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옮긴 장소는 아르단의 방이었다. 단 둘이서만 대화하겠다는 아르단의 명에 따라, 탁자에 다과를 차려둔 시종들이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손녀인 웰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더는 지켜보는 시선들이 없게 되고 나서야 아르단은 입을 열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안심됩니다. 시벨리우스 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그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릅니다. 노인을 이렇게 노심초사하게 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말도 없이 나간 건 미안해.”
“이해는 합니다. 시벨리우스 님은 아직 한창의 나이이니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신 거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됐습니다.”
평화로운 대화였으나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그렇지 않았다. 시벨리우스는 날선 기류가 파고드는 것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장로와 보내는 시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가벼운 대화도 칼로 찌르고 베는 것 같았다. 그와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을 한 아르단은 탁자 위에 올려둔 서클렛을 손가락으로 느긋하게 쓸었다.
“웰디에게서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마신의 성물을 가져와버린 모양이더군요.”
“신관들이 찾고 있어. 다시 돌려줘야 해.”
“물론입니다. 성물을 사사로이 소유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건 제가 수하를 시켜 마신전에 돌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시벨리우스 님.”
엄격한 목소리에 시벨리우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철없는 행동은 이제 충분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
“다른 종족의 세상이 신기해보이고 재밌어 보일 수 있지요. 그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룬은 그래선 안 됩니다. 늘 주변을 경계하고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처럼 간교한 종족은 특히 가장 주의해야 합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난 충분히 주의하고 있어. 그리고 모든 인간이 간교한 건 아니야. 좋은 사람도 있어.”
“이것 보십시오. 주의하신다면서 이미 인간에게 호의적인 태도시군요. 스스로 모순을 느끼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르단. 난 바보가 아니야.”
한숨과 함께 내뱉은 대답에 아르단이 잠시 멈칫했다.
“눈앞의 상대가 간교한지, 호인인지. 진심으로 날 위하는 건지 아닌지. 그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어.”
“…….”
“누구보다 날 어리숙하게 여기고 무시하고 있는 건 당신 아닌가?”
공기가 가라앉으며 정적이 흘렀다. 아르단은 웃음기를 거둔 얼굴로 한동안 가만히 시벨리우스를 응시했다. 그리곤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렇군요. 시벨리우스 님도 이제 장성하셨지요. 늙은이가 노파심이 너무 과했나 봅니다. 제 눈에는 아직도 시벨리우스 님의 어린 시절이 선해서 말입니다.”
“…….”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으셨지요. 부모도 형제도 없이 홀로 남겨진 상태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매일 아르단, 아르단, 하면서 얼마나 저를 찾으셨는지…….”
“그만해, 아르단. 말 그대로 어릴 때 일이잖아.”
“하하, 죄송합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져서 그만.”
속이 갑갑한 기분에 시벨리우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보호자였던 과거를 내세우는 아르단은 정말 상대하기 벅찼다. 빚을 진 기분에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눌러 삼키게 된다. 그렇게 삼킨 싹이 결국은 독이 되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시벨리우스 님을 잘 보필해야겠다는 생각이 과한 나머지 그간 제가 너무 엄격했지요. 서운한 마음이 있으신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모한 행동을 하신다면 그거야 말로 시벨리우스 님이 아직 장성하지 않으셨단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난 반항심 때문에 이러는 게……!”
“반항심이 아니라면 한때의 유희는 그저 유희로 흘려버리실 줄도 아셔야겠지요. 룬의 책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실 테니 말입니다.”
“……아르단.”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상대가 호인인지, 악인인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룬은 그런 걸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애초에 다른 종족과 어울려선 안 된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아르단의 두 눈이 기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시벨리우스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서있는 것 같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넘을 수 없는, 까마득히 높고 견고한 벽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조용해지자 아르단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벨리우스 님이 자꾸 외부로 시선을 돌리시는 건 부담감 때문이겠지요. 아직 룬의 힘을 각성하지 못하신 것에 너무 자책하셔서 그런 겁니다. 다 부담을 드린 제 탓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신계로 돌아가면 시벨리우스 님도 룬의 힘을 각성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때가 되면 일족들과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겠지요.”
우스운 말이었다. 각성이 화합의 기준이라면 역대 최강의 룬이라 평가 받는 선대 룬은 누구보다 진정한 화합을 이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힘을 폐하고 마을을 떠났지 않았던가. 애초에 룬은 유니콘이 아닌가? 다른 일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이루는 화합을 왜 그는 힘을 각성해야만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머릿속이 반박하고 싶은 말들로 온통 소란스러웠다.
“이해하셨으면 이제 신계로 돌아갈 준비를…….”
“난 안 갈 거야.”
