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62화 (562/608)

제562화

너무 황당하니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아직 어린애다. 애한테 화를 내서 뭘 어쩔 건데. 방향을 찾지 못한 분노가 속에서만 부글거리다 파스스 산화했다. 그저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머리카락만 바라보고 있자니 시벨리우스가 어쭙잖은 위로를 시도해왔다.

“그,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엘. 머리카락을 다시 기르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게 전부야?”

“어? 아니, 으음. 사실 나도 엘은 금발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니, 됐어. 더는 말하지 마.”

너는 가급적 위로를 하지 마라. 사람 복장 터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그런 뜻을 담아 빙긋 웃으니 시무룩해진 시벨리우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머리 위에 있지도 않은 귀가 처져 있는 게 보이는 거 같았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여기서 짜증을 내봤자 엄한데 화풀이나 하는 거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머뭇거리고 있는 꼬마 인어가 보였다. 나름 좋은 일이라고 한 것 같은데 반응이 좋지 않으니 겁이 난 모양이다. 내가 잘못한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 제법 귀여워 심란한 기분도 나아졌다.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잘못한 부분은 알려주기로 했다.

“꼬마야. 이런 건 본인의 허락을 받고 해야 하는 거야. 앞으론 동의 없이 멋대로 바꾸면 안 돼. 알겠지?”

차근차근 타이른 말에 꼬마 인어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맹랑한 대꾸가 떨어졌다.

“왜?”

“어, 그야…… 이건 내 머리카락이니까? 남의 걸 멋대로 손대면 안 되잖아. 그거랑 같은 이치야.”

“난 도와준 건데? 원래 머리 색이랑 달랐잖아.”

“음, 누구나 다 원래 머리 색으로만 사는 건 아니거든. 다른 색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도 있어.”

혹시 꼬마 인어는 타고난 머리 색이 달라지면 큰일이 난다고 여기는 건가. 오염되었다거나 다쳤다고 여기는 건지도. 그래서 도와준답시고 되돌린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인어들의 세계가 굉장히 보수적이라든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헤아려보고 있자니 꼬마 인어가 생긋 웃었다.

“그래도 넌 바꾸면 안 돼.”

“어? 응?”

“모든 주술엔 기본 토대가 있어. 아무리 견고해도 이 기본 규칙은 되도록 유지하는 게 좋아. 하물며 지금 네 주술은 불안정한 상태잖아. 그럼 더더욱 지켜야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외계어를 들은 기분이다. 어린애가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내용은 더 말이 안 된다는 점이 그랬다. 주술이라니, 기본 규칙이라니. 지금 내 상태를 알아보고 한 말인 거 맞지? 핏기가 가시는 기분과 함께 얼굴이 굳었다. 다시 마주친 인어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카노스?”

거짓말처럼 주위가 고요해졌다. 사람의 숨소리는 물론 공기가 흐르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급히 시벨리우스를 돌아보니 마치 정지한 것처럼 굳은 모습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만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시간이 전부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내가 있는 곳만은 아니었다. 맞은편의 꼬마 인어―사실은 인어의 껍질을 뒤집어쓴 다른 존재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입가에 한가득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마신 카노스가.

“오, 그래도 제법 눈치가 빠른데?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어.”

정말 놀랐다는 듯 감탄하는 말을 들으니 이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두통이 또 도졌다. 나도 이런 걸 맞추고 싶지는 않았다고!

“이게 대체 뭐예요, 카노스!”

“만나러 가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지킨 거뿐인데? 나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야 기다렸지만! 아니, 그렇다고! 왜 그런 꼴로!”

“내 꼴이 왜? 귀엽지 않아? 너도 마음에 들어 했던 거 아니었어?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잖아.”

그런 적 없거든! 설령 그랬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순진한 꼬마 인어를 향한 거지, 그 속에 카노스가 들어 있다면 얘기가 아주 많이 달라진다. 다 알면서 뻔뻔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이가 절로 갈렸다.

“당장 원래대로 돌아오세요.”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제가 안 괜찮거든요?”

“그게 중요한가?”

“……지금 신나게 벼락을 떨어트리는 신은 어디의 누구죠? 본인이 멸종시키는 종족의 모습을 꼭 하고 있어야겠어요?”

“이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알았어. 기다려 봐.”

허를 찔렸다는 얼굴로 혀를 찬 꼬마 인어, 아니 카노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그의 형체가 쑥쑥 자라더니 빠른 속도로 내가 아는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훤칠하게 큰 키에 새카만 흑발, 짙은 어둠이 담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무심코 숨을 삼켰다. 다시 봐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제 됐어?”

