 맞았지만, 필요한 건 단지 생명만이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가 필요했다. 희생하는 신은 그의 죄업을 온전히 받아내는 제물의 역할이었다. 단순히 신적에서 지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악신에게 향하던 모든 저주와 업을 대신 받아내고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악신을 위해’ 소멸한다는 말 그대로였다. 모든 걸 다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같은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알았다. 왜 카노스가 운명의 시계를 부수면서까지 강제성을 막았는지. 마신을 잃은 후의 파장이 클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자처해서 그 길에 들어갔는지. 그는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엘뤼엔은 불쾌해지는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힘이 들어간 주먹에 뼈대가 하얗게 일었다.
“그걸 말해서 뭘 어쩔 거지? 사실을 밝히면 달라질 거라도 있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 넌 엘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그야…….”
굳이 상상해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크로아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 오지랖에 오히려 더 찾으려고 하겠지.”
“그걸 안다면 너나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마라. 아니, 애초에 엘한테 상관 마. 남의 아들에게 신경 꺼라.”
“내 친구이기도 하거든?”
“납치범이겠지.”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다시 업무 지옥에 끌려온 크로아첸이 살짝 혀를 찼다. 그를 노려보는 엘뤼엔의 시선은 흉흉했다. 쭉 성실하게 일하는 게 기특해서 잠시 풀어줬더니 그새 사고를 쳤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한 번만 더 내 아들을 멋대로 신계로 데려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웃기시네. 네가 뭘 어쩔 건데?”
“지금 처리하는 서류 양을 두 배로 늘려줄 순 있지.”
“…….”
지극히 현실적인 협박은 크로아첸을 바로 조용하게 만들었다. 코웃음을 친 엘뤼엔이 옆에 있던 천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 숙여 화답한 천사들이 들고 온 서류들을 우르르 그의 책상 앞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무섭게 쌓이는 양에 크로아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잠깐 기다려! 이 분량은 다 뭐야? 분명 다 끝냈잖아?”
“그건 오전 치 분량이고. 오후엔 오후의 서류가 있는 법이지.”
“그새 이렇게 쌓였다고?”
“이유는 네 마족들에게 물어봐라.”
“젠장! 어제도 죽을 만큼 일했잖아! 내가 서류랑 전쟁하려고 전쟁신인 줄 알아? 대체 언제까지 이러란 말이야!”
“죽을 때까지다.”
뭘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시선에 크로아첸은 절규했다. 이건 사기라는 둥, 이럴 줄 알았으면 마신 같은 건 절대 안 됐을 거라는 둥, 항상 하던 발악들이 오늘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다시 업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엘뤼엔은 그 모습을 잠시간 응시했다. 어깨를 덮는 새카만 머리카락, 밤을 담아낸 눈동자. 눈에 아프도록 익숙한 색이었지만, 그 색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아는 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그는 아직도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역시 그랬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에 본래 그 색을 지니고 있던 이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엘뤼엔은 문득 언젠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악신을 소멸시키려면 상급신이 희생해야 한다더군.”
악신이 아직은 마왕이었을 때, 그를 봉인한 후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카노스가 그의 궁처에서 정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멋대로 침범한 불청객이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다 보니 머무는 걸 그냥 내버려 뒀다. 그래도 자신의 침대에서 온종일 뒹굴거리고 있는 남자를 볼 때면 살심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정말? 상급신이 희생해야 해? 이야, 들어가는 재료 한번 비싸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엘뤼엔은 그가 연기하는 중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보내니 그의 눈이 사르르 휘어졌다.
“이미 알고 있었군.”
“내가 또 모르는 게 없는 신이잖아.”
“알아봤자 막지도 못한다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냐하하, 너무 완벽하면 재미없지.”
태평하게 팔을 뻗고 드러눕는 모습을 엘뤼엔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던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네 선택인가?”
“응? 무슨 말이야, 엘뤼엔?”
“모든 걸 놓아봤자 후련해지진 않을 거다. 너도 그걸 모르진 않겠지만.”
“……정말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빙긋 웃는 얼굴은 너무도 태연해서 동요의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점이 싫은 녀석이었다. 늘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뒤통수를 치고, 모든 걸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하고, 혼자서만 감당하는 빌어먹을 자식.
