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97화 (597/608)

외전. 4화

그날 저녁엔 라미아스가 잠시 들렀었다. 황제가 또 무슨 패악을 부렸는지 잔뜩 화가 난 채였다. 그때쯤 그는 올 때마다 야반도주한 주방장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는 게 레퍼토리였는데, 그날은 유독 더 심했다. 처음에 오죽 힘들어서 그러나 싶어서 받아줬더니 틱틱대고 빈정거리는 게 한도 끝도 없었다. 정작 시벨리우스는 무시로 일관했지만 내가 참기가 어려웠다. 결국 검을 뽑아 들었고, 그제야 조용해졌다.

“다음엔 경고로 안 끝나요.”

“너 점점 날 너무 막 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동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 와서 화풀이하니까 그렇죠. 동대문 건 동대문에서 해결합시다. 오케이?”

“동…뭐? 지명이야? 처음 들어보는 발음인데?”

“뜻에 집중해요, 뜻에.”

누가 정보국 국장 아니랄까 봐 아무튼 뭐 하나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이후엔 저녁 식사를 하며 세상 동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유니콘 일족이 신계로 이주한다는 소식까지 이르게 됐는데, 시벨리우스는 남을 생각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심각해지니 시벨리우스도 긴장했다.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유니콘도 인간만큼이나 사회적인 동물이잖아. 동족이 없는 땅에 너 혼자 덜렁 남는다는 게 생각만큼 가벼운 문제는 아닐걸?”

“그건…….”

“지금 당장이야 엘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근데 너, 엘이 인간이라는 건 제대로 인지하는 거지? 너만큼 살기는커녕 당장 백 년 뒤도 기약할 수 없어. 그때도 지금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지 못했다기보다는 이미 고심하던 부분을 지적당해 뜨끔한 반응에 더 가까웠다.

“네가 사교적이고 친구를 쉽게 만드는 성향이면 또 몰라. 내가 그동안 지켜봤는데 딱히 엘 외에는 다른 친구를 만들지도 못하더만. 인간 사회에 섞이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살아갈 수 있겠어? 넌 룬이니까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특히 조심해야 하잖아. 그런 부분들을 전부 충분히 고려했냐는 거야.”

“…….”

시벨리우스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일렁이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슬픈 생각을 떠올린 듯이 와락 흐려졌다.

“뭐, 정 안 되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에 너 같은 존재가 또 있을 수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네.”

라미아스가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딴에는 정체를 드러내려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 그때쯤엔 시벨리우스는 아예 그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이런 호의를 선뜻 베푸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원하면 친구가 되어 줄 수도……어, 야! 아직 말하는 중인데 어디가!”

“나 잠깐, 혼자 생각 좀 할게.”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시벨리우스는 라미아스가 황당해하든 말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라미아스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내가 먼저 그를 찾았다. 엘뤼엔이 일러준 방향으로 가니 해변에 멍하니 앉아 밤바다를 구경하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밤에 보는 경치도 좋네.”

다가가 말을 걸자 그가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조금 기가 죽어 있는 얼굴을 보고 쓰게 웃었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부분은 아니었을 거 아냐. 그것도 전부 감수하고 남으려던 거 아니었어?”

“……응, 맞아.”

“그럼 뭘 고민하는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뜻밖의 대답이라 조금 멈칫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시벨리우스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알아. 엘은 인간이고, 나보다는 먼저 죽을 거야. 환생하겠지만 중간계는 아크아돈 외에도 많잖아. 다행히 여기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환생한 너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들을 했더니 조금 우울해졌어.”

“벌써 하기엔 너무 이른 생각 아니야? 나 아직 많이 어려. 그리고 검성이라 평범한 인간보다는 오래 살걸?”

“하하, 맞아. 그렇지. 그냥, 얼마 전에 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해서 그런가 봐. 아직 멀다고만 생각했던 일인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거든.”

음, 이거야말로 인과응보였다. 할 말이 없어서 시선을 피하니 시벨리우스가 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너무 무거운 주제였네.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다시 만날 거야.”

파도치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허둥거리던 시벨리우스의 동작이 멎는 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본 그의 눈동자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설령 다른 모습이 돼도, 네가 날 알아보지 못하게 돼도. 그래서 서로의 모든 게 생소해지더라도. 우린 여전히 친구일 거야.”

