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53화 (553/608)

제553화

“이 안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세이렌의 동상이 있을 거예요. 그 머리에 마신의 성물을 올려주세요.”

생각보다는 싱거운 방법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성기사 중 한 명이 냉큼 배낭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 성물이 들어 있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촉박하다더니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구나.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고 내용물이 뭔지부터 확인했다. 순간 보이는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성물이에요?”

“네, 조금 의외죠? 그렇게 보여도 성물 맞아요. 머리에 채울 거라 그에 맞춰 제작된 거예요.”

에디스가 웃으며 설명했다. 이후로도 뭔가 더 말이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냥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우아한 형태의 장신구였다. 시린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색의 둥근 틀, 정 가운데엔 짙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 시대에서는 금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라피스 라줄리다. 성물답게 값비싼 재료를 쓴 거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왜 여기서 나오냐?”

황당해하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지금 내 심경을 대변했다. 동조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훑어내리다 그냥 상자 뚜껑을 덮어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헛웃음만 나온다는데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이제 이런 일 좀 안 생기면 안 되나? 오늘 처음 본 장신구가 너무 친숙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이 복잡했다. 라피스가 내게 준, 그리고 지금도 내 이마를 장식하고 있을 바로 그 서클렛이었다.

* * *

한밤의 손님들이 떠나고 난 뒤 찾아든 아침은 매우 화창했다. 갑자기 변경된 일정을 전하기에도 그리 민망하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분이 그랬다는 거고, 받아들이는 쪽에선 그렇지 않았나 보다. 다른 일정이 생겼으니 여기서 헤어지자고 전하며 신물을 돌려주자 웰디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정말 그만두시겠다고요? 이대로 돌아가면 저희가 신물을 다시 중간에 내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번 기회를 놓치시면 아주 오래 기다리셔야 할 텐데요.”

“어쩔 수 없죠. 그 정도는 감수하는 수밖에요. 다시 빌려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 염려 마세요.”

“그러시다니 알겠어요. 그럼 시벨리우스 님은…….”

“물론 엘이랑 같이 갈 거야.”

일정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일찌감치 뒷정리를 마친 시벨리우스는 이미 모두와 작별할 생각으로 만만했다. 아쉬움이라곤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산뜻한 얼굴에 웰디는 야속해하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차기 장로는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다른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하셨죠. 목적지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여기서 좀 멀어요. 에펜 왕국으로 갈 예정이거든요.”

“에펜 왕국이라고요? 잘됐네요. 저도 같이 갈래요.”

“네?”

“저도 같이 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설마 여기서 이런 수를 택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물론 시벨리우스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저희도 일정이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자세한 이유는 말씀 못 드리지만 이번 일정을 끝마치는 대로 에펜 왕국으로 이동할 예정이었죠.”

이게 즉석에서 급조한 변명이라는 건 주변 유니콘들 반응만 봐도 뻔했다.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당황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명분은 그럴듯하니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부드러운 사유를 내세웠다.

“음, 그래도 좀 곤란하겠는데요.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 공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정원에 제한이 있거든요.”

“공간 이동이요? 당신은 정령사가 아니었나요?”

“제가 아니라 저분이 하실 거예요.”

엘뤼엔을 가리키자 웰디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수상하리만치 존재감이 강했던 저 사람이 마법사였냐는 놀람에서, 혹시 드래곤이 아닐까 하는 긴장으로 이어지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여기고 다시 평온해지는 순서였다. 드래곤이라면 공간 이동 마법 정도는 인원 제한 없이 거뜬히 할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듯했다.

“가능한 인원이 몇이죠?”

“네 명 정도요.”

이어진 대답에 웰디는 더 편안한 얼굴이 됐다. 역시나 드래곤은 아니겠다고 생각하는 게 훤히 보였다. 드래곤이 아닌 대신 정령왕인 걸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마석을 갖고 있어요. 그걸 쓰면 한 명 정도는 더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아렐, 당신은 신물을 갖고 모두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세요. 다음 일정은 저와 카리안만 가겠어요.”

“예? 웰디 님, 그건…….”

묵묵히 듣고 있던 아렐이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웰디는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인원은 추려야 하고, 돌아가는 길을 통솔할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아렐, 당신이 이번 신물 대여를 주도했으니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해주세요. 당신을 의지하기에 맡기는 일이에요.”

