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75화 (575/608)

제575화

“저게 뭐 하는 거야?”

라미아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을 가리키자 디아곤이 그렇다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나를 같이 가리켰을 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 해괴한 짓을 다 하네. 저놈이 나한테만 따로 할 말이 있나 본데. 잠깐 다녀올게.”

“네.”

그 뒤로 이어진 광경은 한편의 희극이 따로 없었다. 디아곤이 저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라미아스를 해맑게 웃으며 반겼다. 그리곤 곧바로 그의 입을 틀어막더니 그대로 공간 이동을 했다. 경악한 라미아스가 저항을 시도했을 땐 이미 빛 속에 삼켜진 후였다. 찰나의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디아곤이 다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게 마지막 광경이었다.

“…….”

음, 뭐, 알아서 잘 해결하고 돌아오겠지. 그동안 시간이나 때울 겸 주위를 돌아보았다. 후문에서 이어지는 둔덕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풀밭 위로 별 무리 같은 꽃들이 한가득 수를 놓았다. 근처의 숲에서 날아온 듯한 하얀 꽃잎이 바람을 타고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봄을 한가득 담은 달콤한 바람이었다.

오늘따라 정령들도 기분이 좋은지 웃음소리가 맑았다. 한동안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라미아스가 왔나 싶어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꽃잎들이 춤을 추는 곳에 서 있는 건 라미아스가 아니라 흑발의 소년이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금안을 가진.

“트로웰.”

이제야 조금 전 디아곤의 이상한 행동이 이해됐다. 아무래도 우리 둘이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건가 보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는 나를 그는 차분히 응시해왔다.

“영역을 수습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잠깐 온 거야.”

짤막이 대답한 후 트로웰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선이 내 가슴 부근에 머물렀다.

“몸은…….”

“아! 보다시피 멀쩡해. 전혀 아무렇지 않아.”

“……그래.”

“트로웰은? 괜찮아?”

내 질문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넌 이상해.”

어딘지 허탈해 보이는 음성이었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그 모습에 용기를 냈다.

“저기, 이프리트한테 들었어. 인간을 멸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고. 정말 고마워.”

트로웰은 잠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 불쑥 내뱉듯이 물었다.

“일어났을 때 모든 게 끝났으면 어땠을 거 같아?”

“그거야 당연히…… 슬펐겠지.”

그는 잠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다시금 나를 응시하는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랜 방황을 끝마친 것처럼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인간이 좋지는 않아.”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네가 죽는 건 더 싫은 것 같아. 아니, 싫어. 인간을 다 멸족시키려는 주제에 그중에서 하나가 죽는 건 싫다니, 너무 모순이잖아. 그걸 깨달았을 뿐이야.”

“트로웰…….”

“정확히 말하면 그만둔 게 아니라 보류야. 네가 죽은 후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마치 떠보는 듯한 말이라 웃음이 나왔다.

“트로웰은 안 그럴 거야.”

“단정하는 어투네.”

“정말 안 그럴 거니까.”

내 세상의 그가 증거였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대답은 같았을 거다. 이미 트로웰의 마음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만난 그에게선 늘 가시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래의 그만큼이나, 온전히 편해진 트로웰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괜찮구나. 괜찮아진 거야. 조용히 혼자 감동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어딘지 씁쓸해 보인다고 느꼈을 때였다.

“미안해.”

“……응?”

“내가 너무 못나게 굴어서……, 널 다치게 했어. 정말 미안해.”

차분한 사과와 함께 그가 머리를 숙였다.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멍해졌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아냐, 트로웰! 이러지 마.”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널 괴롭게 한 건 사실이잖아.”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안 써. 내가 아는 트로웰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네가 아는 내가 뭔지 모르겠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내 형이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떨군 트로웰이 피식 웃었다. 나야 부끄러울 게 없었으므로 그저 당당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담담히 떨어지는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으로 서로를 마주하기까지,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헤헤거리고 웃는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트로웰이 곧 뭔가를 상기한 얼굴로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다시 돌려줄게.”

“응? 아……!”

