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83화 (583/608)

제583화

“인간이 됐으면, 외모도 달라졌어?”

관심 없는 척 딴 곳을 보고 있던 이프리트가 힐끔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본인 딴에는 도도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호기심은 못 이기는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머리 색이랑 눈동자 색만 다르고 나머지는 거의 다 같았어. 아, 성별도 생겼구나. 남자였지.”

“뭐야, 얼굴이 똑같으면 성별은 생겨봤자 아니야?”

“하하, 그건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긴. 어차피 널 대하는 상대는 헷갈렸을 거라는 얘기지.”

“그래도 엄연히 기분이 다르거든!”

발끈해서 대꾸한 말에 이프리트는 코웃음을 쳤다. 아, 그러셔? 깔보듯이 내려다보는 시선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기분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적어도 변명할 여지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나만 서러워질 게 뻔해서 그냥 참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시 무성이 되었겠구나. 뒤늦게 미친 생각에 내 몸을 내려다봤다. 외견에선 차이가 없었으나 확인해보지 않아도 성별은 사라졌을 게 뻔했다. 과거로 가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었는데 내심 섭섭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머리칼에 시선이 미치고 가볍게 한 줌 쥐어보았다.

손바닥 안에 감겨드는 머리칼은 더는 금발이 아니라 푸른색이었다. 새파란 바다를 옮겨둔 것 같은 깨끗한 물의 색. 원래 이게 맞는 건데도 과거의 엘뤼엔이 지니고 있던 그 색을 내가 지니고 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내가 물끄러미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이프리트가 물었다. 살피는 시선에 염려가 깃든 것을 보니 모든 게 다 아무렇지 않아졌다. 바로 두 팔을 뻗어 이프리트와 미네를 다시 끌어안았다.

“아니, 아무 문제 없어! 으아~ 어쨌든 너희들 다시 보니까 너무 좋다!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아, 또 뭐야! 징그러워! 자꾸 달라붙지 말고 저리 갓!”

“이프리트, 엘이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자꾸 거절하는 것도 실례입니다.”

“시끄럿!”

이 티격태격하는 분위기도, 짜증을 내는 음성조차 전부 다 그리웠다. 다시금 돌아왔다는 실감을 하며 한참 동안 두 정령왕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처음엔 밀어내기 바쁘던 이프리트도 이내 체념했는지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회포는 잘 풀고 있는 거 같네.”

웃음기를 담은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쯤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미소짓고 있는 흑발의 소년이 보였다.

“트로웰!”

그와는 이미 재회의 기쁨을 충분히 누렸지만 현실에서 보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얼른 달려가 끌어안으니 그 역시 경쾌하게 웃으며 마주 안았다.

“오래 잠들어 있다 깨어난 건데 어디 불편한 점은 없어?”

“응,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다행이야.”

“아, 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라피스는 어떻게 됐어?”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미처 그의 존재를 생각지 못했다. 내가 본래의 육체로 돌아왔으니 임시로 쓰고 있던 인간의 육체는 사라졌을 거다. 출발하기 전에 영혼의 보석을 엘뤼엔에게 건네줬어야 했던 게 아닐까?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당황해서 물으니 트로웰이 담담히 대답했다.

“라피스의 혼은 엘뤼엔이 잘 회수했어. 명계로 보냈을 거야.”

“아…….”

곧바로 명계로 간 거구나. 내 표정이 흐려졌는지 트로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렇게 바로 환생의 궤도에 오르진 않을 거야. 전에 약속해둔 것도 있으니 작별 인사하는 시간 정도는 마련해주겠지.”

“정말? 그러면 좋겠다.”

그럼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는 걸까. 이대로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그런데 이프리트와 미네의 표정이 이상했다. 못마땅하다는 듯 굳어 있는 얼굴들이 마치 불만에 찬 사람들 같았다. 그 시선은 정확히 트로웰을 향해 있었다. 트로웰도 둘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으음, 다녀왔어.”

“다녀왔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말 잘하는 짓이다, 너! 또 그 재앙이 반복되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하하, 미안, 미안.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

트로웰이 정령계를 떠난 것에 대한 타박이었다. 하긴 다시 생각해도 본체로 움직인 건 정말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나도 편을 들어주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대륙의 모든 식물이 말라버리기 직전이라고!”

