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그냥 솔직히 말해. 뭘 만들다 실패한 거지? 애초에 네가 무슨 요리를 한다고.”
“아,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리고 저 요리 실력 많이 늘었거든요?”
시벨리우스가 떠나고 나서 가장 불편해진 점은 사실 숙소보다는 식사였다. 마을에서 지내면 식당에서 해결하면 되는데, 숲에선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매번 끼니때마다 마을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무래도 직접 해 먹는 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이 상황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편식하는 편도 아니고, 전에도 대충 먹으면서 잘 지냈으니까. 그냥 그 시절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하면 될 줄 알았다. 미처 몰랐던 거다. 시벨리우스와 지내는 동안 내 입맛이 너무 높아졌다는 걸.
정령일 땐 별다른 영향이 없었는데, 육체가 있는 건 확실히 달랐다. 심지어 이 입맛은 다시 낮아지지도 않았다. 편한 침구는 없어도 괜찮았지만 음식은 아니었다. 이젠 삶은 감자라든가 대충 아무거나 넣어 끓인 잡탕 스튜 같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대로 요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기에도 요리책이 있는 데다가, 시벨리우스가 요리할 때 옆에서 도우면서 눈대중으로 익힌 것들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나니 문득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다. 아크아돈은 매운 음식을 즐기는 나라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은 다 존재했다. 간장도 맛이 좀 다를 뿐이지 비슷한 종류가 있었고, 고추와 깨 기름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비슷한 재료들을 찾아 최대한 활용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떡볶이를 만들어봤고, 다음으로는 불고기와 갈비를 만들어 봤다.
사실 정확한 방식대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얼추 짐작대로 해본 거라 제대로 된 한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비슷한 맛이라도 느껴본다는 게 왠지 감동스러웠다. 그래서 내친김에 이번엔 김치에 도전해본 거였다. 이런 사연을 알 리가 없는 라미아스는 그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가 만든 김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뻘겋게 생긴 게 아무리 봐도 먹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먹을 거 맞다고 몇 번을 말해요.”
일단 양념은 잘 배어든 것 같아 맛을 봤다. 짭짜름하면서 매운맛이 약간 달착지근한 느낌으로 혀에 맴돌았다. 액젓은 끝내 구하지 못해 감칠맛은 조금 떨어졌지만, 이만하면 꽤 만족스러웠다.
“와, 나 천재인가?”
레시피도 안 보고 만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맛을 내지? 아무래도 요리에 심상치 않은 재능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배울걸. 그럼 이사나랑 둘이 다닐 때 좀 더 괜찮은 식사를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입맛이 높아진 나도 대충 먹는 게 힘들어졌는데, 황제였던 이사나는 더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는 게 새삼 대견했다.
“뭐야, 그렇게 감탄할 정도로 맛있어?”
나 혼자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호기심이 생겼는지 라미아스가 내가 잘라둔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매워!”
경악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테러용 맞잖아!”
“거참, 엄살이 심하시네. 이 정도가 뭐가 맵다고 그래요. 나도 매운 거 잘 못 먹는 편이라 안 맵게 만든 거구만.”
“이게 어떻게 안 매운 거야! 너 혀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드래곤이 이 정도 매운 것도 못 먹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더 먹어 봐요. 매운맛은 통각이라 계속 먹으면 적응할 거예요.”
“웃는 얼굴로 무슨 무서운 소리를 하는 거야!”
펄펄 날뛰는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니 정말 매운가 보다. 뜻밖에 재밌는 걸 발견한 기분에 유심히 구경하자니 그가 파드득 몸을 떨고는 두고 보자며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내가 김치를 더 먹일까 봐 달아나는 게 분명했다.
“애냐.”
너무 신나게 웃었나 보다. 라피스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매운 거 좀 먹었다고 두고 보자고 하는 게 웃기잖아. 라미아스가 저렇게 매운 거에 약한 줄은 몰랐어. 넌 알고 있었어?”
“몰라. 관심 없어.”
돌아오는 대꾸는 몹시 뚱했다. 평소에도 친절한 태도는 아니지만 그는 유독 라미아스한테 반응이 더 건조한 편이었다. 물어보면 딱히 사이가 안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방문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느낌이다.
혹시 란타샤랑 얽혀 있어서 그런가? 차였다곤 해도 어쨌든 어머니와 연애할 뻔한 상대니까. 자식 입장에선 기분이 묘한 건지도 모르겠다. 라피스가 딱히 그 정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닐 텐데. 지금으로선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이유가 없었다.
내 생활이 단조로워지면서 엘뤼엔은 정령계에 가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아무래도 정령왕의 영역이 두 군데나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은 듯했다. 둘 다 엘뤼엔이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미네르바의 봉인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마냥 안쓰럽게 여길 수 없다는 게 참 복잡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이프리트와 트로웰도 바쁘긴 마찬가지. 덕분에 나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라미아스가 자꾸 찾아와 잔소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혼자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답답해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시 만나면 선물을 주지!”
