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52화 (552/608)

제552화

“흑발이라 몰라볼 뻔했습니다. 머리는 대체 언제 바꾸신 겁니까?”

“좀 됐어요. 이상한가요?”

“아뇨,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도 머리칼 꽤 긴 편 아니셨습니까?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을 것 같은데 용케 자르셨네요. 맡으려는 이발사가 있긴 했습니까? 아무도 안 한다고 했을 것 같은데.”

“말도 마세요.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다고요.”

새벽녘에 이뤄진 뜻밖의 재회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제국을 떠난 이후로는 서로의 근황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서서 대화를 나눌 건 아닌 것 같아 아예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이런 곳에서 마주친 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물은 말에 에디스는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탁을 받았어요.”

“신탁이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 마신교 본단에서 열린 집중 기도회에서부터 출발했다. 신관들이 모여 한창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별안간에 대신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조 같은 말을 읊었다고 한다. 마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은 것이다.

인비디아가 눈을 뜨는 날, 나시크의 시간이 깊어지는 때. 늙은 용이 잠든 품에서 인도하는 빛이 이르리니. 진실을 뒤쫓는 가련한 귀인을 만나리라.

듣기만 해도 뭔 소리인가 싶은 내용이었는데, 전문가인 신관들은 용케도 이걸 잘 해석했다.

“질투의 신 인비디아는 2월의 신이기도 하죠. 눈을 떴다는 건 초반을 의미하고요. 나시크는 달의 신이고, 이 산의 이름이 고대어로 늙은 용이란 뜻이에요. 하늘에서 보면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나 봐요. 그래서 저희는 2월 새벽에 산의 중심부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거라는 의미로 해석했어요.”

그리하여 마신전에선 신탁을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신관과 성기사 셋을 특별 파견했다.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에디스 일행이었다. 정확한 일자와 위치까진 알 수 없어 지난 일주일간 계속 산을 탐사했다는 이들은 지친 기색 없이 표정이 매우 밝았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며 웃는 에디스는 특히 들뜬 얼굴이었다.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의미심장해서 당황스러울 찰나, 이어진 말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 엘을 만난 걸 보니 저희가 제대로 해석했네요. 그 귀인이 엘이었나 봐요.”

“네? 저요?”

“엘이 귀인이긴 하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아이라까지 흐뭇한 얼굴로 동조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고 보니 이건 확실히 나를 저격한 내용이었다. 달과 시간대, 장소까지 다 들어맞는데 아닐 수가 없잖아. 아니, 잠깐만. 이렇게 되면 그 앞의 수식어가 참 신경 쓰이는데요.

“그러니까…… 저란 말이죠.”

“네, 귀인이요.”

낯부끄러운 기분에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태연한 표정들에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수식어를 나만 들은 건 아니잖아. 지금 나만 신경 쓰이는 거야? 왜 다들 그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데?

“야, 마신이 너보고 가련하대. 아이고, 가련한 귀인이셨어요?”

그렇다고 이런 반응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낄낄거리는 라피스에게 닥치라고 해준 다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뜬금없이 또 이런 신탁이라니.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려고 그랬나 보다. 신기하다는 듯이 힐끔거리는 눈길들을 의식하니 더욱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예상보다 더 길어질 느낌이었다.

“음, 그래요. 귀인은 그렇다 치고, 지금 마신전이 신탁을 받을 만큼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거네요?”

“네,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있거든요.”

“무슨 중요한 임무요?”

“곧 신전이 복원될 거예요.”

설명인즉 에펜 왕국과 세이크 제국에서 사라진 마신의 신전이 다시 세워질 거라는 소식이었다.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에디스를 바라보았다.

“신전 복원에 사제들이 나설 게 있나요? 그건 그냥 신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하지만 지금 그 땅들은 혼탁한 가짜 신의 힘으로 오염됐기 때문에 정화부터 할 필요가 있거든요. 일종의 밑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가짜 신? 오염이요?”

“세이크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며 선포했던 천명을 기억해보세요.”

그게 뭐였는지 떠올리기는 쉬웠다. 왕세자의 회유에 넘어간 황제가 대대적으로 세상에 공표했던 천명은 잊혀진 신 세이렌을 부활시킨다는 거였다. 대다수가 황당해하는 반응이었지만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르긴 했다. 지난 2년간의 기억 속엔 인어의 그림을 인장으로 내세운 단체가 광장에서 대놓고 포교를 하는 광경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명분을 만들기 위해 한 말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세이렌은 실제로 부활하려고 했어요.”

