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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572화 (572/608)

제572화

“시벨, 미안한데 혼자서 장을 봐야 할 것 같아.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내가 늦어지면 먼저 돌아가.”

“응, 알겠어.”

종이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시벨리우스를 뒤로하고 아이와 함께 서둘러 종이를 따라나섰다. 혹시 놓치면 곤란하니 아예 아이를 안아 들고 뛰었다.

그렇게 한참 날아간 종이는 외진 동네로 접어들었다. 아이를 만난 상점가에서 한 시간은 족히 떨어진 거리였다. 기껏해야 가장 번화가인 광장쯤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될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먼 거리를 아이 혼자 보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상점가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한 무리는 지금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 뒤에 있었다. 이쯤 되면 가는 길이 우연히 겹친다고 봐주긴 어려웠다.

“혹시 여기 살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동네가 나와서 그런지 얼굴이 한결 밝았다.

‘애를 잃어버렸는데 찾지도 않고 혼자 집에 돌아간 건가?’

나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애를 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 이건 너무 억측이다. 어쩌면 아이 먼저 집에 돌아갔다고 생각해서 일단 들러본 걸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이후에도 쭉 나아간 종이는 어느 집 앞에 이르러서야 툭 떨어졌다. 아이가 자신의 집이라고 버둥거리길래 내려주니 빠르게 달려나갔다. 문고리를 두드리자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며 안에서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빠.”

“세상에, 에밀리!”

아이를 발견한 남자가 감격하며 소리쳤다.

“아이고, 아빠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부둥켜 끌어안고 다친 곳은 없는지부터 살피는 걸 보니 다행히 일부러 버린 건 아닌 모양이다. 슬금슬금 쫓아오던 무리는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이쪽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보호자가 나타나니 더는 접근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제 내 역할은 끝난 것 같아 이만 돌아서려고 했다. 가는 길에 겸사겸사 저 느낌이 좋지 않은 무리하고는 잠시 상담 시간을 가져볼 예정이었다. 그 순간 아이를 살피던 남자가 나를 알아차리고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저기, 그런데 누구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실은 아이가 길을 잃은 걸 봐서요…….”

“아, 설마 에밀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주신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는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백방으로 딸을 찾아다니다가 혹시 싶어 집에 와봤는데, 마침 그 직후에 우리가 도착한 거라고 했다. 역시 짐작대로였다.

“아빠를 무사히 만나서 다행이에요. 많이 무서웠을 텐데 잘 다독여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식사라도 대접을…….”

“아뇨, 그건 괜찮아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마음만 받을게요.”

웃으며 정중히 거절하려니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대로 내가 떠나는 게 서운한 시선이었다.

“에밀리도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잠시만 들어왔다 가시지요. 식사가 어려우시면 차로 드리겠습니다. 그래 봤자 없는 형편이라 싸구려 홍차입니다만……. 뭐든 대접하게 해주십시오.”

“하, 장난해? 대놓고 싸구려라고 말할 거면 대접하겠단 말을 하질 말라고. 야야, 집어치워. 그냥 무시해버려.”

고급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 라피스가 투덜거렸다. 나 역시 무시하고 싶기는 한데, 아이가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번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은 아직 오전이었다. 점심때 전에만 돌아가면 되겠지 싶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 한 잔만 마실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자자, 안으로 드십시오.”

반색한 남자가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했다. 내부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손님 대접에 바빠진 남자가 부엌에서 분주한 동안 뻘쭘한 기분으로 식탁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아이가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여기요. 드세요.”

“고마워.”

찻잔에 담긴 액체에선 맑은 붉은빛이 났다. 남자의 말대로 홍차인 것 같았다.

“에밀리랬지? 엄마는 어디 계셔?”

“엄마는 없어요.”

“아, 미안해.”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물어본 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당황해서 일단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잘못 우린 건지 떫은맛이 너무 강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여운을 주는 맛이 있었다.

‘이거 맛이…….’

바로 찻잔을 내려놨다. 아까부터 유독 껄끄러운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단지 기분 탓이 아니었나 보다.

“뭐야, 이 거지 같은 상황은.”

이상한 점을 감지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에밀리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왜 그러세요?”

“너희 설마…….”

몸을 일으키려는데 눈앞이 아찔했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게 하는 약인 것 같았다.

“이런, 벌써 알아차리다니. 혀가 굉장히 예민하신 분이로군. 혹시 몰라 정량보다 많이 넣길 잘했지.”

차와 함께 먹을 걸 내오겠다던 남자가 씩 웃으며 나타났다. “이봐, 이제 들어와도 돼.” 그가 창밖을 향해 외친 말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정체는 한눈에 알아봤다. 에밀리를 만난 순간부터 쭉 우리를 뒤쫓았던 바로 그 불량한 무리였다.

“다행히 성공했네.”

“아깐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틈을 봐서 이쪽으로 유인하려고 했는데 마법 같은 걸 쓰더니 그걸 따라가라고 하는 거야. 에밀리가 동정표를 얻어 구슬렸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일을 망치는 줄 알았어.”

“뭐야, 마법사였어? 완전 횡재했네.”

처음부터 다 한 패였던 건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약물에는 강한 편인데 왜 이러지 싶었다가 내가 더는 물의 정령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렇다고 바로 이런 꼴이냐.”

황당해하는 라피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생각에 너무 방심했다. 그나마 검성이 된 덕분에 버티는 거지 아니었다면 바로 정신을 잃었을 거다. 우선은 약 기운을 몸에서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잘했다, 에밀리.”

남자가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에밀리의 얼굴엔 기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의식을 안 잃어?”

“약을 너무 적게 쓴 거 아냐?”