목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겨우 마음이 안정되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으러 온 친구는 발견한 모양이네.”

잘됐다는 듯이 웃는 얼굴에 기분이 묘해졌다. 라피스 역시 그가 나타난 이후부턴 잠잠한 상태였다. 단순히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연결이 끊긴 느낌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거예요? 여기 현실 공간 아니죠?”

“맞아, 네 의식만 따로 끌어온 거야. 현실의 너는 네 유니콘 친구와 지금 한창 숲을 빠져나가는 중이지. 한번 경험해봐서 그런지 잘 아네.”

물론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덕분에 기껏 세운 계획이 다 허사가 됐으니까. 이로써 그간의 의문들은 해결됐다. 역시 내가 홀려 있었던 거라는 소리였다. 기가 막혔지만 죄책감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를 보니 한숨밖에 안 나왔다.

“엘뤼, 아니, 아버…… 엘퀴네스는 어떻게 한 거예요?”

“푸하, 무슨 호칭이 그렇게 많아?”

“남이사. 무슨 상관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안 웃을 테니까 삐치지 마. 네 정령왕이라면 정령계로 돌려보냈어. 아직은 잠들어 있을 거야.”

삐친 거 아니라고 따지려다가 이어진 말에 바로 멈칫했다.

“잠들어 있다고요?”

“너 정체 들켰잖아. 그래서 최근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덧씌웠거든. 그 후유증이야. 그냥 잠깐 쉬고 싶어서 정령계로 돌아간 걸로 해놨으니까 너도 말 맞춰둬.”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한 건 아닌데 굉장히 어렵지. 그래서 내가 신력을 얼마나 많이 소모했는데.”

멀쩡하게 웃는 얼굴만 봐선 전혀 그렇지 않은데, 본인이 그렇다니 믿었다. 잊지 말자. 카노스는 소멸하기 직전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신이다. 태도를 보고 속으면 안 된다. 오히려 태연하게 넘길수록 진심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정령왕, 그중에서도 엘뤼엔의 정신을 건드렸을 정도면 정말 온 신력을 퍼붓긴 했을 거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주의했어요.”

“음? 아, 뭐.”

설마 사과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깜빡인 카노스가 피식 웃었다.

“사실 이번 건 네 실수라기보다는 상대의 눈치가 너무 비상했던 거지. 금제가 걸려 있는 주술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보통은 그거 하나 밝혔다고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라고까진 생각 못 해.”

“그래도요…….”

어쨌든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깊이 반성하고 있으려니 곧 머리에 묵직한 손길이 닿았다. 고개를 들고 바라본 카노스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건방지지 않은 엘퀴네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어.”

“아, 그러신가요…….”

“이렇게 온순한데 사실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도 꽤 재밌어.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게 이런 거겠지? 사실 나도 이런 걸 지향한 건데 잘 안 된단 말이야. 역시 의도하지 않아야 효과가 큰 건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귀여운 후배 님이 지금도 내 신력을 만만치 않게 뽑아가고 있다는 소리지.”

그러니까 일단은 나도 정령왕이라 의식을 장악하는 게 쉽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최대한 손을 써도 몇 년 정도가 한계였다면서, 덕분에 신력이 완전히 바닥나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설명한 카노스는 이제야 겨우 회복된 참인데 또 정양하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간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며, 굳이 신탁으로 에둘러 의사를 전달한 이유가 전부 다 그래서였다. 신력이 부족해서.

“와, 내가 신력이 고갈돼서 뻗어 있는 날이 오다니. 이런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었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윽, 그건 사과 안 해요. 카노스가 멋대로 한 거잖아요.”

“그건 그래. 전부 내 욕심 때문이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쭉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본론을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는 거죠?”

카노스의 미소가 묘해졌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내색하지 않는 얼굴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쭉 똑바로 마주 보던 그가 처음으로 시선을 흘렸다.

“음, 우리 그런 것보다는 좀 더 유익한 대화를 하는 게 어때? 예를 들면 네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라든가. 날 만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아니었어?”

“……해결 방법이 있나요?”

“돌아가려고 해도 귀환이 안 되는 거지?”

화제를 돌리는 게 뻔히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중요한 문제이긴 했으니까.

