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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573화 (573/608)

제573화

“괜한 짓을 하네. 그래 봤자 어차피 죽을 텐데. 너 때문에 그건 죽는 공포를 두 번 느껴야 하잖아.”

“트로웰, 이건 아냐. 이러면 안 돼.”

“뭐가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돼, 트로웰? 어떻게 하면 될까. 뭐든지 할게. 네가 시키는 일은 전부 다 할게. 제발, 그러니까 제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가볍게 팔짱을 꼈다. 어딘지 신경질적인 동작이었다.

“그럼 네가 죽을래?”

“……어?”

“네가 대신 죽을 거라면 그거 살려줄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이렇게 할까? 네가 죽으면 인간을 멸족하는 계획을 철회하기로. 어때? 한 명의 희생으로 전부를 구하는 거야. 영웅 놀이 하기에 딱 좋은 조건 아닌가?”

영웅 놀이라니, 그런 게 아닌데.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는 내가 말을 이을 틈을 주지 않았다.

“아, 하지만 난 널 죽이지 않기로 했던가. 그럼 네가 스스로 죽으면 되겠다. 간단하지?”

“…….”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경악한 시벨리우스가 벌컥 소리쳤다. 순간 그의 모습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상체의 반까지 땅에 파묻혔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버린 거다. 당장 이거 놓으라며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트로웰이 나를 돌아보았다.

“왜? 이건 아닌 거 같아? 뭐든 다 할 수 있다며. 그래도 막상 너만 죽어야 한다면 그건 또 아닌 거 같지? 그래서 후회할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트로웰, 나는…….”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넌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할 거야.”

경멸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게 떨어지는 말이 아팠다.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거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마치 이래도 잘될 거라 생각하느냐고 조롱하는 듯이. 곰팡이처럼 좀먹는 불행이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더더욱…….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나도 예언 하나 할까?”

“……뭐?”

불쑥 뱉은 말에 트로웰이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미래를 보는 정령왕 앞에서 내가 예언을 운운하니 어처구니가 없겠지. 하지만 우리 둘의 미래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바로 그 미래에서 온 산증인이니까.

“너와 난 언젠가 정말 많이 친해질 거야.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할 일을 제쳐두고 기꺼이 구하러 가는 그런 사이가 될 정도로 말이야.”

“무슨 헛소리를…….”

“우연히 만나면 우리는 너무 기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겠지. 내가 아끼는 이라는 이유만으로 넌 내 일행을 존중할 거고. 내게도 네가 아끼는 이들을 소개해 줄 거야.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라고 여기게 될 거야.”

맞아, 내가 태어났던 세상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난 반드시 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 거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뭐라고 말해도 난 상처 받지 않아.”

그게 아무리 극단적인 방식이라도.

말문이 막힌 듯한 트로웰에게서 시선을 떼고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검집에서 날을 빼내자 새파란 빛이 일었다.

이따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결국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벌써 몇 년째 성장하지 않는 이 육체가 늙기는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주어진 수명이 있긴 할 거다. 주술의 효력이 하염없이 영구하진 않겠지. 혼이 되면 이 시대에 갇힌다고 했으니 곧바로 영혼의 보석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냥 그 시기가 조금 일찍 오는 것뿐이다.

“야,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라피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급하게 들렸다.

‘미안해, 라피스.’

“하지 마.”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반대하는 말부터 나온다. 여하튼 눈치 하나는 정말 빨랐다.

“하지 말라고 했어!”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트로웰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검을 꺼내든 순간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멋대로 구는지 가늠하는 시선 같기도 했다.

“트로웰,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

“……무슨 부탁? 유언? 아니면 유품이라도 남기려고?”

“좀 비슷해.”

트로웰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일변하고 품 안에 고이 보관해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이 안에 라피스가 있었다. 트로웰에게 성큼 다가선 후 그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주머니를 올려놨다. 잠깐 멈칫하던 트로웰이 이채가 감도는 눈으로 주머니를 응시했다. 그간 내게 영혼의 보석이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는데 아무래도 직접 접촉하니 알아본 것 같았다.

“이건…….”

“이 녀석 좀 부탁할게.”

‘미래의 네 대자야.’

이 와중에도 농담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보니 난 확실히 위기의식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야!”

‘난 괜찮아, 라피스. 먼저 돌아가.’

