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9화
반가운 재회? 너무 자연스럽게 건네받아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파이어 버스터를 넘겨준 후였다. 나한텐 그렇게 말이 많던 파이어 버스터는 트로웰에게 가서는 아주 조용했다. 황당해하는 내게 트로웰이 거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헛웃음을 삼킨 후 조금 전에 한 말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젠장, 너무 늦었잖아! 벌써 돌아가 버린 건 아니겠지? 황성엔 대체 왜 방어 결계 따위가 있는 거야!”
“어리석은 의문이네. 당연히 마법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거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 것 같냐!”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과 함께 다투는 말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피하려다가 멈칫해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목소리들이 낯익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잠시 후 정원의 담벼락 안에서 두 남자가 나타났다. 한쪽은 화사한 은발에 푸른 피부를 지닌 엘프였고, 다른 한쪽은 새카만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전신에 흐르는 짙은 기운만 봐도 마족이었다.
“어…….”
생각지 못한 등장에 멍해 있는 사이, 그들도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엘!”
“대부!”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는 걸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시벨리우스와 아스모델이었다.
“너희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아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은 힘에 잠시 숨을 삼켰다가 이내 웃으며 마주 안았다. 세상에,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보게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대부다. 대부야. 이제 돌아온 거지? 다시는 떠나지 않는 거지?”
“응, 아스. 다녀왔어. 다시는 안 떠나.”
“계속 기다렸어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우리 아스, 많이 그리웠어.”
“정말로?”
“그럼 정말이지.”
다독여 주며 답하고서야 아스가 살짝 몸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아스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자랐나? 그래도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성격도 여전한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너한텐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는데, 이렇게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아냐,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대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 고마워, 대부.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울먹이는 말에 나 역시 눈물이 솟았다. 옆을 돌아보니 시벨리우스도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돌아왔어, 엘. 기다렸어.”
어색하게 웃으며 건네오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유니콘의 등장에 참 많이 당황했었지. 다짜고짜 사과하는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는데, 이제야 그 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
“시벨, 너…… 같이 가자니까. 편지만 남겨두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간신히 한 마디 내뱉으니 마주한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역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떨리는 숨을 삼킨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환송회도 못 하고 보내서 그 후로 얼마나 마음이 쓰렸는지 알아? 다시는 그러지 마.”
“응. 응, 엘. 나 반성 많이 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어떻게든 잘 참는 것 같더니 마지막에는 기어코 표정이 무너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울기 시작하는 그를, 두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내가 널 너무 힘들게 했지. 내가 먼저 친구 하자고 해놓고 너무 무책임했다. 그치? 그동안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많이 후회했어.”
“아냐, 엘.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됐어. 이걸로 됐어.”
고개를 저으며 우는 그를 따라 나도 울었다. 이제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오판이었다. 아스가 그런 우리를 같이 부둥켜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온기를 나누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했다. 마주 보는 얼굴마다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채라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다시 보니까 너무 좋다.”
과거에서 지낸 마지막 1년간은 자주 같은 꿈을 꿨었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나를 모두가 반겨주는 꿈.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이사나와 알리사를 비롯한 모두는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모두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고, 반대로 내가 경험한 일도 이야기했다. 정말 과거로 간 거냐며 신기해하는 표정들이 닿으면, 시벨리우스와 남몰래 같은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만의 시선을 주고받기도 했다.
비록 상상했던 그림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돌아왔다고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게 너무 고마웠다.
“나도 정말 꿈만 같아.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정말 걱정했어. 나도 헤어진 뒤의 일은 알지 못하니까. 설마 거기서 3백 년이나 갇혀 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시공간 안의 시간 오차 때문이었던 거 같아. 실제로 내가 거기서 머물렀던 기간은 4년 정도였어.”
그 말에 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울상이 된 아스가 꼼지락거리며 내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럼 많이 놀랐겠다, 대부…….”
