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63화 (563/608)

제563화

“내가 이렇게까지 솔직해져 본 것도 처음이야. 그러니 가상하게 여겨서라도 협조 좀 해주지 않을래?”

“……더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직 못 찾은 건지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말했다시피 내가 계산한 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확률이 높은 쪽을 담보로 거는 게 안정적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역시 미련이 남아? 이렇게 말해도 싫다면 마음대로 해. 나도 어쩔 수 없지. 사실 최대한 뒤로 미뤄볼 수는 있어. 적어도 카류안의 삶에선 일어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있겠지.”

“……! 정말이요?”

“물론 정말이지. 오히려 난 네가 알려준 얘기를 듣고 놀랐어. 원래는 그쪽 흐름을 타고 있었거든. 지금도 그 방향으로 진행되는 중이고.”

아니, 잠깐. 그럼 뭐야. 원래는 카류안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오히려 앞당겨진 거라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카노스는 빙긋 웃었다. 어떻게 하면 미룰 수 있는 건지 궁금해? 물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바로 대답이 이어졌다.

“트로웰의 계획이 성공하면 돼.”

“……!”

“무슨 계획인지는 알지? 인간을 멸족시키는 거 말이야.”

“그건…… 알지만…….”

“악신이 태어나려면 제물이 필요하지.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란 제물이 없으면 악신은 탄생하지 못해. 그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야.”

맞는 말이다. 애초에 카류안이 아크아돈을 무대로 삼은 건 제물을 모으기 쉬운 환경이라서였다. 정령왕이 부재를 악용하면 신들의 눈을 피해 수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정령왕으로 인해 결국 실패한 거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른 중간계에서는 쉽게 시도할 수 없거니와 하더라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즉, 아크아돈에서 인간만 사라져도 이 문제를 상당수 방비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어, 그치만…… 인간은 멸망해도 다시 부흥하지 않나요?”

“자연적인 멸망이면 그렇지. 이런 식으로 관리자가 의도한 멸족은 그대로 끝이야. 인간 종족이 이 땅에서 다시 씨앗을 틔우긴 어려울걸.”

느른한 어조로 설명을 마친 카노스가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걸 네가 지켜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순간만 해도 내가 아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비단 이 시대에서 친해진 사람들만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에 태어날 이사나와 알리사, 황제의 친위대들, 유쾌한 샴페인 용병들, 그들 모두의 인생이 사라지는 거였다.

“뭐, 인간들이야 다른 중간계에서 태어나면 되니 딱히 피해라고 할 건 없을 거야. 오히려 제물로 잡혀 죽을 일을 피하는 거니 더 나을지도. 가장 걱정해야 할 건 트로웰이지.”

“……트로웰…이요?”

“아까 말했잖아. 선택의 길을 따라가 볼 수 있다고. 그 중엔 트로웰이 인간을 멸족한 미래도 있어. 보여줄까?”

싫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뚜렷한 직감이 그걸 봐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카노스의 손이 내 이마에 닿는 게 더 빨랐다.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캄캄한 공간 속, 마치 무대 공연처럼 한 곳에만 빛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 사슬로 포박된 무릎 꿇려진 소년이 보였다. 머리를 깊게 숙인 트로웰이었다.

<관리자들은 피조물의 생사를 주관할 수 있다. 이는 죄가 아니다.>

어디선가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묘한 음색이었다. 트로웰의 맞은편, 그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자리에 거대한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법정을 연상시키는 그 자리엔 신들이 도열한 채였다.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명계의 신 섀넌. 망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 그의 존재가 이 자리가 어딘지를 증명했다. 명계의 심판대였다.

<허나 사사로운 복수심으로 인족 전체를 멸한 정령왕 트로웰은 도가 지나쳤다.>

<하물며 내정된 멸망을 의도적으로 앞당김으로써 정화의 순회까지 방해한바, 유구한 아크아돈의 체계를 무너트렸으니. 이는 씻을 수 없는 죄업이다.>

<저주를 받은 혼은 더는 정결하지 않다.>

한마디씩 이어지는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암흑 속에 거대한 그림자들이 가득했다. 배심원인지 관람객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수군거리며 비난과 경멸의 눈길을 쏟아내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판결문이 떨어졌다.

