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96화 (596/608)

외전. 3화

“……제목이 ‘엘’이에요?”

“어, 맞아. 주인공 이름이 엘이거든.”

우연치고는 참 공교로운 제목이었다. 이 순간엔 트로웰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알아차린 라미아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저자가 지은 거야. 난 관여 안 했어.”

“작가도 정령사라고 했죠?”

“맞아, 물의 정령사였어. 그래서 자기 로망을 잔뜩 담았다고 하더라고. 아마 읽어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올걸? 주인공인 정령사가 신관으로 위장 잠입해서 왕실과 얽힌 위험한 음모들을 파헤치고 세상을 구하는 내용이거든.”

순간 엘의 표정이 멍해졌다.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눈을 깜빡인 그가 서둘러 시선을 내리고 책을 펼쳤다. 천천히 읽어가는 눈동자가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했다.

“에, 엘퀴네스?!”

“대부?”

“엘, 왜 그래!”

당황한 일행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살폈다. 트로웰 역시 엘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앞장을 얼마간 살피던 엘이 책의 마지막 장을 들췄다. 가장 하단에 적혀 있는 저자의 서명을 확인하곤 더 먹먹한 얼굴이 됐다.

“작가 필명이…… 물망초네요?”

“어? 어, 맞아.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고 자기 필명도 그렇게 붙였어.”

“혹시 이 사람, 본명이 랑시 아니었어요?”

“헐, 그걸 어떻게 알았어?”

라미아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숨을 삼킨 엘의 얼굴이 결국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었어?”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이 물었다. 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모두가 탄성을 흘렸다. 잠재의식이 남아 있던 건 라미아스만이 아니었던 듯했다.

“랑시가 세피온 공작가에서 일했구나.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 애가 제국으로 이주했나요?”

“어어, 내 후계자도 물의 정령사였거든. 정령사들을 위주로 한 특별대를 구성했는데,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왔었어.”

“다비안 말이죠?”

“헉, 그 녀석도 알아?”

“다비안의 친구인 크리스를 더 잘 알지만요.”

“크리스? 라케인 크리스? 대륙 3대 헌터 길드였던 여명의 길드 마스터 말이야?”

“와, 길드가 그렇게나 성장했구나. 내가 그 헌터 길드 창립 멤버였어요. 길드원의 자격으로 라미아스와 처음 만났고요.”

“허얼? 진짜?”

“네, 진짜요. 하하, 이런 얘기들 하니까 진짜 기분 이상하다. 그래도 여기선 숨겨야 한다는 제약은 없어서 좋네요.”

엘은 당시의 이야기를 잘 언급하는 편이 아니었다. 떠올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그동안 지닌 제약 때문에 습관이 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어색한 듯 후련하게 웃는 얼굴을 트로웰은 애달픈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모두 표정이 비슷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요, 라미아스.”

“어어, 말해.”

“나 실은 라미아스한테 묻고 싶은 거 되게 많았거든요. 다비안도 그렇고 크리스도요. 다들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해요. 기억하는 거, 알려줄 수 있어요?”

간절히 올려다보는 얼굴에 라미아스는 허를 찔린 것처럼 짧은 신음을 흘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가 이내 그윽한 표정을 지은 채 엘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명령만 내려줘, 내 귀여운 엘퀴네스. 널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저런 짓만 안 하면 훨씬 호감을 살 텐데. 언제 훈훈했냐는 듯 한순간에 무너진 분위기에 트로웰은 나직이 혀를 찼다. 엘이 질색하며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시벨리우스와 아스모델이 그를 제압해 바닥에 패대기치는 광경이 이어졌다. “이거 놔! 난 엘퀴네스의 계약자라고! 내가 내 정령왕과 교감하겠다는데 왜 방해하는 거야!” 꽥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모두가 무시했다.

“아무튼 방심을 못 하겠네. 라피스 녀석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대부, 이거 버리고 와도 돼?”

황당해하는 시벨리우스에 이어 아스모델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어지간하면 계약자를 챙기는 엘도 굳이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트로웰은 다시금 라미아스의 미래를 예감했다.

“최대한 멀리 갖다 버려.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주변에 결계도 좀 치고.”

“응! 금방 끝내고 올게!”