“그렇긴 한데, 이제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어떻게 같이 왔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
진작 묻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잠시 아스와 시선을 교환한 시벨리우스가 쑥스러워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이사나가 남긴 책에 나만 열어볼 수 있도록 주술을 걸어둔 게 그였던 모양이다. 펼쳐지면 그에게도 신호가 가는 구조였다고 한다. 놀라운 건 시벨리우스가 그동안 마계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스에게 전해줄 게 있어 찾아간 김에 겸사겸사 마왕성에서 머무르게 되었다고.
“아스가 잘 대해줬어?”
“그럼~ 당연하지, 대부. 국빈으로 대접하고 성에서 제일 좋은 방도 줬어. 심심해할까 봐 매일 놀러도 가고 불편한 거 없는지 살펴봤어. 나 왕이라서 엄청나게 많이 바쁜데. 시벨의 일은 부하들 안 시키고 다 내가 직접 챙겼어.”
“아이구, 그랬어? 우리 아스 너무 기특하네.”
머리를 쓰다듬으니 아스가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그대로라 참 좋긴 한데, 이렇게 귀엽고 착해서 마계는 잘 다스리는 건지 내심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진짜 가증스러워서 더는 못 참겠다. 엘, 이 녀석 마냥 귀엽게 보지 마. 대부 앞이라고 내숭 떠는 거니까.”
“어? 그래?”
“그렇다니까. 쟤 마계에서 별명이 소나기인 거 알아? ‘소중한 목숨 아끼고 싶으면 나대지 말고 얌전히 기어라’라는 뜻이야.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성격 한번 진짜…….”
“앗! 대부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이미지를 망칠 작정이야?”
아니, 소나기가 그런 뜻이었어? 생각지 못한 해석에 멍해져 있는 사이 아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시벨리우스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으로 피식거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어? 누가 뭐라고 해도 죄다 뻔뻔하게 무시하더니 그래도 엘 앞에선 창피하긴 한 모양이지? 이참에 반성 좀 해.”
“……비열한 퍼런 엘프.”
“뭐? 야, 내가 왜 비열해! 그리고 너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치사한 퍼런 엘프! 자기는 대부랑 둘이서만 아는 얘기 하더니! 나는 나쁘게 만들고!”
“너 진짜!”
어느새 다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툭하면 옥신각신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도 함께 지낸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 예전보다 사이가 더 편해졌다는 게 훤히 느껴졌다.
웃음을 삼키고 있으니 아스가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시작했다. 난 아무나 막 대하는 게 아니다, 가끔 말을 안 듣는 애들이 있어서 본보기 삼아 처벌을 좀 강하게 했더니 그거 보고 오해하는 거다. 마족은 처벌을 강하게 안 하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기타 등등. 당연히 이해해 줄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하지만 하소연을 이을 때마다 시벨리우스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데르온은 어떻게 지내?”
“부하도 잘 지내. 같이 데려올까 했는데 지금은 카르텐을 비우기 어려운 상황이라 그냥 우리만 왔어. 마신이 계시지 않아서 잠시만 관리가 소홀해져도 숲이 메말라버리거든.”
“아…… 아직도 새 마신이 정해지지 않았나 보구나.”
“응, 안 그래도 신계에 문의를 해봤는데 마계도 대차원이다 보니까 감당하려면 최고신 급은 되어야 한대. 그렇다고 다른 최고신들이 겸하자니 이미 담당한 부분이 커서 그것도 어렵고. 현재로서는 형벌의 신이 마신을 겸하게 될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해.”
“헐, 정말?”
그렇지 않아도 그날 잠시 달래주러 온 이후로 엘뤼엔의 얼굴을 보기가 힘든 참이었다. 원래도 일이 많은 편인데 날 데리러 오느라 몇 년간 자리를 비우기까지 하는 바람에 도저히 틈을 내기가 힘들 만큼 바쁜 상태라고 들었다. 마계의 업무 중 일부를 돕는 것뿐인데도 이 정도인데, 아예 그가 마신이 될 수도 있다니. 이러다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왜 카노스는 그렇게 한가했던 거지?
“뭐가 됐든 얼른 정해졌으면 좋겠어. 마신의 힘이 있어야 알이 안정적으로 태어나는데 지금 그것도 같이 동결됐거든. 마족의 숫자가 너무 줄었어.”
