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5화
“그거 알아요? 4천 년 전에 나와 라미아스는 만난 적이 있어요.”
“……어?”
“그때 친하게 지냈던 인연을 봐서 이만 덮을게요. 3백 년이면 짧은 시간도 아니니까요.”
잠시간 어리둥절해하던 블루 드래곤들이 뒤늦게 내가 한 말을 이해하고 화색이 돌아 고개를 들었다. 오칼은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미아스만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아아니, 자, 잠깐만! 4천 년 전? 그게 언제쯤이지? 우리가 그때 만난 적이 있다니? 어디서? 진짜? 어떻게? 아니, 일단 만났으면 내가 이 얼굴을 잊었을 리가 없는데?!”
네, 완전히 깨끗하게 잊었답니다. 속으로 대답해주면서 계약서를 펼쳐 들었다. 블루 드래곤들 모두 숨을 삼키는데 정작 당사자인 라미아스는 내가 한 말만 의식하느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트로웰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
“4천 년 전이면 황금 문명기 때인데? 내가 그때 세이크 제국에서 공작 가문을 꾸리고 있었거든? 정말 그때 우리가 만났다고? 장난치는 게 아니고 진짜로?”
“그래서 계약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야 당연히 하지!”
대답과 동시에 서명이 새겨지면서 계약이 완성됐다. 손끝에 고이는 기운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대니 물의 인장이 자리 잡았다. 그때까지 허둥거리고 있던 라미아스가 숨을 크게 삼켰다. 얼빠진 표정을 보니 아직도 상황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용건은 끝났으므로 후련해졌다.
“좋아, 이걸로 끝.”
“어? 응? 어?”
“마나 잘 쓸게요.”
“아, 아니! 잠깐만! 엘퀴네스?”
“그럼 이제 진짜로 안녕.”
생긋 웃어주고 곧바로 정령계로 귀환했다. 당분간 바쁠 예정이니 부르지 말라는 경고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답은 해 주고 가!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났다는 거야? 응? 엘퀴네스으으!”
처절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 *
다행히 라미아스는 날 다시 찾지 않았다. 모처럼 성사된 계약이 다시 파기될까 봐 우선 자중하는 것 같았다. 단호하고 냉정한 전대와의 계약도 무사히 지켜온 드래곤다운 처신이었다. 그의 시름을 뒤로한 채로, 나는 트로웰과 함께 세상을 돌아보는 여행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여정이었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던가. 3백 년이나 지난 아크아돈은 내가 알던 모습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의 복식과 먹거리, 가옥들의 건축 형태나 길이 바뀐 건 가장 흔한 변화였다. 산이 있던 곳이 사라져 들판이 되었거나, 강이 사라지고 마을이 들어서기도 했다.
반면에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일단 스왈트 제국이 아직 건재했다. 이사나의 이전 세대부터 굳건하던 황가의 혈통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는 중이라고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계보에 알리사가 들어 있다는 거였다.
“정말? 이사나와 알리사가 결혼했어?”
미소지은 트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제왕의 별이 둘일 땐 파국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두 사람은 그리 혼란한 과정 없이 순탄하게 맺어졌다고 했다. 라온휘젠 황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알리사의 마음이 굳건해서 소용이 없었다고. 뒤늦게 끼어든 이가 훼방을 놓기엔 첫 만남부터 쌓아온 둘의 유대가 워낙 강했다. 운명이 안배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에 휘둘리지 않은 두 사람이 참 기특하고 대견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엔 이슬비가 내렸어. 다들 엘이 보러 와 준 거라고 많이 기뻐했어.”
흐린 날씨조차 행복한 두 사람에겐 축복이 되었다. 내가 함께하지 못한 추억 속에서, 내 자리를 비워둔 사람들의 이야기에 목이 멨다.
평생 다투는 일 한 번 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화목한 부부였다고 했다. 자녀는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뒀는데, 네 남매 모두 정령사의 자질을 타고나 제국의 이름을 드높이는 주역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피가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세대에 한두 명은 정령사가 태어난다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자질을 타고나는 아이를 후계자로 삼는 관습까지 생겼다. 정령사가 황가의 상징이자 특징이 된 셈이었다.
“저 녀석이 이번 대 황제인 카를리안이야. 땅의 정령사지.”
트로웰의 설명을 들으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모르던 건물이 늘어나긴 했지만 황제가 일하는 본궁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집무실의 위치도, 늘 이사나가 앉던 자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이사나가 아니라 낯선 초로의 남자였다. 그게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외모라도 닮았다면 위화감이 덜했을까? 이번 황제는 어느 한구석도 선대와 닮은 부분이 없었다. 인상이며 분위기도 다르고, 머리 색조차 흑발이었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둘 다 금발이었으니 외탁한 모양이다.