“아앗, 안 돼! 이거 놔! 엘퀴네스! 엘퀴네스으으!”

끌려나간 라미아스가 빠르게 퇴장했다. 그동안 시벨리우스는 주섬주섬 수납장에서 소금을 꺼내 문 앞에 뿌렸다. 주술에서 소금을 뿌리는 건 악귀를 쫓아내는 행위였다. 내심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던 트로웰이 참견의 말을 얹었다.

“엘, 그건 그냥 페르데스한테 물어봐. 명계에서 일하니까 영혼의 생전 기록 정도는 확인해 줄 수 있을 거야.”

“아, 그래야겠다. 좋은 방법 알려줘서 고마워, 트로웰.”

“별말씀을.”

물론 그가 안타깝게 여긴 건 끌려나간 라미아스가 아니라 상황 판단 못 하고 주접을 부린 드래곤 때문에 들어야 할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엘 쪽이었다. 이윽고 손을 털어내며 들어온 시벨리우스가 트로웰을 향해 물었다.

“차라도 마실래? 마침 좋은 찻잎을 구했거든.”

“나한테 한 말이야?”

“그럼 너지 누구야. 정령왕도 차 맛은 즐길 수 있잖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니 시벨리우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덕에 주전자를 올렸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듯한 모습을 응시한 채, 트로웰은 문득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 사회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그간 꽤 물러졌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물러진 건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왠지 모를 머쓱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 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트로웰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혹한을 거친 땅은 얼어붙은 상흔들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꽃은 피어났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화제의 작가 ‘물망초’ 단독 인터뷰!

올해는 이 사람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취미 삼아 펴낸 한 권의 책이 입소문을 통해 퍼지면서 출간 세 달 만에 30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현재까지 판매량은 무려 천만 부. 매일같이 쏟아지는 주문량에 인쇄소는 밤낮없이 가동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물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독자 투표 인기 작가상, 장래가 기대되는 신예 작가상을 동시 수상했으며 제국의 이름을 드높인 인물에게 수여되는 영예로운 세이크 상도 수상했다. 잡혀 있는 강연만도 수십 개. 사방에서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들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자는 시간도 줄일 정도라고. 다름 아닌 모험 소설 작가 물망초의 이야기다.

본명은 랑시 락테어. 물망초가 필명인 이유는 단순히 좋아하는 꽃이어서다. 정령사라는 독특한 이능자의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내어 제국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그는 장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해지는 대형 신예다. 얼마 전엔 그 자신도 정령사라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오늘은 등단과 함께 저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화제의 물망초 작가를 만나본다.

안녕하세요, 물망초 님.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소설 <엘>의 저자 물망초입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올해는 물망초 님의 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물의 정령사 엘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 ‘엘’은 환상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사실 계속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큰 사랑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엔 작가님도 물의 정령사라고 밝히셔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소설을 구상하신 계기였을까요? 혹시 작가님의 경험담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담은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주인공 엘은 정령왕의 계약자니까요. 전 하급 정령사라서 엘처럼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웃음). 사실 진짜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해도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허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 내용처럼 가능하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정령사 분들의 고초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이참에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엘에 등장하는 상황들은 허구이고,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엘은 소설이라는 점을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

허구라는 건 아쉽지만, 정말 멋진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내용 구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다들 믿지 않으시던데요, 사실 엘은 꿈에서 봤던 이야기였습니다. 꿈에서 아주 아름다운 물의 정령사가 나왔는데, 너무 생생해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꿈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할 정도였죠. 소설 엘은 그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지인의 조언을 받아 몇 가지 재밌어 보이는 설정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만, 대부분은 꿈에서 봤던 내용입니다.

꿈에서 본 이야기라니,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덕분에 저희가 이런 재밌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으니 꿈속의 정령사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저 역시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그런 꿈을 꾼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까는 전부 소설이고, 허구라고 말씀드리긴 했는데요, 어쩌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정령사의 이야기를 접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딘가에는 정말 엘이 실존하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무척 즐거워집니다. 올 한해 제국인들을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 작가다운 답변이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라미아스는 은퇴한 후에 곧바로 사망한 걸로 위장하고 세피온 공작의 삶을 접었다. 그때가 다비안이 막 삼십 대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이후로는 수백 년간 인간 사회에 나가지 않았고 관련 소식도 접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의 말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왜 굳이 명령을 내려달라는 거창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본인도 수소문해야 해서 그런 거였다.