그가 품에서 꺼내드는 걸 보고 나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라피스가 담긴 주머니였다. 내가 그에게 줬던 방식 그대로, 이번엔 트로웰이 내 손을 잡고 주머니를 쥐여 줬다.

“야이! 너! 이 미$#%[email protected]##%ㄲ악!”

순간 귀가 얼얼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고함이 머릿속을 가득 울렸다. 불시에 닥친 기습에 숨을 삼키자 트로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하하하…….”

그래, 이거지. 라피스라면 만나자마자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을 줄 알았다. 역시 할 말은 하는 드래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트로웰더러 개 또라이라고 했더니 넌 한 술을 더 뜨냐!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내 복장을 뒤집으려고 작정을 했어! 너도 또라이라고 불러줘? 어?”

‘알았어, 라피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우리 이따가 얘기하자.’

“그게 반성하는 태도냐!”

이번엔 진짜 단단히 화났나 보다.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잔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내 모습을 트로웰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가 가볍게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기웃거리고 있던 정령들이 움찔해서 우르르 사라졌다. 지켜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쫓아낸 게 분명한 행동이라 몸이 긴장했다.

“그것에 관해 물어볼 게 있어.”

“으응? 뭔데?”

“그 영혼의 보석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왠지 모르게 너와 비슷했어.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어? 그, 그래? 이상하네. 이프리트는 화기가 강하다고 했는데.”

“속성을 말하는 게 아냐.”

차분히 내리뜬 금안이 신묘한 빛을 품었다. 혜안을 연 거다.

“역시 아무리 다시 봐도 같아. 널 읽어보려고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야. 생소한 게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이상할 정도로 그리운 기분이 들어.”

“…….”

이걸 어쩌지. 이런 부작용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라피스도 긴장했는지 어느새 잔소리를 멈춘 채였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넌 대체 누구지?”

이어진 질문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늘 내게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물어온 건 처음이었다. 단지 별다른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 의구심이 든 거다.

어떻게든 모르쇠로 나가보려던 마음을 바로 접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고. 훗날 불시에 일이 벌어져서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되느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카노스의 주술이 발동하도록 유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 정체를 알아차릴 만한 기억을 지우는 거니까, 라피스를 보면서 품은 의구심도 같이 잊을 거다. 결심을 굳히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 줄게.”

운을 떼자 트로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으면서 막상 정말 답하려고 하니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난 실은, 이곳에 친구의 영혼을 찾으러 왔어.”

“……뭐?”

“내 친구가 큰 사고를 당했는데…… 영혼이 사라져버렸거든. 그게 여기에 떨어져서, 그걸 따라온 거야.”

마주한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이 말로 꽤 많은 부분을 알아차렸겠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부터, 찾으러 온 친구가 바로 지금 내 손에 들린 영혼의 보석이라는 것까지. 내 입으로 여기까지 밝혀본 건 처음이라 그런가.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그거 알아, 트로웰? 거기서도 우리는 형제였어.”

순간 입을 벌린 그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럽게 일렁이는 얼굴이 수많은 감정을 빚어내다 곧 화려한 빛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게 이상했다는 듯. 떨리는 숨을 내뱉은 입술이 환하게 웃었다. 물기가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며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그는 이내 우려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내가 그동안 말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짐작한 듯했다.

“이런 걸 알려줘도 괜찮은 거야?”

“상관없을 거야. 이 정도는.”

대놓고 정체를 밝힌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아마도. 그래도 시야가 울렁거리고 있으니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힘겹게 웃는 게 느껴졌는지 트로웰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뻗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차피, 전부 잊을 테니까.”

“너……?”

“미안해, 트로웰.”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곧 텅 빈 듯이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울렁거리던 시야가 빠르게 안정됐다. 다행히 카노스의 주술이 안전하게 발동한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시 눈에 빛이 돌아왔을 때 트로웰은 꿈에서 막 깬 것처럼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움찔해서 물러섰다.

“방금, 뭐였어?”

“응? 뭐가?”

“왜 내가 너랑 손을…… 아니, 됐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그는 어느새 경계심을 거둔 모습이었다. 덕분에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기억이 지워졌어도 위화감은 분명 있을 거다. 더 집요하게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체념이 빨랐다.