덕분에 세월이 흘렀다는 실감은 확실히 들었다. 내가 아는 장소를 전혀 다른 사람이 채우고 있는 그 모습이, 마지막 남은 미련조차 완전히 거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둘의 아이들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왕래가 잦았는데, 그 후로는 점차 교류가 끊겼어. 그래도 황제에겐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주고 있어. 지금 카를리안은 이미 세 번을 다 쓴 상태지만.”
“계속 챙겨줬구나. 고마워, 트로웰.”
“아냐, 내가 그러고 싶었어. 네가 돌아왔을 때 스왈트 제국이 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거든.”
제왕의 별과 반려성. 운명의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후손들은 모두 현명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제국이 굳건했던 건 트로웰의 가호 덕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황제를 만나볼래?”
“……아니, 이거면 됐어. 그냥 갈래.”
고개를 저으니 트로웰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슬프면서도 기쁘고, 애틋하면서도 서글픈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 마른 바람이 불었다.
* * *
운명의 반려와 맺어지지 못한 탓일까. 아직도 강국인 스왈트 제국과는 달리 마법 제국인 카터스 제국은 라온휘젠 황제의 서거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선황의 뜻과는 반대로 마법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었다.
제국의 자랑이던 마법 아카데미가 하루아침 사이에 문을 닫고, 수많은 서적과 문화들이 짓밟혔다. 그 과정에서 황제에 반발한 가문들이 내란을 일으켰는데 그로 인한 전쟁이 백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한 세대를 장악한 전란에 나라가 멀쩡할 수는 없는 법. 이후로 제국은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고, 카터스의 핏줄은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라온휘젠 황제와는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그 끝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도 마법은 무사히 전승되어 지금은 제2의 황금기를 꿈꿀 수 있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오히려 제국의 핍박에서 도망친 마법사들이 독자적으로 마탑을 세우고 마법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더 널리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다. 생활 마법 위주긴 해도 마도구의 사용도 보편화 되었고, 연금술 분야도 크게 성장한 것 같았다.
종족 간에 교류도 활발해졌다. 첫 교역 문을 연 것은 오랫동안 폐쇄적으로 살던 드워프 일족이었다. 실수로 영역을 벗어난 어린 드워프가 몬스터에게 잡혀가는 것을 마침 지나가던 인간이 구해준 것이 계기였다는데, 서로 조금씩 친교를 다지기 시작하다가 완전히 교역 문을 개방하는 쪽으로 이어진 듯했다.
그에 자극을 받은 엘프들도 영역 안에 인간의 진입을 허가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종족 교역의 시대가 열렸다. 물론 아무나 다 허가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엘프가 다 개방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혹시 미네르바의 세대교체에 영향을 받은 건가?”
“아주 아니라곤 못 할 거야. 애초에 종족끼리 사이가 틀어진 게 그 일이 원인이었으니까.”
트로웰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전대 미네르바가 건재했을 때는 해소되지 않는 문제였지만, 이제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지난 일로 묻을 수 있게 된 거다.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젠 거리에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있는 모습은 그리 어색한 광경이 아니었다. 덕분에 여전히 4천 년 전의 세상에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상점가에서 생선을 고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땐 더욱 그랬다.
“주인장, 여기 생선들 상태가 너무 안 좋은걸?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보존을 너무 대충한 거 아니오?”
“무슨 말이야? 내륙에서 이만하면 괜찮은 거지.”
“아냐, 수도가 여기보다 더 내륙인데, 거기서 파는 것들도 이것보단 상태가 좋았어. 웬만하면 보존 마법 처리 좀 하쇼. 거 얼마나 한다고.”
“아, 싫으면 사지 마!”
가게 주인과 실랑이를 하는 남자는 블루 엘프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달려가 붙잡을 뻔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얼굴이 전혀 달랐다. “엘, 왜 그래?” 의아해하며 나를 돌아보던 트로웰이 내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하곤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블루 엘프도 최근에 지상 진출이 늘었지. 멀리서 보니 좀 닮았네.”
“그러고 보니 시벨은 지금 어디서 지내?”
“음, 그 녀석은…….”
묻는 것마다 친절히 설명해주던 트로웰이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설마 시벨리우스까지 죽은 건 아니겠지? 그의 수명은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가 서둘러 답했다.
“걱정하지 마. 아마 잘 지낼걸? 곧 만나게 될 거야.”
“정말?”
“그럼 정말이지. 아, 저기서 축제를 하나 봐, 엘. 가보자!”
