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99화 (599/608)

외전. 6화

쥬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신족이 모시는 신과 성향이 다른 경우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에 해당했다. 신력을 주입할 때 신이 의도적으로 다른 성향을 부여하는 경우, 이미 주인이 있는 천사를 다른 신이 강제로 탈취한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족의 탄생 과정에 다른 존재가 개입한 경우였다.

성향이 다른 신족은 신들도 반기지 않았다. 일단 주인과 온전한 교감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게 가장 컸다.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무리에서 동떨어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웬만해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은 정말 흔치 않은 상황이었다. 철저하게 단속하는 청공의 방에서 어쩌다가 그런 사고가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정말 나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뭐야, 그럼. 고위 신족이면 뭐해. 그래 봤자 반쪽 짜리인 거잖아.’

그럴 바엔 날개가 네 장이라도 주인과 온전히 연결된 자신 쪽이 더 나았다. 그런 생각으로 쥬엘이 왠지 모를 승리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돌연 생각지 못한 광경이 눈에 보였다. 루미나엘이 어느새 형벌의 천사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옆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쥬엘이 매우 당황했다.

“야, 너.”

불쑥 들려온 말에 주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형벌의 천사들이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루미나엘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미나엘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한 곳만 응시했다.

“너 말이야. 분홍 눈.”

“저요?”

지목당한 분홍색 눈동자의 신족, 나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나드엘이야?”

“앗, 네. 마신의 천사님이시죠? 언니들한테 말씀은 들었어요. 저랑은 처음 만나네요. 나드엘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활짝 웃으며 답하는 것에 루미나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불만스럽게 살피는 듯한 눈길이라 나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 이건 좀 생각지 못했네.”

“네? 뭐를요?”

“너 다시 언니라고 해봐.”

“언니요?”

반사적으로 따라 한 말에 루미나엘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보다 못한 다른 형벌의 천사들이 나드엘을 보호하며 나서려고 할 때였다.

“루미나엘 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문제가 있다면 저와 먼저 이야기를…….”

“역시 귀엽잖아.”

“……네?”

“확인하길 잘했어. 주인님이 괜찮은 일을 시키실 때도 다 있네.”

나드엘은 물론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하지만 루미나엘은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나드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루미나엘이야. 그냥 루나라고 불러. 야, 너 내 동생 할래? 아니다, 그냥 동생 해라.”

“네에?”

“따라 해봐, 루나 언니.”

“루, 루나 언니요?”

“오, 좋아, 좋아. 그럼 난 그렇게 알고 간다! 다음에 보자, 나드엘.”

“네? 예? 지금 막 오셨잖아요?”

“너 보러 왔던 거야.”

경쾌한 답변에 그들을 지켜보던 모든 신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형벌의 천사들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고 계속 숨겨왔는데.” “설마 회동에 나타날 줄은.” 그들이 낮게 탄식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회장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든 말든 제 용건만 마치고 유유히 돌아선 루미나엘은 가는 길에 얼어 붙어 있는 쥬엘과 마주쳤다. 쥬엘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전부 믿기지가 않아서 그저 얼떨떨했다. 자매처럼 지내자고 한 건 자신이 먼저였는데, 막상 그가 동생으로 삼은 건 다른 쪽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루, 루미나엘 님. 저분에게 동생을 하라니…….”

그럼 저는요? 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든지 말든지, 라는 답변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난 신경 안 쓴다는 해석도 가능했다. 루미나엘은 새삼 발견했다는 얼굴로 쥬엘을 바라보았다.

“어, 넌 이름이 뭐였지?”

“쥬, 쥬엘인데요.”

“아, 그래? 여튼 잘 지내라. 아, 근데 너한테 말해둘 거 있었다.”

까무룩 죽어가던 쥬엘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돌았다. 너도 내 동생 같은 아이야, 또는 그래도 쟤보다 너랑 더 친해, 이런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꿈이었다.

“앞으론 칭찬이라도 내 이야기 하고 다니지 마. 나 그런 거 좀 안 좋아 해.”

“…….”

“그리고 너네 주인님한테는 그만 연락하시라고 해. 우리 주인님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귀찮게 한다고 심기가 너무 불편하셔.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신 거 같거든. 네가 제대로 된 수행 천사라면 주인님의 목숨도 잘 챙겨야지? 알아서 자중하시게 하자. 알았지?”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시선은 얼음장 같았다. 겁에 질린 쥬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살벌한 시선이 풀렸다. 루미나엘이 훌쩍 사라지고 난 후에 쥬엘은 멈췄던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고위 신족이 내뿜는 위압을 온몸으로 받은 탓에 몸이 덜덜 떨렸다.

