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44화 (544/608)

제544화

겨울의 낮은 짧다. 특히 이 지역은 정오만 넘겨도 하루를 마칠 준비를 시작할 만큼 날이 빨리 저무는 편이었다. 점심 무렵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한 해는 오후를 파도처럼 집어삼키고 순식간에 밤을 불러들였다. 터덜터덜 길을 돌아 나왔을 땐 이미 주위가 침침해져 있었다.

“엘, 여기야!”

그 어둑한 하늘 아래서도 용케 날 발견한 시벨리우스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사이에 이미 장을 다 본 건지 그는 상점가 계단 위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서둘러 다가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가 빙긋 웃었다. 하얗게 퍼지는 입김 사이로 얼어붙어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해, 시벨. 오래 기다렸지? 추운데 밖에 있지 말고 어디 들어가 있지 그랬어.”

“괜찮아. 잃어버린 건 무사히 찾은 거야?”

“아, 응. 덕분에.”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어? 왜?”

“표정이 굳어 있잖아.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이런, 심란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난 모양이다. 얼른 얼굴 근육을 매만지자 가만히 살피던 시벨리우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누가 엘한테 뭐라고 했어? 어떤 녀석이야?”

“하하, 아냐. 누가 뭐라고 하긴.”

……했다.

“그래, 이런 사고를 안 치면 네가 엘이 아니지.”

한숨과 함께 내뱉어진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차라리 사고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웃어넘길 수나 있을 텐데.

“엘?”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근심하는 시선을 향해 애써 의연히 웃었다. 지금 하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마을 밖에서 엘뤼엔을 만나는 순간엔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늦었군.”

헤어진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뤼엔이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앉아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두워진 하늘빛을 따라 검푸른 색을 띠기 시작한 머리칼이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젠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 광경에 새삼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역시 내 상태를 알아봤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지?”

그의 시선을 받은 시벨리우스가 난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모르겠다는 동작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응시한 엘뤼엔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니 속이 마구 울렁거렸다.

“아버지이이!”

서러운 마음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움찔한 팔이 반사적으로 밀어내려는 동작을 취하다 곧 멈춰섰다. 주춤거리는 손길이 가볍게 어깨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뭐하는 거냐? 떨어져라.”

비록 이어진 말은 냉담하기 그지없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하며 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엘뤼엔은 끝내 날 밀어내지 않았다. 그에 안심하는 만큼 더 서러워졌다.

어떡하지, 아버지? 나 못 돌아가게 됐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운이 좋은 편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운은 좋은데 스스로 말아먹는 거라고 했던가.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 그게 그거가 아닌가 싶다. 어차피 그 운이 좋다는 부분도 이프리트가 건네준 축복의 영향이었을 거다. 그런데 이제 그조차 효력이 완전히 끝난 모양이다. 3년 정도 유지될 거라고 했으니 시기적으로도 확실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진짜 말이 돼?”

다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귀환의 주문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어!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일은 정말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겪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이번만큼 뒷골을 당기는 문제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좀 억울하기까지 하다. 애초에 정령왕은 운을 타고나는 존재잖아. 근데 난 왜 이래!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어떻게 된 게 뭐 하나 편하게 가는 일이 없어! 내가 타고난 건 악운이었냐!

“저기, 엘. 괜찮아?”

한창 씩씩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문에 달라붙어 우물거리고 있는 시벨리우스가 보였다. 괜찮냐니, 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내 손을 연신 힐끔거리는 걸 보고 따라서 시선을 보냈다가 흠칫했다. 움켜쥔 주먹 안에서 처참히 뭉개진 마늘이 삐져나와 있었다. 아차, 나 지금 마늘 껍질 벗기는 중이었지.

“어, 음, 이게 왜 이렇게 됐지?”

아하하 웃으려니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더 무너졌다. 오늘은 눈이 너무 많이 내린 탓에 사냥을 나가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려니 너무 심심하고, 잡생각도 많이 들어서 머리를 비울 겸 시벨리우스에게 부탁해 소일거리를 받아온 거였다. 안 그래도 그는 내키지 않아 했는데, 잘하고 있나 살피러 나왔다가 마늘을 터트리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역시 내가 마늘을 너무 많이 줬지? 힘들면 그만해도 돼, 엘. 난 널 고생시킬 생각은 조금도…….”

“아, 아냐! 마늘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도 않아. 그냥 잠깐 딴 생각하다가 그런 거야.”

“정말? 나한테 화난 거 아니야?”

“당연하지. 애초에 내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 왜 너한테 화를 내겠어.”

“아주 재밌게들 노네.”

기가 죽은 녀석을 어르고 달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라면 또 환청을 듣나 했겠지만 이젠 누군지 안다.

‘참 재밌기도 하겠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이상한 시비 걸지 마.’

시벨리우스를 안으로 들여보낸 후 머릿속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직접 말하는 건 아무래도 들통날 위험이 커서 대화 방식을 바꾼 참이었다. 파장을 맞추기가 좀 번거롭고 꽤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긴 하지만 혼자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너야말로 이미 벌어진 일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거야. 그만 끙끙거리고 적당히 털어내.”

