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98화 (598/608)

외전. 5화

“그냥 넘어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돌아가서 자중하십시오.”

엄중한 경고는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가이엘이 무기를 꺼내든 것에 당황한 유니콘들이 당황하며 물러섰다.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악문 그들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 처량한 뒷모습들을 보며 가이엘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룬이 있었다면 정화도 훨씬 수월했을 것을. 오히려 업을 쌓았으니 자업자득이지. 가장 성결하고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버렸으면서 그분의 자녀들이라고 지껄이다니, 염치없기는.”

딱히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발끈한 유니콘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르단 역시 참지 않았다.

“아무리 루세프 님의 천사라지만,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제가 못 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룬의 힘을 버린 건 저희가 아닙니다! 그걸 결정한 게 누군지는 당신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 추악하고 더러운 배신자가……!”

“아르단, 제가 말한 버렸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무슨…….”

“당신이 주인님의 힘으로 룬을 봉인했을 때, 이미 당신들은 룬을 버린 겁니다.”

룬을 잃었다고만 알고 있을 때에도 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유니콘 일족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일족을 지키라고 하사한 힘으로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를 폐했다. 루세프에겐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의 성정이 관대하여 너그럽게 넘어갔지만, 이게 얼마나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인지는 신계의 모두가 다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가이엘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유니콘이 여전히 뻔뻔하게 궁처를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그 배신자가 날개를 꺾는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애초에 그가 날개를 꺾을 마음을 왜 갖게 됐습니까? 그렇게 되도록 한 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까? 설령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봉인했다 해도 그 사실을 루세프 님께 솔직히 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가 죽었다며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싸늘히 쏘아붙인 말에 아르단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도 억울한 표정인 건 여전해서 가이엘은 더 불쾌해졌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룬을 봉인한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선대 룬이 날개를 꺾게 만든 책임도 져야 합니다. 후생이 괴롭지 않으려면 삶이 남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혼을 정화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도 다신 신족으로 태어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앞에 모든 유니콘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르단은 아예 허물어지듯 주저앉은 채였다. 그 창백한 얼굴을 똑바로 응시한 채, 가이엘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루세프 님이 강신했던 그를 감히 더럽다거나 추악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또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올 경우 엄중하게 조치할 겁니다.”

넋이 나가 있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다시 한숨을 내쉰 가이엘은 당신들이 배신자라고 부르는 그 유니콘은 오히려 다음 생도 고결한 삶을 살 거란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이만 떠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물쭈물하던 유니콘들이 주저앉아 있는 아르단을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단숨에 눈빛이 돌변한 아르단이 표독하게 소리쳤다.

“우린 단지 루세프 님의 곁에 있고 싶을 뿐이었어! 늘 루세프 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너희가 뭘 알아!”

“우리도 신족이야! 우리도 신과 함께하는 걸 허락받은 상서로운 일족이라고! 처음부터 신계에서 살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단 말이야!”

발악하듯 외치는 소리는 일족들이 그를 끌어가다시피 데려가는 도중에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가이엘은 그대로 몸을 돌려 궁처 안으로 들어갔다. 소음을 듣고 확인하러 나온 다른 천사가 가이엘의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어휴, 대체 저게 무슨 일이래요?”

“유니콘이 또 유니콘 한 거지, 뭐.”

“정말 질린다. 누가 들으면 억지로 내보냈던 건 줄 알겠네요. 쟤넨 자기들이 신계를 떠나고 싶어 해서 떠난 거라는 건 기억을 하고 있을까요?”

“못하니 저러겠지. 선대의 일은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여기니까. 애초에 선대의 유지를 제대로 이어갔다면 룬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도 없었겠지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쓴소리 제대로 했으니 한동안은 잠잠할 거야.”

“그러길 바라야죠. 언니도 신경 쓰지 말아요. 그보다 외출할 준비 하셔야죠. 이제 곧 회동 시간이잖아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신들의 연회가 있는 것처럼 수행 천사들에게도 단체로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오늘은 몇 년에 한 번 주기로 찾아오는 천사들의 회동날이었다. 회담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일종의 단체 야유회에 더 가까워서 그 날만 기다리는 이들도 있는 한편, 귀찮아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이엘은 명백히 후자에 속했으나 기대하는 동료 앞에선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 회동엔 거기서도 오겠죠?”

“어디?”

“새 마신 님의 궁처 말이에요.”

“초대장에 참석으로 회신했다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협조적인 게 의외예요. 카노스 님때는……으음, 이건 그냥 넘어가고요. 어쨌든 다들 기대도 안 했잖아요. 아직 첫 번째 천사만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어떤 분일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게. 궁금하네.”