“아니거든? 이 정도 양이면 입에 머금자마자 훅 갈 정도라고.”

“일단 더 먹여볼까?”

그때였다.

쿠웅!

요란한 소음과 함께 온 사방에 강한 진동이 일었다. 균형을 잃은 남자들과 에밀리가 비명을 질렀다. 벽에 균열이 일면서 빠른 속도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인이 바깥에서 집을 움켜잡아 단숨에 부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만 남긴 상태로 집이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한순간에 폐허가 된 주위를 돌아보다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멀쩡했다면 문이 있었을 방향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흐트러진 흑발 아래, 서늘하게 가라앉은 금안이 스산한 빛을 머금었다.

트로웰.

참담한 기분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지금 가장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좋아할 수가 없다는 거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불행은 늘 소리 없이 다가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어쩌면 가장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다.

* * *

한국은 지진이 거의 없는 나라였다. 건물이 무너질 정도의 강진은 특히 드물었다. 그 무서운 자연재해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내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한 건 중학생 때였던가. 방학 동안 이웃 나라에 놀러 갔던 태진이 강진에 휘말려 죽을 뻔했다고 한 말을 듣고 나서였다. 그때 그 녀석이 말하던, 세상이 끝나는 느낌이라고 한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눈앞에서 땅이 갈라지고 크게 솟구쳤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급격히 기울어진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나왔다. 건물들이 두부처럼 으깨졌다.

고요해졌을 땐 모든 게 끝난 후였다. 펼쳐진 참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멀쩡한 지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동네 하나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생존자의 신음이 들렸다. 누구 하나 피할 겨를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안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은 건지 헤아려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이런 게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고의로 일으킨 현상이라니.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트로웰이라니. 끔찍한 악몽을 꾸는 거 같았다.

“엘!”

때마침 바람이 일더니 시벨리우스가 공중에서 착지했다. 내가 너무 늦어져서 찾아보다가 참사가 일어난 걸 확인하고 달려온 거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작은 신음이 들렸다. 무너진 잔해 틈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에밀리였다.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용케 목숨을 건진 듯했다. 하지만 빠져나온 장소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트로웰이 서 있는 곳 앞이었다.

“사, 살려…….”

무참하게 다친 에밀리는 힘겹게 앞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았다. 트로웰이 그 모습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더러워.”

그는 곧 에밀리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기겁한 에밀리가 마구 버둥거렸지만 어른도 못 이기는 힘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트로웰이 향하는 곳은 바닥이 갈라져 벼랑이 난 부근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숨을 삼켰다. 에밀리를 그 아래로 던지려는 거다.

“트로웰! 이제 그만해!”

다급히 외쳤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시벨리우스가 황급히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비켜.”

“미친 짓도 적당히 해! 아직 어린애잖아!”

“그와 동시에 인신매매단의 끄나풀이지. 싹수부터 말라비틀어진.”

“뭐?”

“네가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이 작은 인간이 엘을 납치해 팔아넘기려고 했어.”

시벨리우스가 숨을 삼켰다. 그제야 여자애가 누군지 알아본 것 같았다.

“상점가에서 아빠를 잃어버렸다고 한…….”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다고 좋아하던걸.”

“……!”

“이래도 이게 그냥 어린애로 보여?”

트로웰의 질문에 시벨리우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남들보다 유한 성정이라 해도 근본적으로는 종이 다른 유니콘이었다. 살아온 시간 내내 인간을 배척하도록 교육도 받았다. 수긍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거야! 그렇게 가르친 어른들 잘못이야! 아직 아이니까 충분히 바뀔 수 있어!”

“죽이는 게 더 빨라.”

서둘러 만류해봤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트로웰은 굳어 있는 시벨리우스를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아직 한 달 안 됐어!”

그제야 나아가던 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 내쉴 겨를은 없었다.

“아, 그래. 그게 남아 있었지.”

중얼거리는 얼굴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 시선이 처참히 무너진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상당수 죽였는데 그게 의미가 있나?”

“그건……!”

“번거롭게 그런 거 따질 거 없이 그냥 내가 약속을 깬 걸로 해.”

“트로웰!”

“대신 널 죽이기로 한 것도 없던 걸로 할게. 서로 한 번씩 약속을 어긴 거니 공평하지?”

안 돼. 이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되는데.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눈길을 보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죽이기로 했다고?”

대답한 건 트로웰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 내가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예전 약속을 지키기로 했거든. 쟬 제일 먼저 죽이기로. 아무렴 내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런 한심한 일과에 어울려주는 줄 알았어?

“……너 또 비열한 협박을!”

“미안하지만 본인이 먼저 제안한 거야. 협박은 이득이 있을 때나 하는 거지. 이걸로 내가 얻을 이득이 뭐가 있어?”

시벨리우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트로웰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다 지겨워. 끝낼 거야, 전부.”

텅 빈 것처럼 공허한 얼굴에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카노스가 보여준 환상 속에서, 검은 구덩이로 추락하는 그의 얼굴도 저랬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엘. 여긴 너무 위험해.”

주먹을 꽉 움켜쥔 시벨리우스가 날 일으켰다. 마침 약 기운이 거의 가셨는지 몸에 힘이 돌아온 참이라 부축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달려나갔다.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직후 트로웰이 기어코 에밀리를 벼랑 아래로 던졌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기를 맞출 수 있었다. 거의 날다시피 뛰어올라 떨어지는 에밀리를 받아들고 다시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괜찮아?”

숨도 못 쉬는 상태로 하얗게 굳어 있던 에밀리가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차분히 달랠 상황은 아니라 일단 내려주고 트로웰의 앞에 섰다. 그 일련의 과정을 트로웰은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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