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0화
“흠흠, 근데 또 전부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란타샤가 너 마음에 든다고 칭찬도 하고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어.”
“……뭐가 그런 이유가 아니야. 좋아하는 애가 날 칭찬해서 호승심이 생긴 거면 그게 그거잖아.”
“하하, 그건 그래…… 헉, 근데 내가 좋아하는 애가 란타샤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이건 바보인가? 황당해져서 바라보니 신음을 삼킨 디아곤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가 도망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갔을 기세였다. 그래, 라피스가 괜히 유치하진 않겠지. 유전자의 신비를 새삼 되새기며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튼 진짜 미안해.”
“뭐…… 그걸로 딱히 피해 입은 건 없으니 됐어.”
“맞아, 너 진짜 강하더라.”
이미 두 번이나 제압당해서인지 디아곤은 순순히 인정했다. 너처럼 강한 인간은 처음 봤다는 둥, 검성도 그만한 상급 몬스터를 쉽게 상대하진 못하는 게 정상이라는 둥, 그때도 들었던 말들이 또다시 이어졌다.
“란타샤가 괜히 칭찬한 게 아니라니까. 하긴 걔가 보는 눈이 진짜 높거든. 걔한테 칭찬받으면 진짜배기란 소리야. 그걸 새삼 실감했어.”
“하아, 그래…….”
“근데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이름을 불러서 진짜 깜짝 놀랐어.”
“어? 아, 그건 그냥 찍은 거야. 상급 몬스터를 조종하는 걸 보면 드래곤인 거 같은데, 트로웰의 계약자가 그런 이름이었다고 들었던 거 같아서.”
“아, 그렇구나. 난 또 어디서 나랑 만난 적이 있나 했네.”
만나긴 했다. 4천 년 후의 미래였지만. 그때도 쾌활한 성격이긴 했는데 어린 디아곤은 쾌활하다 못해 산만한 느낌이었다. 내가 딱히 앙심을 품지 않은 것 같으니 마음이 놓였는지 마치 십년지기 절친을 만난 것처럼 사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화제를 강제로 틀었다.
“다른 얘기는 됐어. 어쨌든 내가 널 찾아오긴 했지만, 너한테 용건이 있는 건 아냐.”
“내가 아니면…… 트로웰?”
고개를 끄덕이니 그의 표정이 다시 난처해졌다. 어쩌면 연락할 방도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으음, 트로웰을 만나서 뭐 하려고?”
“그렇게 말한다는 건, 만나게 해줄 수 있다는 거지?”
“그건 가능하긴 한데…….”
다행이다. 그간의 시간이 헛수고가 되진 않으려나 보다. 벅차오르는 기분에 디아곤의 손을 꽉 붙들었다.
“제발 만나게 해줘! 부탁이야!”
“이해가 안 되네. 너 그때 굉장히 위험했던 건 기억하는 거야?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점을 너무 과신하지 마. 이번엔 진짜로 죽이려고 할지 몰라.”
“그건 내가 알아서 감당할게.”
이후로도 만류하는 말을 여러 차례 밀어내고서야 디아곤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후회하지 마.”
이어진 말엔 쓰게 웃었다. 후회할 건 이미 너무나 많아서 더는 들어찰 자리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난 괜찮을 거다. 괜찮아야 했다.
* * *
디아곤이 날 데려간 곳은 울창한 밀림 속이었다. 정확히 대륙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였다.
“여기에 트로웰이 있어?”
“어, 여기서 좀 걸어가면 돼. 근데 깨어 있을지는 모르겠네. 자고 있으면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아직 깨어 있는 시간이 그리 긴 편은 아니거든.”
“기다리는 건 상관없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깨어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니?”
“몰랐어? 지금 트로웰이 몸이 좀 안 좋아. 엘퀴네스가 땅의 영역을 완전히 붕괴시켰잖아.”
“……뭐?”
누가 뭘 했다고?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니 디아곤은 엘퀴네스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냐며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령 계약이 파기됐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지금 땅의 정령들은 소환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돼. 이 와중에 수복해야 할 트로웰까지 중간계에 있으니…….”
“아…….”