무심히 반응하긴 했지만 사실 가이엘도 많이 놀라긴 했다. 엘퀴네스 출신의 신들은 단체 활동에 비협조적인 경향이 있어서 그들의 천사 또한 그랬다. 지옥의 신 크라제의 천사들은 내킬 때만 참석하는 편이었고, 형벌의 신 엘뤼엔의 천사들은 총무가 매일같이 애원하고 애원한 끝에 저번 회동에서야 처음 참석했다. 그마저도 가장 어린 천사가 가보고 싶다고 말해서 성사된 거였다.

설명이 생략된 전 마신의 천사들은 아예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번 마신도 엘퀴네스 출신이다 보니 다들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초대장을 안 보낼 수는 없어서 그냥 의례적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대뜸 참석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새 마신님은 성격이 사교적인 분인가 봐요. 얼마나 무서운 분일까 싶었는데 오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오해일 리가. 그 엘퀴네스 출신, 심지어 전쟁과 파괴를 관할하는 신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성격이 마신이 될 수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가이엘은 그렇게 지적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삼켰다. 오늘 회동이 파국에 이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이번 천사들의 회동은 지난 회동 이후로 7년 만에 열리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단체 야유회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밝았다. 참석자들은 각자 소속된 궁처가 표시된 자리에 앉아 주최단이 준비한 다과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계속 한 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 비어 있는 그 자리는 새 마신 크로아첸의 천사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정말 자리가 마련되어 있네요. 참석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기대되네요. 어떤 분이려나요?”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져 가는 가운데, 한 모금 마신 찻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은 신족 하나가 입을 열었다.

“루미나엘 님이 오늘 나오신다고 해서 정말 의외였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심 없다고 하셨거든요.”

발언한 이는 네 장의 날개를 지닌 상급 신족이었다. 주변 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그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쥬엘 님, 그분을 만나보셨어요?”

“네, 아시다시피 제 주인이신 펠마 님이 분쟁의 신이라 전쟁신 계열이잖아요. 같은 마속성 중에서도 좀 더 직계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상급자인 크로아첸 님께 인사드리러 가시는 길을 수행했었어요. 이후로 서신을 전해드리면서도 자주 찾아 뵙고 있고요.”

“오, 그럼 혹시 크로아첸 님도 뵈셨을까요?”

“그야 물론이죠.”

온 사방이 술렁거렸다. 새 마신 크로아첸은 지금까지 제대로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행간의 소문에 의하면 형벌의 신에게 끌려가 감금당한 채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형벌의 신도 워낙 신비주의다 보니 관련된 농담으로 여겼으나, 얼마 전 지옥의 신 크라제가 감금 장소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 쌍욕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신빙성이 더해진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아무도 새 마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그를 봤다는 이가 나왔으니 다들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남신이시죠? 어떻게 생기셨어요?”

“진짜, 진짜 굉장해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잘생기셨어요.”

“헉, 정말요?”

“뵙는 순간 눈이 머는 줄 알았지 뭐예요? 상급신들은 원래부터 존재감이 강렬하시지만, 그분은 정말이지, 그냥 차원이 달라요. 제가 보기엔 형벌의 신만큼 잘생기신 것 같아요.”

“세상에!”

워낙 두문불출하여 한때는 괴물처럼 생겼다는 오해가 있었던 형벌의 신은 3백 년 전의 그 사건을 통해 모습이 드러나면서 재평가를 받은 지 오래였다. 지금은 엘뤼엔이란 이름이 신계에서 가장 잘생긴 남신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런 형벌의 신만큼이나 잘생긴 신이 태어났다고 하니 신족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쥬엘 님이 너무 부러워요. 저도 뵙고 싶어요.”

“저희 주인님은 왜 전쟁신 계열이 아니신 거죠?”

다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러운 감정을 표출했다. 덕분에 주목을 한데 받은 상급 신족 쥬엘의 어깨가 한껏 으쓱여졌다.

“그분의 성격은 어떠셔요? 많이 무서우신가요?”

“저는 인사만 드리고 밖에서 대기한지라 어떠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분의 천사이신 루미나엘 님을 보면 조금 무뚝뚝하긴 하지만 그렇게 무서우신 분은 아니세요.”

“정말요?”

“네, 자주 뵌 제가 장담해요. 제가 자매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그러자고도 하신걸요.”

다시금 부러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인간들의 사회만큼은 아니지만 신계에서도 인맥은 아주 중요했다. 특히 상급신과의 친분은 쌓을수록 좋았다.