언뜻 듣기로는 흠잡을 수 없는 답변이긴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라기엔 묘한 기류가 읽혔다. 마치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선을 그어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렐이 그들의 세계에서 배제된 거다. 아마 몇 차례 시벨리우스를 두둔하려고 한 것 때문이겠지. 아렐도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눈빛이 변했다. 동요하던 얼굴이 이내 차분해졌다.

“……잘 알겠습니다.”

웰디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군요.”

“…….”

몰라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인가. 여러모로 중의적인 답변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 간신히 다스렸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놓고 얼굴을 찌푸릴 수도, 그렇다고 태연할 수도 없는 기분에 그냥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동자가 의아한 눈길로 마주해왔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를 보니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시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뤄졌던 내 기억 속의 진짜 첫 만남. 그때도 그의 눈동자는 지금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당시엔 다른 사람을 배려할 겨를도 없을 만큼 나도 궁지에 몰렸던 시기라 미처 돌이켜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때때로 생각한다.

시벨리우스는 아주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4천 년이란 갓 부화한 헤츨링이 성룡이 되고도 남는 세월이다. 한 문명이 멸망하고, 폐허를 딛고 일어선 인류가 다시 전 세계를 주도하게 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 아득할 정도로 기나긴 시간 동안 그를 가둬둔 건 주술로 이뤄진 공간이었다.

‘완전한 밀봉’, ‘밀폐된 독실’, ‘시간의 정지’, ‘돌아올 수 없는 이방인’, ‘세상과의 격리’, ‘지독한 고독’이라 했던가. 속박을 위해 완성된 언령은 전부 다정하지 않은 단어들뿐.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암실이었다. 죄인의 영원한 형벌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감옥이 지금 내 배낭 안에 있었다.

“엘, 저 녀석이 억지 부리는 거 다 받아주지 않아도 돼. 곤란하면 내가 뭐라고 할까?”

“아니, 괜찮아.”

기꺼운 제안이었지만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은 두고 보자.”

이게 정말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면 피하기만 하는 것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모르는 사이 벌어지는 일에 휘말리느니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 두는 게 더 낫다.

정화를 위해 만들어진 성물이 어쩌다 유니콘의 손에 들어가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유통 과정에 내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신전에 장식되어 있던 걸 훔쳐온 거라더니, 장물을 받은 대가를 여기서 이렇게 치르는구나.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참, 그 소식은 들으셨어요, 엘?”

새삼 회한에 잠기고 보니 가장 아픈 값을 치른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헤어지기 전 에디스가 했던 말이 계기였다.

“아인 이드리스라고 했던가요? 그 미네르바의 계약자 말이에요. 그날 이후로 계약이 파기됐대요. 더는 정령사가 아니게 되었다나 봐요.”

“아, 그래요……?”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건데 지금은 제국을 떠난 것 같더라고요. 정령 계약이 끊길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세간에 도는 소문처럼 정말 그가 잘못해서 바람의 왕이 폭주하게 된 걸까요?”

혼잣말처럼 이어진 질문엔 차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선뜻 논할 수도, 대답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조차 끝은 아닐 것이다. 내가 무서운 건 그거였다.

시선을 들어 겨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숲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유독 겨울이 추워서 봄이 늦어질 거란 예측이 많았다. 실제로 이 시기에 피어야 할 나무들이 아직 싹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게 단지 봉인된 바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부분을 굳이 직면하게 되는 건 때가 이르렀기 때문인가. 나는 또 어디까지 버텨야 하고, 버틸 수 있을까. 흐려지는 마음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가올 시작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 * *

끼이익, 낡은 나무문은 열고 닫힐 때마다 듣기 싫은 소음을 울렸다. 그 소리가 날이 저물기도 전에 울리는 일은 무척 드문 편이었다. 한창 재료를 다듬던 가게 주인은 안으로 비틀거리면서 들어오는 남자를 찌푸린 눈으로 응시했다. 이런 가게를 찾는 이들은 대개 다 그렇지만 한눈에도 궁핍한 사정이 보이는 초라한 차림새였다.

“여긴 선불이오.”

때문에 자리를 잡고 앉는 남자에게 가장 먼저 할 말도 정해져 있었다. 남자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동전 몇 개를 내밀었다. 거지는 아니었군. 그제야 주인의 미간이 좀 펴졌다.

“뭘 드시겠소?”

“아무거나, 술이면 좋습니다. 간단한 안주와 같이 주십시오.”