“그대로 두면 정령계 전체에도 악영향이라 이프리트가 더 악화하지 않도록 수습하고 있기는 한 것 같아. 그래서 이프리트랑도 소식 끊긴 지 좀 됐다고 들었어. 남의 영역 감당하기가 쉬운 건 아니니까.”
그간 두 정령왕이 소환되지 않던 이유를 여기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한 사유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영역이 완전히 붕괴하다니, 봉인보다 상황이 나쁜 거 아닌가? 땅의 정령들 상당수가 소멸했을 걸 생각하니 얹힌 것처럼 속이 무거워졌다.
“여하튼 그 때문에 트로웰이 지금 많이 예민하거든. 그래도 진짜 만날 거야? 마음을 돌릴 마지막 기회야.”
진지하게 묻는 디아곤은 제발 다시 생각하라는 표정이었다. 곧장 트로웰 앞으로 이동하면 될 걸,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이상했는데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그래도 만나겠다고 하니 그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얼굴로 터덜터덜 앞장섰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거대한 구덩이 앞이었다. 동굴과 연결된 구조인 것 같았는데, 아래에서도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라 바닥과 흙벽을 뒤덮고 있었다. 바로 그 한가운데, 풀밭이 잔디처럼 깔린 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는 소년이 보였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트로웰이었다.
단지 그것뿐인데, 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치 그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 디아곤이 무언가 말을 거는 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훌쩍 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나무를 디딤돌 삼아 조심스럽게 바닥에 착지한 후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섰다.
“트로웰.”
그 순간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짙은 속눈썹 사이로 찬란하게 드러나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자 몸이 긴장하는 한편으로 안도감이 일었다.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엔 잠기운은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나른해 보였다.
“……넌 진짜 겁이 없구나.”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조금 더 그 앞으로 다가섰다. 누워 있는 머리맡에 몸을 굽히고 앉으니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괜찮아?”
“네가 왜 내 안부를 묻는 거야?”
“몸이 안 좋다고 들어서…….”
“그러니까 그걸 신경 쓰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정말 특이한 애라니까.”
한숨을 내쉰 트로웰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멀리서 디아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목숨이 위험한 건 난데 정작 나보다 그가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그때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올리던 트로웰이 뭘 발견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이마가 왜 그래?”
“아…….”
계약의 인장이 사라진 걸 알아본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매만지려니 트로웰이 내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깜짝 놀란 디아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없잖아.”
“그게, 그렇게 됐어.”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니 황금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한동안 나를 살피듯 바라보던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 상태로 잘도 내 앞에 나타났네.”
“아하하, 그러게.”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냥, 널 만나고 싶었어.”
꾸미는 말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다른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왜? 너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책임지라고 하려고?”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래 주면 난 좋긴 하지.”
“…….”
트로웰은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크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제정신인지 살피는 시선이라 조금 머쓱해졌다.
“농담이었어…….”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트로웰은 피로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소모적인 일로 시간을 낭비하느니 엘퀴네스를 달래는 쪽이 네 목숨을 건사하는 길일 텐데. 내가 평소와 다른 상태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 거야. 지금은 널 죽이는 것도 귀찮아. 이상한 짓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
“몸이 많이 안 좋아?”
“그냥 조금 저조한 것뿐이야. 이 상태가 그리 오래 가진 않을 테니 헛된 기대는 하지 마.”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어.”
안 되겠다. 지금 트로웰은 너무 예민해서 무슨 말을 해도 다 거칠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차라리 정면승부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차례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트로웰, 내게 시간을 조금만 주면 안 될까?”
“시간? 무슨 시간?”
“널 설득할 수 있게 해줘.”
그가 피식 웃었다. 정말 재밌어서 웃었다기보다는 실소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런 시간은 이미 충분히 줬던 거 같은데.”
“지금까지는 미래를 바꿔보려는 시간이었지. 네 마음을 직접 움직이는 설득을 시도한 적은 없었잖아.”
“그래서 이제부터 그걸 해보겠다고? 뭘 어떻게? 인간의 좋은 점이라도 줄줄 열거해볼 생각이야? 그게 아니면 무릎 꿇고 살려달라는 애원이라도 하려고?”
“그게 뭐든. 전부.”
“…….”
잠시간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지니 입안이 말랐다.
