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성인의 외모를 벗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트로웰은 곧바로 엘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엘은 굳이 동선을 숨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가 있는 곳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여행을 시작한 엘은 그의 유니콘과 더불어 대자인 아스모델과 함께 세상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중이었다. 현 여행지는 사막 왕국인 하라툰. 옛 알폰프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왕국으로, 지금은 대부분 생산 기능을 회복한 롬 대륙에서 몇 군데 남겨둔 사막 지대 중 하나였다. 그런데 확인하고 보니 먼저 방문한 손님이 있었다.
“맙소사! 이거 내가 아는 맛이야!”
충격에 빠진 얼굴로 소리치는 남자는 짙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드래곤 일족의 장로이자 현 엘퀴네스의 유일한 계약자. 현재 그는 방금 입에 넣은 음식에 경악하는 중이었다. 그가 요리를 맛보는 것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던 엘이 두 눈을 반짝였다.
“아, 진짜요? 이건 기억해요?”
“틀림없어! 이 식감! 이 온도! 이 단맛과 짠맛이 절묘하게 이루는 조화! 내가 제일 아꼈던 주방장이 딱 이런 맛을 냈었어! 뭐가 불만이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야반도주 해버려서 내가 얼마나 개탄했었는데!”
호들갑스럽게 외친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갈색 머리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그게 쟤였다고? 정말?”
막 완성된 다음 요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시벨리우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나 맞다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넌 유니콘이잖아! 그 주방장은 블루 엘프였다고! 아, 아니다! 블루 엘프로 위장한 유니콘이었나? 헐, 허얼! 진짜 맞나 봐!”
“그러니까 내가 맞다니까. 거기까진 알면서 왜 내 얼굴은 몰라?”
“몰라! 기억 안 나! 그 주방장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도 지금 깨달았다고! 아,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머리를 부여잡은 라미아스는 혼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미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던 트로웰은 쓴웃음을 지었다. 본인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망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이들일수록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나야말로 네가 드래곤인 줄은 몰랐어. 어쩐지 인간치곤 지나치게 강한 것 같더라니. 반역자들 잡을 때도 내가 도와줘서 주술 부분 해결했었잖아. 그건 기억나?”
“헐, 맞아! 그랬었……아, 아냐! 난 아직 인정할 수 없어! 이건 진짜 이상하다고! 내 엘퀴네스야 그 시대 사람이 아니었으니 잊어버린 건 그렇다 쳐! 넌 왜 잊어버렸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마 기억을 지우는 절차가 그에게 적용되지 못한 탓이겠지. 그래서 그도 같이 예외가 된 거야.”
때마침 나설 자리가 마련되는 걸 트로웰은 놓치지 않았다. 자연스레 끼어들어 답한 것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트로웰!”
눈을 동그랗게 뜬 엘의 얼굴에 환한 기쁨이 번졌다. 재회하던 날 그랬던 것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반가움만 가득한 얼굴을 보며 트로웰은 무겁게 웃었다. 말 없는 방문에도 언제나처럼 반겨주는 것에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그래서 가슴에 아릿한 통증도 일었다.
없던 것처럼 지워져 버린 기억. 탁한 데다가 거의 상기되지 않는 그 시절의 순간들은 현실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어도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물며 몇천 년이나 지난 옛일이었다. 그러나 엘은 아니다. 그에겐 불과 얼마 전에 경험했던, 길어봤자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일들이었다. 망각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금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넌 어떻게 날 보며 웃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걸까.
“갑자기 어쩐 일이야?”
“그냥 보고 싶어서.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방해라니, 그럴 리가! 트로웰은 언제나 환영이지. 어서 와.”
하필 더 최악의 기억을 떠올린 시점이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조금 괴로웠다.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벨리우스의 흉흉한 눈길이 오히려 달가울 정도였다. 한때는 그 혼자만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온전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서. 바보 같이 원망조차 하지 않는 엘을 대신해 화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랑 반응이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엘퀴네스? 내가 왔을 땐 왜 왔냐고 했잖아.”
“라미아스가 트로웰이랑 같아요?”
“흐흑, 맞는 말이지만 너무해. 그치만 이런 냉정한 점마저 멋있어.”
“아, 진짜.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어째서? 내 마음을 주는 건데!”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바뀐 성격 진짜 적응 안 되네. 저쯤 되면 환생한 수준 아니야?”
질색하는 엘 옆에서 시벨리우스도 같이 질색했다. 내 성격이 뭐가 바뀌었냐는 항의와 양심이 있으면 과거를 떠올리라는 타박이 맞부딪쳤다.
“네가 얼마나 엘을 알차게 구박하고 부려먹었는지 알아? 그런데 이제 와서 수줍은 척 내숭을 떨어봤자.”
