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80화 (580/608)

제580화

돌아가는 길에 마신전을 들른 건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냥 기차에서 창밖을 구경했을 뿐인데, 이름도 모르는 정차 역에서 하얀 신전이 보였다. 첨탑에 마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확인했을 땐 어느새 기차에서 내린 후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입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견습 신관으로 보이는 사제가 다가왔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기도하러 왔다고만 말했다. 다행히 수상하게 보이진 않았는지 사제는 능숙하게 나를 기도실로 안내했다.

“원하시는 시간까지 기도하고 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직 모호한 시간대라 그런가. 기도실 안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배치된 의자 한구석에 적당히 앉아 단상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실내를 돌아보려니 예전에 엘뤼엔의 신전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때의 엘뤼엔처럼 카노스가 홀연히 단상 앞에 나타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카노스. 듣고 있어요?”

그게 괜히 서운해서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기도실에서 하는 말은 신한테 전해질 확률이 높으니까. 이 하소연도 전해지기는 할 거다. 그가 제대로 일을 한다면 말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트로웰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요.”

당신이 보여준 미래를 틀었어요. 그게 참 기쁜데, 당신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면 좀 많이 슬플 것 같아요. 정말 모두가 다 살 수 있는 결말은 없었던 걸까요? 지금 이건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요? 쏟아내고 싶은 말들은 말았지만 전부 꾸역꾸역 참아냈다.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로 하소연하고 싶진 않았다.

“저 뭐 하나만 일러도 돼요?”

그 대신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모두에게 유익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라미아스라는 블루 드래곤 알죠? 그 드래곤이 영혼의 보석을 수집하고 있거든요? 제가 아는 개수만 열 개가 넘는데, 그거 그대로 두면 안 될 거 같아서요. 그 사람들도 다 본향에서 실종된 거잖아요. 다들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안 그래도 계속 벼르고 있었다. 조만간 엘뤼엔에게 신고하는 방법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왕 신전까지 온 김에 기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 근데 이거 제가 일렀다는 건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알았죠?”

라미아스가 신고자를 알게 되면 몹시 귀찮아질 게 뻔하다. 이건 반드시 익명이 보장되어야 했다. 기대감이 불러일으킨 환청이었을까. 왠지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고자질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내가 신 앞에서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지 배웅하는 사제들의 표정도 흐뭇했다.

“노친네가 불쌍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네.”

라피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노친네는 라미아스다.

“신고가 잘 접수되긴 했을까? 다른 신전에도 가봐야 하나?”

“안 그래도 될걸. 그 노친네, 예전에 영혼의 보석 몰래 수집해둔 거 다 털렸다고 했거든. 신고자가 누군지 끝내 못 찾았다고 내내 이를 갈았는데. 그게 너였네.”

저런, 그랬구나. 하나도 안 미안하다. 그보다 카노스도 일을 하긴 하는 구나. 아까 들었던 웃음소리가 환청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싶으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실실 웃으니 라피스도 헛웃음을 흘렸다.

“너란 녀석도 참……. 친하게 지내면서 뒤통수를 치냐.”

“그거랑 이건 별개지.”

친구라고 범죄행각을 묵인해줄 순 없잖아. 오히려 업보가 쌓이는 걸 막아주는 거니까 라미아스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아무리 수집이 취미라도 해도 그렇지, 영혼을 수집하면 어떡하냐고. 솔직히 말하면 납치 감금이랑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친하다는 건 부정을 안 하네.”

이어지는 말투엔 묘하게 가시가 있었다.

“넌 라미아스가 싫어?”

“그러는 넌. 그 노친네가 마음에 들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반칙 아닌가. 하긴 라피스의 대답이야 어차피 뻔하긴 했다.

“뭐, 나쁜 사람은 아니지. 고마운 점들도 많고. 나 심심해할까 봐 자주 놀러와 주기도 하잖아.”

“그럼 돌아가서 그와 계약할 거야?”

“어?”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잠시 당황했다. 아, 그렇지. 라미아스를 내 시대에서 만나면 계약할 수 있는 관계인 거구나. 수면기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니 언제 다시 깨어날지는 모르고, 또는 그대로 영원한 잠을 택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만난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사안이었다.