“내게 시간을 줘. 한 달, 아니 일주일이라도 괜찮아. 내가 마지막으로 뭐든 해볼 수 있게 해줘. 그래도 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땐 약속대로 할게.”
“약속?”
“날 제일 먼저 죽인다고 했잖아. 그렇게 해.”
어디선가 꿀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트로웰은 이렇다 할 감정적인 변화를 보이진 않았지만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원래 지켜야 할 약속이야. 엘퀴네스 때문에 참은 거지 네 허락은 상관없어. 그 엘퀴네스도 지금은 의미가 없어졌지. 그런 게 조건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망설이고 있잖아.”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난 알아. 트로웰은 내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설득하는 것도 결국 들어줄 거야.”
하, 공허한 웃음이 흘렀다. 웃는 얼굴인데도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나를 향했다.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네.”
“맞아. 왜냐면 내가 트로웰을 그만큼 좋아하거든.”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난 트로웰이 정말 좋아. 넌 내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 행복할 수 있었어.”
탄생의 순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환생의 문을 열어젖힌 풋내기였다. 평생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왔던 내가 정령왕이라고 해봤자 실감이 될 리도 없었다. 처음 만난 다른 정령왕들도 한없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들 역시 호기심과 경계심을 갖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트로웰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거 알아?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도, 전부 네가 처음이야.”
단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첫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내 정령계 삶은 시작부터 엉망진창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런 호의는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다. 트로웰이 다정한 이라 가능했던 거다. 그러니 난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진심이 전해지도록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트로웰은 뭔가 말을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찌푸린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딱히 네게 그리 거창한 도움을 준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망상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망상이 아닌데…….”
“설령 그랬다 해도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상황이 달라진 걸 모르겠어? 후회할 말은 하지 마.”
“후회 안 해.”
트로웰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그였다. 짜증 난다는 듯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던 그가 이내 습관이 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한 달.”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됐다. 그가 정말로 응해줬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트로웰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딱 한 달만이야. 하지만 이걸로 괜한 기대는 하지 마. 한동안은 몸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했어. 어차피 버리는 시간을 주는 것뿐이야.”
“응! 그래도 고마워! 정말 고마워, 트로웰!”
박수 소리가 들렸다. 감격한 표정을 한 디아곤이 울면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잘됐다. 정말 잘됐다.” 코를 훌쩍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그 모습을 기가 찬 표정으로 바라본 트로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말해두겠는데, 난 란타샤만 닮았어.”
라피스가 볼멘소리로 또 한 번 부친과 선을 그었다. 디아곤이 다른 건 몰라도 참 자식 복은 없었다.
“엘!”
천막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과격한 환영이 들이닥쳤다. 덮치듯이 달려와 내 두 팔을 움켜잡고 바쁘게 살피는 시벨리우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돌아왔는데 네가 없어서 내가 얼마나……!”
“쪽지 남겨놓고 갔는데 못 봤어?”
“봤어! 그래서 더 이러는 거야! 트로웰을 만나고 오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 그게…….”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찾아다닐 거 같아서 그러지 말란 의미로 행방을 알린 건데 오히려 역효과였나 보다. 그 순간 내 뒤쪽에 시선이 미친 시벨리우스가 숨을 크게 삼켰다.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서는 트로웰을 발견한 탓이었다.
“주술로 만든 저택인가. 별 재주가 다 있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강한 힘이 나를 잡아당겼다. 빛과 같은 속도로 나를 제 등 뒤로 숨긴 시벨리우스가 부들거리며 트로웰의 앞을 막아섰다.
“너, 너……!”
“내가 뭐.”
그제야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 주위를 가볍게 돌아보던 트로웰이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시큰둥한 대꾸에 시벨리우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는 듯 그의 전신에 날카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얼른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시벨, 기다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넌 엘의 털 끝 하나도 못 건드려!”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그가 크게 소리쳤다. 이미 품에서 주술을 쓰는 종이들까지 꺼내든 상태였다. 트로웰은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내뱉듯이 대꾸했다.
“안 건드려. 한 달간은.”
“뭐, 뭐?”
“어떻게 된 건지는 네가 그렇게 보호하려는 저 애한테나 물어봐.”
시벨리우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