대답하는 말투도 의외로 단정해서 가게 주인은 다시 새삼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허름한 차림과 음울한 얼굴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다가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한 사람들 짝이 딱 저랬다. 머리가 굵어지기도 전에 장사에 뛰어들어 온갖 형상을 다 접한 그는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저런 이들은 대체로 말로도 좋지 않았다. 대충 싸구려 술이나 먹여 얼른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주방으로 이동했다.

만드는 사람의 속 생각이 어떻든 간에 요리 과정은 공평했다.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굳어 있던 남자의 안색이 한결 풀어졌다. 그제야 여유가 생긴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라곤 저 하나뿐인 가게 안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좁고 낡은 데다가 불결했다. 얼룩이 그대로 남은 식탁이라든가, 기름때가 잔뜩 낀 조리도구들만 봐도 위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훤히 보였다. 이런 가게라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만 새삼 자신의 처지가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엔 이런 가게에서 식사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고작 몇 개월 전만 해도 그랬다.

‘전부 꿈인 것 같아.’

피로한 눈가를 문지르며, 그는 이미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곱씹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한숨을 쉬지 않는 순간이 더 드물었다.

누구나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 남자에게는 지난 반년 전의 일이 그랬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그날로 다시 돌렸을 것이다. 잠들 때마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 모든 게 사실은 다 지독한 악몽에 불과하기를. 다음날 눈을 뜨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 있기를. 하지만 아무리 빌고 또 빌어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그저 하루가 지나갔을 뿐, 그는 여전히 잔인하고 건조한 현실에 남겨져 있었다.

아인 이드리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바람의 정령사. 미네르바의 사랑을 받는 축복받은 총아. 한때 모든 정령사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이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병동에서 눈을 떴을 때였다. 큰 부상으로 오랫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그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일부가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사지는 전부 멀쩡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니고 있을 때는 알지도 못했던 감각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그를 이루던 세계에서 단절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상한 말들만 했다. 바람의 정령왕이 폭주했다고 했다. 그걸 엘이 막았다고도 했다. 알고 보니 엘도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도 들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소환된 적이 없는 엘퀴네스의 계약자였다.

쏟아지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충격적인 것뿐이라 배신감이고 놀라움이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성화를 부렸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미네르바를 어서 달래야 한다고 했다. 그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미네르바를 부를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처음 며칠간은 믿어지지 않아 멍해 있기만 했다. 그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몇 달이 됐다. 반년이 넘어가고 나서야 겨우 머리가 받아들였다. 미네르바가 그를 떠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정말이었다.

정령왕의 계약자가 아닌 그는 정령사조차 아니었다. 아무리 소환진을 그리고 주문을 읊어도 바람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의 가호를 받지 않는 그는 그저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궂은일도 마다하며 성실히 쌓았던 친분과 인맥은 평범해진 그 앞에선 허물어지는 짚단과 같았다. 앞다투어 도착하던 초대장이 뚝 끊겼다. 이젠 어느 가문에서도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황제가 작위를 주겠다고 했을 때 받아둘 걸 그랬다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수군거림과 동정의 눈길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는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 하자는 지인의 권고를 받아들여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옮겼다. 하지만 그게 더 큰 실수였다. 함께 동업하기로 한 지인은 투자금을 받자마자 그대로 잠적했다. 계약했다는 건물도, 관련 서류들도 알고 보니 전부 위조문서였다. 사기를 당한 거였다.

그에게 임한 불행을 함께 성내주던 또 다른 지인은 기분 전환을 하자며 향락가로 그를 이끌었다. 술을 마시고 가볍게 카드놀이를 몇 번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앞으로 쌓인 청구서가 어마어마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 그 많던 재산도 순식간에 파탄이 났다.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몸이 되고 보니 결국 돌아갈 곳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바다를 건너 고향 대륙을 다시 밟았다. 꿈꾸던 금의환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막상 본국이 가까워지니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국에서 그는 백작 작위가 있었고, 작지만 영토도 갖고 있었다. 왕국에도 그의 소식은 전해졌겠지만, 이미 내린 작위를 어쩌진 못할 것이다. 제 영지 안에서 조용히 살면서 다시 재기할 기반을 갖추면 된다.

무엇보다 그 나라는 그가 미네르바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고백했던 장소도, 처음 둘이서 함께 살았던 저택도 전부 그대로일 것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미네르바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을 용서해줄지도 몰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아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맞은편 공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차림인데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였다. 누가, 언제 온 거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기는커녕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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