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1화
늘 웃고 있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동양인치고는 색소가 옅은 편이라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유독 밝았었다. 친해진 계기조차 떠오르지 않을 만큼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있는 게 당연한 사이였다. 인기도 많고 뭐든지 다 잘해서 왜 이런 녀석이 나와 친하게 지내나 싶었지만, 그래서 더 자랑스럽기도 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수많은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였다. 그리워하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기억 속에 묻어뒀던 단짝이었다. 그 태진이가 이프리트였단다.
한꺼번에 교차하는 수많은 기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프리트도 그랬다. 그처럼 다정했었다.
“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게.”
“혼자서 힘든 일은 겪지 않게 할게. 언제든지 마음껏 의지해.”
그가 축복과 함께 건넸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은 전부 다 지워졌을 텐데. 나에 대한 건 전부 다 잊었을 텐데도. 그런데도 이프리트가 약속을 지킨 거였다. 그가 말한 그대로,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혼자 두지 않았던 든든한 친우였다.
“이제 보니 나보다 그쪽이 더 적절한 예시가 되겠군. 환생한 그는 어땠었지? 모든 기억을 잃고 다른 외모가 된 그는 네가 아는 이가 아니었나?”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모르고 있었을 땐 생각지 못했지만 알고 나니 분명히 보였다.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었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필연인 경우가 더 많지. 그 녀석과는 깊은 인연을 맺었으니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 거다.”
“저, 정말?”
“운명의 실은 복잡하고 교묘해서 한번 강하게 얽히면 쉽게 끊어버릴 수가 없다. 꼭 몇 번씩은 마주치게 된다고 하더군. 아마 찾아보면 겹치는 인연이 또 있을지도 모르지.”
아아, 그게 정말이었으면 좋겠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먹먹해졌다. 울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엘뤼엔이 말했다.
“이사나도, 네가 아꼈던 다른 이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이어질 인연이라면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는데.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위로가 이번엔 전혀 다르게 와 닿았다. 포기와 체념에 가까웠던, 영원히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 여겼던 공허한 공간에 꽃처럼 희망이 피어났다.
끝이 아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쭉 모두가 날 기다려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니, 그들도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설레는 기분으로 고개를 들고 나를 응시하는 시선들과 마주했다. 응원하듯 미소지은 얼굴들을 보며 나도 같이 웃었다.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겠다.
모두를 다시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다.
* * *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운을 뗀 건 시벨리우스와 둘이서 공원을 걸을 때였다. 재상이었던 아셀이 생전에 조성했다는 국립 공원엔 날개를 활짝 펼친 새하얀 유니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자신을 모델로 했다며 푸념하는 척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던 시벨리우스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뭔데 그래, 엘?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심각한 얘기거든. 어쩌면 이 얘기를 듣고 나면 네가 날 원망할지도 모르겠어.”
“말도 안 돼. 내가 왜 엘을 원망하겠어.”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차분히 답한 말에 시벨리우스도 긴장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내 심호흡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알려야 할 일이라면 빠를수록 좋았다.
“우리가 예전에 같이 갔던 식당 기억나? 네가 사과 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물어봤던 가게 말이야.”
“사과 파이? 아아, 기억나. 아렐과 마주쳤던 그 식당 말이지? 어릴 때 먹었던 사과 파이랑 똑같은 맛이어서 내가 레시피를 물어봤었지.”
고개를 끄덕인 시벨리우스가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추억을 공유하는 걸 기뻐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하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대신 한 번 더 심호흡했다.
“그 사과 파이가 왜 어릴 때 먹은 것과 같은 맛이 났는지 알아?”
“응? 왜라니?”
“실은 그때 우리가 만난 유니콘은 아렐만이 아니었어. 그 식당의 사장님도 유니콘이었어.”
“뭐?”
그제야 시벨리우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어. 설령 정체를 감췄어도 유니콘이었다면 내가 알아봤을 거야.”
“아마 평범한 유니콘이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몰라. 그 사람은, 스스로 힘을 버렸거든.”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하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지워졌다. 스스로 힘을 버렸다는 말에서 떠올린 사람이 있는 듯했다.
“설마.”
신음을 삼키듯 중얼거리는 것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숨을 삼킨 시벨리우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혼란스러운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보며 재차 고백을 이어갔다.
“그 사람은 널 알아봤었어.”
“…….”
“당시에 알려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끝내 말하지 못했어. 그가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내가 그를 위해서 알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미래를 바꾸지 않으려던 것도 있어. 미안해.”
시벨리우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계속 입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 욕해도 돼.”
“아니, 엘. 아니야.”