발악하는 듯한 부름에 속으로 대꾸해 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교감 역시 끊겼는지 이후로는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사라져서 모두의 기억이 지워져도 트로웰이라면 영혼의 보석을 그냥 방치하진 않을 거다. 신계에 신고해서 가져가도록 하겠지. 그 이후의 과정은 모르겠다만 운이 좋다면 라피스가 내 상황을 전해줄 수 있을 거고. 그럼 신계 쪽에서 나를 찾아내지 않을까. 물의 정령왕이 돌아오지 않으면 곤란할 테니 어떻게든 찾아내긴 할 거다. 그게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주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던 트로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의도를 살피는 시선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모르겠을 땐 그냥 믿어보라니까. 나도 남의 말 참 안 듣지만 트로웰도 만만치 않다. 혹시 정령왕 천성인가?

“그럼 이제 할게.”

“……뭐?”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날 끝을 가슴에 겨눴다. 심장이 찔리면 얼마 못 버틴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느 정도였지? 몇 분인가? 몇 초? 이왕이면 초 단위였으면 좋겠다. 아픈 건 싫으니까. 아, 그런데 난 타고난 체질도 그렇고 검성이기도 하니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러 번 찔러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체가 이럴 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엘! 안 돼! 그만둬!”

멀찍이서 시벨리우스가 비명을 질렀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저 녀석한테 사과해야 할 것만 늘고 있다.

이런 건 시간을 끌수록 오히려 하기 어려워진다. 눈을 감고 단숨에 검을 찔러 넣었다. 콰직, 살을 꿰뚫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며 뻐근한 감각이 단숨에 차올랐다.

“엘!”

어느 정도는 예상한 거라 그런가.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당장 숨이 막히는 것 같기는 한데 좀 버겁다는 정도였다. 역시 한 번으로는 안 되려나. 그냥 검기를 쓸걸. 이상하게 좋은 생각은 꼭 나중에 떠오른단 말이야. 검은 꽂혀 있을 때보다 뺀 후가 더 위험하기도 하니 우선 뽑아냈다. 그제야 본격적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으…….”

몸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검을 놓치기 전에 재차 다시 찌르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끝까지 의연하려고 했는데 반동 때문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차라리 단숨에 끝내게 해주지, 이러면 더 아프기만 하다고! 누가 방해하는 건가 싶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마주친 얼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트로웰?”

날 붙잡고 있는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트로웰이 나를 막지? 이번만큼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기는 처음이었다.

“너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날 붙잡고 있는 손이 떨고 있는 거 같았다. 입술을 깨문 그가 다급히 내 몸에 무언가를 뿌렸다. 순간 타는 소리가 나면서 끔찍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던 거 같다. 몸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 뒤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실제로 의식을 잃은 건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딘가에 눕혀졌다는 것만 알 것 같았다. 물에 잠긴 듯 먹먹한 이명이 가득했다. 왕왕 다그치는 말소리와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혼란한 중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의 얼굴도 보인 것 같았다.

“아버지……?”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너무 슬퍼 보였다. 꿈인가. 꿈인 것 같다. 왠지 나른한 기분이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 얼굴은 트로웰로 변해 있었다.

“트로웰…….”

“너 대체 뭐야.”

낮게 묻는 목소리에 울림이 일었다. 바로 앞에 있는 데도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역시 꿈인가 보다. 하긴 그렇게 지독하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것도 내가 보고 싶은 광경을 보여주는 꿈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뭐가 이렇게 쉬워? 네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아? 차라리 이전처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우기지 그랬어! 그게 훨씬 더 너다웠을 거야! 알아? 이런다고 누가 널 알아주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희생해봤자 개죽음일 뿐이야! 인간들이 고마워할 거 같아?”

다그치는 얼굴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우는 모습은 내 시대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난 트로웰이 이런 식으로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고 싶었던 걸까. 그보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꿈이라도 억울한 오해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트로웰, 난 인간들 때문에 목숨을 건 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이런 짓까지 했으면서……!”

“내가 목숨을 걸었다면, 그건 널 위해서야.”

젖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얼어버린 것처럼 굳어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트로웰.”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내 손길을 피하거나 뿌리치지 않았다.

“난 트로웰이 행복했으면 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적 없어. 설령 그렇다 해도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싫어. 상관할 거야. 내 형이니까.”

“…….”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형인걸.”

