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2화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정령계를 비우고 와도 돼?”
그제야 미친 생각에 물으니 트로웰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역시 안 되는 거구나! “빨리 돌아가면 괜찮을 거야.” 황당해서 바라보는 것에 그가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프리트와 내가 신계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엄격한 얼굴로 혼냈던 그였는데. 트로웰에게 이런 면모도 있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때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하던 엘뤼엔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엘. 이제 여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응? 뭐를?”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무심코 숨을 크게 삼켰다.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로 엘뤼엔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들.”
내가 마주 잡기를 기다리며 펼쳐진 손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른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장 난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엘뤼엔은 내가 선뜻 손을 잡지 않자 초조한 듯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이지? 설마 돌아가기 싫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그런데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머릿속에선 이곳에서 다 마치지 못한 일들이 가득했다. 모두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내년에 있을 란타샤와 디아곤의 언약식도 가봐야 하는데. 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라피스였다. 이대로 가면, 그와는 마지막이 된다.
“야, 너 지금 뭘 망설이는 거야?”
순간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설마 작별 인사니 뭐니 쓸데없는 미련 두는 거 아니겠지? 여기서 쌓은 관계들은 전부 꿈이야. 깨어나고 나면 전부 흩어지는 물거품 같은 거라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하지만 라피스, 나는…….’
“설마 나 때문이라고 하려는 거면 더더욱 집어치워. 화낸다.”
목소리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말문이 턱 막혀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이러는 거 절대 나 위하는 거 아냐. 칠칠치 못하게 시공간에 떨어져서 찾으러 오게 만드는 데다가 이제 돌아가는 발목도 붙잡는다고? 미안하지만 사양이야. 내가 제 구실도 못 하는 녀석으로 남는 건 이미 충분해. 날 더 한심하게 만들지 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피스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다. 나도 안다. 이건 그냥 내 미련이었다.
“너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오히려 지나쳤을 정도야. 과거에 더 붙잡혀 있지 말고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가. 가서 진짜 네 삶을 살아.”
팔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엘뤼엔과 트로웰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내민 손을 마주 붙잡았다. 곧 발밑에서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비상하는 매처럼 하늘로 높이 솟구친 빛줄기가 순식간에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동안 고마웠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 속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고마워, 라피스.’
울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견뎌내며 웃었다. 맞잡은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돌아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 * *
「그러고 보니 아버지, 귀환의 주문 키워드가 뭔지 아버지는 알겠어?」
내 질문에 엘뤼엔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몰라서라기보다는 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이어졌다.
「아마, 넌 계속 그 키워드를 떠올렸을 거다.」
「어? 떠올렸다고?」
「그래. 틀어졌다곤 해도 구조 자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돌아가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랐을 거다. 실제로 여러 차례 일치한 흔적도 있고. ……다만 네가 입으로 내뱉지 않아서 발동이 되지 않은 거다.」
「헐, 진짜? 그럴 리가. 나 진짜 웬만한 건 다 말해봤는데? 키워드가 대체 뭐였는데?」
당황하며 묻는 것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애틋함과 안쓰러움, 그러면서도 서글픈. 수많은 감정을 담아낸 시선이 하나의 단어를 그려냈다.
그 순간 알았다. 아아, 그랬다. 내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던 말이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랐는데 끝내 입으로는 내뱉지 못했다. 말해버리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억지로 눌러 삼켰던 한 마디가.
「보고 싶어, 아버지.」
* * *
기이한 감각에 눈을 떴다.
엘퀴네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이 감도는 물속의 풍경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아늑했다.
최근 정령계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상태였다. 봉인된 미네르바의 상태도 순조롭게 나아지는 중이었고, 한동안 지상을 들쑤시고 다니던 트로웰도 얌전했다. 딱히 신경을 거스르는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저조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나 돌이켜봐도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애초에 놓치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계속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어딘가를 가야 할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그 기분은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하면서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눈앞에서 불길이 솟구치더니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나타났다. 불의 왕 이프리트였다.
“야, 엘퀴네스. 물어볼 게 있는데.”
이프리트와는 평생 좋게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호승심이 강한 편인 그는 상극인 엘퀴네스에게 처음부터 매우 호전적이었다. 엘퀴네스도 온화한 성정은 아니라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응징했더니 적개심까지 쌓은 상태였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쳐도 으르렁거리기 바빠서 대화랄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편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비록 가지고 온 용건은 그렇지 않았지만.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을 거 같냐?”