“어? 겨우 그사이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우리가 재회를 나눈 시간은 길어봤자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중간에 헤매다 온 거라 해도 넉넉히 잡아 며칠 정도였을 거다. 아무리 정령왕이 자리를 비웠다지만 그 정도 기간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런데 미네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겨우가 아닙니다, 엘. 거의 5년이 다 되었는걸요.”

“……뭐?”

“이미 땅의 정령들 상당수가 소멸했습니다. 클레이와 멀든은 몇 마리 남지도 않았어요.”

“그게 무슨…….”

5년? 그 잠깐의 순간이 5년이었다고?

멍하니 생각하다 머리가 그대로 멈췄다. ……그럼 내가 과거에서 보냈던 지난 몇 년은? 그건 여기선 얼마나 된 거지?

설명을 구하며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어, 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나 데리러 와서 머문 시간은 잠깐이었잖아. 그게 어떻게 5년이나 될 수 있어?”

“음, 일단 놀라지 말고 들어줘, 엘. 시공간 안에선 수많은 변칙이 일어나. 출발한 궤도와 돌아오는 궤도를 맞추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그래서 시간에 오차가 생기는 것 같아. 그래도 며칠 정도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계산이 틀렸나 봐.”

“그럼 나는?”

“…….”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침착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트로웰은 잠시 한숨을 내쉰 다음 나를 차분히 응시해왔다.

“먼저 충격받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그,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나도 무리라는 거 알아. 그래도 흥분하지 않도록 노력해줘. 지금 땅의 기운이 너무 약해진 상태라 네 감정이 날뛰면 아크아돈에 홍수가 날 거야.”

“……알았어. 조심할게. 흥분하지 않을 테니까 말해줘.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초조한 기분에 손끝이 굳었다. 십수 년? 설마 수십 년까지는 아니겠지. 머리로는 더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만 밀려드는 불길한 기분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설마 아닐 거다.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스스로 세뇌하며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괴로운 듯이 일그러진 트로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모두가 부질없는 희망임도 알았다.

“3백 년이야.”

일순 세상이 멈췄다.

“네가 떠난 그 날로부터 3백 년이 흘렀어.”

삐이이― 귓속에서 지독한 이명이 울렸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머리를 세차게 할퀸 것 같았다.

“엘, 괜찮습니까?”

“엘!”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정신이 들었을 땐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드니 모두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3백 년이라고?”

“엘, 일단 진정하고…….”

“대답부터 해줘. 정말 3백 년이 지났어? 내가 잠든 후로 3백 년이나 지난 거야?”

“……그래.”

“……그럼 이사나는?”

“…….”

“알리사는? 아셀과 샴페인 용병단들은? 다들 죽은 거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엘…….”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시선들이 이미 그 대답이었으니까. 뭐라고 정의할 수도 없는 혼란한 감정에 속이 들끓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리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길어봤자 4년이었을 뿐인데. 내게 흐른 시간은 겨우 4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3백 년이나 지났단다. 소중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없단다.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하… 하하… 하하하…….”

왜 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웃었다. 모두가 심한 장난을 치는 거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독하게도 내게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하는 증거가 존재했다.

이사나와 맺었던 계약의 결속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꼼꼼히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임의로 해지하지 않는 한, 이게 사라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계약 당사자의 죽음.

“하하…….”

실없는 웃음만 나오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트로웰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 품을 벗어나지도, 마주 끌어안지도 못한 채로 얕은 숨만 겨우 내쉬었다.

라피스를 찾기 위해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인해 돌아온 결말이 이런 거라니.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잖아.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자꾸만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가려 해서 입술을 꽉 악물었다. 누군가 악몽을 꾸는 거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또 질 나쁜 환상에 빠진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미치고 싶었다.

* * *

“네겐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몇 날 며칠 물의 영역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나를 두고 엘뤼엔이 건넨 한마디였다. 그는 무릎을 끌어모은 채 웅크리고 있는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다. 인간의 수명은 지극히 짧지. 영원히 함께할 수도, 그 끝이 아름답지만도 않다. 이건 불멸자가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을 숱하게 겪을 텐데, 그때마다 무너질 건가?”

“…….”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로 헤어진 건 오히려 운이 좋은 거다. 아주 먼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해라. 너와 이어질 인연이라면 굳이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도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거다.”

환생을 말하는 거였다. 언젠가는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난 이사나를 만날 수도 있노라고. 희망이 생기면서도 동시에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건 다르잖아.”

“뭐가 다르지?”

“내가 알던 이사나가 아니잖아. 모습도, 성격도,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거잖아.”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본질도 달라지는 건가?”