‘그게 말이 쉽지. 넌 걱정도 안 돼?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게 됐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을걸?”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라피스가 답했다.

‘그렇지도 않다니?’

“내가 돌아가는 방법이야 간단하거든. 네가 적당한 신전에 날 갖다 주고 신고하기만 하면 돼. 그럼 신계에서 알아서 할 거야.”

‘……헐, 그렇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영혼의 보석인 라피스는 신전에 가져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신계에서 회수한 다음 알아서 본래의 자리를 찾아줄 거다. 시공간이 얽혀있으니 과정이 매우 복잡할 거고, 그만큼 오래 걸리긴 할 테지만 어쨌든 언젠가 제자리를 찾게 된다는 건 분명했다. 아니, 잠깐. 그렇다는 건…….

‘지금 나만 망한 거야?’

“엄밀히 말하면 미래의 아크아돈도 같이 망한 거지.”

라피스는 끼어들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

‘너 진짜…….’

“왜, 사실이잖아. 육체만 남겨두고 온 거랬나? 정령왕의 껍데기만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려나? 10년 가뭄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멸망 길 걷게 생겼네. 쯧쯧, 물의 정령왕 한 번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들이야?”

‘……영혼의 보석도 부서지는지 한번 시험해볼까? 이렇게 된 거 같이 망하게 해줘?’

“알았어, 알았어. 성질은.”

한발 물러선 목소리에 진득이 치밀어오른 혈압을 가라앉혔다. 이게 뭐가 이쁘다고 굳이 여기까지 찾으러 왔지? 과거는 미화된다더니, 그리움에 묻혀 이 녀석이 얼마나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종자인지 잊고 있었다.

“마신 쪽은?”

‘여전히 대답이 없어.’

사람 속을 뒤집는 일엔 빠지지 않는 또 한 존재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게 카노스를 부르는 거였다. 그가 정말 이런 상황을 의도한 건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주술을 보완한 그라면 부작용을 고칠 방법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그에게 여전히 날 만날 마음이 없는 거다. 이런 상태라면 마신전을 찾아간다 해도 소득이 없을 게 뻔했다.

차라리 내 정체를 밝히고 주술을 풀어버릴까. 답답해지니 생각이 절로 극단적으로 흘렀다. 주술이 풀리면 나 역시 라프네리아가 된다. 미리 사정을 설명해두고 엘뤼엔이나 시벨리우스가 날 신전에 갖다 주게 하면 되지 않을까. 정 돌아갈 방법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것도 대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라피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좀 위험할걸.”

‘왜?’

“생각해봐. 현대의 트로웰이나 엘뤼엔이나 이 시대의 널 기억하지 못했다며. 그럼 주술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너에 대한 기억이 날아가는 걸 수도 있어.”

“……!”

“주술이 풀릴 때 혼이 멀리 튕겨 나가기라도 하면? 라프네리아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른 세상의 존재와 소통할 수도 없어. 넌 라프네리아가 되자마자 기척이 사라질 거고. 그럼 바로 발견되기도 어려워지겠지. 행여 누군가가 널 발견하더라도 그자가 신전에 순순히 신고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아?”

거의 없겠지. 오히려 라미아스 같은 드래곤에게 발견됐다간 수집품으로 영원히 박제될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다시 보니 진짜 위험한 방법이었다.

‘라피스, 네가 먼저 돌아가서 내 상황을 알리는 건 어때?’

“귀환 절차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넌 명계 놈들을 믿냐? 걔들이 정령왕의 혼을 잃어버리고도 대처한 꼴을 봐. 내가 복귀할 때쯤이면 넌 여기서 이미 늙어 죽었을걸?”

아니, 그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엘, 곧 저녁 먹을 시간이야.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때마침 시벨리우스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오면서 대화가 잠시 멈췄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반응하려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얼마 전에 사 온 연어 훈제해둔 건 어때?”

“와, 좋은 생각이야. 그럼 오늘 저녁은 훈제 연어 요리로 가야겠다. 녹나무 열매랑 곁들여서 오븐에 구울게. 치즈랑 같이 먹으면 맛있을 거야.”

“벌써 기대된다.”

“금방 되니까 대충 마무리하고 들어와.”

“응, 알았어.”

요리할 생각에 신이 났는지 시벨리우스가 흥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 완전히 문이 닫히는 시점에 맞춰 한숨을 내쉬었다. 먹을 거 생각에 잠깐 들떴던 기분이 다시 빠르게 가라앉았다. 또 끼어들 때를 구분하지 않는 라피스의 목소리 때문에 더 그랬다.

“난 저 녀석 싫어.”

‘넌 좋아하는 쪽을 세는 게 더 빠르지 않아? 그리고 시벨도 너 싫어할걸.’

“아무튼 싫다고. 넌 왜 여기서도 저 녀석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

‘친구니까 그렇지.’