“……뭐?”
눈을 가늘게 뜬 엘퀴네스는 곧 이 상황을 수긍했다. 이제 보니 새로운 방식의 시비인 것 같았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장난치는 게 아니라! 내가 분명 너한테 할 말이 있었던 거 같거든? 근데 그게 뭐였는지 모르겠어.”
“벌써 소멸할 때인가?”
“아니거든!”
발끈해서 대꾸한 후 이프리트는 찜찜한 표정으로 엘퀴네스를 노려보았다.
“이상하네. 왜 널 보는데 별로 화가 안 나지? 요 몇 년간 전쟁을 안 해서 그런가? 근데 내가 왜 너랑 안 싸웠지?”
“내 알 바 아니다.”
“이거 봐. 태도나 성격이 딱히 변한 것도 아닌데. 예전 같았으면 화부터 났을 텐데 이제 좀 참을 만하단 말이야?”
심각하게 구시렁거리던 이프리트가 마침내 깨우침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내가 너무 착해진 건가?”
“꺼져.”
“차암나! 너 툭하면 나한테 꺼지라고 하는데 말이야!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에도 꺼지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기이한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린 엘퀴네스는 어렵지 않게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소한 일이었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개연성 없이 전개되는 소설처럼, 전후 관계가 도려내 지고 상황만 남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엘퀴네스, 내 얘기 좀 들어봐. 나 아까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숲에 갔다? 근데 내가 왜 거길 찾아갔는지를 도통 모르겠는 거야.”
“역시 소멸할 때군.”
“아니라니까! 어쨌든 거기에 거의 다 허물어져 가는 판잣집 하나만 덜렁 있더라고. 되게 오래됐는지 누가 살던 흔적은 없고 전부 삭아 있던데. 그거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안 좋았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그러게? 그냥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
엘퀴네스는 황당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이프리트를 바라봤다. 더 이상한 건 그가 말한 숲이며 판잣집을 자신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충동이라고 여기면서도 엘퀴네스는 입을 열었다.
“그 숲이 어디…….”
“앗, 이게 누구야! 트로웰이잖아?”
하지만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엔 트로웰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군, 엘퀴네스는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기준에서) 갓 세대교체를 이룬 땅의 왕은 지금까지 한 번도 물의 영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얼마 전엔 분쟁도 있었던 참이었다.
원래 엘퀴네스는 다른 정령왕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 트로웰이 벌이는 짓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하면 듣지 않을 게 뻔했기에 땅의 영역을 쳤다. 그때 무너진 땅의 영역은 아직도 복구 중으로, 트로웰은 어떤 식으로든 엘퀴네스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렇게 불쑥 찾아올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트로웰,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러는 넌 왜 여기에 있어?”
“난 엘퀴네스한테 할 말이 있는 기분이라서.”
누가 봐도 황당한 답변인데 트로웰은 무슨 헛소리냐고 쏘아붙이는 대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 이유를 짐작한 이프리트가 헛숨을 삼켰다.
“뭐야, 설마 너도?”
“……와야 할 거 같은 기분이었어.”
“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나도 딱 그런 기분이었거든. 뭔가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 않아?”
망설이던 트로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오, 그래?”
“미네르바가 깨어나는 미래를 봤어.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전해주려고 한 건데…….”
“헉, 정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잖아! 정말 기쁘고 축하할 일이네. 근데 네가 굳이 그걸 알려주려고 했다고? 그것도 엘퀴네스한테?”
그냥 오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찾아왔다는 것보다 더 말이 되지 않는 이유였다. 본인 역시 그렇게 여기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엘퀴네스한테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밖에 떠오르지 않더라. 한 박자 늦게 변명이 이어졌지만 수긍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엘퀴네스, 너 대체 우리한테 무슨 요사한 짓을 저지른 거야?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해줄게.”
“닥치고 둘 다 나가.”
힐난의 시선을 받아줄 이유가 없는 엘퀴네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물론 거기에 굴할 이프리트가 아니었다.
“와, 무서워 죽겠네. 엘퀴네스가 나 자꾸 구박한다고 도련님한테 다 이를 거야.”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어? 음? 그러게?”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한 이프리트가 호들갑스럽게 입을 가렸다.