“거봐요, 허풍 맞다니까.”

슈레이의 천사가 옆 신족에게 말했다. 내내 아무렇지 않았던 수군거림이 드디어 가슴을 찔렀다. 쥬엘이 노려보는 것에 모두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본격적인 회동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오늘을 위해 몇 년간 공을 들였던 주최단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루세프의 천사 중 한 신족이 이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근데요. 제가 먼저 태어났는데요오…….”

울상이 된 나드엘이 호소하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 * *

전쟁과 파괴의 신 크로아첸. 마신이기도 한 그의 궁처는 짙은 밤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궁전의 형태였다. 멀리서 보면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건물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우아한 조각장식이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사실은 절규하는 인간들의 머리를 바글바글하게 묘사한 것이라거나, 황금인 줄 알았던 외벽이 실제론 폐건물처럼 거무죽죽하다는 것이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아름다움에 홀려 가까이 다가갔다가도 막상 궁처 앞에 이르면 차마 걸음을 더 옮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한눈에도 주인의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로 마신의 궁처답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설계가 참 직관적이네.”

크로아첸은 맞은편에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진주 같은 피부에 맑은 물색의 눈동자가 선명할 정도로 강렬했다. 빛이 감도는 푸른 머리칼 또한 청명한 여름 바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선뜻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외모조차 종족의 특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듯한 이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였다.

차기 상급신인 정령왕은 쉽게 주목받기 마련이지만, 특히 이번 엘퀴네스는 탄생의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온갖 특이한 선례는 다 만들고 있어서 더 유명했다.

한때는 계약자이기도 했던 이를 전혀 다른 입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참 묘한 기분이었다. 많은 것이 바뀌고 달라진 지금도 그를 대하는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그랬다. 아마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만 해도 머리에 품은 생각이 훤히 다 읽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소리를 할 게 뻔했지만 크로아첸은 그냥 물었다.

“무슨 소리야?”

“네 궁처 말이야. 화려한 외모에 그렇지 않은 네 더러운 성격을 표현한 거 아냐?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구나 싶어서 내심 감탄했어.”

“그렇겠냐?”

역시 얄미운 소리나 할 줄 알았다. 알아도 짜증이 나는 건 마찬가지라서 크로아첸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

“아니라고? 그럼 왜 이 모양이야?”

“네가 온종일 서류에만 시달려봐. 머리가 안 이상해지나. 거지 같은 기분을 표현할 방법이 이런 거밖에 없다고.”

“와, 머리가 이상하다는 자각은 있구나. 역시 자기 객관화의 현시였네.”

“까불지 또.”

“납치범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거든?”

뚱하게 내뱉는 말 그대로였다. 원래 정령왕은 아크아돈 외의 다른 차원으로는 이동하지 못한다. 그런 엘이 마신의 궁처에 있을 수 있는 건 크로아첸이 조금 전에 그를 직접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데려온 거다 보니 당사자에겐 납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크로아첸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대차원 밖에선 시간 제약이 가해지는 신은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항상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그와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정령계에 가도 네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걸 어쩌라고. 아직 신전도 안 세웠고, 마땅히 연락할 방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다짜고짜 납치하냐. 정령왕이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그쪽도 엘퀴네스 출신이라면서요. 직속 선배가 뭐 이래?”

“오히려 잘 아니까 이러지. 대차원은 시간 흐름 똑같잖아. 몇 시간 정도론 어떻게 안 돼. 아무 지장도 없거든?”

“그래도, 갑자기 사라지면 다들 놀란단 말이야.”

“미네르바한테는 말해놨어. 알아서 전달했을 거야.”

짜증 낼 걸 예상해 그 정도는 대비해놨었다. 이제 어쩔 거냐는 시선에 말문이 막힌 엘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 개인 일정에도 지장이 생기거든?”

“무슨 개인 일정.”

“그야 뭐. 여관에 말해둔 귀환 시간도 그렇고. 저녁때 가려고 봐뒀던 식당도 그렇고. 원래 하려던 걸 못 하게 된 거면 그게 지장인 거지.”

“아, 그래. 참 대단한 일정이네.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요즘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건데?”

“뭐 하긴. 그냥 여행 다니는데.”

