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601화 (601/608)

외전. 8화

3.

“상급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신계의 정무 회의. 한자리에 모인 신들의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매번 회의 때마다 언급되지만 늘 마땅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안건이 이번에도 화두에 오르고 있었다.

어떤 세계든 제대로 잘 굴러가기 위해선 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규모가 크고 관리가 까다로울수록 상급자의 힘이 필요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차원이 넘쳐나는 것에 비해 상급신의 숫자는 이십 명도 채 되지 않는 게 신계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정령왕의 세대교체와 함께 자연스럽게 충원이 이뤄져야 하지만, 소멸하는 정령왕마다 신의 길을 거부하는 탓에 벌써 몇만 년째 인원에 변동이 없었다.

“중하급신들이 아무리 늘면 뭐합니까? 상급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따로 있는데요.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상급신이 될 수 있는 신의 영혼들이 선택의 시기에 자꾸만 속계로 향하니까요.”

“그걸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신이 되게 해야죠! 명계에선 대체 뭘 하길래 설득 하나 못 하는 겁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본인이 거부하는 걸 어쩌란 거야?”

“한번 인세로 가면 설득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게 문제야. 인연에 얽힐수록 신이 되는 것에 더 회의적으로 군단 말이지.”

“이러다 다음 순번도 신이 되는 걸 거부하면 어쩌죠?”

한탄하는 목소리, 탓하는 목소리, 발끈하는 목소리들이 뒤섞인 회장은 몹시 어수선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마땅한 대책 방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지난 회의도 이러기만 하다 끝난 참이라 다들 막막한 한숨만 내쉬었다.

“그럼 이제 선택권을 안 주면 되겠네.”

그때 돌연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이들이 모두 그쪽을 바라보았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둔 채로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남자였다.

한눈에도 훤칠한 그는 먹물보다 짙은 흑발을 지니고 있었다. 슬며시 떠지는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 또한 빛마저 삼켜버릴 듯이 검었다. 다리를 내린 그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단지 그뿐인데도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마신 카노스. 가장 강한 상급신이자 마족의 창조신. 천신과 운명의 신, 명계의 신과 더불어 신계의 태초부터 존재한 최고신 중 하나.

정무 회의 때 최고신들은 대표로 돌아가면서 참석했다. 의장이나 다름없는 위치라 참석하는 최고신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날 회의의 방향이 결정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신의 차례에 열리는 회의는 늘 망한 회의였다. 자신의 차례일 때 카노스는 자리만 채울 뿐 회의에 관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참석이라도 해주면 다행이었다. 오늘 회의도 다들 처음부터 체념한 참이라 그의 존재를 아예 없는 걸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신이 웬일로 나선 것이다. 한껏 긴장한 이들을 돌아본 카노스가 씩 미소 지었다.

“다음 선택의 시기를 갖는 게 누구야?”

“예? 아, 그게…….”

뒤늦게 질문을 이해한 총무가 들고 있던 자료를 허둥지둥 넘겼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아마도 현 엘퀴네스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주위가 잠시 술렁거렸다. 현 엘퀴네스는 타고나기를 완성형으로, 역대 최강의 엘퀴네스라는 평을 받는 이였다. 그가 신이 되면 최고신의 힘도 넘볼 수 있을 거라는 평이 이미 공공연했다. 카노스의 검은 눈동자에도 이채가 서렸다.

“아, 드디어 그가 소멸할 때인가? 그만한 거물이 신이 안 되고 인간 세상을 유람하고 다니기는 너무 아깝지. 딱 좋네. 그냥 신계로 보내.”

“하, 하지만 명계에선 소멸한 정령왕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설명을 들은 그가 내세를 택할 생각이라면 크게 반발할 텐데요.”

“장사 한두 번 해봐? 선택권 주는 척하고 적당히 속여넘겨. 어차피 처음 소멸해봐서 명계 구조도 모를 때잖아. 세상 순진할 때인데 뭐가 문제야.”

아니, 이런 걸 장사라고 하지 말라고.

신들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불만의 표정을 짓지 못했다. 그래도 매번 결론이 나지 않던 문제가 해결된 덕분에 전체적으론 밝은 분위기였다. 그들이라고 강제로 진행하는 걸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단지 후환이 두려워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카노스가 지시한 거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마신은 워낙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한번 관여한 부분에선 일 처리 하나는 확실했다. 오히려 나서기 시작하면 최고신 중에서 그만큼 든든한 존재가 없었다.

그렇게 한 정령왕의 운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됐다.

* * *

눈을 떴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짙은 잿빛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안개가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감각기능엔 이상이 없는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작이고 끝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 있다는 것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건 자신이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분명 환생의 궤도에 올랐을 텐데, 여전히 모든 기억이 다 선명했다. 정령왕의 삶을 마치고 명계에 도착한 것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삶에 관한 설명을 들은 것, 그리고 결정을 내렸던 순간까지도. 어느 하나 사라지거나 바래진 부분이 없었다. 물론 지금 상황도 중간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혹시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그게 아니면 이 또한 환생 과정의 일부인가. 긴 삶을 통해 축적된 지식은 많았지만 그에게도 명계는 미지의 세계였다. 환생 자체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보니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던 그는 우선 차분히 기다렸다. 사고가 벌어진 것이든 누군가가 의도한 상황이든, 계속 이런 상태일 리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엘뤼엔 님.”