“뭐?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정령왕이 아니라도 이 외모는 완벽하게 내 취향이거든? 내가 이 한 떨기 꽃 같은 미인을 구박했을 리가 없어! 지금 기억이 없다고 지어내는 거지!”
“진짜 심하다. 너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나름대로 근엄하고 위엄도 있지 않았어? 그런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뭘 모르는구나. 내 엘퀴네스 앞에서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소유격 빼고 불러요, 제발.”
실속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다툼이었다. 저 녀석 곧 쫓겨나겠네. 혜안이 아니라도 뻔히 들여다보이는 미래를 짚어보며 트로웰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눈앞에서 촌극이 펼쳐지든 말든 태평하게 과자를 집어 먹고 있던 아스모델이 제 맞은편에 앉은 트로웰을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장난기를 머금고 휘어졌다.
“삼촌, 안녕?”
“그건 또 참신한 호칭인걸.”
“대부의 형제면 나한테는 삼촌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보다 아까 그 얘기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어?”
“무슨 이야기?”
“시벨리우스도 같이 예외가 되었단 거 말이야.”
그제야 무의미하게 이어지던 다툼이 멈췄다. 어려도 마왕은 마왕.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통솔하는 능력이 탁월하구나. 주섬주섬 소파에 앉는 이들을 보며 트로웰은 가볍게 웃었다.
“말 그대로야. 본래 엘은 그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지. 정상적인 출생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고 전부 만들어진 존재였잖아. 그래서 세상의 체계가 오류로 인지하고 관련 흔적을 전부 지우는 쪽으로 수정했을 거야.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하나가 우연히 빠져나간 거야. 그럼 그 자체가 또 새로운 오류가 되지.”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기억들도 같이 지워졌다?”
“일단은 그렇게 보고 있어. 다만 엘과는 달리 그는 실존했으니까, 존재 자체가 지워지지는 않고 오류를 일으키는 부분만 삭제하는 쪽으로 진행된 게 아닌가 싶어.”
깍지낀 손 위에 턱을 괸 시벨리우스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본인도 그럴 거라 짐작하고 있었을 테지만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듣는 건 기분이 남다른 듯했다.
“시공에서 아예 분리되다니, 루세프의 힘으로 이뤄진 봉인이라 성능이 지나치게 좋았어. 운이 좋은 거야. 평범한 봉인이었으면 시간이 멈추지도 않았을 거고 세상의 체제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랬다면 4천 년 후에 늙고 아무것도 모르는 말 한 마리만 덜렁 이 세상에 떨어졌겠지.”
“……말을 해도 꼭.”
“하지만 너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잖아? 초반에 엘한테 꼬장을 부리지 않았다면 더 완벽했을 거라고 후회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
“젠장, 내 생각 읽지 마!”
‘읽은 게 아니라 들린 거야.’
감정의 동요가 크면 읽지 않으려 해도 상대의 생각이 들렸다. 제어하려 노력해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트로웰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의 분노가 합당하다고 여기는 점과는 별개로, 자신만 보면 날을 세우는 유니콘에게 그도 친절하게 굴 마음은 없었다.
문득 돌아본 엘은 찜찜한 얼굴로 착용한 서클렛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몇 차례 바꾸려는 것 같았는데 그 이마를 장식하고 있는 건 여전히 라피스라줄리로 장식된 은테의 서클렛이었다. 달리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하는 것 같더니 끝내 그대로 쓰기로 한 것 같았다. 지금 서클렛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게 어색하다고 변명하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계약자들과 함께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으니까.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카노스의 흔적이란 이유도 있을 터였다.
“그보다 엘, 재밌는 걸 찾았는데 볼래?”
“재밌는 거?”
빙긋 웃은 트로웰이 챙겨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가 운영하는 정보상의 요원 루키아가 적재적소에 가져온 책이었다. 의아해하며 받아든 엘이 표지에 적힌 제목을 훑었다.
“구전설화를 통해 알아보는 정령의 세계? 정령을 주제로 한 건가?”
“단락마다 담고 있는 이야기가 달라. 거기서 물의 정령 단락을 읽어 봐.”
“속성 별로 나뉜 거야?”
흥미로운 얼굴로 장을 넘기던 엘이 곧 그 부근을 발견했는지 시선을 멈췄다. 천천히 읽어내려가는 얼굴에 조금씩 동요가 서리기 시작했다. 책을 건네줄 때부터, 정확히는 이 책을 구했을 때부터 그럴 거라 예상했던 트로웰은 그 광경을 차분히 응시했다.
“트로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지?”
빙긋 웃으며 답하는 말에 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알리사한테 줬던 책이 바로 그거야.”
“아…….”