물론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 시절은 미네르바가 배신당한 직후라, 인간 사회에 나가 있던 드래곤들이 전부 귀향하던 시점이었다. 인간에게 치를 떨던 시대인데 하물며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었다. 기가 죽은 라미아스는 그 대신이라며 신문 하나를 들고 왔다. 그가 은퇴하기 직전에 수집했던, 랑시의 인터뷰 전문이 실린 신문이었다. 그 후로 이미 몇 번이나 읽었던 내용을 다시 또 읽었다. 마지막 문단까지 꼼꼼히 다 읽고 나니 긴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딘가에는 정말 엘이 실존하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유난히 눈에 밟히는 문장 하나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라피스는 전부 꿈일 뿐이라고 했지만, 현대의 지인들만큼이나 그들과의 인연 또한 각별했었다. 이미 끝나버린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랑시가 남긴 이 한마디가 그들과 나의 세계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엘, 따뜻한 유자차야.”

“아, 고마워.”

시벨리우스가 건네준 잔에선 달콤한 향이 풍겼다. 한 모금 마시자 몸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맛있다. 역시 과일은 지금이 더 맛있는 거 같아.”

“그렇지? 문명은 4천 년 전이 더 발전했지만 채소와 과일의 품종 연구는 지금이 더 활발하니까. 쿠키도 구웠는데, 먹을래? 따끈따끈해서 지금 가장 맛있을 거야.”

“앗, 먹을래!”

얼른 대답하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은 시벨리우스가 쿠키가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한눈에도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빛깔을 보니 문득 그와 헤어지고 생존으로 요리를 익히던 시절이 떠올랐다. 슬슬 자신감이 붙던 참에 제과에도 도전해본답시고 쿠키를 구워봤는데 몽땅 태워 먹고 장렬히 실패했었다. 겉은 탔는데 속엔 반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신기한 쿠키였다.

그 뒤로 웬만하면 제과 종류는 그냥 사 먹기로 하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제과점의 것도 시벨리우스가 만든 것보다 맛있진 않았다. 항상 그리웠었는데 지금은 언제든 그가 만든 쿠키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비록 다른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근데 시벨, 나 이거 세 개 정도가 한계일 거 같아.”

“괜찮아. 남은 건 아스한테 먹으라고 하면 되니까 무리하진 마.”

“응, 미안. 하아, 인간일 땐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거 하나는 참 좋았는데 말이야. 정령의 몸은 이게 참 문제야. 조금만 먹어도 과식한 느낌이 드는 거. 이 맛있는 걸 고작 한두 개로 만족해야 한다니.”

언젠가의 이프리트처럼 입에 넣자마자 분해해서 없애버리는 방법도 쓸 순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정성스럽게 만든 걸 그렇게 없애는 건 너무 아깝기도 하고. 투덜거리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시벨리우스가 탁자 위에 놓아둔 신문에 시선을 보냈다.

“그건 또 읽고 있는 거야?”

“아, 응. 볼 때마다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하긴 나도 꽤 놀랐으니까.”

그 시절의 나에 관해 사라진 건 단지 기억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날 취재한 기사들이며 관련 문서 기록들도 전부 다 지워졌다. 그래서 더욱 이런 식으로 흔적이 남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뭔가 신기해. 날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난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당연히 엘도 똑같을 거야. 내가 그 증거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만났는데도 친구가 됐는걸.”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당연하지. 네가 나와도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어줬을 때, 난 네가 진짜 엘이라는 걸 확신했어. 기억이 없는데도 약속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웠어. 정작 난 널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그날의 시벨리우스가 떠올랐다. 모든 게 카노스의 장난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후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망연자실한 그를 보니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다가갔었다.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려서 당황했었다. 미안하다고 연거푸 사과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직 혼란스러워서 그렇겠거니 했다.

“네가 분명히 말했는데.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하게 돼도 친구일 거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이라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로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시벨리우스가 쪽지만 남겨두고 떠나기 직전, 그 전날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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