예상대로 곧 안개 속에서 모호한 울림이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성별조차 분간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엘뤼엔? 그건 나를 부르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엘뤼엔 님. 주신께서 하사하신 당신의 새 이름입니다.”

“……주신?”

생각지 못한 존재가 언급된 것에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령왕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도 명계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신계와 내세, 두 가지 길 중에서 고를 수 있다고 했고, 그는 분명 내세를 택했다. 육체를 가진 평범한 일원 중 하나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주신이 그 삶에 관여한단 말인가. 설마가 확신으로 굳어지기 시작하며, 불쾌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네 모습을 드러내라.”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이곳은 온전한 당신의 영역. 당신이 뜻하는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엘뤼엔 님께서 보시고자 하시면 보시게 될 겁니다.”

“…….”

아직 형태조차 구현하지 못한 의식체에 불과했던가. 그는 한숨을 내쉰 후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이번엔 ‘의지’를 담아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욱하던 안개가 빠르게 걷히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기류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들썩이는 공간들이 눈앞에서 차례로 형태를 이루어나갔다.

이윽고 완성된 건 상앗빛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성채였다. 중앙의 기둥 위엔 반짝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두 개의 추를 이고 있는 천칭을 새하얀 뱀이 휘감고 있는 형태였다.

문양을 잠시간 주시한 뒤 그―엘뤼엔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활짝 열린 성문 앞엔 긴 금발을 지닌 여인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존재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등에 달린 새하얀 여섯 장의 날개를 보며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도 다시금 확인했다. 더불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네 이름은 유리엘이다. 네가 할 일을 시작해라.”

명이 떨어지는 순간 주인이 인지한 존재에 숨이 깃들었다. 인형처럼 굳어 있던 육신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하며 텅 비어 있던 눈동자의 초점이 선명해졌다. 생명을 얻은 신족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제 주인을 맞이했다.

“천사 유리엘이 존귀한 주인님을 뵙습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 가지 묻겠다.”

“예, 하문하십시오.”

“내가 신이 된 건가?”

주인에게서 서늘한 분노를 느낀 유리엘이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나 신족은 두려운 감정보다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본능이 더 앞서는 이들이었다. 곧 차분한 답변이 이어졌다.

“네, 그렇습니다. 엘뤼엔 님께선 오늘부터 형벌과 저주를 관장하는 신이 되셨습니다.”

하― 엘뤼엔은 차게 웃었다. 짐작한 사실을 재확인한 것뿐이라 해도 이 순간이 기가 막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곤 의심조차 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농락당했다. 그가 삶에서 처음으로 느껴본 굴욕이었다.

* * *

“이건 뭐지?”

엘뤼엔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더미에 시선을 보냈다. 집무실 안엔 수많은 서류가 쌓여 있었지만 그가 기존의 것과 착각할 리는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서류였다. 긴장한 천사들 사이에서 유리엘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바이톤의 생태계 변동에 관련된 보고서입니다.”

“생태계 변동?”

쌓여 있던 서류들이 공중에 떠올라 그 앞에 펼쳐졌다. 빠르게 스치는 문자들의 향연을 전부 읽어낸 엘뤼엔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기록된 내용 모두가 동일 사건에서 발생한 피해목록이었다.

“한 왕국이 몰살됐군.”

죽은 건 주민만이 아니었다. 가축을 비롯하여 풀 한 포기조차 살아남은 게 없었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벌어질 규모도, 인간의 무력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서류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린 엘뤼엔이 앞에 선 유리엘에게 시선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던 유리엘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마족 셋이 사제들이 세운 방벽을 무시하고 침범했습니다.”

“놈들은 지금 어딨지?”

“죄송합니다.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마계로 숨은 후였습니다. 마왕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마신의 인가 없이는 내어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마신 측에도 범인 인도 요청을 보냈습니다만…….”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또 무시했을 것이다. 이미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차원 중 하나면서도 속계에 더 가까운 마계는 여러모로 특수한 차원이었다. 주 군림신인 마신 카노스 외에는 아무도 마계의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또 다른 관리자인 지옥의 신 크라제조차 가벼운 보조만 할 뿐이었다. 그 점을 악용한 마족들이 다른 차원에서 사고를 치곤 본계에 숨는 일이 허다했다.

엘뤼엔이 담당하게 된 차원 바이톤은 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 때문에 마계와 연결되어 버린 비운의 세계였다. 시간대마저 마계와 묶인 덕분에 마족들이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드는 휴양지가 됐다. 그만큼 마족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도 현장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놓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단 한번 마계로 숨으면 끌어낼 방도가 없다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이에 관련하여 마신 쪽에 수차례 공문을 보냈지만 마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공문을 보기는 하는 건지도 미지수였다.

마신이 나다니기 좋아해서 궁처에 머무르는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업무까지 소홀히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니면 이제 갓 신의 자리에 오른 애송이의 항의 따윈 무시하겠다는 의미인가.