“너 내 아들 해라!”
“뭘 하는가 했더니!”
“……진짜 뭐하냐, 너?”
침대에 누운 채로 계속 중얼거렸더니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가 짜증을 냈다.
“키워드 조합해보는 거는 건데. 내 잠재의식 속에 있을 거라고 했거든. 이러다 덜컥 맞출 수도 있잖아.”
“근데 그 이상한 주문들은 다 뭐야?”
“주문은 아니고.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말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들 위주로 떠올려보는 중이야.”
“…….”
침묵에서 욕설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이다 싶다가도 조금 아쉬웠다. 짜증 나면 자주 짓는 표정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기억력은 좋다고 자부했는데, 요즘은 라피스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다가 멍청해지면 어떡할 거야!”
얼마 전 라미아스가 외치고 간 말이 떠올랐다. 설마 정말 바보가 되어가는 건 아니겠지.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고립된 환경이다 보니 신경 쓰이긴 했다.
때마침 가방 안에서 웬 불빛이 반짝거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금속 메달이 달린 목걸이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일전에 라미아스가 연락 좀 편하게 하자며 주고 간 통신용 마도구였다. 반려석과는 다르게 영상 송출 기능은 없었지만, 나는 이쪽이 더 편해서 좋았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가 뭐야?』
메달에서 라미아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냥 습관이에요.”
『넌 종종 이상한 말투를 쓰더라. 대체 고향이 어디야?』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건데요?”
『말 돌리긴. 너 오늘도 한량처럼 지낼 거지?』
“한량이라니…….”
『신체 건강한 녀석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면 그게 한량이지 뭐야. 아무튼 됐고, 너 심심하지 않냐? 내 일 하나만 도와줘라.』
“정보국 일인가 봐요?”
『뭐, 그런 거지. 보수는 섭섭지 않게 챙겨줄게.』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돈이라면 이미 넘치도록 많다. 예전에 사냥한 몬스터들을 처분한 돈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엘뤼엔도 주고 갔다. 무엇보다 돈이 있어봤자 쓸 데도 없었다. 숲에만 있는데 돈이 필요할 리가.
“별로 끌리지 않는…….”
『내 전속 제빵사가 만든 특제 케이크 세트.』
“…….”
『네 유니콘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인간 중에선 제일 실력 있는 제빵사지. 대륙 어딜 가도 이거보다 맛있는 케이크는 먹지 못할걸? 어때, 이건 좀 끌리지 않겠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간 요리가 좀 늘긴 했는데, 아직 제빵은 못한다. 할 수 있어도 대륙 최고의 제빵사가 만든 케이크는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뭘 하면 되는데요?”
* * *
숲에 산다고 해서 세상 물정에 완전히 어두운 건 아니다. 비품을 보충하기 위해 마을을 들를 때마다 듣게 되는 소문도 있고, 라미아스가 직접 말해주는 것들도 있다 보니 큰 흐름은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왕실이 파탄 난 에펜 왕국이 한동안 몹시 혼란스러웠다는 것도, 그러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던 국왕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새 국왕은 막내 왕자였다는 것 말고는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선대 국왕과 나이 차이도 커서 왕권 다툼에선 일찌감치 물러나 있었고, 그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능력이 좋은지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나라가 빠른 속도로 안정되어 가는 추세였다. 끝없이 오르기만 하던 세금도 동결되었고 난민을 구제하는 정책도 펼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선대 국왕보다는 나라를 잘 꾸려갈 사람인 건 분명했다.
라미아스가 부탁한 건 바로 그 새 국왕을 암살하려는 작전을 막는 거였다. 왕실이 비어 있는 동안 내란이 들끓으면서 여기저기 왕위를 탐내는 세력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퇴각! 모두 퇴각하……!”
퍼억! 비상 신호를 울리며 퇴각을 명하던 남자가 외치던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근방에 있던 이들이 모두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주춤거렸다.
쓰러진 사람이 완전히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다음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젖은 흙과 물 냄새 사이로 비린 피 냄새가 섞였다. 왕성의 지하 수로 안, 새벽녘을 기다리며 습격을 준비하던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은 이제 열 명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뒤집어쓴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들은 모두 부릅떠진 채 나를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체를 알아내려는 시선이다. 어차피 나도 복면을 쓰고 있어서 봐도 소용없겠지만.
“미안한데, 퇴각은 못 할 거 같네요.”
챙그랑, 순간 병장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모두가 짜 맞춘 것처럼 우르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다음 공격을 이으려던 걸 멈추고 어정쩡하게 자세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뭐야, 항복할 거예요?”
그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뭐, 전부 다 죽여야 한다는 말은 없었으니 투항을 받아들여도 상관없겠지. 알겠다는 뜻으로 무기를 거두니 다들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고. 전부 묶어둔 다음에 라미아스한테 연락해보면 되려나? 잠시간 고민하다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움찔한 이들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눈동자들을 보며 빙긋 웃어줬다.