“누구랑? 마왕 꼬맹이랑 퍼런 엘프 놈은 마계로 돌아온 거 이미 확인했고. 그 이후로는 한동안 본계에 있었잖아. 갑자기 어디서 누굴 알게 돼서 여행을 다시 시작한 건데?”

“내가 아는 사람이 그 둘 뿐인가. 그리고 넌 언제까지 그런 호칭이야? 아스는 그렇다 쳐도 시벨은 이제 블루 엘프 아니거든?”

“됐고. 솔직히 말해.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아니야. 내가 뭘 숨긴다고 그래.”

눈동자가 떨리는 게 다 보이는구만 아니기는.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인가 싶었지만 크로아첸은 굳이 다그치지 않았다. 겁 많고 예민한 동물을 다루려면 조급해선 안 된다. 어차피 저 성격에 평생 비밀은 불가능하니, 가만히 있어도 조만간 알려질 것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지금은 느긋하게 지켜보는 게 더 나았다. 그래야 방심한 그가 틈을 내기도 더 쉬울 테니까.

“아, 근데 저건 뭐야? 휘장에 웬 거미 문양을 박아놨어? 강렬하긴 한데 좀 무섭지 않나?”

그래서 뻔히 말을 돌린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스스로 여기기에도 자신은 참 관대한 신이었다.

“거미가 무섭다는 게 금시초문인데. 그게 왜 무서워? 거미형 마수도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실제 위협이 문제가 아니야. 그냥 다리가 많이 달린 생물에 거부감이 드는 거지.”

“아직도 전생 습관 못 고쳤냐?”

“아무튼! 왜 거미 문양을 썼냐고.”

“내 문장이야.”

“헐, 진짜?”

“뭐가 문젠데.”

“아니 문제랄 건 아닌데…… 박쥐 날개 다음은 거미라니, 좀 당황스럽네. 마신은 히어로물을 따라가는 법칙이라도 있나? 근데 왜 세계관은 다르지?”

“뭔 소리야.”

대충 예상은 됐다. 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건 대부분 전생의 영향이었다. 하고 많은 중간계 중에서도 하필 주신의 땅인 지구에서 태어났다고 했던가. 특수 구역인 지구는 고위 신일수록 함부로 관여하지 못하는 장소였다. 엘을 찾기 어려웠던 것엔 그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좀 한산해지면 언제 한번 지구의 문화를 알아보긴 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언제 한산해질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근데 너 안 바빠? 요즘 쉴 틈 없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시간 보내도 괜찮아?”

그에게 일이 많다는 건 엘도 잘 알았다. 외면하고 있던 부분을 지적받은 크로아첸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 괜찮아. 그렇다고 일만 하고 살 순 없잖아.”

“그야 이해는 하지. 근데 너 이렇게 노는 동안 우리 아버지만 힘들어지는 거 아냐?”

“차라리 그러면 좋겠네. 엘뤼엔은 이제 인수인계 끝냈다고 손 거의 다 뗐거든? 그 지독한 자식이 그동안 얼마나 굴려댔는지 알기나 해? 야, 그리고 호칭 정확히 해. 우리가 아니라 네 아버지겠지.”

“한국 출신은 어쩔 수 없어. 네가 이해해야 해.”

젠장, 내가 진짜 지구에 대해 공부하고 만다. 크로아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연락 안 되는 거 불편해. 매번 찾아가는 것도 귀찮은데 내 문장 받아라.”

“하하, 싫은데?”

“엘뤼엔이랑 전 마신 건 받았잖아. 심지어 엘뤼엔한테는 네가 먼저 요청까지 해놓고선. 내 문장은 왜 싫은데?”

“거미 문양 같은 거 갖고 다니고 싶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하지만 합리적인 사유라 크로아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문장의 형태 같은 건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 거미의 형태인가 불만도 솟았다. 직접 정한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름과 함께 받는 거라 선택권도 없었다.

“넌 나중에 얼마나 좋은 문장 받나 보자.”

“난 신 안 될 건데.”

“누군 되고 싶어서 됐냐? 그런 거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엘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제야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경각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여하튼 그럼 그건 내가 양보할게. 대신 다른 거 협조해.”

“다른 거 뭐?”

“너 엘뤼엔의 궁처도 가봤지? 내 궁처 보면서 뭔가 허전한 점 느끼지 못했어? 엘뤼엔의 궁처랑 비교해봤을 때 뭐가 부족한 거 같아?”

“화사함과 우아함?”

“……그래, 그거 말고 또.”

잠시 고민하던 엘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 천사가 없나?”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참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크로아첸은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며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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