<타락한 대지에게서 신의 자격을 영구히 박탈한다!>

아아.

아득한 추락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트로웰이 그제야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공허한 눈동자엔 빛이 스미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텅 빈 얼굴로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딴 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명왕, 섀넌의 시선이 서늘히 굳어졌다. 분노한 신들이 음성이 온 사방에 솟구쳤다.

<신적에서 박탈되었으니 더는 예우도 없다!>

<더러운 죄인의 혼에 판결을 집행하라!>

안 돼, 안 돼! 트로웰! 안돼!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어떻게든 트로웰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트로웰이 꿇어 앉혀진 바닥이 무너지면서 그가 천천히 추락하기 시작한다.

<피의 값이 그 혼에 새겨지리라!>

그의 모습이 새카만 암흑 속으로 점차 사라져간다. 똬리를 튼 뱀처럼 웅크린 어둠이 마침내 입을 벌려 집어삼키기까지, 그는 끝까지 미소 짓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망하는 삶을!>

“그만!”

비명을 내지른 동시에 눈앞의 광경이 우르르 깨졌다. 파괴되는 세상과 함께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나를 누군가가 다급히 부축했다.

“엘?”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시벨리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였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카노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엘? 괜찮아?”

“……시벨, 여기에 인어 있지 않았어?”

“인어라니? 무슨 인어?”

당황하는 시벨리우스는 자신을 구해준 꼬마 인어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카노스가 관여한 기억이 사라진 거다. 어떠한 예감에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드러난 손등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마치 그날처럼. 그의 부재를 완전히 확인하고 인정해야 했던 그 순간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에, 엘?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급히 다가와 달랬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선택은 네 몫이야.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보자.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떨리는 입술을 그대로 악물었다. 선택은 내 몫이라니. 다시 보자니. 내가 뭘 선택할지 알고 있으면서.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이럴 거면 다정하지나 말지. 좋아할 수도 없게 모질고 매정하게만 굴지. 나한테 대체 어떡하라고.

그가 위험하다고 수차례 강조하던 엘뤼엔의 경고가 맞았다. 그를 보면 질색하던 반응들도 이제야 겨우 이해됐다. 이렇게 될 걸 알았던 거다. 다정하기에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그는 정말 잔인한 신이었다.

* * *

마계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 동쪽 영지라면 가장 고요한 곳은 남쪽 영지다. 남공작 루카르엠이 집권한 이후로 남쪽 영지는 늘 고요했다. 특히 공작성은 유령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척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성 자체의 식솔도 없다시피 했고, 방문객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그 공작성이 최근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뭐야, 오늘도 안 계셔?”

“죄송합니다.”

뚱하게 투덜거리는 말에 그를 대면한 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긴 흑발을 가볍게 내려 묶은 여성은 남 공작성의 총관이었다. 루카르엠만큼이나 지난 행적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그 주인에 그 총관이라는 평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까지 같았다. 루카르엠이 늘 웃는 얼굴이라면, 총관은 무표정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족들은 루카르엠만큼이나 그의 총관도 어려워했다. 하지만 눈앞의 손님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벌써 얼굴을 뵙지 못한 게 몇 년째야. 대체 요즘 어디서 뭘 하시는 건데?”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무능한 총관이네.”

“죄송합니다.”

반복해서 사과하는 태도는 단정했지만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결국 먼저 항복을 선언한 건 손님 쪽이었다.

“오늘도 내가 찾아왔다고 전해줘.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꼭이야. 나중에 다 확인할 거야?”

“물론입니다, 카류안 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연거푸 신신당부한 후에야 카류안은 한발 물러섰다. 여기서 선을 더 넘으면 냉정한 총관이 아예 내쫓아낼지도 몰랐다. 실제로 계속 귀찮게 했다가 쫓겨난 전적이 있다 보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그림처럼 고요한 총관이 생각보다 굉장히 강한 마족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다시 아크아돈에 보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번엔 진짜 이길 수 있는데. 아직 근신 기간이라 허락 없이 차원의 문을 열지 못하는 카류안은 아쉬움을 쩝쩝 삼켰다. 인간 정령사에게 무참히 패배한 그 날의 기억은 카류안에겐 씻지 못할 굴욕적인 역사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점이 더욱 그랬다.