“내가 주술을 보완하면서 생긴 부작용이 맞을 거야. 하지만 기대했던 답변을 해주진 못할 것 같네. 식을 건드리면서 발생한 문제라 고칠 방법은 따로 없어. 주술을 유지하려면 그 부작용은 감수해야 해.”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저 이대로 못 돌아가요?”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그래도 심하게 꼬인 건 아니라 네가 주술의 핵심 키워드만 알아내면 저절로 해결될 것 같은데.”

“핵심 키워드라면…….”

“네게 주술을 걸어준 신과 연결된 언령. 그건 네 잠재의식 속에 있어. 이것만은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네가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 없어.”

스스로 깨우치라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암담한 기분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떠올릴 수 있었다면 진작 떠올렸을 거다. 생각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데, 그 전에 정체를 들키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카노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잠시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서늘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생글거리는 웃음이 돌아왔다.

“일단 안전장치를 걸었어.”

“안전장치요?”

“그냥 시간 벌이용이긴 한데 그래도 쓸 만할 거야. 누군가가 네 정체를 알아차릴 것 같으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해. 그럼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을 잃을 거야.”

“헉, 정말요?”

신기해서 내 몸을 내려다보는 동안 그는 몇 가지 주의점을 설명했다. 오직 유추해서 알아낸 것에만 효력이 있으며, 내가 먼저 사실을 밝히는 경우엔 소용이 없다는 것. 상대가 정령왕이면 기억을 지워도 위화감을 느낄 거라는 것. 그 위화감을 의식할수록 봉인한 기억이 깨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도.

“일단 봉인이 깨진 후엔 나도 책임 못 져. 그러니 그전에 최대한 빨리 키워드를 생각해내도록 해.”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작별 선물이야. 이어진 말엔 심장이 덜컥했다. 이만 돌아가겠다는 의미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소리다.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에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주세요.”

“정말 포기를 모르는구나, 후배 님.”

카노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온몸으로 곤란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더더욱 이유를 들어야 했다. 바꿀 수 있는 미래를 굳이 막아선 이유를.

“혹시 미래를 다 아시는 거예요?”

짐작할 만한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그러자 눈을 깜빡인 카노스가 곧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아냐, 아냐. 그런 건 라데카도 못 해. 너 미래가 얼마나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줄 알아?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부 다 달라져. 그중에서 뭘 택할지도 그날그날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달라지고. 그러니 사실 어느 하나도 정답이라고 할 수가 없어.”

“그럼…….”

“하지만 각 선택의 길들을 따라가 볼 수는 있지.”

심장이 다시금 덜컹거렸다. 동요하는 나를 바라보는 카노스는 이제야 설명해줄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조금 후련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를테면 설정값을 넣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거야. 물론 이것도 실제와는 오차가 있어서 가능성을 추론하는 정도지만.”

지금까지는 뭘 어떻게 해봐도 결과가 거의 같았다고 했다. 카류안이건 다른 이름이 붙건, 그 혼은 언제나 신을 증오하며 탐욕스럽게 힘을 갈망했다. 대부분은 그걸 막지도 못했으며, 막는다 해도 피해 규모를 추산할 수조차 없었다고.

“그런데 네가 온건한 결과를 알려준 거야.”

“…….”

“그러니 난 그 길을 잡을 수밖에.”

짙어진 미소를 보면서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같은 말이었다. 내가 카류안이 무사히 소멸한 미래에서 왔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아는 상황 그대로 전개되어야 훗날의 신계가 카류안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카노스라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다. 이미 이 시점부터 그렇게 될 줄 알고 있던 그라서.

“그런 내색은 전혀 없었다고요…….”

“냐하하, 나 원래 그런 거 잘하잖아. 거짓말이 특기인데?”

아니다. 그는 카류안을 구하고 싶었던 거다. 다른 길로 틀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거였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선택에 관여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보려 했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그냥 지금 아예 혼까지 소멸시키면 안 돼요?”

“음, 그건 너무 당연해서 추론도 안 해봤는걸. 걔가 사실 원래부터 타락한 혼이거든. 정화하지 않고 소멸시키면 그 탁기가 고스란히 남아서 누군가가 이어받게 될 거야. 오히려 더 최악으로 갈지도 모르지. 아, 참고로 지금이 정화하는 과정이야.”

“말도 안 돼요…….”

“하하, 맞아. 재미없지? 원래 뭐든 저지르긴 쉬워도 되돌리긴 어렵잖아. 신계의 일도 그런 거야. 다 인과응보지 뭐.”

태연히 웃는 얼굴에 가슴 속이 갑갑해졌다. 그 결과가 처참하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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