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7화
“……빌려줘요? 유니콘한테요?”
“어, 한 1년 전쯤인가. 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다며 잠시 빌리고 싶다고 부탁하더라고. 꼭 필요하다고 간곡하게 애원하는데 사정이 참 딱하게 보이지 뭐야. 그래서 빌려줬지, 뭐. 그러고 보니 돌려받는 걸 잊고 있었네.”
<주인님을 직접 찾아뵐 다른 방법을 찾았음.>
설마 그게 이런 뜻이었을 줄이야. 신물을 통해 루세프를 직접 강신하려는 거구나. 란타샤에게 거절당하면 당했지, 설마 유니콘에게 선수를 빼앗길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 머릿속이 아연했다.
“뭐야, 너도 그게 필요했던 거야?”
“네…….”
“그걸 왜 찾아? 운명의 짝이라도 찾아보려고? 그거 반드시 좋은 인연만 비추는 건 아냐. 재수 없으면 운명의 악연이랑 엮이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잘못 엮여서 파탄 난 짝들 내가 여럿 봤다.”
이 시점에선 신물의 부가기능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란타샤는 당연히 내가 거울의 원래 기능을 원한다고 여겼다. 소유주도 몰랐던 정보를 유니콘들은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로 인해 부가기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걸 수도 있었다. 어쨌든 한발 늦은 입장에선 속이 쓰렸다.
“그런데 나한테 하이튼의 신물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 그게, 누가 알려줬어요.”
“누구? …혹시 랄스 그 자식이니?”
담배를 태우는 동안 느른하게 풀어졌던 눈동자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아뇨, 아닌데요.”
“아니긴. 그 자식이 아니면 누가 너한테 그런 걸 알려줬겠어. 그 자식이 내 거울에 비친 게 자신이었다고 미주알고주알 떠들디? 아무튼 입 한번 싸다니까.”
……잘못 엮여서 파탄 난 짝들에 본인 이야기도 포함이었구나. 어차피 계속 부정해봤자 믿을 기세도 아니었고, 누구한테 들었는지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악연이 될 만한 상황이 계속 추가된다는 점에서 그 거울이 신통하긴 한 모양이다.
“어쨌든 여기까지 올 정도면 넌 그 거울이 꼭 필요한 거지?”
“네, 필요해요.”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유니콘 장로 앞으로 서신을 써줄게. 네가 나 대신 가서 신물을 받아오는 거야. 그런 김에 네 용건도 같이 해결하면 되지 않겠어?”
순간 멈칫한 건 미래를 아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리한 란타샤는 그 잠깐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왜, 이 방법은 싫어?”
“아, 아뇨!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무례한 부탁이었을 텐데 고마워요, 란타샤.”
바로 정신 차리고 대답하자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란타샤가 곧 쓰게 웃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바로 서신을 적은 후 각인까지 해서 건네줬다.
“자, 가져가. 딱히 고마워할 건 없어. 어차피 내 서신이 있어도 돌려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거야. 유니콘은 이종족에게 호의적이지 않거든. 인간에겐 특히 더하고.”
“각오하고 있어요.”
“그래, 행운을 빌어.”
작별은 담백하게 이뤄졌다. 다행이라면 란타샤가 다음에 올 땐 결계를 부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점이다. 신물을 찾아와도 이프리트를 통해 전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내 얼굴을 다시 볼 의향은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이제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진척이 있었냐 하면, 출발하기는커녕 아직 시벨리우스에게 말을 꺼내보지도 못했다. 몇 번 시도해보긴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을 보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하필 신물을 가져간 게 유니콘일까. 굳이 동행할 필요 없이 나 혼자 다녀오면 되지만 이 여정 자체가 꼭 시벨리우스가 서클렛에 갇히는 전초전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친구의 암울한 과거에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지난 사건만으로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지 않나. 이제 정말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일어나야지 않겠어?”
라피스는 자기 일 아니라고 속 편한 소리를 했다. 맞는 말이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겠지. 나도 그게 나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니라면 한 발짝 떨어진 기분으로 지켜볼 수 있었을 거다.
‘불행의 씨앗이 된 기분 알아?’
“얼씨구.”
‘아냐, 생각해봐. 막을 수 있는 일을 방관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내가 돌아가서 시벨의 얼굴을 어떻게 봐?’
“또 시작이냐. 그 고민은 이제 끝난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너 자꾸 그런 잡생각 때문에 미래를 틀어보려고도 했었잖아. 아니야?”
“……!”
“맞지? 내가 경고해도 들은 척하지도 않았잖아.”