“일단 자고 있어요.”
항복한 사람들을 막 기절시켜 두는데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앗,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빠르게 돌아보자 가까이 다가오던 사람들이 다급히 소리치며 허둥지둥 망토를 들쳐 보였다. 뭘 하는 건가 했는데 이제 보니 안에 입고 있는 제복의 형태가 익숙했다. 아이기스의 요원들이었다.
“국장님께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물망초. 뒤처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물망초?’
그건 또 뭐야. 라미아스가 뭔가 이상한 짓을 해 뒀나 보다. 안 그래도 귀찮았는데 잘됐다 싶어 나머지 과정은 그들에게 인계하기로 했다.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서니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요원들이 딱딱한 자세로 경례를 보냈다.
“곧 국장님께서 연락하실 겁니다.”
긴장했는지 건네는 말투도 몹시 조심스러웠다. 알겠다는 눈짓을 보내준 다음 가볍게 도약해서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그렇게 완전히 지하 수로를 빠져나갔을 때쯤, 들었던 대로 품속에서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네, 저예요.”
『지금 막 임무 완료 신호 받았다. 어떻게 됐어? 우리 애들 만났어?』
“네, 만났어요. 남은 일 넘겨주고 나온 참이에요. 근데 물망초는 뭐예요? 절 그렇게 부르던데.”
『네 암호명.』
“그것참 금시초문이네요…….”
『애들한테 네가 일급 극비 요원이라고 둘러댔거든. 아이기스는 원래 암호명을 꽃 이름으로 지어. 전통이니까 이해해.』
일급 극비 요원이라니. 어쩐지 다들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이다 했다.
“왜 하필 물망초인데요?”
『너랑 잘 어울리지 않아?』
대체 어디가? 그거 되게 아기자기하게 생긴 꽃 아닌가? 라미아스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괜히 이상한 말만 들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정말 고맙다. 기습 작전이라 우리 쪽에서 파악하는 게 너무 늦었거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근데 제국이 왜 에펜 국왕을 도와줘요?”
『아, 그 국왕을 세운 게 우리야.』
“헐…….”
『힘 실어주고 추대하느라 고생 좀 했지. 기껏 투자했는데 이렇게 금방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왕실 혈통이라 자연스럽게 추대된 줄 알았더니. 그런 물밑 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왕국민도 아닌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국가 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우리가 전쟁해서 먹자니 큰 이득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제국이 먹는 꼴을 볼 수는 없고. 어영부영 방치했다가 계륵이 될 바엔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왕조를 두는 게 나으니까.』
“와, 대국 마인드 재수 없어.”
『너 은근슬쩍 말을 막 한다?』
“혼잣말이에요, 혼잣말. 그보다 일이 너무 많았어요. 잠복한 위치가 전부 다 다른 데다가 인원도 들은 것보다 더 많았다고요.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는데요?”
『알았어. 원하는 대로 준비해둘게. 먹고 싶은 거 전부 말만 해.』
적당히 통신을 마무리한 후 고개를 드니 하늘이 어슴푸레 환해져 있었다. 곧 동이 틀 시각이었다. 모처럼 수도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자니 아쉬워서 환복한 후에 번화가로 걸음을 옮겼다.
상점가에서는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한창 장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몇 개의 골목을 건너가자 한창 짐을 옮기고 있는 인부들 사이에서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 이거 이쪽으로 옮기면 돼요?”
“어휴, 내버려 두고 넌 학교 갈 준비나 하라니까.”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요. 괜찮아요.”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얼굴을 한 모녀는 랑시와 랑시의 엄마인 에리나였다. 장사가 잘된다고 하더니 가게도 제법 크고 직원들도 많아 보였다.
‘잘 지내고 있구나.’
큰 후유증 없이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했던가. 라미아스한테 부탁해서 간간이 소식은 살피고 있었지만, 직접 와서 본 건 그날 헤어진 후로 처음이었다. 어두운 기색 없이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사이에 키도 더 큰 것 같았다.
“가서 인사라도 하지그래?”
라피스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 때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근방에 있던 작은 화원이 문을 열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막 내놓기 시작한 화병 중에서 꽃 하나를 발견하고 기분이 묘해졌다. 무슨 우연인지 물망초였다.
“저기, 지금 꽃 살 수 있나요?”
“네, 뭐로 드릴까요, 손님?”
반갑게 웃으며 대답하는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조금 큰 꽃다발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기척 없이 조용히 다가가 랑시의 근처에 내려놓고 나왔다.
“엄마, 누가 꽃다발을 두고 갔어요.”
“어머나~ 예쁜 물망초네. 누구지?”
뒤늦게 꽃다발을 발견한 모녀가 수선스러워졌다. 놓고 간 사람을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중이었지만 아마 날 발견하지는 못할 거다. 설마 지붕 위에 올라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유치하긴.”
웃으며 구경하고 있으니 라피스가 끌끌 혀를 찼다. 그래, 나 유치하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