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6화
“그 정도면 영주가 싫어하진 않았어?”
“싫어할 것도 없지. 어차피 본인의 업적인걸.”
“무슨 말이야?”
“휴센 드 아우레스 공작. 초대 영주의 이름이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휴센이라면 분명 그 휴센일 텐데, 그 이름 뒤에 붙어 있는 호칭들이 전부 낯설었다. 어떻게 된 건가 했더니 이사나가 남긴 작품이었다. 공신이자 소드 마스터가 된 위대한 검사에게 포상의 의미로 공작 작위와 함께 북부의 영토를 내렸다고.
휴센 본인도 새 이름을 어색해해서 아우레스라고 불릴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공작이란 자리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대리인에게 행정을 맡겨두고 쭉 용병으로 지냈다. 다른 샴페인 용병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작 몇십 년간 아무도 영주가 누군지를 몰랐다고 한다. 말년에나 정식으로 신분을 밝혔는데, 자식들조차 그때 알았다고 하니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영주 일가가 활약하기 시작한 건 후세 때부터야. 하지만 공국의 주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영주로 꼽는 건 항상 휴센이라고 해.”
동료였던 이들이라 그런지 설명하는 트로웰의 표정에도 애정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이후에도 교류했는지 물었더니 그러진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지내는지 틈틈이 살피긴 했지만 굳이 만나진 않았노라고. 하지만 그들의 임종 때엔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고 했다.
“모두 노환으로 눈을 감았어. 이릴은 용병답지 않은 죽음이라며 투덜거리더라.”
말만 들어도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숨을 거둔 건 이릴이었다고 한다. 그 뒤를 따르듯 남편인 헤롤이 이듬해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사망 후 부쩍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쉐리도 3년을 버티지 못했다. 마이티는 장수했지만, 그래도 가장 오래 산 건 휴센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모두를 따라가고 싶어 했지만 소드 마스터가 된 초월자의 육체가 그의 안식을 방해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찾아들었을 땐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매일 쉐리의 무덤 앞에서 시간을 보내다, 그 앞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들으니 작별의 무게가 더 크게 와 닿았다. 내가 만약 이곳에 남아 있었어도 하나둘씩 떠나가는 사람들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엘뤼엔의 말대로 내게는 이편이 나았던 건지도 모른다. 이윽고 회상에서 빠져나온 트로웰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말년에 남긴 비석도 있는데. 볼래?”
“정말? 볼래.”
그가 날 데려간 곳은 번화가 앞의 광장이었다. 공원처럼 꾸며진 장소 한가운데에는 각자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섯 용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샴페인 용병단의 모습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봤다. 그때쯤엔 트로웰은 이미 이들 곁을 떠난 지 오래되었을 텐데 ‘매튜’의 동상도 잊지 않고 챙겼다. 반갑고 신기한 기분으로 살피고 있으니 그 앞에 놓인 비석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항목별로 적혀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직접 새긴 건지 필체가 전부 다 달랐다.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1. 우리 정령왕 봤다! 놀랐지?
2. 실은 더 큰 비밀도 있지롱. 알고 싶으면 금화를 바쳐라!
3. 위에 쓴 말 무시해라.
4. 3번 말은 더 무시해라!
5. 4번 말을 따르는 놈들은 하극상으로 간주한다. 나 영주다.
6. 비석에다 이딴 거 적지 마. 유치하게.
7. 라고 이릴 언니가 투덜거렸습니다.
8. 우리 여사님은 무섭다. 모두 알아두도록.
9. 라고 어디의 잡혀 사는 헤롤 씨가 비굴하게 말했습니다.
10.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공작 부인.
11. 이건 텄어. 무효야. 다시 만듭시다.
12. 애초에 네가 시작한 거잖아, 헤롤.
13. 처음부터 웃기는 문구를 적은 건 댁이야, 영주님아.
14. 나이는 제발 곱게 먹자.
15. 난 이미 훌륭한 어른인데? 헛소리 마. 다들 그만하라고! 이 주책맞은 노인네들아!
웃음이 터져 나와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마지막 부근에선 자리가 부족해서인지 한 줄에 여러 사람이 쓴 것 같았다. 그 시절 툭하면 다투던 모습들이 절로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참 여전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들 장난으로 새긴 건데 참모가 그대로 보존해버렸어. 설마 이게 정말로 광장에 세워질 줄은 그들도 몰랐겠지. 애원하고 빌고 없애려고 부단히 시도했는데 참모가 철벽 수비로 사수했어.”
“그 참모란 사람 누군지 참 마음에 드네.”
“너도 아는 사람이야.”
“어? 내가 안다고?”