“헐.”

“인어의 힘을 키우던 것도, 황제를 끌어들여 포교를 시작한 것도 전부 그 과정이었죠. 모두에겐 다행스럽게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로 실패했지만요.”

심지어 그 실패엔 미네르바가 연관되어 있었다. 금지된 술법으로 세이렌이 혼을 이어받으며 명맥을 유지한 아일브라 백작 가문은 인어들과 함께 아주 오랫동안 세이렌의 부활을 준비해왔다. 새로이 완성한 흑주술로 인어의 힘이 강해진 지금이 바로 그 적기였고, 이를 위해 아나이스 왕녀의 몸에도 일찌감치 주술을 준비해뒀다고 한다. 세이렌이 그 몸에 깃들어 부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왕녀가 덜컥 사망해버린 거다.

“허…….”

“그들의 대업은 수포가 됐어요. 하지만 지난 2년간 제국이 적극적으로 포교한 탓에 세이렌을 따르는 신도가 많아졌죠. 그들의 신앙이 다시 세이렌에게 힘을 부여하고 있고요. 이 악순환으로 인해 두 나라엔 지금 탁기가 흐르고 있어요.”

사이비라도 신앙은 신앙이라 뭉치면 위험한 힘이 된다. 이런 힘은 근본부터가 탁하기에 대부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편이었다(내 시대에서 증명할 수 없는 능력을 종교 재판으로 엄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마 세이크 제국은 황제가 정신을 차린 이후로 알아서 자정하고 있지만, 구심점이었던 에펜 왕국은 오히려 더 악화한 것 같았다. 아예 세이렌을 위한 성역까지 만들어지면서 광신도들의 집합체가 된 모양이었다. 듣기만 해도 갑갑한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세자가 붙잡힌 걸로 끝난 게 아니었네요.”

“맞아요. 진짜 해결은 이제부터죠. 그 왕세자도 다시 복권했지만요.”

“네? 복권이요? 왕세자가요?”

“모르셨군요. 그간 에펜 왕실의 소식을 들으신 게 없나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소식은 왕세자가 제국에 구금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에펜 왕국 영토에서 지내면서도 딱히 정세를 알아본 적이 없었다. 워낙 동떨어진 시골이기도 했고,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에디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생각보다 더 나쁜 소식이 될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처음엔 에펜 왕국도 알아서 잘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미혹의 힘을 지닌 왕세자가 구금되고 나자 국왕이 세뇌에서 풀려나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분노한 국왕은 왕비를 탑에 유폐했고, 아일브라 가문에 군대를 보내 그들 혈족을 전부 몰살했다. 왕국에서 인어를 몰아내려 대규모의 토벌군도 일으켰다. 하지만 탑에서 탈출한 왕비에게 역습을 당하면서 한순간에 상황이 반전됐다.

“지금 에펜 왕국은 왕비가 실권을 장악했어요. 국왕은 실종된 상태로 생사를 알 수가 없고요.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제국에 구금되어 있던 왕세자가 귀국했죠. 조만간 대관식을 치른다고 해요.”

“……황제가 왜 왕세자를 풀어준 거죠?”

“왕국에서 재정 전부를 쏟아부어 보석금을 치른 모양이에요. 지난 전쟁 때문에 손해가 막심했던 제국으로선 할 만한 거래라 본 거 같아요.”

그렇다고 자길 암살하려던 놈을 풀어줘? 아무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황제였다.

“이제 아일브라의 혈통은 왕비와 왕세자뿐이죠. 왕비는 전국 각지에서 가임기의 여성들을 모으고 있어요. 왕세자의 아이를 낳게 해서 세이렌이 부활할 몸을 다시 준비하려는 것 같아요.”

들을수록 엄청난 내용에 마른세수가 절로 나왔다. 흑막이 왕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진짜가 나서자 규모가 달랐다. 하지만 정작 에디스는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왕세자가 귀국해서 오히려 더 잘됐다며, 어차피 마지막 발버둥이 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평했다. 그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건 간에, 마신의 신전이 다시 세워지면 전부 다 끝날 거라는 예언이었다.

“교황 예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응답을 받았어요. 수많은 마신관을 학살한 에펜 왕국엔 신전이 다시 세워지는 동시에 징벌의 힘이 임할 거예요.”

“징벌의 힘이요?”