“……지금 생각하니 참 무책임한 말이었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4천 년 후의 재회만 생각한 대답이었다. 이곳에 돌아온 후로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을 줄은, 그래서 내가 아는 이들이 사라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의식 없이 가볍게 할 수 있었던 대답.

각자 다른 시간의 선. 남겨지는 삶의 무게를 실감한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선뜻 말할 수 없었을 거다. 모두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엘이 그렇게 말해줘서 난 기뻤어.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는걸.”

그래도 시벨리우스의 다정한 말이 위안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대답한 걸 후회하진 않았다. 아마 시간을 다시 돌려도 난 같은 말을 하겠지. 그게 희망 사항이기도 하니까.

“근데 아스는 어디 갔어?”

“아, 그 녀석은 결계를 손보고 있을 거야. 세피온… 아니 라미아스라고 했지. 그 녀석이 계속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잖아. 신문 전해 줄 때 잠깐 들여보내 줬더니, 그새 회로 하나를 파악했다는 것 같더라고. 그걸로 파괴는 못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더 강화하려는 거 같아.”

“아하하. 열심이네. 그래도 설마 아스의 결계가 장로급 드래곤도 못 뚫을 정도일 줄은 몰랐어. 마왕이라지만 아직 3백 세밖에 안 됐는데.”

“그 녀석 주특기야. 전체적으로 다 뛰어나긴 하지만 진법이랑 결계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지. 근데 칭찬은 하지 마. 부하들 따돌리고 놀 궁리하느라 잔머리만 늘어서 그래.”

라피스의 피를 받은 영향도 있으려나. 덕분에 밑에서 일하는 부하들만 죽어 나가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시벨리우스는 한이 많아 보였다. 알고 보니 아스가 도망칠 때마다 주위에서 그를 달달 볶았던 모양이다.

“내가 계약자지 보모는 아니잖아? 대체 왜 그 녀석이 사고를 칠 때마다 다들 나한테 하소연하는 거냐고. 지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마왕을 나더러 어쩌라고. 걔가 내 말을 들으면 또 몰라.”

계약자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가 이곳에도 있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을 물었다.

“근데 아스는 계속 중간계에 내려와 있어도 돼? 지금 굉장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어, 음. 아마 안 될걸. 마계에서 계속 연락은 오고 있는 것 같던데. 결계 친 거 아마 그거 피하려는 목적도 있을 거야.”

“……그거 괜찮은 거야?”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야 당연히 안 괜찮겠지.

그 순간 온몸에 소름 돋는 감각이 느껴졌다. 쿠웅, 동시에 묵직한 소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니 멍하니 서 있는 아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온 사방에 미세한 마력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결계를 친 이후로는 계속 무언가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는 증거였다.

“결계가 파괴된 거야?”

같은 것을 느꼈는지 시벨리우스가 헛숨을 삼켰다.

“설마 라미아스가?”

“……음, 아니. 이건 다른 쪽 개입 같은데.”

“다른 쪽?”

결계가 깨지기 전에 느꼈던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숨어 있는 마왕을 단번에 찾아내고, 내가 인지하는 것보다 빨리 결계를 파괴할 수 있는 이가 애초에 평범한 존재일 리도 없지만.

“와, 새 마신 님! 진짜 너무해!”

아스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역시나 크로아첸 그 녀석이 맞았다. 한숨을 내쉬려니 누군가가 우물쭈물 걸어 나왔다. 눈에 띄게 창백하게 질려 있는 남자는 머리 색과 눈동자 색만 봐도 마족이었다. 그를 발견한 아스가 한달음에 다가섰다.

“너야? 네가 마신님한테 나 찾아달라고 기도했어?”

“마, 마왕 전하. 제때에 돌아오지 않으셔서 모두의 염려와 근심이 큽니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아서 처리되지 않는 사안이 너무 많습니다. 부디 저희의 사정을 헤아려주십시오.”

“그래서 데르온한테 대행 맡겼잖아.”

“그 데르온 님이 이걸 보내셨습니다.”

힘겹게 답한 마족이 덜덜 떨면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편지처럼 보였는데, 왠지 손에 쥐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뭐야, 편지? 대체 이게 뭐라고…….”