카류안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를 말하는 건가 보다. 누군가가 경고하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라피스였구나. 그 지독하던 순간에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노스를 만났던 자리에도 라피스는 함께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보석인 상태에서도 기억이 조작될 수 있는 걸까.
“있어.”
라피스에게도 지난 기억이 있는 건지 궁금해서 슬쩍 물었더니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마신을 만난 직후까지도 상황을 선명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후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부터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기절했고, 의식을 차린 후에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내 기억에 심어진 흐름 그대로였다.
“그래서 난 네가 마신이랑 대화하고 난 후에 설득된 줄 알았지. 그런데 이런 걸 물어보는 걸 보면 네 기억은 나와 다른 모양이네?”
‘실은 그게 좀 복잡해. 난 그냥 환상을 봤을 뿐이거든.’
“자세히 말해봐.”
한층 진지해진 어조에 기대어 지난 경험을 설명했다. 카노스가 사라진 후로 갑자기 어둠에 삼켜진 것부터 그 뒤로 줄줄이 이어진 환상들까지. 그게 주로 바람의 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롯한 미네르바의 계약자와 관계된 환상들이었다는 것도.
‘그런데 그 환상이 다 끝나고 나니까 2년이 지나 있더라고.’
“허……. 근데 너 기억은 다 있지 않아?”
‘응. 생각하려고 하면 떠오르긴 해. 그래서 기억이 조작된 건가 했어.’
“그건 아닐걸. 단순 기억 조작으로 시간의 흐름까지 느껴질 리가 없지. 나 같은 영체나 정령왕들의 기억까지 전부 정교하게 조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돼. 그냥 네가 홀려 있던 것 같은데?”
역시 그런 건가. 하긴 그저 만들어진 기억이 이렇게 섬세할 순 없겠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령왕들의 감각을 완전히 속인다는 건 확실히 불가능하다. 적어도 엘뤼엔은 못 속인다. 라피스는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결론지었다.
“아주 애를 가지고 놀았구만.”
노골적인 평을 들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서러움을 드디어 누군가가 알아주는 기분이라 그런가 보다. 갈수록 감동하는 지점이 낮아지는 것 같다는 점에서 이게 괜찮은 현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고민 끝에 시벨리우스에게 모든 경위를 털어놓았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 않아서 마음이 쓰였다던 그는 내가 유니콘 마을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고 하자 표정이 흐려졌다.
“그래서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금방 해결하고 돌아올 테니까 넌 그냥 이곳에 있어. 마을 위치만 짚어줄 수 있을까?”
“…유니콘 마을은 진법이 깔려 있어서 위치를 알아도 들어가기 힘들어. 경계심들도 강해서 선뜻 협조하진 않을 거야.”
“그건 어떻게든 해야지, 뭐. 정 안되면 아버지도 있으니까.”
인간인 나는 무시할 수 있어도 정령왕을 무시하진 못할 거다. 시벨리우스도 그 부분엔 할 말이 없었는지 바로 수긍하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시벨리우스는 유니콘 마을에 동행하지 않아도 항상 위험한 상태라는 것 말이다.
경각심을 되찾는 순간은 불시에 찾아왔다. 마침 사냥감을 처분할 시기라 유니콘 마을로 출발하기 전에 민가를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헌터 협회 지부에 들어서려는데 뒤따라오던 시벨리우스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당황해서 돌아보니 그는 굳어진 얼굴로 문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있어선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불길한 예감에 기척을 줄이고 문을 살짝 열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늘 손님 없이 한가하던 곳에 오늘은 선객이 있었다. 코끝까지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눈에도 타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지부장은 그들이 건네준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한참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음, 맞소. 이 얼굴이었소.”
“확실한가?”
“틀림없소. 이렇게 생긴 얼굴이 둘일 리는 없지. 다른 일행이 워낙 화려한 외모라 그에 비해 가려지는 편이긴 한데, 이쪽도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이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소. 애초에 이 지역엔 블루 엘프가 흔하지도 않고.”
블루 엘프. 누굴 겨냥한 건지 모를 수가 없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마침 지부장이 그들에게 그림을 돌려주면서 내가 있는 방향에도 안쪽이 선명히 보였다. 푸르스름한 피부에 긴 귀, 은발을 지닌 청년의 그림은 한눈에 봐도 시벨리우스였다. 심지어 외형 특징을 바꿨을 가능성까지 고려했는지 다양한 종족별로 그려져 있었다.
‘유니콘이구나.’
그들이 시벨리우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낸 거다.
이제 그들은 지부장으로부터 우리가 활동하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었다.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다음, 기척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이후엔 서둘러 천막으로 돌아가 머물던 흔적을 전부 지우고 지역을 옮겼다.