“어머, 웬일이니. 지난 유희의 여파가 아직도 안 빠졌나 봐. 하긴 그게 좀 재밌긴 했지.”
“네 지난 유희라면 50년 전이잖아.”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얘기했나? 들어봐, 트로웰. 나 그때 끝장나게 충실한 기사였거든. 가주의 아들이 날 아주 잘 따랐어. 애가 순하고 참 얌전했지.”
“관심 없어.”
“근데 걔가 나중에 커서는 가문을 말아먹더라고. 술과 도박에 마약까지, 안 하는 게 없더라니까. 이야, 인간사는 정말 한치도 알 수 없단 말이야.”
“관심 없다고 했어.”
엘퀴네스는 잔뜩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자신이 왜 이런 실없는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쫓아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이 촌극을 지켜볼 마음도 사라졌다.
“당장 나가.”
“어어? 잠깐……!”
결국 그는 무력을 쓰기로 했다. 당황한 두 정령왕의 얼굴이 밀려드는 거센 소용돌이에 삼켜져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청객들이 사라진 물의 영역은 다시 고요해졌다. 부드러운 물결에 몸을 묻으며 엘퀴네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를 되찾은 것은 좋은데 다시금 번잡한 생각이 밀려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일상. 그런데 이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조형 속 마지막 한 부분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 * *
아주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처음 인지한 건 물속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였다. 기분 좋은 감각이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 왔다. 탄산처럼 청량하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기운. 내 몸에 딱 맞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옷을 걸친 것 같았다.
―엘퀴네스께서 돌아오셨어!
―우리 왕이 돌아오셨다!
―온 대륙의 생명이여! 기뻐하라!
―물의 왕께 경배를!
정령들이 한목소리로 합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느끼는 벅찬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내 기분도 같이 부풀었다. 마치 세계와 연결된 듯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넘실거리는 물결이 보였다. 새파란 공간을 수놓는 크고 작은 물방울들, 그와 함께 영유하는 찬란한 빛의 흐름이 눈부셨다. 손바닥을 펴서 조금씩 움직여보다가 숨을 한껏 크게 들이켰다. 공기와는 분명히 다른데 호흡하기는 더 편하다.
아, 그렇구나. 정말 돌아온 거야. 묘한 감동을 느끼며 물결의 흐름에 좀 더 몸을 맡겼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허둥거리지 않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제자리를 되찾았다는 안정감만 들었다. 정령으로 지낸 기간보다 인간으로 산 시간이 더 긴 것 같은데, 이제 그런 건 상관없을 만큼 정령으로서의 자아가 더 큰 모양이다.
“뭘 혼자 바보같이 웃고 있는 거야? 돌아왔으면 인사부터 할 것이지.”
순간 들려온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풍성한 붉은 머리칼을 화려하게 늘어트린 소녀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프리트!”
와,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아는 얼굴을 보니 더 돌아왔다는 실감이 든다. 반가운 마음에 몸을 벌떡 일으킬 때였다.
“이프리트만 보이는 겁니까? 저도 여기 있는데요.”
이번엔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있는 건 구름처럼 새하얗고 작은 소녀였다. 달빛을 머금은 눈동자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까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미네!”
“네, 접니다, 엘.”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미네가 얼굴을 기괴하게 찡그렸다.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가고 억지로 들어 올린 듯한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지만, 알아둬야 할 건 저게 화난 표정이 아니라는 거다. 웃는 모습이 특이한 건 여전하구나.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들 잘 지냈어? 정말 오랜만이야!”
기쁜 마음에 두 정령왕을 번갈아 꽉 끌어안았다. 질색하는 이프리트와는 다르게 미네는 폭 안겨 왔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무료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없어서 심심했어?”
“네, 엘 주위에는 항상 재미있는 일들만 일어나잖습니까? 없는 일도 만들어내는 분이니까요. 저도 본받아서 열심히 따라 해 봤는데 잘되지 않았습니다.”
“아하하, 그랬구나.”
칭찬이겠지. 칭찬일 거다. 웃음기를 거둔 미네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뒤였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
“어떤 종족의 육체를 입으셨습니까?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인간이었어.”
“그렇습니까? 엘은 인간과 상당히 인연이 깊군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종족으로 사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둘 다 인간이라니. 정령 계약을 처음 맺은 것도 인간이었고. 이쯤 되면 운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