대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멈칫한 아르단이 무서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난 신계에 안 갈 거라고 했어. 갈 거면 당신들이나 가. 난 아크아돈에 남을 거야.”
“…….”
노련한 장로답게 아르단은 선뜻 흥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던 시벨리우스가 얼굴을 굳혔다.
“이곳에 남은 미련거리가 사라져도 그렇게 말하실지 궁금하군요.”
“……엘이 죽어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내 친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라도 더 가지 않을 거야. 엘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할 생각도 하지 마. 그럼 나도 내 목숨을 걸 테니까.”
“설마 죽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못 할 것 같아?”
“…….”
처음으로 아르단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노려보았다가 한층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시벨리우스 님. 유니콘 일족이 신계로 귀환하는데, 룬인 당신이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룬 취급 한 적 없잖아.”
“시벨리우스 님.”
“그리고 신계에 돌아가면 룬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다들 내가 아니라 루세프 님이 강신하길 원했던 거잖아. 그 루세프 님을 직접 뵐 수 있게 됐으니 내 역할도 끝난 거 아닌가?”
“그렇다 해도 그 힘은 고유합니다. 다른 종족에게 넘어가게 할 수는…….”
“절대 안 넘겨. 맹세해. 원하면 이 자리에서 힘을 폐할게. 나도 날개를 꺾으면 돼? 그러면 되겠어?”
“무슨…….”
“그만두게 해줘. 난 이런 거 이제 더는 못하겠어. 전부 지긋지긋해.”
그 순간 아르단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격정적인 반응에 시벨리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형제가 참으로 똑같군요. 하긴 룬의 혈통들은 항상 그랬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보는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을 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이 닿았다. 시벨리우스는 저 얼굴이 미소 짓는 얼굴보다 그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마 가장 솔직한 진심을 비춘 얼굴이라 그럴 터였다.
“남들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걸 긍지로 여기지 못할망정 의무를 내팽개칠 궁리만 하기에 바쁘지요. 대체 왜 루세프께서 당신들의 혈통에 룬의 힘을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면, 내가 룬이었다면……!”
“당신이 룬이라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거 같아?”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 책무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차라리 당신이 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실소하며 답하는 말에 아르단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다. 이어지는 질문엔 이를 가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아크아돈에 남겠다 하셨습니까? 어떤 말로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우리와 같이 신계로 돌아갈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겁니까?”
“그래.”
“하! 좋습니다! 우리도 당신같이 한심한 룬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신계로 돌아가면 룬 따위가 더는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설마 이대로 포기하는 건가? 희망을 느낀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단의 입매가 크게 비틀어졌다.
“허나 필요 없다 해도 룬의 힘은 루세프님의 산물. 저는 그 고결한 힘을 지상에 방치하지도, 그 힘이 소멸하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겠습니다.”
직후 짧게 무어라 중얼거린 아르단이 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매만졌다. 동시에 시벨리우스는 자신을 억압하는 강력한 힘을 느꼈다. 무언가에 결박된 것처럼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뭘 하려는 거야.”
“그거 아십니까, 시벨리우스 님? 이 신물이 내리는 심판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지에 박힌 푸른 보석에 기이한 빛이 번졌다. 저 보석이 청금석이던가. 신력을 담아내기에 좋은 광물이라 신의 보석이라고도 불리는 광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클렛에 박혀 있는 보석도 같은 재질인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서클렛의 보석에서도 빛이 일었다. 마치 두 보석이 서로 공명하는 것처럼.
“죄인을 영원한 심연에 가두소서!”
눈앞에서 폭풍이 일었다. 그 속에 순식간에 집어삼켜진 시벨리우스는 아득한 추락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엘한테 장갑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문득 이전의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 얼마 전 포목점을 구경하다 운 좋게 인어의 비늘을 발견해서 구입해둔 참이었다. 아주 예쁜 파란색이었는데, 전해주기라도 할 걸 그랬다. 트로웰의 말대로 작별 인사는 하고 왔어야 했던 건지도 몰랐다.
‘미안해, 엘.’
흐려진 시야가 닫히며 의식이 빠르게 멀어졌다. 그는 그대로 먹물 같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쏴아아―
소용돌이 치던 기류가 서클렛의 보석 속으로 사납게 빨려 들어갔다. 그 거대한 파장이 끝났을 땐 시벨리우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를 집어 삼킨 서클렛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얌전하기만 했다. 이윽고 소임을 끝낸 반지가 먼지처럼 바스라지는 것을 아르단은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귀한 신물을 써버렸지만 한 점의 후회도 일지 않았다. 오히려 희열이 들끓어 올랐다.
“원하는 대로 지상에 남으시지요, 마지막 룬이여. 영원한 시간에 갇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말입니다.”
이젠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대를 향해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것으로 룬의 혈통은 영원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보거나 해할 수 없을 터였다.