트로웰이 황급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태도였지만 곧 만날 거라는 말을 믿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거로 굳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한겨울인 날씨는 어디에 눈을 둬도 무채색이었다. 이런 시기에 열린 축제라 그런지 도착한 장소엔 얼음 조각상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썰매장과 얼음낚시도 마련된 것 같았다. 이 지역 명물인 전통 겨울 축제라고 했다.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트로웰이 물었다.
“혹시 이 광경 눈에 익지 않아?”
“음, 그렇네.”
“그럼 저건 어때?”
그가 가리킨 곳엔 리본이 잔뜩 달린 나무들이 있었다. 특이한 건 리본 외에는 모두 똑같은 장식물을 달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화로 만들어진 제비꽃이었는데, 숫자에도 의미가 있는 건지 전부 세 송이씩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주위에 있는 다른 장식물 속에서도 제비꽃들이 보였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세 송이씩이었다.
‘가만, 제비꽃 세 송이? 게다가 겨울 축제라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멍하니 입을 벌리자 알아본 트로웰이 웃었다.
“세 송이의 제비꽃이 이 마을의 상징이래. 옛날에 너무 가난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몰린 적이 있었나 봐. 다들 이번 겨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축제를 열었는데, 우연히 들른 신의 아들이 제비꽃 모양을 한 보석 세 개를 주고 갔다지.”
“……!”
“마을 사람들은 보석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무사히 겨울을 넘겼어. 그 후로는 경작도 잘 되면서 가난에서도 벗어났고. 이후에 그들은 은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제비꽃 세 송이를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해. 이 고장에서 3백 년간 내려온 유서 깊은 일화야.”
기억난다. 겨울 축제에 가고 싶다고 조르는 알리사에게 못 이겨 한 마을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던 대공군과 맞부딪쳤는데, 그 과정에서 망가트린 비품들을 보상할 겸 제비꽃 몇 송이를 쥐여주고 나왔었다. 너무 큰 건 부담스러워할까 봐 적당히 손에 잡히는 작은 크기의 꽃을 골랐던 것뿐인데, 그게 설마 마을의 상징이 될 줄이야. 어안이 다 벙벙했다.
“나를 알리사라고 알고 있었을 텐데…….”
“맞아, 처음엔 그렇게 알려졌지. 그런데 나중에 황후가 된 알리사가 그 일화를 알게 되고는 직접 오해를 정정했어. 자신이 아니라 진짜 신의 아들이 베푼 은혜였다고 말이야.”
이후엔 축제가 열릴 때마다 직접 방문하기도 했단다. 물론 이사나도 함께했다. 덕분에 황제 부부가 즐겨 찾는 축제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이 더 크게 번창했다고.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꾸려진 가옥들과 여유와 활기가 가득한 거리들. 별다른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던 부분들이 새삼 다시 보였다. 그때의 전경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많이 변했는데, 그 자체가 모두와 함께한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실은 이 여행이 다 끝나면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한참 동안 주위에 시선을 빼앗긴 내게 트로웰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여 주고 싶은 거? 그게 뭔데?”
“나중에. 아직은 비밀이야.”
그것도 내가 한 일과 관련된 걸까. 궁금했지만 굳이 재촉하진 않았다. 아직은 돌아봐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자, 그럼 다시 가볼까?”
미소지으며 묻는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 몰려든 나이아스들의 무게를 구름이 더는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퐁퐁 떨어지는 함박눈에 얼음 위에서 한창 썰매를 타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깨끗한 웃음소리들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이 세상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트로웰이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북쪽에 있는 바이칼이라는 공국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생겨난 나라 중 하나였는데, 북부 특유의 척박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제법 크고 번화했다. 주민 대부분이 현역 용병이거나 용병 출신으로, 용병 길드의 본거지가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용병의 왕국이라고도 불리는 것 같았다.
“용병 길드 본사는 원래 수도에 있지 않았어? 북부로 이주한 거야?”
“아니, 그 길드는 망했어. 지금 있는 용병 길드는 새로 만들어진 다른 길드야. 이제 3백 년 정도 됐으니 역사는 오히려 이쪽이 더 길 거야.”
“아, 그렇구나.”
3백 년이라니, 내가 자리를 비운 시점에 창단되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휴센 일행과도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니 예상대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존 길드의 박해가 커지자 아예 박차고 나와 새 길드를 창단해버렸다는 거다.
“그 사람들답네.”
“그렇지?”
북부가 기반을 다지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보니 처음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보란 듯이 성장해서 기존 길드의 영향력까지 덮어버릴 만큼 커졌다. 나중에 가선 용병이 되려면 북쪽으로 가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여겨질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가난했던 공국을 그들이 먹여 살리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원래 이름보다 샴페인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