“허풍일 거예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던 한 하급 신족이 옆에 있던 이에게 속삭였다. 안정의 신 슈레이의 천사였다. 주인들끼리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아는 신족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쥬엘도 그 소릴 들었다. 그 역시 자신이 허풍이 좀 있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발끈했겠지만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냐면 이번엔 진짜거든.’

정확히는 그러든지 말든지, 라고 하긴 했지만 어쨌든 거절하진 않았다. 쥬엘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 때였다.

“뭔데? 내 이야기?”

“……!”

불쑥 들려온 음성에 무심코 돌아본 신족들이 모두 흠칫했다. 언제 온 건지 알 수 없는 신족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청색의 눈동자에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보라색 머리칼을 편하게 늘어트린 그는 숨을 절로 삼킬 만큼 아름다웠다. 심지어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고위 신족이었다.

‘왜 고위 신족이 이쪽에…….’

참석자가 많다 보니 회동 장소는 모시는 신의 계층에 따라 그룹이 나뉘어 있었다. 이쪽은 중급신과 하급신의 천사들 위주로 마련된 자리였다.

“루미나엘 님!”

그 순간 쥬엘이 외친 소리에 신족들은 다시금 화들짝 놀랐다. 루미나엘이라면 조금 전까지 쥬엘이 언급하던 마신의 천사 이름이었다. 그제야 외모에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마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포식의 기회를 노리듯 아래로 날카롭게 다리를 뻗은 거미의 문양. 마신 크로아첸의 문장이었다.

안 그래도 주목받고 있던 공간에 더욱 시선이 몰려들었다. 온 사방을 가득 채운 술렁거림에 쥬엘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렇게 유명한 존재가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해온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지금 도착하신 거예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깜짝 놀랐어요.”

“내 이야기 중인 거 같길래.”

“마신께서 워낙 신묘한 분이시잖아요. 다들 궁금해하시더라구요. 혹시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글쎄.”

“저 칭찬밖에 안 했단 말이에요. 진짜예요.”

애교 섞인 말투에 빤히 바라보던 마신의 천사―루미나엘이 피식 웃었다. 그림 같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니 절경이 따로 없었다. 주변에 있던 신족들이 모두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동안 슈레이의 천사는 합이 맞는 다른 신족들과 숙덕거렸다.

“별일이 다 있네요.”

“어떡해요. 이번엔 허풍이 아닌가 봐요. 진짜 친한 사이 같은데요?”

“뭐, 냅둬요. 저분이 보는 눈이 없나 보죠.”

이번에도 타격을 전혀 받지 않은 쥬엘은 무시했다. 오히려 패자의 발악이라고 생각하니 기분만 더 좋아졌다.

“그런데 루미나엘 님이 참석하시다니 정말 의외였어요. 회동에 관심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 특명을 받아서.”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루미나엘은 이 상황 자체가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무슨 특명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던 쥬엘이 살짝 눈치를 살폈다. 고위 신족인 그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건 주인인 크로아첸뿐일텐데, 신인 그가 천사들의 회동에서 알아보려는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때 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위 그룹에서 이제 막 도착한 신족들을 맞이하는 소리였다.

“저길 봐요, 형벌의 천사들이에요.”

누군가 탄성을 내뱉었다. 상급신의 천사들은 대체로 신족의 계급이 높지만, 전원이 고위 신족으로 이뤄진 궁처는 형벌의 신이 유일했다. 아름다운 신의 위명에 걸맞게 천사들의 외모 또한 아름다웠으므로 모두가 훈훈한 표정이 되었다.

“루미나엘 님이 훨씬 멋있어요.”

관심을 빼앗긴 쥬엘은 툴툴거렸지만 그 역시 시선은 연신 그쪽을 살피기 바빴다. 지난 회동에는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형벌의 천사들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과연 그 엘뤼엔의 천사들답게 다들 존재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분만 외모가 다르네요?”

주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다 보니 한 궁처의 천사들은 대체로 다들 비슷한 외모를 지니는 편이었다. 지금 나타난 형벌의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다들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유독 혼자만 소녀처럼 귀여운 외모를 지닌 이가 있었다. 저분은 형벌의 신 쪽이 아닌가? 쥬엘이 궁금해하려니 근처에 있던 신족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 나드엘 님을 말하시는 건가요? 쥬엘 님은 저번 회동 때 나오지 못하셨죠? 그게 그렇다더라구요.”

“아, 그럼 혹시?”

“네, 저분은 성향이 다르시대요. 탄생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