악신을 위해 죽는 자.
악신의 죄업을 받으리라.
마지막 인사는 엘로부터 전해 들었다. 점점이 흩어져 소멸해가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미소지었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단다.
그야 물론 고맙기는 했을 것이다. 그간 그를 대신해 처리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가 소멸한 이후의 파장을 수습하기 위해 처리한 업무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만 생각하면 이미 환생해 태어나 있을 놈을 붙들어 와서라도 다시 신계에 눌러 앉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생 같은 소리.’
그는 전부 버렸을 뿐이다. 자신을 둘러싼 인연과 쌓아온 모든 것을. 그런데도 마음 놓고 탓할 수가 없는 건 그로 인해 신계가 얻은 이득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오히려 잃기만 했을 뿐.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잃었다. 다시는 안주하지 못한 채 영원히 방황하는 길을 택했다.
<그게 네 선택인가?>
그날 마지막으로 건넸던 질문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엇을 묻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의아하게 바라보던 표정도. 사실은 그 외에도 한 가지 더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게 된 그때에도 엘뤼엔은 그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이미 질문을 들을 수 있는 상대는 더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게 네 선택인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냐.>
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해도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결말 또한 달라졌을 리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엘뤼엔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최악의 친우였다.
* * *
“너 때문이야!”
노엘은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소년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울면서 똑바로 노려보는 눈동자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소년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는 다른 아이들도 다 비슷한 표정이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셀라가 나무에서 떨어졌어!”
“저런, 어쩌다가? 다치진 않았어?”
“당연히 다쳤지! 셀라를 걱정하는 척하지 마! 다 너 때문이잖아!”
셀라가 나무에서 떨어진 그 시각에 노엘은 근방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노엘이 일부러 셀라를 나무에서 떠민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노엘도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이런 행동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습관이 돼버린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선 차라리 이편이 더 낫기도 했다.
“셀라는 너한테 잘해줬는데! 어떻게 그런 셀라를 다치게 할 수 있어? 넌 진짜 끔찍한 자식이야!”
“말이 심하네,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일단은 같은 핏줄이니 어쩔 수 없는데. 노엘이 중얼거린 말에 발끈한 소년이 그에게 덤벼들려 했다. 기겁한 아이들이 그런 소년을 가까스로 붙잡아 말렸다. 친구들 품에 꼭 끌어안긴 상태에서 소년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난 너 같은 거 핏줄로 인정 못 해! 네가 어떻게 그딴 말을 입에 담아?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조부모님이 병을 앓는 것도 전부 다 너 때문이야! 너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 없었어! 전부 다 너 때문이라고!”
“정말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네 옆에 있으면 좋은 일이 없어! 그 예언 그대로야! 네가 우리 일족을 망칠 거야! 우리를 전부 다 죽일 거라고!
울며불며 외치는 말은 너무 처절해서 되레 가련할 정도였다. 한숨을 내쉰 노엘이 몸을 일으키자 소년을 비롯한 아이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노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막상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조차 가련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그때 소란을 느낀 어른들이 호통을 치며 나타났다. 그들은 노엘과 대치 중인(실상은 그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인)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다그쳐 떠나도록 했다. 일견 다수가 한 명을 따돌리는 걸 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노엘은 그들의 본심을 잘 알았다. 사실은 아이들을 자신에게서 보호하려는 행동이었다.
“네가 이해하거라. 다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이다.”
어른 중 하나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들의 어린 나이를 탓하는 그는 노엘도 그 또래라는 건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오히려 나이는 노엘이 가장 어렸지만, 노엘은 그걸 지적하는 대신 그저 싱긋 웃었다.
“딱히 신경 안 써요. 어른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저러는 건데요.”
저 꼬마들이 뭘 보고 배웠겠냐는 타박이었다. 움찔한 어른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네 주위에서 끊임없이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
“제가 저주받았다면서요. 그래서 그런가 보죠.”
애써 평온을 가장하던 낯빛들이 대번에 굳어졌다.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는지 경악하는 시선이 닿았으나, 노엘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