강지훈의 형들은 너무 고약한 사람들이라, 늘 다정하고 멋있는 형을 동경했었다. 내가 그를 따르는 것처럼 그도 나를 동생으로 여겨주길 바랐다. 이곳에서 그가 자신의 입으로 형이라고 말해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다.

“괜찮아, 트로웰. 다 괜찮을 거야.”

표정이 흐려진 그가 엎드려지다시피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 닿은 머리칼이 뺨을 간질였다. 울고 있는지 흔들리는 머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매만졌다. 잠시 멈칫한 트로웰이 내 손을 꽉 맞잡아왔다. 나른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에 눈을 뜨면 전부 끝나 있을까. 망상으로 회피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데. 그래도 이런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발전이 없었다.

* * *

어느 순간 불현듯이 눈이 떠졌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좀 더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부드러운 침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한 두 시간만 더 자면 딱 좋을 것 같다.

옆으로 몸을 돌아눕는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조금 들자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내가 다시 의식을 차리는 건 명계나 신계에서 날 찾아낼 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앞에 엘뤼엔의 얼굴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아버지…… 드디어 만났네.”

엘뤼엔이라니. 엘뤼엔이다. 드디어 만났구나. 헤헤 웃는 나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을 보는 것치고는 너무 무심한 얼굴이다. 나만 반가운 건가 싶어서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그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날 만나고 싶긴 했나 보군.”

“당연하지. 계속 이날만 기다렸어.”

“다시 소환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지.”

“……응?”

소환이라니? 미래의 신을 어떻게 소환해. 그런 걸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을 거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미치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의 머리칼이 파란색이다. 왜 파란색이지? 순간 잠기운이 완전히 날아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딜 봐도 시벨리우스의 천막 안이다. 뭐야 잠깐, 여기 아직 과거 시대야? 나 안 죽었어? 분명 심장 찌르지 않았나? 내가 왜 살아 있지? 몸을 더듬어가며 살펴봤지만 아픈 부분은커녕 상처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옷은 또 언제 갈아입은 거야.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무심코 부른 것에 그가 다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아무리 자세히 봐도 엘뤼엔이었다. 환상이나 착각 따위가 아닌 진짜 이 시대의 엘뤼엔.

“왜…….”

왜 그가 여기 있지? 여기가 현실이고, 내가 원래 시대로 돌아간 것도 아니라면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당혹감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는 게 불만인가?”

아니, 그럴 리가! 얼른 고개를 흔드니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그래도 왜 아프지 않은 지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설마 아버지가 치료해준 거야?”

“그럼 누가 그걸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그건 그렇다. 목이나 심장은 육신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급소다. 대부분 찔리면 죽는다고 봐야 했다. 사실 그래서 택한 거고. 성수나 회복제를 써도 잠시 더 버티게만 해줄 뿐이라고 들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하니 차라리 쓰지 말고 편히 보내주는 게 낫다는 주의법까지 있을 정도다.

‘아, 혹시 트로엘이 나한테 뿌린 게 그건가.’

그렇게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아팠던 건 처음이었다. 다리에 돌 가시가 박혔을 때보다 더 아팠다. 부상이 악화하는 속도를 상처가 재생되는 속도가 따라가질 못해서 그랬던 거 같다.

그냥 부상의 고통이 길어지는 건 줄 알았지, 설마 그런 식으로 가중되는 걸 줄이야. 경상은 통증 없이 재생되는 편이라 이런 부작용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드시 살릴 수 있을 상황이 아니면 진짜 안 쓰는 게 더 나은 방법이었다. 트로웰이 회복제를 갖고 있었다는 게 더 의외긴 하지만.

“아픈가?”

묻는 말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엘뤼엔이 내가 찔렀던 가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고통을 되살렸더니 나도 모르게 그 부근을 매만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아니! 아무렇지 않아. 하나도 안 아파.”

다 죽어가는 사람도 멀쩡하게 되살리는 치료술을 받았는데 아플 리가. 그러긴커녕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엘뤼엔의 시선은 다쳤던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쑥스러우면서도 어색한 기분에 자꾸 몸이 긴장했다. 그는 어떻게 알고 바로 와서 치료해준 걸까. 설마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나? 아니, 그보다 이미 계약까지 파기한 애가 뭐가 이쁘다고 도와줬지? 그러고 보니 아직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는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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