“……어느 쪽이든 재수 없는 놈이군.”

“예?”

“아니, 됐다. 어쨌든 이대로 놔두면 끝이 없겠어.”

호구가 돼준 건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그가 깃펜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창 업무 중이던 천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남긴 뒤 엘뤼엔은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주인의 뒤를 다급히 따라나선 유리엘이 질문했다.

“엘뤼엔 님. 어디를 가십니까?”

“마신의 궁처에 간다.”

유리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이 된 후로 그의 주인이 외출한다고 말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엘뤼엔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어떤 낯짝인지 면상은 확인해야겠다.”

확인하는 김에 그 낯짝을 후려치겠다는 소리로 들렸으나 유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은 참 후련할 거 같았다.

“마신께선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엘뤼엔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검은 날개의 천사를 내려다보았다. 몸에 흐르는 신력은 마신의 것이 분명한데, 다른 신의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누군가에서 빼앗은 천사라는 소리였다. 하물며 날개가 여섯 장인 고위 신족이었다. 마신의 성미가 고약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도 질이 나빴다.

“예정 귀환 시간은?”

“죄송합니다.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지.”

“네? 그, 하지만…….”

“그래도 제 궁처인데, 언제고 한번은 돌아오지 않겠나?”

엘뤼엔은 당황한 천사를 무시하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홀에 있던 다른 마신의 천사들이 그를 발견하고 술렁거렸다. 엘뤼엔도 다른 의미에서 잠시 황당해했다. 천사의 수가 한눈에도 열은 넘었는데, 그들 모두 다른 신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갈수록 더 가관이군.”

이쯤 되면 온전히 마신의 기운만 지닌 천사가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엘뤼엔은 지켜보는 눈길들을 무시한 채 홀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조용히 뒤따라온 유리엘이 그 뒤를 지키고 섰다. 문 앞에서 미처 막아설 틈을 놓친 천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들어왔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지?”

“예, 예?”

“수십 번 공문을 보내도 개무시 당하는 나보다 더 곤란한가? 그게 아니면 하루아침에 개죽음을 당하고도 규명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들보다 곤란한가.”

“그, 그게…….”

“너희에게 따질 일이 아니니 너희 주인을 불러와라.”

다른 신에게서 탈취한 천사와는 온전한 교감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신의 소유이긴 하니 주인에게 응급 신호 정도는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천사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들이 서로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을 교환할 때였다.

“카노스 님은 이런 막무가내 방식으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안쪽의 어둠 속으로부터 한 천사가 걸어 나왔다. 선명한 산호색 머리칼을 단정히 늘어트린 여인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유비아 님!”

돌아본 천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엘뤼엔의 눈에도 이채가 감돌았다. 지금 나타난 천사는 온전히 마신의 신력만 지니고 있었다. 한눈에도 천사들을 통솔하는 존재로 보였다.

“형벌의 신을 뵙습니다. 유비아라고 합니다.”

“네가 마신의 수석 천사인가?”

“그렇습니다. 노여우신 마음은 충분히 알겠사오나, 마신께선 최고신이십니다. 사전에 정한 약속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알현을 청하실 순 없습니다. 부디 예우를 갖춰주십시오.”

“그쪽이야말로 지나친 무례군요.”

유리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현이란 만나려는 이가 더 지체가 높은 대상일 경우에 쓰는 표현이었다. 아무리 최고신이라 해도 직급 자체는 마신 또한 엘뤼엔과 같은 상급신이다. 걸맞지도 않을뿐더러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 하지만 유비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신은 신계의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 갓 태어난 상급신과 존귀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지금 존귀라 했나?”

재차 항의하려는 유리엘에게 물러나란 손짓을 보낸 엘뤼엔이 입을 열었다. 유비아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일 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태어난 시기가 빠르단 이유로 존귀하단 평을 듣는군. 살아온 세월이 가치를 증명하는 전부라면, 마신도 꽤 볼 것 없는 놈이겠어.”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유비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느릿하게 훑은 엘뤼엔이 겹치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보니 만날 가치도 없는 놈이었군.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할 말은 해두지.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라.”

“듣겠습니다.”

“지금부터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범인 인도에 협조하라고 해라. 그러지 않을 시엔 내가 직접 마계로 가서 놈들을 죽여버릴 테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사상자가 이번 일의 관련자에만 국한될 리는 없었다. 마신의 관할 영역에 침범하겠다는 건 그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눈빛이 흔들린 유비아가 입을 열려는 때였다.

“이야, 제법 화끈한 선전포고인걸?”

웃음기를 담은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엘뤼엔은 고개를 틀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살짝 덮는 짙은 흑발에 그보다 더 새카만 눈동자. 그와 대비되는 흰 피부 때문인가. 그저 까맣기만 한 단순한 조합임에도 유난스럽게 화려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그가 마신이라는 건 보는 순간 알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이가 마신이 아니라면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잘난 면상을 보는군, 단조로운 감상을 내린 엘뤼엔은 무심한 시선으로 마신을 마주했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카노스가 가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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