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와, 이거 정말 맛있다.”
얇게 저민 사과가 한가득 올려진 파이에선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크게 한입 베어 문 시벨리우스는 이번에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너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거 알아? 여기 음식이 다 취향에 맞나 보네.”
“응, 크게 특별한 맛인 건 아닌데 뭔가 그리운 느낌이 나는 것 같아. 특히 이 파이는 더 그렇네. 어릴 때 자주 먹던 거라 그런가?”
“어릴 때 사과 파이를 자주 먹었어?”
“누가 곧잘 만들어줬거든. 서툴러서 처음엔 망친 게 대부분이었는데 갈수록 맛이 좋아졌지. 날 주려고 일부러 연습했던 것 같아. 그래서 더 좋아했어.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렇구나.”
기억은 잃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시벨리우스가 제일 자주 만드는 간식이 애플파이였다. 갓 부화한 아스에게 제일 먼저 건네준 음식도 그거였고. 아무래도 그때의 영향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시벨리우스가 요리를 배우게 된 것 자체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도 모를 애매한 기분이라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심부름을 핑계로 일찌감치 자리를 뜬 아렐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정작 나를 이런 기분에 빠트린 장본인은 그저 신이 나 있었지만.
“후식도 입에 맞으십니까, 손님? 잘 드시니 만든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네요. 만들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들어버렸는데 괜찮으시다면 좀 가져가시겠습니까? 가격은 따로 안 받겠습니다.”
권하는 말이라기엔 이미 포장한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온 상태였다. 심지어 주문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 얼결에 바구니를 받아든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지만 이런 건…….”
“괜찮습니다. 보다시피 작은 가게라 손님이 별로 없거든요. 후식을 주문하는 분들은 더 없고요. 남겨놔 봤자 어차피 버리게 될 거라 좋아하시는 분께 보내드리는 게 저도 더 마음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 부담되시면 친구분들께 맛있다고 소문이나 내주세요. 다음에 또 와주시면 더 좋고요.”
선량하게 웃는 얼굴엔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어딜 봐도 그냥 인심 좋은 사장님이 단골손님을 확보하려는 투였다. 그 태도가 얼마나 천연덕스러웠는지 경계하던 시벨리우스도 차츰 긴장을 풀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게 맛있는 음식이라면 더더욱. 바구니를 소중히 끌어안는 시벨리우스 역시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였다. 그 모습을 부드럽게 응시하는 식당 주인, 리글레오를 보자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 아이에겐 제 이름을 알리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일족을 배신한 자의 이름이라 싫어할 겁니다.”
조금 전 그가 했던 당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멋대로 밝힐 수는 없었을 거다. 실제로 시벨리우스가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보였던 반응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그 사과 파이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레시피 적어드릴까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얼마든지요. 딱히 특별한 비법이 들어간 것도 아닌걸요.”
하지만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이 더 크지 않을까. 한창 둘만의 세계에 빠진 형제를 바라보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화목한 광경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만큼 더 씁쓸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지?”
중얼거리듯 건넨 말에 엘뤼엔이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어떤 과정이 전부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여기서 아렐과 마주친 것만큼이나, 때마침 도착한 장소가 유니콘이 운영하는 가게 앞이었던 것도 짚어볼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주인의 정체가 시벨리우스의 형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다분히 의도된 결과였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날개를 꺾은 천마가 최근 일족 하나와 작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짐작대로 엘뤼엔은 부정하지 않았다. 유니콘 마을을 방문하는 문제를 앞두고 고심만 깊어진 내게 그가 안배를 내려준 거다. 아니, 어쩌면 어린 동생을 위해 서툰 솜씨로 사과 파이를 만들어주던 형을 위한 안배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중에 시벨리우스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냥 좋은 기억만 나눴으면 좋겠다. 이미 상처투성이인 남자가 사랑하는 동생이 자신을 원망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기억까지 감당하지 않길 바란다. 그건 결국 시벨리우스에게도 다시 상처가 될 테니까.
* * *
아렐을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후였다. 만남은 이번에도 리글레오가 운영하는 식당 안에서 이뤄졌다. 첫 방문에서 이미 마음의 문을 연 시벨리우스는 반갑게 맞이하는 리글레오와 웃으며 인사했고, 요리에 관련된 주제로 손쉽게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뒤늦게 도착한 아렐이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하다가 이내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았다. 애써 내색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표정도 그와 비슷할 거라 서둘러 본론에 들어갔다.