“아, 그렇겠구나. 3백 년간 알이 하나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아직 카노스 님의 영향력이 좀 남아 있어서 몇 개 정도는 더 태어나긴 했어. 하지만 그걸로는 터무니없이 부족…….”
순간 설명하던 아스가 움찔하더니 표정이 돌변했다. 어딘가를 다급히 돌아보는 행동에 나도 당황해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야, 왜 그래?”
시벨리우스도 이상하게 여겼는지 아스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굳어 있던 아스가 그 얼굴 그대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마신의 힘이…….”
“뭐?”
때맞춰 내 등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아스와 시벨리우스를 만난 기쁨에 빠져 있느라 잠시 같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던 트로웰이었다. 아니, 아예 자리를 비웠던가? 그러고 보니 둘을 만난 이후로 쭉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너……!”
시벨리우스도 놀란 얼굴인 걸 보니 역시 자리에 없었던 게 맞았다.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와 눈을 맞춘 트로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긴 한데, 잠시 정령계로 돌아가자.”
“어? 정령계? 왜?”
“반가운 손님이 와 있어.”
정령계에 올 만한 손님이라면 엘뤼엔인가? 조금 전 아스가 마신의 힘을 언급한 게 걸렸다. 지금도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엘뤼엔이 마신이 된 건 아니겠지?
일단 가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둘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들 금방 헤어지는 걸 서운해했지만 곧 다시 만날 날짜를 정하는 걸로 타협을 봤다. 사실 그들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온 참이라 다시 돌아가 보긴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사흘 정도 후에 샴페인 용병단의 비석이 있는 광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트로웰과 함께 정령계로 귀환했다. 화사한 에바스 에덴의 전경을 배경으로,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드러지게 깔린 보석 꽃들의 화려함이 무색하리만치, 그보다 더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아버지!”
“어서 와라, 엘.”
역시 손님은 엘뤼엔이었구나. 한달음에 달려가 폴짝 안기니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새 더 응석이 늘었군.”
“헤헤헤~!”
“아크아돈은 다 둘러보고 온 건가?”
“응, 전부는 아니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났고, 마음의 정리도 끝냈어.”
“그래, 잘했다.”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엘뤼엔이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령왕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만의 신력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혹시 마신이 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딱히 기운이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볼 생각으로 그와 눈을 맞췄을 때였다.
“아버지, 나 물어볼 것이…….”
“끝내긴 누구 마음대로 끝내? 아직 나랑은 만나지도 않은 주제에.”
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드는 게 더 빨랐다. 심지어 잘 아는 목소리였다. 당황스러운 기분에 황급히 돌아봤다가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렸다.
처음엔 내가 이제 헛것을 보기 시작하나 싶었다.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인데,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라피스?”
“오냐.”
당연한 듯 이어지는 대답에 다시 숨을 삼켰다.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자세도, 상대를 오만하게 깔아보는 표정도 그대로였다. 본인도 인정한 판이니 다른 사람이라고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정말 라피스가 맞았다. 환생하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걸까? 하지만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붉은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루비처럼 선명한 붉은빛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칠흑보다 새카만 어둠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그 모습?”
영혼이어도 머리 색이 바뀌진 않을 텐데? 당황해서 물으니 그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짓궂은 표정이었다.
“뭐인 것 같은데?”
“혹시 혼이 오염됐어? 영혼의 보석으로 지낸 기간이 너무 길었나?”
“……그렇게 나오기냐.”
라피스의 표정이 바로 떨떠름해졌다. 뒤에서 트로웰은 웃음보가 터졌는지 어깨를 떨면서 나무를 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황당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라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대체 무슨 관점으로 보면 그런 식으로 해석이 돼? 뭐, 이게 너답기는 한데.”
“갑자기 검은색으로 변했으니 그렇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명계로 바로 보내졌을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 갔더니 내 지난 전생들이 전부 떠오르더라.”
“그렇구나. 그럼 이제 환생하는 거야?”
“이미 환생했는데, 뭘 또 환생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