쓴웃음을 지은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잘했어. 네 판단이 옳았어. 거기서 네가 사실을 알려줬으면 미래가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난 평생 날 버리고 떠난 형님을 원망하며 살아왔었어. 아마 그때 알았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 분명 그에게 온갖 모진 말을 다 퍼부었겠지. 내가 모르고 있어서, 덕분에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그게 더 괴로웠을 거라고, 낮게 말하는 그는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이었다.
“형님에 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는 게 없었는데. 이제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 생겼네. 고마워, 엘. 그날을 좋았던 날로만 남을 수 있게 지켜줘서.”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웃으며 대화하던 형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벨리우스가 레시피를 받아 적으며 이것저것 물을 때마다 리글레오는 기뻐 보였다. 동생이 말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순간을 잊지 않도록 눈에 새기는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는 그 시선을 몰랐던 것 같지만.
“그 사람이 너한테 남긴 말이 있어.”
멈칫한 시벨리우스가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은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어.”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조금 크게 떠진 눈동자에 이내 물기가 감돌았다. 그 상태에서 시벨리우스는 허탈한 듯이 웃었다.
“정말 끝까지 너무한 사람이야. 이러면 정말로 원망할 수가 없잖아.”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긴 하지만 탓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움과 후회, 아쉬움. 한꺼번에 떠오른 수많은 감정을 꾸역꾸역 삼켜낸 그가 다시금 숨을 크게 한 번 토해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는지 다음에 고개를 들었을 땐 한층 홀가분해 보였다.
“엘, 실은 나도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보여줄 거?”
다음 순간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해 갔다. 피부색이 희어지면서 귀의 형태가 동그래졌다. 반대로 은발은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깨끗한 갈색이었다. 파랗던 눈동자도 녹색으로 변했다. 언젠가의 아셀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리글레오가 지니고 있던 것과 똑같은 색깔이었다.
그의 은발과 벽안은 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이 될 때도 색은 변하지 않았었다. 당황하고 있으니 시벨리우스가 알아볼 줄 알았다며 웃었다.
“이렇게 된 지 꽤 됐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어진 설명은 놀라웠다. 앞으로 룬의 혈통을 이어가는 문제를 두고 루세프가 그에게 결정할 권한을 줬다는 모양이다. 그에 시벨리우스는 아예 룬 자체를 없애는 쪽을 택했다고. “그래서 이제 나도 룬이 아니야.” 머쓱하게 웃는 그는 오랜 멍에를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한 얼굴이었다.
“큰 결심을 했네. 룬의 힘을 각성했으니 더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복수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겠어. 다들 그렇게 룬에 집착했으니 아예 사라져버리면 통쾌할 거 같았거든. 좀 유치하지?”
“아니, 전혀.”
시벨리우스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충분했다. 그 외의 어떤 이도 이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단호히 답한 말에 시벨리우스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그 머리색도 잘 어울린다.”
“정말? 다행이다. 실은 아직도 어색해서 계속 주술을 걸어두고 있었거든.”
“아냐, 정말 잘 어울려.”
거듭 멋지다고 하니 시벨리우스는 앞으론 이렇게 다녀야겠다며 흐뭇해했다.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동조했다.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제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럴 거야, 엘. 같이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자. 나중에 다시 돌이켜도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도록. 그래서 그땐 참 즐거웠다고만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야.”
“응, 다시 한번 잘 부탁해, 시벨.”
“나도. 잘 부탁해, 엘.”
악수를 나눈 후에 마주 보고 웃었다. 무엇이 시작이고 끝인지도 알 수 없던, 엇갈리던 시간이 이제야 한 자리로 모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냐면―.
“전 엘이 그렇게 말하길래 한 몇십 년은 같이 여행이라도 다니실 줄 알았습니다만.”
엎어진 채로 물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나를 향해 미네가 말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더니 벌써 이틀째 이러고 있자 측은해하는 시선이었다.
“고작 2년 만에 그만두신 건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그 말대로였다. 시벨리우스와 함께 세계 여행을 시작하긴 했는데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심심해할 거면 왜 그만뒀냐는 시선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도 원랜 더 같이 놀고 싶었지.”
“그런데요?”
“아스가 너무 서운해해서 말이야. 마왕인데 우리랑 같이 다닌다고 아크아돈에 눌러앉아서 마계에 돌아갈 생각을 안 하잖아. 마계는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
“아, 그런 문제였군요.”
“오죽하면 데르온이 혈서까지 보냈다니까? 그거 들고 온 마족이 얼마나 벌벌 떨던지. 차마 불쌍해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시벨이랑 같이 보내버렸지, 뭐.”
곧 죽어도 혼자선 안 돌아간다고 우겨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소중하고 귀여운 대자이지만 이번엔 정말 얄미웠다. 쥐어 박고 싶다는 얼굴로 이를 갈던 시벨리우스도 어쩔 수 없이 체념했다. 어느 정도 바쁜 상황만 정리되면 다시 다 같이 놀자고 기약하긴 했는데, 그게 몇 년 후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 이프리트와 트로웰은 유희를 시작했다. 이프리트는 귀족으로 지내는 중이고, 트로웰은 정보상을 운영하는 중이라고 했다. 둘 다 바빠 보여서 놀아달라고 조를 수가 없었다. 덕분에 미네만 붙들고 늘어져 있으니 그의 한숨 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중이었다.