“허가를 받았다.”
다행히 그가 들고 온 소식은 긍정적이었다. 본인들도 빌린 것이다 보니 아무래도 까다롭게 굴기는 어려웠나 보다. 아렐이 그들 일족에게 나를 ‘드래곤의 대리인’이라 설명한 덕분도 있었다.
“다만 조건을 하나 붙이셨다. 신물을 대여하는 동안 우리 측 담당자가 동행한다는 조건이다.”
내가 신물을 들고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하긴 나라도 만약의 사태는 대비해 둘 것 같다. 그거야 아렐이 맡으면 되겠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담당자도 장로께서 직접 지정하길 원하셨다.”
“으음, 그건 곤란한데요. 그냥 당신이 맡으면 안 돼요?”
“이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나 역시 함께하게 될 거다. 내가 호위하는 분이 담당하시게 될 것 같으니.”
“그게 무슨…… 아, 설마…….”
불길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니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마가 맞다. 웰디 님이시다.”
어쩐지 웬일로 일이 술술 잘 풀리나 했다. 그야 중요한 물건일수록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겠지. 혈육만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 장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해된다. 하지만 바로 그의 손녀이기 때문에 이쪽은 더 곤란했다. 이건 아예 적의 척후병을 본거지에 들이는 꼴이잖아. 전에 봤을 땐 성격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인성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시벨, 우리가 당분간 따로 행동을…….”
“아니, 나도 같이 있을래.”
신물을 대여하는 동안 나 혼자서 유니콘들을 상대할 생각으로 운을 떼는데 시벨리우스의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당황해서 바라보는 나를 그는 담담한 눈길로 마주했다.
“무슨 생각이야, 너.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분명 들킬 거야.”
“응, 그렇겠지.”
“그런데 왜…….”
“웰디는 괜찮아. 아마 괜찮을 거야.”
호기롭게 나선 것과는 다르게 말투는 영 자신이 없다. 미심쩍게 바라보니 그가 쓰게 웃었다.
“오히려 나쁘지 않은 기회 같아. 웰디는 차기 장로로 내정된 아이고, 현 장로의 측근 중에선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야.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자라서 서로 잘 알기도 하고. 그 애를 설득할 수 있다면 앞으로 한결 순탄해질 거야. 반대로 그 애조차 설득할 수 없으면 난 앞으로도 제대로 설 수 없겠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난 네가 힘들어지는 건 싫어.”
“아니야, 엘. 내가 바라는 거야. 요 며칠간 나도 많이 생각해봤거든. 내가 원한 삶은 아니지만 이미 이렇게 태어난 거잖아. 언제까지 외면하고 피해 다닐 수만은 없는 문제인 것 같아. 한번 부딪혀볼래.”
자신 있게 답하는 그는 오랜 번민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아렐과의 관계가 원만히 풀린 영향일까. 마을을 떠나 있던 지난 몇 년간의 삶이 그에게 여유를 가져다준 것도 있을 거다.
정작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나였다. 그는 앞날을 모르니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까지 이 문제를 낙관적으로 여겨선 안 된다. 좀 더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를 내 손으로 악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기분을 지우지 못하겠다.
“엘, 정말 괜찮아. 날 믿어줘.”
하지만 이어진 말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믿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내 일방적인 판단과 결정을 어떻게 앞세우겠어. 지금 이 말을 외면한다면 지금까지 시벨리우스를 믿지 못하던, 그의 일족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정 안 되면 다시 도망치는 방법도 있으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적어도 내 눈앞에서 시벨리우스가 봉인되는 참사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 지금은 그게 목표였다.
* * *
인간들이 유니콘을 사냥하려는 목적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외형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니콘은 멀리서도 한눈에 띌 만큼 빼어난 외모를 타고난다. 엘프도 준수한 일족이지만 유니콘은 닿아선 안 될 것 같은 신비롭고 묘한 분위기까지 있었다. 특히 유니콘 여성은 설탕으로 빚어낸 것처럼 화려하고 달콤하게 생겼다는 평이었다.