혀를 차며 편지를 낚아챈 아스가 아무렇지 않게 봉투를 개봉했다. 순간 펼쳐지는 내용물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존경하옵고 친애하는 마왕 전하. 강대한 마계의 군주이신 전하께서 공사다망하신 줄은 제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옵니다. 충실한 수하이자 보필자로서 전하의 깊고도 고귀한 뜻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드리는 것이 제 마땅한 소임인 줄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심히 송구하옵게도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업무 영역은 한계가 있었나이다. 아무쪼록 하루빨리 본성으로 귀환해주시길 간곡히 바라고 또 바라옵나이다.

전하를 누구보다 흠모하는 데르온 드림.

말투가 너무 극진하긴 했지만 데르온답게 정중하고 온건한 편지였다. 문제는 그 편지를 잉크가 아니라 피로 썼다는 거였다. 편지 전체에 짙은 마력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제 보니 전달한 마족의 옷자락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그가 왜 편지를 꺼내면서 덜덜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앞에서 피를 내고(대체 무슨 방법으로 피를 쏟았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즉석에서 편지를 쓴 게 분명했다.

추신, 돌아오지 않으시면 다음엔 제 시체를 보시게 될 겁니다.

하단에 적힌 추신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혈서의 분위기와는 어울린다는 점에서 차라리 이쪽이 더 낫긴 했다.

‘……그래, 이런 마족이었지.’

정중하긴 하지만 좀 많이 이상한 마족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해진 것 같고. 이런 그가 육아를 맡은 게 역시 문제였던 걸까.

“대부, 데르온이 나 협박해.”

아스가 울상이 된 얼굴로 돌아보았다. 분명 이젠 인간이 아니라 정령왕일 텐데, 왜 두통이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전에도 이런 생각한 적 있지 않았나?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안 보던 사이에 내 귀여운 대자가 상당한 사고뭉치로 성장했다는 것.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여기서 접어야 할 모양이었다.

2.

신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천신 이오웬이 창조한 신성 종족을 뜻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신수를 비롯하여 그밖에 신계에 사는 거민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거민들은 일족마다 따로 불리는 호칭이 있었으므로, 그냥 신족이라고만 호칭하는 건 주로 천신의 아이들을 뜻했다. 다른 말로는 사자(使者)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완전히 분리됐으나 한때는 마족과 드래곤도 신계의 거민에 해당하는 신족이었다. 수명이 존재하고 생산활동이 필요한 거민들과는 달리 천사의 직분을 받는 신족은 오직 신의 신력으로만 탄생하며, 주인과 생명을 공유했다. 타고나는 성향 또한 주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에 여러모로 거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영혼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신족은 정결한 혼으로 태어나지만, 그중에서도 사자가 될 수 있는 건 첫 삶에서 꽃피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의 혼뿐이었다. 그래서 다정한 신일수록 제 천사들을 애틋하게 여기고 자식처럼 아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차이들이 신족 간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천마대전이 발발하는 계기로까지 이어졌지만, 이 체계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시절처럼 격렬하진 않아도 사소한 갈등 역시 여전히 존재했다.

“루세프 님을 뵙고 싶습니다.”

창공에 지어져 하늘 정원이라 불리는 정의의 신 루세프의 궁처. 그 성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가장 선두에 대표로 서 있는 초로의 남자를, 천사 가이엘은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백발인 머리에 색이 있을 때부터 봤던 사이였으나 서로가 좋은 관계였던 적은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신계에 정착한 이후부터 계속 악화하기만 하는 중이었다.

“주인님은 바쁘신 분입니다. 매번 이렇게 불시에 찾아와 알현을 청하면 곤란합니다.”

천군 사령관 중 하나이자 신계의 수호지기이기도 한 루세프는 궁처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찾아온다는 점이 주인을 무시하는 것 같아 가이엘은 가장 불쾌했다. 원칙적으로는 그들은 이곳에 와서도 안 되는 자들이었다.

“특히 귀환 1세대는 속계의 오염을 전부 정화하기 전까진 거주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계속 이러면 징계 조처가 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귀환한 것도 벌써 4천 년 전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당연히 모든 정화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저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남자가 반발하며 외치는 말에 가이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마 유니콘. 신도들도 신의 자녀임을 자청하는데, 루세프가 직접 창조하고 존재를 부여한 그들 일족이 루세프의 자녀라고 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단지 신족이 할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뿐.

어차피 한때의 삶, 환생하면 달라질 육신에 저렇게 집착한다는 점이 이상했으나 중간계에서 오랜 지낸 여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때인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역시 정화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시선에 오히려 항의하던 유니콘 대표―아르단이 더 주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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