“미네, 나 심심해.”
“계약자에게 가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싫어. 라미아스는 날 보면 자꾸 이상한 숨소리를 낸단 말이야.”
“그건 확실히 싫겠군요. 그럼 다른 드래곤에게 놀러 가시는 건요? 디아곤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여기선 한 번밖에 안 본 사이라 좀 어색해. 그리고 디아곤이 지금 놀 기분이 아닐 거야.”
“아, 그렇겠군요. 그 후로도 쭉 여전한 겁니까?”
미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란타샤의 레어에서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자연 현상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란타샤의 신체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게 깨어나려는 징후인지, 아니면 영원한 잠으로 들어서는 건지 아직 알 수가 없어 디아곤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어쨌든 자꾸 저 부르지 마시고 나가서 아무나와 노십시오. 슬슬 귀찮습니다.”
“너무해.”
야박한 말에 축 늘어졌지만 미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귀찮았으면 벌써 돌아갔을 텐데 계속 곁에 있어 주는 걸 보면 진심은 아니었다. 괜히 혼자 실실거리다 고요히 앉아 있는 미네를 다시 돌아보았다.
“근데 미네는 유희 안 해?”
“음,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를?”
“인간이 저를 소환해주기를요.”
이건 또 의외의 대답이었다. 물결에 늘어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인간과 계약하고 싶은 거야?”
“네, 실은 엘이 부러웠거든요.”
“어? 나?”
“유희는 말 그대로 유희라서 연극을 하는 기분에 더 가깝잖습니까? 그 안에서 보이는 모든 것은 진짜 제가 아니죠. 그에 비해 같은 유희라도 인간과 계약해서 그 삶에 섞이게 되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인 것 같습니다.”
달을 닮은 은백색 눈동자가 잔잔한 빛을 머금고 나를 응시해 왔다.
“한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그리워하면서 또 희망을 찾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와도 진정한 교감을 이룰 수 있구나 싶었죠. 물론 엘이 특별한 상황이었던 덕분도 있겠지만, 저도 그런 감정들을 겪어보고 싶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하니 뭔가 거창해 보이네.”
“거창한 거 맞습니다. 흔히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닌걸요.”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멋쩍게 웃었다. 최근 몇 년간의 여행으로 더 실감했다. 이사나와 다닐 때나 내가 인간이 되었을 땐 전혀 몰랐는데, 셋이서만 다녀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일단 다들 이 세계에 적을 두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한 발짝 떨어져 관람하는 기분이 더 강했다. 심지어 신기할 정도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간일 때는 툭하면 여기저기 휘말렸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똑같이 다니는 데도 이런 차이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아마 유희를 해도 이런 상태를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속해 있는 세상이 달라서 그럴 거다. 그러다 인간과 계약하면 그의 운명에 섞여들게 되어 같이 영향을 받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행할 때 현지인과 어울리게 되면 그 나라의 더 다양하고 깊은 모습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렇게 말하니 나도 인간과 계약하고 싶다. 누가 또 소환해 주지 않으려나.”
벌렁 드러누우며 중얼거리니 미네가 동정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 나도 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거. 이사나만 해도 엄청난 요행이 있었던 건데, 그런 기적이 또 일어날 리가 없었다.
“인간은 둘째치고 드래곤이라도 소환해 줬음 좋겠어. 계약자가 한 명밖에 안 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아직도 다들 장로의 눈치를 봅니까?”
“그렇다니까. 라미아스는 아니라고 우기는데 내가 보기엔 분명 협박했어. 대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
“힘내십시오. 언젠간 용기 있는 누군가가 소환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드래곤은 나이 먹을수록 강해지는데 라미아스가 최연장자다. 심지어 건강 관리도 아주 잘 해와서 앞으로도 몇천 년은 더 거뜬히 살 것 같다고 했다. 계약자 복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애먼 허공만 노려보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다. 잠시 말이 없던 미네가 나를 콕콕 찔렀다.
“엘, 실례지만 확인해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뭘?”
“저 앞에 떠오르고 있는 거, 소환 마법진 아닙니까?”
“어? 뭐라고?”
당황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뭘 말하는 건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바로 정면에서 보였으니까. 새하얀 물거품과 함께 물속에서 파문을 그리며 등장하는 화려한 황금빛의 문양들.
<물의 왕이여, 부름에 응답하소서.>
그리고 나를 부르는 음성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아 숨을 꿀꺽 삼켰다. 틀림없었다. 소환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