“너에 대해서 이해하는 건 이제 그만뒀어.”

“아하하…….”

내가 수상하게 군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 본의 아니게 그간의 행실이 면역 역할을 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싶으면서 민망한 기분을 삼키고 있는데 트로웰이 나를 진지하게 응시해왔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언젠가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전부 설명해주겠다고.”

“…응.”

이번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약속할게. 언제가 되든 꼭. 전부 다 말할게.”

말할 수 있는 그 시기엔 이 약속조차 지워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꼭. 언젠가는 반드시. 웃으며 답하니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트로웰. 하루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도 네가 너무 그리워. 그곳의 너도 잘 지내고 있을까? 이날의 일들을 기억하게 됐을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말들을 억지로 터트려 흩었다.

그래도 이제 마주 보고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처럼 멀게 느껴지던 일이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작별 시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렇게 오래 대화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벌써 헤어질 시간이라니, 아쉬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언제 또 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다음 기약이라도 받아놔야겠다는 생각에 그가 사라지기 전에 다급히 말을 걸었다.

“저기, 트로웰. 우리 종종 볼 수 있는 거지?”

“종종이면 얼마쯤을 말하는 거야. 일 년 주기?”

“아니! 그건 종종이 아니지!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되어야…….”

“네 까칠한 정령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어딘가를 의식하는 느낌이라 무심코 따라 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는지 엘뤼엔이 팔짱을 낀 상태로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음, 아버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우리 이제 화해했잖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엘뤼엔이 근거를 드는 순간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 화해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아?” 트로웰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누가 영역의 토대까지 완전히 날려버려서. 시간을 많이 내긴 어려워.”

그래도 안 오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짧게 보는 것도 괜찮아.”

“그래, 그럼.”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자.”

“응! 다음에 봐, 트로웰!”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답하니 트로웰 역시 미소지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투명해지면서 빛이 되어 흩어졌다.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꽃잎들이 흩날리는 걸 잠시간 지켜보다 몸을 돌려 엘뤼엔을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 데리러 와준 거야?”

“그래. 아직 이곳에 용건이 남았나?”

“아니, 그렇진 않은데. 아, 근데 라미아스가…….”

“그건 알아서 올 거다.”

라미아스에겐 꾸준히 냉담한 그다운 답변이었다.

“근데 아버지, 나랑 다시 계약 안 할 거야?”

그 말에 이동 마법을 시작하려던 엘뤼엔이 멈칫했다.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던 건가 싶어서 조금 서운해졌다.

“화해하면 다시 계약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것도 네겐 화해로군.”

“헐, 우리 화해한 거 아니야?”

잘못했다고도 했고 포옹도 했잖아! 분위기 좋았잖아! 그럼 화해한 거지! 설마 나만 기분 풀린 거야? 그런 거야? 당황해서 돌아본 엘뤼엔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여전히 못 미더워서 그래? 이제 진짜 무모한 짓 안 한다니까?”

“아니, 그래서가 아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입가를 가볍게 매만졌다. 평소답지 않게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엥? 내가 왜?”

“……그렇군. 내가 또 잘못 판단했던 것 같다.”

그간 엘뤼엔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던 듯했다. 그는 잠시간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애처로운 것을 보는 듯한, 그러면서도 안도감이 스민 시선이었다. 트로웰이 후련해하던 것처럼, 그 역시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하지만, 그래. 아버지라면 원하지 않았어도 권해야 했던 거겠지. 그게 네게 이로운 일이라면 더더욱.”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네겐 배우기만 하는군. 항상 먼저 다가오게 해서 미안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버지. 이건 아버지가 나한테 먼저 가르쳐준 거야. 아버지가 먼저 날 아들로 삼아줬기 때문에. 내가 온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꾸준히 배려해주고 묵묵히 기다려줬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그럴 수 있었던 거야.

“계약하자, 엘. 다시는 깨지지 않을 계약을.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이다.”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휘어 접은 엘뤼엔의 얼굴에 찬란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어느 날, 내가 그의 아들이 되겠다고 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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