우연치고는 너무나 공교로웠던 이야기들. 덕분에 생각지 못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했다. 시벨리우스도 알아보았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 뒤로 알아봤는데, 5백 년 전에 딱 세 권만 발행된 거였어. 아마 사료용으로 제작한 거 같아. 혹시 구할 수 있을까 싶어 계속 찾아봤지만 소득이 없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발견했어.”
“그렇구나. 고마워, 트로웰. 사실 나도 그 책은 뭐였는지 계속 궁금하긴 했었어. 정말 이런 내용이구나. 직접 보니까 더 놀랍네. 5백 년 전이면 작성자의 자료를 찾아보는 건 어렵겠지?”
“그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야. 세갈이라는 왕국에서 발행된 건데, 그 나라 자체가 전란으로 사라졌거든.”
“무슨 책인데 그래? 나도 봐도 돼?”
궁금한 얼굴로 끼어든 라미아스에게 엘은 순순히 책을 넘겼다. 기쁜 얼굴로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던 라미아스의 표정이 곧 묘해졌다.
“동화책이네? 어디 보자. ‘소년은 부모도 형제도 없는 외톨이였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소년은 엘퀴네스에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되어주시겠어요? 그러자 엘퀴네스가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아이야.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렴. 내가 널 영원히 지켜주겠다.’……헐. 뭐야, 이거.”
다음 장을 넘기는 손길이 빨라졌다. 전체 두 편으로 구성된 일화는 엘퀴네스가 소년의 아버지가 되어주는 전편과, 소년이 친구로 삼은 백마를 엘퀴네스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후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반적인 내용을 확인하는 내내 라미아스는 연신 헛숨을 들이켰다. 단순히 내용 자체를 황당하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쏟아지는 생각의 동요를 읽어낸 트로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너, 그 책의 저자를 알고 있어?”
“뭐?!”
엘과 시벨리우스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주목받는 것에 당황한 라미아스가 몸을 움찔했다.
“어,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이 책은 모르겠고, 이 이야기의 근본이 된 소설의 원작자를 안다고 해야 하나.”
“소설?”
“어, 소설. 예전에 내 밑에서 일했던 정령사였어. 걔가 글 쓰는 게 취미여서 출간도 하고 그랬거든. 재미 삼아 정령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썼는데 그 안에 들어갔던 설정들 같은데? 아니, 그게 확실해.”
생각지 못한 출처가 밝혀졌으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당황스러운 시선을 교환할 때였다.
“근데 좀 묘하네. 사실 주인공이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랑 친구가 된 백마가 사람으로 변하는 건 내가 던져준 소재거든.”
“……뭐라고요?”
“아니, 그냥. 지나는 길에 우연히 글 쓰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 재밌어 보여서. 이런 설정도 넣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응하더라고. 근데 어떻게 딱 그 부분들만 실렸지?”
혼란스러워하던 엘과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바로 떨떠름해졌다. 트로웰 역시 범인이 너였냐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반응들을 어리둥절하게 여기던 라미아스가 퍼뜩 자각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응? 아? 설마 이거 진짜 있었던 일이야? 엘퀴네스가 전대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불렀었어? 헐, 잠깐. 사람이 되는 백마는 쟤인가? 유니콘? 내가 무의식적으로 쟬 생각하고 던진 소재였던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헐, 뭐야! 내 잠재의식 무슨 일이야!”
생각지 못한 반전에 가장 놀란 건 반전을 일으킨 본인이었다.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 소설이 세상에 나온 것도 세피온 공작일 때였어. 양자 놈한테 작위 물려주고 은퇴하던 시기였을 거야.”
“허…….”
“와, 이거 진짜 미치고 팔딱 뛰겠네. 기다려 봐. 나 그 소설 초본 갖고 있거든? 지금 바로 찾아올게!”
허둥지둥 사라진 라미아스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나타났다. 손에 제법 두툼한 두께의 책 한 권을 쥐고 있는 채였다. 푸른색 표지에 은박으로 된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거야.”
보존마법으로 관리된 책은 지금 막 발행된 새것처럼 깨끗했다. 상태만 보면 4천 년의 것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대의 인쇄와 제본 기술로는 아직 이만큼 세련된 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일단 종이의 재질부터가 달랐다. 고대어로 적혀 있기도 하지만, 당대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건 고대의 서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대중 소설이라 좀 허황된 설정도 많지만 재밌게 잘 썼어. 출간되자마자 초대박을 쳐서 인쇄소가 주문량을 따라가질 못할 정도였어. 이 책의 인기가 정령사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아주 크게 기여했지.”
초판본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면서 라미아스는 한껏 뿌듯해했다. 마지막 장에 저자의 사인도 있다는 자랑도 있지 않았다. 상사의 특권을 알차게 활용한 모양이었다. 책을 건네받은 엘이 조심스럽게 살피다 겉면에 박힌 표제를 확인하고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