이어진 질문엔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다시금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만약 네가 정령왕의 임기를 끝낸 후에 인세의 길을 택한다 해도 여전히 넌 내 아들일 거다. 나를 전혀 못 알아보고, 전혀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닌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을 거다. 넌 어떻지?”

그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과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여전히 그는 내 아버지였다. 비록 그만큼 힘들고 외로웠지만,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 전제가 사라질 일은 없었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든, 그는 내 아버지였다.

“그래, 바로 그런 마음인 거다.”

엘뤼엔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애정과 염려를 담은 시선에 목이 멨다.

“애도하고 추억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슬픔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상실을 두려워하는 건 당장 눈앞의 것들만 바라보기 때문이지. 주어진 삶이 짧기에 그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엘, 넌 그렇지 않다.”

“…….”

“넌 정령왕이다. 인간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한때의 추억에만 매달려 있을 생각인가? 그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맞는 말이었다. 나도 이러고 있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슬픔에 묻혀 있어봤자 주어진 결말이 달라지진 않는다. 알면서도 끝없이 밀려드는 절망을 밀어내기가 어려웠다. 내가 좀처럼 답하지 못하니 엘뤼엔의 표정도 흐려졌다.

“지금 네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이런 성격이라 따르는 이점이 더 클 거다. 하지만 그게 널 다치게 한다면 더는 이점으로 볼 수 없겠지.”

“나는, 아버지, 난…….”

“네가 처음부터 정령왕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과정조차 필요하지 않았을 거다. 엘, 너는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덫으로 두고 싶은 거냐?”

그 말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싫다. 그렇게 하진 않을 거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리라 생각했다.” 옅은 숨을 내쉰 엘뤼엔이 굳은 얼굴을 풀었다.

“결국 모든 건 네가 결정하기에 달렸다. 추억이란 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가장 달콤한 꿀도, 가장 쓴 독도 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내 아들이 현명한 길을 선택하리라 믿는다.”

“……응.”

“정 견딜 수 없거든 우선 주변을 돌아봐라. 떠난 사람들이 있다면 네 곁에 남은 이들도 있다. 잃은 것만 헤아리기엔 네게 주어진 게 더 많다는 걸 잊지 마라.”

“응, 알았어, 아버지.”

터져 나오는 울음을 끅끅 참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엘뤼엔이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내가 진정할 때까지 어깨를 토닥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더 눈물이 났다.

가장 힘들었던 건 평생 내가 돌아오길 기다린 사람들 쪽일 텐데, 내가 이런 위로를 받아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그 다정함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실컷 울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때쯤엔 엘뤼엔도 다시 신계로 돌아간 후였다. 계속 영역 안에만 있으면 잡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몸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탁 트인 전경이 펼쳐졌다. 빛을 품은 듯한 보석 꽃들과 갖가지 모양으로 꾸며진 싱그러운 나무들. 다소 흐린 하늘조차 그려낸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 또한 오랜만에 보는 낙원이었다.

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으려니 물의 정령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들이미는 시큐엘을 쓰다듬어준 다음 옷자락을 잡아끄는 운디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장소엔 트로웰을 비롯한 정령왕들이 모여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엘!”

“다들 안녕?”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없는 인사만 건넸다. 곧바로 달려온 트로웰은 내 표정부터 살폈다.

“이제 좀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정말 다행이다. 걱정했어.”

밝게 웃는 트로웰의 얼굴엔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으로 따라 웃으니 이프리트가 툴툴거렸다.

“제발 걱정 좀 시키지 마. 그깟 인간들 몇 죽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프리트!”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인간의 수명이 우리보다 훨씬 짧다는 건 다 아는 거였잖아. 어차피 겪을 일 그냥 빨리 겪었다 치면 되지. 그렇게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굴 게 뭐 있냔 말이야.”

엘뤼엔이 한 말과 내용은 거의 같은데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말도 화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 같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예시 같기도 하고. 그러자 미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나무랐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이프리트. 엘이 섬세한 성격이라 그런 겁니다.”

“글쎄, 그 약에 쓸 데도 없는 섬세한 마음! 버려도 되지 않냐고!”

“이프리트가 그 싸가지 없는 성격을 버리면 엘도 그렇게 될 겁니다.”

“뭐야?”

불과 바람은 상성이 좋은 편일 텐데. 이 둘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트로웰을 향해 엷게 미소 지었다. 이프리트의 발언이 강하긴 했지만,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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