그런 점에서 웰디는 전형적인 유니콘 여성의 외모를 갖춘 사람이었다. 빛이 감도는 것처럼 깨끗하고 하얀 피부, 오밀조밀하게 귀여운 얼굴, 질 좋은 루비를 연상시키는 보석 같은 눈동자. 풍성하고 화려한 은발엔 은은한 분홍빛이 감돌았다. 솜사탕으로 사람을 빚는다면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스쳐 지나가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외모다 보니 수행원 사이에 있는 리더를 알아보는 덴 전혀 지장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사전에 협의한 접선 장소는 도시에서 마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숲 안이었다. 엘프의 관할 구역이라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당신은…….”
긴장한 상태로 대면을 기다리고 있던 웰디 역시 나를 한눈에 알아봤다. 흐트러진 얼굴엔 설마 내가 드래곤의 대리인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물론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설마, 시벨리우스 님……?”
“오랜만이야, 웰디.”
어차피 마주할 작정으로 왔던 시벨리우스는 쓰고 있던 후드를 선뜻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짐작하면서도 정말일 줄은 몰랐는지 정면에서 마주한 웰디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그를 알아본 유니콘 수행원들도 경악에 차 술렁거렸다.
“아렐, 너……?”
그중 한 남자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렐을 돌아보았다. 그날 잡혀 있던 세 유니콘 중에서, 아렐과 함께 웰디를 호위하던 카리안이란 자였다. 그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모든 유니콘의 시선이 아렐을 향했다. 아렐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렐? 이런 얘기는 전혀 없었잖아요.”
“죄송합니다, 웰디 님. 미리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대체……!”
“아렐을 탓하지 마.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급히 나선 시벨리우스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굳은 얼굴로 아렐을 노려보던 웰디가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전 할아버지께 임무를 받고 나온 거예요. 드래곤의 대리인이 하이튼의 신물을 잠시 대여한다고 해서요. 그런데 설마 모두를 속이신 건가요?”
“속이지 않았어. 여기 있는 엘이 드래곤의 대리인이야. 신물 때문에 만나는 거고, 난 엘의 일행으로 동행한 것뿐이야.”
“하지만 저 사람은 인간이잖아요.”
“네, 맞아요. 인간이죠. 인간은 드래곤의 대리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웃으며 물은 말에 웰디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대신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 뵀을 때도 평범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설마 드래곤과 친분이 있으실 줄은 몰랐네요. 신물을 핑계로 저를 끌어내어 무엇을 이루려는 거지요? 유감이지만 그게 무슨 목적이든 이루지 못할 거예요.”
순간 수행원들의 기세가 사나워지더니 다들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시벨리우스의 등장이 너무 충격이 컸나. 아무래도 뭔가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 것 같았다.
“음, 제 목적은 신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건데요. 당장은 돌려주기 어렵다고 하셔서 일단 잠깐 대여하는 거고요.”
“정말 그것뿐인가요?”
“왜 다른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유니콘 측 파견 여부를 결정한 것도, 그 담당자를 정한 것도 제가 아닐 텐데요.”
본인들도 너무 잘 알다시피 그건 전부 그들 장로의 결정이었다. 이번에도 웰디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뭘 깨달았는지 돌연 밝아진 얼굴로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그 말을 믿을게요. 그럼 이제 시벨리우스 님은 저희에게 돌아오시는 건가요?”
“…아니.”
“아니라고요?”
재차 충격에 빠진 웰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희가 그동안 당신을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세요? 이곳에 오면 저를 만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오신 거잖아요. 그건 돌아오신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 반대야, 웰디. 돌아갈 마음이 없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러 나온 거야.”
“시벨리우스 님!”
“웰디 님, 그렇게 흥분만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일단 시벨리우스 님의 말씀도 들어봐 주십시오.”
옆에 있던 아렐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웰디가 원망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듣겠어요? 아렐은 방금 시벨리우스 님이 하신 말을 듣지 못했어요? 돌아올 마음이 없으시다잖아요! 이런 일은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웰디 님, 시벨리우스 님이 룬이십니다.”
“그게 무슨……!”
“일족의 그 누구도 룬보다 신분이 높지 않습니다. 룬이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루세프 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