* * *
예상했던 대로 시벨리우스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혹시 몰라 마신의 성물에 관한 소식을 수소문해봤지만 그에 관해서도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였다. 너무 자세히 파고들면 이상한 오해만 받게 될 것 같아서 이것도 어느 정도만 알아보다가 적당히 그만뒀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가 근원의 숲 안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기간이기도 했다. 처음엔 간단한 천막을 치고 지냈는데 불편한 점들을 하나둘씩 보완해나갔더니 지금은 오두막집 정도가 됐다. 시벨리우스의 천막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은 했다. 단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라미아스는 올 때마다 불평하기 일쑤였다.
“아니, 대체 왜 이런 산속에서 처량하게 지내는 거냐고. 하다못해 근방의 마을에서 지내도 되잖아. 네가 돈이 없어 능력이 없어? 지낼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는데, 싫다. 마을에서 주택을 구매하라는 것도 싫다. 하다못해 인부 고용해서 쓸 만한 집이라도 지으라니까 그것도 들은 척을 안 해. 너는 대체 뭐가 문제냐?”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오만상을 찡그린 라미아스는 대접받은 차를 마시는 내내 투덜거렸다. 순서와 표현만 조금 다를 뿐이지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조금만 더 들으면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와서 또 잔소리하기예요?”
“내가 오죽 답답하면 그러겠냐? 다른 인간들은 젊을 때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난리인데. 넌 아직 한창때인 녀석이 말이야. 왜 벌써 은퇴한 인간처럼 살아? 야망도 없어?”
“에이, 그런 거 있어서 뭐해요. 일만 많이 하지.”
“넌 네 재능과 능력이 아깝지도 않냐!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다가 멍청해지면 어떡할 거야! 그럴 바엔 그 능력을 나를 위해 써! 내 후계자가 되라고!”
“이미 후계자 정했잖아요. 발표 연회까지 열지 않았나?”
“네가 한다고 하면 걔 물릴게. 걔도 상대가 너라면 아무 불만 없이 물러날걸?”
“하하, 싫어요. 안 해요.”
농담이라도 적당히 받아넘겼다간 정말로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라(그리고 다비안도 정말 양보할 사람이라) 냉큼 발을 뺐다. 라미아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세피온 공작의 후계자라니, 어림도 없지. 다른 일은 해도 그건 절대 안 한다. 누굴 말려 죽이려고.
“다비안한테 잘하세요. 아무나 하겠다고 받아주는 거 아니니까.”
“못 할 자리 권한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이거 공작 후계자 자리거든? 심지어 세피온 공작 가문이거든? 제국 5대 가문 중 하나인 대귀족이라고! 제국에서 가장 많은 영지를 보유한 가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요.”
관리할 땅이 많으면 일도 그만큼 더 많을 거 아냐. 그야말로 눈만 돌리면 일감이 쌓여 있는 상황일 텐데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다비안만 해도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에 들어간 후로는 잠도 거의 못 자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쯤 왜 하겠다고 했을까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니 라미아스는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거참. 이런 만사태평인 녀석이라 정령들이 좋아하는 건가…….”
나라고 무작정 허송세월하고 싶은 건 아니다. 여전히 귀환할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고,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건지 고민도 많이 했다. 처음엔 유희하는 셈 치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보거나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 헌터 생활을 해볼까도 싶었다. 그런데 계획을 세워볼 때마다 그냥 여기에 있어야 할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근데 너 아까부터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요리하는데요.”
한창 버무리고 있던 그릇을 들어 보였다. 절인 배추에 붉은 양념이 더해지니 제법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하지만 라미아스는 얼굴을 왕창 찌푸렸다.
“진짜 요리 맞아? 너 지금 거기에 고춧가루랑 마늘 같은 거 막 쏟아붓지 않았어? 테러용 폭탄을 제조하는 게 아니고?”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음식 맞거든요. 김치라는 거예요.”
“그런 음식은 처음 들어보는데?”
“와, 그래요? 드래곤도 모르는 게 있구나.”
“뭐? 아, 아냐! 진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니까? 어느 나라 음식인데?”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책에서 우연히 요리법만 본 거라서요.”
“무슨 책이 지역 소개도 없이 달랑 요리법만 적혀 있어? 그 책 나도 좀 보자.”
“저한테 없어요. 예전에 도서관에서 봤던 거예요. 제목도 모르고요.”
“암만 들어도 수상한데. 그냥 아무 말이나 지어 붙이는 거 아니야?”
지어 붙이는 거 맞다. 그렇다고 한국 음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계에서 왔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인간이면 대충 그런 나라가 있다며 무마해도 되겠지만 몇천 년 묵은 드래곤에겐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는지 라미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