우리가 떠난 것을 눈치채더라도 금방 따라붙을 수 없도록. 유추조차 할 수 없게 연고가 전혀 없는 장소로 이동하고 나서야 겨우 안심이 됐다. 엘뤼엔이 공간 이동 마법을 할 줄 안다는 게 오늘처럼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와, 아직도 추격하고 있었구나. 진짜 큰일 날 뻔했다. 그치?”
“……응.”
고개를 끄덕이는 시벨리우스는 침울한 모습이었다. 잠깐의 평화 속에서 잊고 있던 처지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 같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이렇게 되니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시벨리우스가 추격자에게 발각된다면? 그땐 이번처럼 요행으로 도주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함께 가서 돌파하는 쪽을 택하기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무섭다. 이도 저도 못 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인가. 상황이 전부 어렵게 꼬였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진 시벨리우스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밥 먹고 생각하자.”
* * *
엘뤼엔이 선정한 장소는 꽤 큰 도심지였다. 여행자가 많은 곳인지 오가는 사람에 무심한 분위기라 행적을 가리기는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래도 천막을 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보니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작은 식당 하나가 보였다.
아직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식당 안엔 손님이 없었다. 주인이 혼자 운영하는 식당인 듯 근무자도 한 사람뿐이었다. 갑자기 들어온 손님에 놀라 당황한 얼굴을 하던 남자가 허둥지둥 우리를 자리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았다.
간단히 요기할 만한 종류로 주문을 마치고 나니 주변의 광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꽤 먼 곳으로 왔다는 건 알겠는데 이제 보니 건물 조형이라든가 사람들의 복식까지 미묘하게 달랐다.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야, 아버지? 에펜 왕국은 아닌 것 같은데.”
“체르바 연합국이다.”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이곳의 지명도 이젠 꽤 익숙해졌다. 에펜 왕국이 북쪽에 있다면 체르바 연합국은 남부에 있는 나라였다. 거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 셈이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미안해, 엘. 아직 숲을 다 탐사하지도 못했는데…….”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침울한 모습이었다. 여러 가지로 고려할 부분이 많다 보니 아직 모두에겐 영혼의 보석을 찾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이참에 그냥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신경 쓰지 마. 사실 그 숲은 이만 떠날 생각이었어.”
“거기서 찾으려던 게 있던 거 아니었어?”
“으음, 실은 그게 말이지. 찾은 것 같거든.”
“헉, 정말?”
깜짝 놀란 시벨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곧 다른 의미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설마, 그 목걸이?”
최근 인상적인 사건이 그것밖에 없긴 했다. 화석 안에 들어 있는 조각이 라프네리아 결정이라는 걸 짚어 낸 장본이기도 했으니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시벨리우스는 더욱 놀라워했다. 그에 비해 엘뤼엔은 여전히 무심한 태도라서 오히려 신경 쓰였다.
“아버지는 왜 안 놀라?”
“대충 짐작은 했다. 최근 들어 숲을 탐색하는 태도가 묘하게 건성이더군.”
……이쯤 되면 엘뤼엔은 사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까지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게 아닐까.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알아차린 시점에서 이미 주술이 풀렸을 테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 목걸이, 거기서 만난 꼬마한테서 받았던 거 아닌가?”
“어어, 음, 맞아.”
“그때가 네가 그곳에 도착한 직후였다고 했지.”
“……응.”
이미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으면서 자꾸 확인 사살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다 알 것 같았다.
“운이 좋은 녀석인 건지, 나쁜 녀석인 건지.”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에 마른세수가 절로 이어졌다. 그걸 누구보다 알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다. 하지만 정작 나를 초조하게 하는 건 이런 소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차마 그동안 라피스를 찾았다고 솔직히 밝힐 수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 기다리던 본론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널 돕기로 한 건 그걸 찾을 때까지였지.”
바로 이거 말이다.
그래, 내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사람은 기억 못 하면서 왜 이런 건 확실히 기억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각오하고 있었으면서도 심장이 철렁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시벨리우스도 다시 눈이 동그래졌다.
“……계약 끊을 거야?”
“글쎄.”
“아버지? 나 아버지 아들인데?”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를 떠나 독립하기 마련이지.”
“싫어, 난 평생 아버지랑 같이 살 거야.”
억지로 팔짱을 끼고 달라붙자 엘뤼엔은 황당해하는 듯하면서도 별다른 말은 안 했다. 싫었다면 바로 내쳤을 텐데 판단을 좀 더 보류하려는 건가 보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의외로 응석에 약하다. 앞으로 계속 이 방법을 쓰면 되지 않을까.
“잘들 논다, 진짜.”
내게만 들리는 투덜거리는 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부자지간에 좀 화목한 모습을 보인다는데 왜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