“으음, 글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래?”

대답을 채근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라피스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게 괜히 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라미아스랑 계약 하지 마?”

“그거야 네 맘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넌 내가 다른 사람이랑 계약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긴 한데…… 뭐, 이제 어쩌겠어. 어차피 난 명계로 갈 텐데.”

순간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라피스와는 헤어져야 하는 거였지. 너무 당연한 건데 마치 지금 처음 알게 된 것처럼 새삼 충격을 받는 게 우스웠다. 라피스의 시선에선 그간 내가 어지간히도 무신경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뭘 눈치를 보냐? 계약할 거면 해. 유희하려면 드래곤의 마나는 필요할 거 아냐. 이사나의 쥐꼬리만 한 마나로는 불편할 테니까.”

“라피스, 너…….”

“어, 내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억지로 삼켜내는 숨이 썼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억지를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존심도 강하고 독점욕도 넘치는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내려놓는 걸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이 상했다.

하루빨리 돌아갈 생각뿐이었는데 오늘은 그게 참 어려웠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 * *

나는 허겁지겁 뛰고 있었다. 손목에 걸린 비닐봉투가 요란하게 덜렁거렸다. 두부를 사 오라는 심부름이었다. 엄마가 7시까지 돌아오라고 했는데 계산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리는 사이에 시간이 넘어버렸다. 화가 났을 엄마를 생각하니 겁이 났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아빠는 집에 없었다. 그러면 적어도 맞지는 않을 거다.

“강지훈, 너 이 자식! 당장 이리 안 와?”

하지만 그런 기대감도 곧 사라졌다. 집 앞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윽박지르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길목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이자 숨이 절로 멈췄다.

“아, 아빠…….”

벌써 퇴근하셨구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얼마 전에 친구가 보여준 동화책이 생각났다. 나쁜 인간을 혼내는 무서운 도깨비가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오는 아빠의 얼굴이 그 동화책에 그려진 도깨비랑 똑같았다.

“지금이 몇 시야! 어? 7시까지 들어오라고 했어, 안 했어!”

“해, 했어요.”

“근데 지금 몇 시야! 넌 눈이 없어? 시계 볼 줄 몰라? 네가 시계 보고 대답해 봐!”

다그치는 말에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엄마가 준 시계를 꺼냈다. 심부름하는 시간을 지키라며 챙겨주신 거였다.

“7시 5분이요…….”

“볼 줄 아는데 왜 약속을 안 지켜! 또 어디서 딴짓했어! 너 때문에 저녁 식사 준비가 늦어졌잖아! 어디 한번 엿 먹어 보라는 거야? 어?”

“그, 그게 아니라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게 어디서 변명이야!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빌기부터 해야지!”

연달아 머리를 내리치는 힘이 너무 아팠다. 아빠는 똑바로 서라며 화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거친 손길은 지나가던 사람 몇이 나무라는 말을 던지고 나서야 간신히 멈췄다. 하지만 핀잔을 들은 아빠는 더 화가 났다.

“너 당장 따라와! 오늘 아주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둘 거야!”

사나운 손길이 내 뒷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어갔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버둥거리니 손길이 더욱 우악스러워졌다. 똑바로 걸으라며 혼내는 말엔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때 갑자기 아빠가 걸음을 멈췄다. 당황해서 올려다본 아빠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끙끙 앓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도자기처럼 하얀 손을 따라가 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엄청나게 잘생긴 서양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였고, 다른 한 명은 흑발에 금색 눈동자였는데 피부가 다갈색 빛이 나도록 짙었다.

“뭐, 뭐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이 동네에선 서양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선지 아빠도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때 차가운 표정으로 아빠를 노려보던 금발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와, 진짜 잘생겼다. 속으로 감탄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엘?”

들려오는 목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를 담은 듯한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보자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엘뤼엔이었다.

“아버지?”

“괜찮은 건가?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지?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아, 그렇군. 꿈이었구나.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에 조금씩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식은땀을 흘렸다더니 온몸에서 푹 절은 느낌이 났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악몽이라도 꾼 건가?”

“으음, 그냥 예전 일을 잠깐……. 아, 최근 일은 아니고 아주 어릴 때 일이었어.”