“마신의 적을 사멸하는 심판의 힘이죠. 가장 자비심이 없는 무서운 힘이기도 해요.”

차분히 답하는 에디스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어진 말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징벌의 힘은 예외를 두지 않아요. 그 힘이 지상에 임하면 세이렌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멸하겠죠. 왕국에 그 성역이 있으니 백성들도 책임을 면하지 못해요. 전부 다 죽게 될 거예요. 왕비와 왕세자, 인어만이 아니라…… 에펜 왕국의 모든 인구가요.”

“……!”

“저희는 그걸 대비하려는 겁니다. 그들의 성역을 없애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요.”

아이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지금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영혼의 보석을 찾는답시고 한가로이 숲이나 헤매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선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신의 영역 아니랄까 봐, 완전히 별세계 이야기였다.

“성역을 없앨 방법은 있는 거예요? 아까 정화할 거라고 했었죠?”

“맞아요. 대개 이런 가짜 성역엔 상징이 되는 주축이 존재해요. 신도들의 신앙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에선 그게 세이렌의 동상이에요. 그걸 마신의 힘으로 정화화면 돼요.”

“문제는 우리의 힘으론 그곳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그곳은 지독한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정화를 시도해 봤지만 안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걸 해결할 방안을 강구하는 중에 신탁을 받은 거고요.”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차마 대놓고 욕설을 내뱉을 수는 없어서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신을 닮은 밤하늘이 오늘따라 참 검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제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네, 맞아요.”

“신탁에서 말한 귀인이 제가 아닐 가능성은요?”

“아무리 봐도 엘이에요.”

단호하게 답하는 에디스는 다른 가능성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라는 물론이고 초면인 다른 사람들조차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런 것 같긴 해서 이에 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어려운 일인 걸 알지만 부탁할게요, 엘. 저희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징벌이 임하기로 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최대한 서둘러야 하는 일이에요.”

“으음, 잠시만요. 전…….”

이게 게임이라면 화면 창에 수락 버튼만 있을 것 같다. 진땀이 흐르는 기분에 입만 연신 벙긋거렸다. 사정이야 충분히 알았고,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선뜻 그러겠다는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강신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분위기를 봐선 바로 출발해야 할 기세인데, 신물의 대여 기간이 촉박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수락할 땐 하더라도 일단 마신전부터 들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에디스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졌다.

“이거 도와주면 내가 만나러 갈게. 그런 재미없는 장난감 같은 거 쓰지 말고.”

“……네?”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에디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라와 다른 사람들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다만 그들은 나보다는 정신을 차리는 게 더 빨랐다. 잠시간 침묵 끝에 이어진 말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신탁인 것 같습니다.”

……신탁을 이런 식으로 내리지 말라고.

물론 기가 막힌 건 나뿐이었고, 마신관들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마신이시여! 무슨 언어인지 알겠어요?”

“아, 아뇨. 처음 들어보는 언어입니다. ‘이히 흐 키움……’ 그다음이 뭐였죠?”

“그게 아니라 ‘이키 크 리움’ 아니었습니까?”

“저는 ‘키피 투히 티툼…’으로 들렸는데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들렸던 모양이다. 무슨 조화를 쓴 건지 발음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해석을 시도하기는커녕 적어둘 수도 없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다. 카노스가 강신을 피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다. 문제는 그걸 다 알면서도 이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는 나였다.

‘……어디 약속 안 지키기만 해 봐.’

마신교 본단에 쳐들어가서 나타날 때까지 농성할 거다. 기도실이든 회당이든 예배당이든 아무 데나 자리 잡고 몇 날 며칠이고 드러누울 거야. 진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라는 걸 처절하게 보여줄 거라고!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돼요?”

이를 악물며 묻고 나서야 우왕좌왕하고 있던 신관들이 겨우 혼란을 수습했다. 어차피 해석할 방도가 없는 신탁은 당장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 내가 도와준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한 것 같았다.

“고마워요, 엘. 말씀드린 대로 세이렌의 성역으로 가시면 돼요.”

“그 성역의 위치는요?”

“아일브라 백작가의 별장이 있던 숲이에요. 기형으로 태어나 죽은 백작가의 여아들을 매장한 곳이기도 하죠. 지금은 인어의 숲이라고 불린다고 해요.”

지도를 꺼내든 에디스가 왕국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심장이 위치한 부근이다. 그냥 보기에도 주술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장소 선정이었다. 이래서 고작 성역 하나에 왕국민 전체가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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