놀라서 바라보니 트로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들이 여기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건 그 참모의 역할이 가장 컸어. 지금도 아우레스 공작 가문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인간이 아닌 거야?”
다시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간이 아니라니.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샴페인 용병과 연이 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마족들은 모두 마계로 돌아갔으니 아닐 거고, 디아곤이나 메세테리우스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아, 혹시 시벨리우스?”
“직접 확인해 봐.”
가볍게 웃은 트로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이륜마차가 막 도착한 상태였다. 그 앞에 있는 의상점에 용무가 있는 듯했다. 산뜻한 금발 머리의 소녀가 먼저 내렸고, 이어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내렸다. 그런데 소년의 모습이 상당히 눈에 익었다.
“……오칼?”
흑발이었지만 분명히 오칼이었다. 쟤가 왜 저기에 있지? 당황해서 돌아보니 트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뤼엔이 만나도록 인도한 것 같아.”
“아버지가?”
“당시 곤경에 처한 휴센 일행을 도울 수 있는 적임자였거든. 나도 양념을 조금 추가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돕기로 한 건 오칼 본인의 의지야.”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직 이쪽을 알아차리지 못한 오칼은 먼저 내린 소녀에게 온통 신경이 팔려 있었다.
“아가씨, 저보다 먼저 내리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기다리시라니까요?”
“됐다니까? 나도 팔이 있는데 문 정도야 내 손으로 열 수 있거든?”
“하지만 귀족의 체면이…….”
“그놈의 체면! 그거 안 지킨다고 내가 귀족이 아니기라도 해? 마음대로 떠들어대라고 해. 어차피 뒷말하는 애들은 내가 귀족답게 굴어도 용병의 핏줄이니 어쩌니 떠들어 댈걸?”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한숨을 내쉬던 오칼이 문득 멈칫했다. 드디어 나를 발견한 거다. 그는 처음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눈에 띌 정도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칸?”
“아, 저, 그, 아, 아가씨! 제가 잠시 급한 일이 생각나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없이도 괜찮으시죠?”
“뭐? 그게 뭐야, 같이 골라주기로 해놓구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몸을 돌린 오칼이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그런지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무, 물의 왕과 땅의 왕을 뵙습니다.”
그대로 넙죽 엎드리려는 걸 말렸다. 너무 과한 인사 같아서 막은 것뿐인데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게…….”
“트로웰의 말로는 네가 휴센 일행을 도와줬다던데. 혹시 나 때문이야? 내 화를 풀게 하려고?”
“……처음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반성의 의미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즐거워서 하고 있습니다.”
눈빛이 맑은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소탈해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조금 전 그가 있던 의상점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깐 뒷모습만 보여서 몰랐는데 정면을 보니 휴센과 쉐리를 섞어 놓은 듯이 생겼다. 이사나의 후손은 하나도 닮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는데, 이쪽은 너무 후손다워서 신기했다. 3백 년 후의 후손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의 딸이라고 해도 믿을 거 같았다.
“저 여자애가 휴센과 쉐리의 후손이야?”
“네, 맞습니다. 아우레스 소공녀이자 차기 영주로 내정된 후계자입니다.”
“둘을 많이 닮았네.”
“그들의 핏줄이 좀 강한 것 같습니다. 태어나는 아이마다 쭉 다들 저렇게 생겼습니다.”
그 말엔 웃음이 나왔다. 둘 다 인물이 좋았던 덕분인지 그대로 이어져 온 후손의 외모도 빼어났다. 이릴과 헤롤의 경우엔 안타깝게도 아버지를 닮은 쪽으로 계보가 이어졌단다. 그래도 큰 키와 덩치를 물려받아서 본인들은 오히려 만족하고 있다고.
놀랍게도 마이티 역시 후손을 남겼다. 꽤 오랫동안 노총각으로 지냈지만 기적적으로 마음이 맞는 반려를 맞이하게 된 것 같았다. 단지 그 후손들은 백 년 전쯤 이주해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다들 잘 살고 있을 겁니다. 조상을 닮아서 다들 제 앞가림들은 잘했습니다.”
“……그렇구나. 샴페인 용병들은 내게 각별했던 사람들이었어. 후손들을 돌봐줘서 고마워.”
“아, 아닙니다. 그들과는 저도 각별했습니다. 정말 제가 즐거워서 하고 있습니다.”
쩔쩔매는 오칼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었다. 그 이마가 깨끗한 것을 보고 물었다.
“아직 물의 정령과 계약은 안 한 모양이네?”
“그게…….”