엘뤼엔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걸 보고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래 봤자 믿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옷 갈아입고 나와라.”

쓴웃음을 지은 채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는 뒷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작년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떠올렸다고 여긴 거겠지.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시간이 해결해주겠거니 싶어도 정령에겐 망각이 없으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왜 그런 꿈을 꿔서는.’

그래도 덕분에 엘뤼엔이 온 거 같으니 나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닌가. 전생의 꿈을 꾼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게 아마 여섯 살 때쯤이었을 거다. 평소처럼 혼나는 중이었는데 지나가던 서양인들이 도와준 적이 있었다. 강지훈이었을 때도 완전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일인데 왜 갑자기 그때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딱 말을 거는 순간에 끝나다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괜히 궁금해지게.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금발 남자, 엘뤼엔이랑 닮지 않았나?’

심지어 다갈색 피부의 남자 쪽은 트로웰과 비슷했던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해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세상에 비슷한 색 조합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릴 때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잘생겼다고 생각한 것도 지금 다시 보면 별거 아닐 거다. 그래도 그날 만난 두 사람이 엘뤼엔과 트로웰을 닮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니, 기묘한 우연이긴 했다. 참 여러모로 별스러운 꿈이었다.

“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나를 반긴 건 뜻밖의 광경이었다. 나무 밑동을 잘라 대충 만든 식탁에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그 주위로 익숙한 얼굴들이 앉아 있었다.

“도련님, 잘 잤어?”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온 이프리트를 시작으로, 란타샤와 디아곤이 손을 흔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트로웰도 내게 가볍게 눈짓을 보내왔다.

“다들 웬일들이야? 이 음식은 다 뭐고?”

“오랜만에 우리 도련님 얼굴 보러 왔지. 얘들도 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길래 데려왔어. 음식들은 얘들이 가져온 방문 선물.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점에서 사온 거래. 뭘 주면 네가 좋아할지 궁금해하길래 내가 추천했어. 잘했지?”

“응! 너무 잘했어!”

선물은 역시 맛있는 음식이 최고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이프리트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정작 선물을 준비해온 란타샤는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너 왜 이런 데서 사는 거야? 너무 원시적인 환경 아냐?”

왜 그러나 했더니 라미아스랑 같은 이유였다.

“엘, 혹시 엘퀴네스가 돈을 안 줘?”

디아곤은 아예 한술을 더 떴다. 엘뤼엔의 얼굴이 서늘해지는 걸 보고 얼른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거 아냐. 내가 편해서 이렇게 지내는 거야.”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이 편하다고?”

“어차피 안에선 잠만 자거든. 비바람을 피하기만 할 수 있으면 됐지, 뭐.”

“취향 참 특이하네.”

“어쩐지 라미아스가 언급할 때마다 한숨을 쉬더라니.”

아니, 내 집이 뭐가 어쨌다고. 정작 정령왕들은 별말 안 하는데 드래곤들은 뭐가 이리 까탈스러운지 모르겠다. 집이 크면 관리하는 데 불편하기만 하지. 여긴 청소기도 없단 말이야!

“신경 쓰지 말고 식사나 해.”

툴툴거리고 있자니 묵묵히 지켜보던 트로웰이 내 앞으로 접시들을 밀어줬다.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였다.

“미네르바는 요즘 어때?”

“많이 안정됐어. 이대로면 예정보다 빨리 의식을 차릴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헤헤 웃으니 트로웰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어렸다. “도련님, 이것도 먹어 봐.” 옆에서 끼어든 이프리트가 닭고기 조림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열심히 먹으니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엘. 그 녀석한테서는 여전히 소식 없지?”

“아, 응.”

여기서 물어볼 사람이라면 시벨리우스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신중해졌다.

“실은 이걸 말해도 될까 고민했는데. 어차피 알게 될 이야기니까 그냥 말할게. 유니콘이 신계로 이주한 것 같아.”

“아.”

“귀환이 확정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오늘 새벽에 신계의 통로가 열린 걸 확인했어.”

설명을 마친 후 이프리트가 염려하는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 트로웰과 엘뤼엔도 내 표정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거 때문에 모인 거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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