“친구? 치인구우? 넌 그럼 저 녀석이 죽어서 사라져도 찾으러 가겠다고 하겠네?”

‘라피스.’

“왜.”

‘계속 헛소리하면 진짜 파묻어버린다.’

바로 조용해지는 걸 보니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결과적으로는 일 초도 가지 않은 판단이었다.

“야, 화났냐?”

‘안 났거든!’

젠장, 이 뻔뻔한 도마뱀이 기가 죽을 리가 없지! 그래, 넌 속 편해서 좋겠다! 자긴 돌아갈 방법 있다 이거지? 이제 막 껍질을 벗겨낸 마늘이 다시금 손안에서 뭉개졌다. 낮게 울리는 소리가 키득거렸다.

“화난 거 맞구만, 뭘. 머리 좀 그만 굴려. 안 쓰던 걸 자꾸 쓰니까 더 예민해지는 거야. 들어 있지도 않은 걸 억지로 굴려봤자 고장이나 나지.”

‘……너 솔직히 말해. 날 화병으로 죽게 하고 싶은 거지?’

“일단 란타샤를 만나 봐.”

‘란타샤?’

여기서 갑자기 란타샤가 왜 나오지?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당황하다가 뒤늦게 떠오른 것에 얼굴을 찌푸렸다.

‘넌 근데 무슨 자기 엄마를 남처럼 부르냐?’

“아, 됐고. 이 시기는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지? 디아곤이랑 언약을 맺기 전에 란타샤는 쓸데없는 연구랑 희귀품 수집을 하는 게 취미였어. 그중에 하이튼이 만든 신물도 있었을 거야.”

연구와 수집이라니. 내가 아는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취미다. 역시 유전자의 힘이 너무 강한 거 아닌가. 그보다 하이튼이 누구였더라.

‘차원 이동을 관장한다는 신 말이야?’

“맞아, 정확히는 모든 차원 이동길과 연결을 관리하는 신이지. 그 연결엔 인연도 포함되기 때문에 인연의 신으로도 불려.”

그건 처음 알았다. 차원 이동을 관리한다고 들었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인연의 신이라고 하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느낌이다. 이프리트가 파이어 버스터의 미래를 그에게 선뜻 맡긴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괜찮은 인연을 만나기를 바랐던 거겠지. 다비안과 이어졌으니 확실히 첫 인연은 괜찮았다. 비록 달가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하이튼이 만든 신물의 이름은 연결의 거울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과 가장 인연이 강하게 닿은 존재를 비춘다고 했다. 그래서 운명의 짝을 찾아주는 거울로도 유명했다고.

“한 가지 재밌는 점은, 그 거울에 숨겨진 부가기능이 있었다는 거지.”

“부가기능?”

“신의 문장을 거울에 비추면 그 신을 강신할 수 있다고 하더라.”

“……!”

강신.

나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켰다. 신을 소환할 수 있다고?

‘신 쪽에서 소환을 거부하면?’

“그럼 애초에 재밌다는 말을 안 하지. 강제 소환이야. 최고신도 예외는 아닐걸?”

그걸 쓰면 카노스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장이 새겨진 쪽 손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흐름이라 아플 정도로 온몸이 긴장했다.

“이제 좀 방법이 보여?”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들었다는 건, 넌 그 신물을 직접 본 적은 없다는 말이지?’

“맞아. 만든 의도는 좋았는데 아까 말한 재밌는 효과 때문에 악용될 우려가 너무 커서 나중에 회수하고 파괴했다고 하더라고.”

‘파괴했다고? 그게 언젠데?’

“란타샤가 메테를 잉태했을 때니까 이 시점에선 좀 나중의 일이야. 지금이라면 아직 갖고 있을 거야.”

아직 신물이 존재한다. 그럼 정말 카노스를 만날 수 있는 걸까. 고양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라피스가 한껏 우쭐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봤냐? 뭘 아는 게 있어야 머리를 굴려도 결과가 나온다는 거.”

‘……네, 정말 그렇네요.’

울컥했지만 이번만큼은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아무리 궁리해도 떠올릴 수 없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너 혼자 애쓰지 말라고.”

아주 잠깐 머릿속이 멈췄다. 얼어붙은 듯이 굳은 상태로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생각과 함께 멈췄던 호흡이 겨우 흘러나간 후에야 조금 전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가 두 개인데 왜 온갖 근심을 혼자 다 끌어안고 있어? 아직 세상 경험도 부족한 녀석이.”

“…….”

최근 들어 눈물샘이 고장 난 게 분명하다. 타박하는 말을 듣고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다. 이대로 울었다간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기에 차라리 웃었다.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뭘 웃냐고 투덜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에 온 이후론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었다. 진실을 감춰야 하는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아무리 가족들 곁에 있어도, 친구를 만들고 유대감을 형성해도 낯선 세상에 나 혼자 뚝 떨어진 외로운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아줄 사람이 있었다. 내가 정말 라피스를 찾긴 찾았구나. 새삼스럽게 벅차오르는 감정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와는 별개로 저 사람 골리는 말버릇은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