주춤거리는 모습만 봐도 이유야 뻔했다. 덜컥 계약하기엔 염치가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내가 그만 덮는다고 했잖아. 이런 모습을 봤으니 굳이 라미아스와의 친분이 없었더라도 덮었을 거야. 사실 그날의 일은 네게도 가혹한 사고였겠지. 반성한 거 잘 알겠고, 이 이상은 바라지 않아. 그러니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진 마.”
“…….”
오칼이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혹시 굳이 계약이 필요하지 않은 거라면 상관없지만.”
“아, 아닙니다! 계약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가에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진심으로 즐겁다고는 하지만 그간 마음속에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었을 거다. 그 어깨를 천천히 다독여주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내 마음이 더 후련해졌다.
“이참에 나랑 계약할래?”
반쯤은 충동적으로 건네본 말이었다. 그러자 토끼 눈이 된 오칼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단지 놀라서 그런 거라기엔 이어지는 반응이 좀 이상했다. 얼굴이 빨개졌다가 순식간에 파리해지더니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
“오칼?”
“앗, 죄송합니다! 절대 싫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영광스럽고 바라마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랬다가는…… 그, 조부가 이번에야말로 절 죽일 겁니다. 틀림없이, 반드시, 그럴 거라서……. 사, 사실 여기서 제가 물의 왕을 뵙고 대화를 나눈 것도 조부 귀에 들어가면…….”
“아…….”
“그, 그래도 권해주셨는데 그까짓 죽음쯤은 각오하고……!”
“하하, 아냐. 됐어.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그제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겨우 회색이 돌았다. 아쉬움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내 기분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손자에게도 가차 없다면 다른 블루 드래곤들도 어림없겠군.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금 오칼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계속 널 기다리는 거 같은데.”
“네? 아…….”
그제야 오칼도 의상점 앞에 서 있는 소녀를 의식했다. 다급히 인사를 건넨 그는 허둥지둥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는 추궁과 왜 아직도 안 들어가고 있었냐는 타박이 지지 않고 맞섰다. 가슴이 몽글해지는 귀여운 광경이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트로웰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변한 세상을 실감할 때마다 가슴이 아플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은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기도 했다. 이 여정의 끝에 선 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 * *
다음 도착지는 한 해안 마을이었다. 바다라는 큰 배경 때문인가. 지금까지는 어디를 가도 낯설었는데 왠지 이곳은 눈에 익은 광경이 더 많았다. 조금 둘러보니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엘프의 영역과 맞닿은 국경지대. 마검을 구하기 위한 여정으로 배를 탔을 때, 중간 경유지로 들렀던 마을이었다.
“여긴 그대로네.”
“그렇지? 이 근방은 엘프들 때문에 개발이 어렵거든. 3백 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곳일 거야.”
여기서 엔딜을 만났었던가? 짧게 스쳐 지나간 곳이긴 하지만, 전부 낯설어진 세계에서 여전히 익숙한 장소가 있다는 게 반가웠다. 한동안 멍하니 주위만 둘러보았다. 트로웰 역시 내가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줄지어 서 있는 대형 선박들도, 부둣가에 있는 큰 광장도 전부 그대로였다. 저 광장에서 엔딜을 처음 봤었다. 엘프를 보게 될 줄도 몰랐는데 사람들과 싸우기까지 해서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 입에서 튀어나온 거친 욕설들에 한창 엘프의 온순한 품성을 논했던 카이테인이 무척 난처해했었다. 그 이후로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당시에도 사람이 가득하던 광장은 지금도 여전히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인간만큼이나 다른 종족들도 많이 보인다는 거였다. 엘프의 영역과 가깝기도 해서 그런지 지금은 다종족이 거주하는 마을이 된 것 같았다.
“레이~! 같이 가자니까!”
천천히 구경하면서 걷고 있는데 문득 뒤쪽에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니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갓 성년이 되었을 법한 남자였다. 그 뒤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쫓고 있었다.
그런데 그대로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남자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는 상태였으나 그 시선은 뚫어지도록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이네. 정말로 만났어.”
밝게 웃는 얼굴엔 놀라움과 감탄, 반가움이 역력했다.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남자의 모습을 차분히 살폈다. 조금 길게 내려 묶은 머리칼은 화사한 연보라색, 눈동자는 민트색이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는, 청초한 분위기를 지닌 미인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돌아봐도 이런 조합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생김새도 요정 같은 그에게선 청량하면서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나와 무척이나 가까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기운이었다.
‘이 사람……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쁜 듯이 다가온 남자가 내 손을 꼭 맞잡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정말 너무 그리웠어.”
닿고 보니 더 분명해졌다. 그제야 쫓아오던 여자가 불렀던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레이?”
남자가 물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억 속과 겹쳐지는 얼굴에 숨을 조금 크게 삼켰다. 아아, 그 아이였다. 나이아스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살려냈던 아이.
“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