정작 자신은 기억이 없지만, 죽기 직전에 루카르엠이 구해줬다고 들었다.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임무를 받은 거였는데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다. 지독하게 수련해서 그때보다 더 강해졌건만, 정작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복수하러 갈 수조차 없으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근데 총관은 이름이 뭐였지?”

돌아서기 전 건넨 질문에 문을 닫으려던 총관이 잠시 멈칫했다.

“아실 거 없습니다.”

“와, 진짜 냉정해.”

카류안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렇게 하면 루카르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져주곤 했다. 하지만 총관은 그보다 더 엄격한 성격이었다.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이 닫혔다.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던 카류안은 축 처진 모습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운 손님이 사라진 공작성은 다시 여느 때처럼 고요해졌다. 매몰차게 닫은 문 앞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 총관은 눈치를 살피는 하인들에게 업무 복귀를 지시하고 돌아섰다. 때마침 온몸이 전율하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의 주인이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총관은 서둘러 주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공작의 방엔 여전히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총관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그 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허락된 자만이 열 수 있는 공간을 가르고, 그 속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는 동안 새카맣던 머리칼은 물이 빠지는 것처럼 색이 흐려지면서 부드러운 산호색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없던 등에는 흑단같이 검은 날개들이 돋아났다.

“유비아 님.”

차원의 문을 열고 나타난 천사장의 모습에 모든 천사가 할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마계 남공작의 총관이었다가 원래 신분인 고위 천사로 돌아온 유비아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카노스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유비아의 걸음이 향하는 곳마다 마주친 천사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그들은 모두 마신의 천사를 상징하는 검은 날개를 지니고 있었지만 품고 있는 신력은 그렇지 않았다. 각자 농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다른 신의 것과 혼합된 신력이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마신의 천사가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궁에서 순수한 마신의 신력만 지닌 천사는 유비아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천사들은 더더욱 유비아를 꺼리고 두려워했다. 마신의 궁처에서 마신의 신력만을 지닌 이가 오히려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기이한 상황이었으나 정작 유비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주인의 방에 도착한 유비아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돌연 낯선 장면들이 빛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

그건 사방이 빠르게 허물어지는 광경이었다. 흉하게 갈라지는 벽면의 무늬도, 무너지는 기둥들의 형태도,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 익숙했다. 평생 살아온 터전을 이루던 것이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신계에서 가장 견고하며 웅장하다고 칭해지는 마신의 궁처가 풍랑을 맞이한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홀로 선 자신은 이날이 오기로 할 줄 알았던 것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이루고 있던 신력이 바람처럼 빠져나가면서 육신이 점차 투명해졌다. 그 마지막 순간, 유비아는 귓가를 스치는 나직한 음성을 들었다.

“가자, 유비아.”

하나뿐인 주군의 음성이었다.

유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 먼지처럼 산화하던 건물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환상이었던가. 어쩌면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미래의 한 부분인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자 침대 위에 고요히 앉아 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유비아의 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유비아.”

“어서 오십시오, 카노스 님.”

“응, 다녀왔어.”

침대에 풀썩 드러눕는 주인은 조금 나른해 보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한번 겪어본 유비아는 이제 그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았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죽겠어. 수명이 4천 년은 깎인 거 같아.”

외람되지만 신은 깎일 수명이 없습니다. 당연한 대답이 먼저 떠올랐으나 유비아는 그렇게 지적하는 대신 그렇군요, 라고만 답했다. 징징거리는 것과는 달리 그의 주인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이유를 짐작한 유비아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분이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 이번에도 아주 귀여웠지.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더라? 나도 그런 아들 갖고 싶어.”

“양자 제안이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걔가 거절할걸?”

그것도 그렇네요. 유비아는 차마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솔직한 성격을 죄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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