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제 보물이에요.>
지금도 그 순간은 선명히 기억한다. 명랑한 웃음이 귀여웠던 소녀가 수줍게 내밀던 작은 목걸이. 무심코 보기엔 평범한 돌 조각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겨놓은 듯한 조개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숲에서 발견한 화석이라고 했다.
<엘한테 드릴게요.>
랑시가 헤어지면서 건넨 작별 선물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소중한 목걸이라면서도 내가 간직해주기를 바랐다. 그게 어린 랑시가 떠올린 가장 값진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받은 그 날부터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떨어트린 적이 없었으니 거의 내 몸의 일부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목걸이 안에 영혼의 보석이 들어 있었단다. 심지어 왠지 라피스인 것 같다.
여기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내가 목걸이를 받은 건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 막 과거 시대라는 걸 깨닫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령왕을 소환해봤던, 말 그대로 여정의 극 초반 시절.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곳에 오자마자 그를 찾은 거였다고?
“……하하하, 장난이지?”
“장난이겠냐?”
이어지는 퉁명스러운 대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번에도 확실히 들었다. 머릿속에서 음파처럼 울리는 거라 목소리 자체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이 밉살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라피스였다. 아니면 설마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 수많은 파란의 시절을 다 놔두고 지금에 와서? 이렇게 뜬금없이?
“엘, 방금 뭐라고 했어?”
“어?”
퍼뜩 고개를 드니 의아한 얼굴을 한 시벨리우스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엔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지. 너무 놀란 나머지 주변 상황을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깨진 돌조각에 대고 떠들어 대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뻔했다.
“아, 미안. 아무것도 아냐.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돌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거지?”
“내 짐작으로는 그래. 언뜻 봐선 모르겠는데 엘이 짚어준 부분은 확실히 성질이 다른 것 같아. 엘은 이걸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거야 그 부분만 혼자 색이 다르니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대답은 입안에서만 맴돌다 사그라졌다. 아무래도 저 돌조각이 자주색으로 보이는 건 나뿐인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라미아스가 보여줬던 영혼의 보석이 색을 띤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전부 길에 굴러다니는 흔하디흔한 돌 알갱이 같은 형태였으니까. 아, 이래서 한눈에 알아볼 거라고 했던 건가. 애써 가라앉혔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내게만 다르게 보인다는 건 역시 이 조각이 라피스가 맞다는 소리였다.
“시벨, 너 혼자 장 좀 보고 있을래? 나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아까 헌터 협회에서 뭘 놔두고 온 것 같아.”
“어? 그럼 같이 가도…….”
“아냐, 아냐. 나 혼자 금방 다녀오면 돼. 여기서 필요한 것들 사고 있어.”
“음, 알았어. 이 목록에 있는 것만 사면 되는 거지?”
“응! 갔다 올게!”
허둥지둥 대답하곤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다. 골목을 돌고 돌아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그리고 주위에 정령들이 없다는 것도 확인한 다음에야) 손에 쥔 것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요사할 정도로 선명한 빛을 품고 있는 자주색 돌조각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라피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긴가민가한 마음이 더 컸다. 어쩌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실감 나는 환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번엔 아무 반응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혹여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내심 마음도 굳게 다졌다.
“부르지만 말고 말을 해.”
그런데 답했다.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다리에 쭉 힘이 풀렸다. 미끄러지듯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고 나니 몸이 덜덜 떨렸다.
“너, 진짜 라피스야?”
“그럼 내가 나지, 누구야?”
손에 쥔 걸 꾹 움켜쥐고 거칠어지는 호흡을 연거푸 삼켜냈다. 정말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라피스였다. 어떡하지? 찾았다. 드디어 라피스를 찾았어. 아니 이걸 찾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솔직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 대체…… 왜…….”
뭐든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여는데 눈물이 울컥 쏟아져나왔다.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지만 끅끅거리는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막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당황한 듯한 음성이 들렸다.
“뭐야, 너. 설마 지금 우는 거야?”
“나도 울고 싶어서 우는 거 아니거든? 이 나쁜 놈아아아.”
“지가 못 알아봐 놓고 왜 나한테 나쁜 놈이래?”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대놓고 투덜거렸다. 익숙한 타박을 들으니 서러운 와중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내가 진짜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라피스?”
“어, 말해.”
“라피스.”
“뭐야, 자꾸.”
“라피스.”
“……그래, 그래. 원 없이 불러라.”
체념한 듯한 음성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이 황당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뭐가 좋다고 웃어?”
“당연히 좋지. 네가 부를 때마다 대답하잖아.”
이름을 부르면 당연한 듯이 대답이 돌아온다. 완전히 식어서 딱딱해진 채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던 그 순간 이후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건 눈앞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던 카노스만큼이나 거대한 단절이었다.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입술을 꾹 악물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라피스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 그 기분이 뭔지는 나도 좀 알지. 솔직히 감동한 걸로 치면 내가 더 할걸.”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너한테 말 걸기 시작한 게 이미 한참은 됐다는 소리지.”
생각지 못한 대답에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라피스가 말을 걸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알아차리자마자 처음 한 소리가 이제야 알았냐는 타박이었던가?
“아무리 불러도 들어야 말이지. 벽에 대고 소리치는 기분이었다니까. 그나마 란타샤의 피를 마신 후로는 좀 들리는 것 같더니. 죄다 헛소리로 취급하고 말이야.”
“무슨…… 헉, 자, 잠깐만! 설마, 그동안 들었던 환청들이 전부 다 너였어?”
“그 설마다. 너 진짜 너무 눈치 못 채더라.”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황당한 기분에 그대로 아연실색했다. 그 환청이 시작된 건 내 기억으로도 꽤 오래전부터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라피스가 나한테 말을 걸고 있었던 거였다고?
“야! 그럴 땐 네가 라피스라고 말을 했어야지!”
“했거든? 근데 그런 소리는 전혀 못 듣던데?”
“헐, 진짜?”
“그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너 자꾸 나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하는데, 나야말로 그동안 답답해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뭐, 이미 죽긴 했지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꿈처럼 아늑하던 기분에 단숨에 찬물이 뿌려진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내가 죽었다는 걸 새삼 자각이라도 했어?”
“……너 진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뭐, 내가 죽은 건 맞잖아.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상황이 설명도 안 되고.”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어?”
“그럼 내가 바보냐? 내가 라프네리아가 된 거잖아. 심지어 과거 시대에 떨어진 모양이고.”
명석한 녀석답게 그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대화도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혼자 담담히 생각을 정돈했을 그를 생각하니 조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너…… 언제부터 의식이 있었던 거야? 설마 여기에 떨어진 순간부터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
“뭐? 아, 그건 아냐. 그냥 언제부터인가 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그전까진 잠들어 있었어.”
날 인지하면서 깨어난 거라면 길어도 3년 정도겠구나. 그나마 최악까진 아닌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화석 안에 있다는 건 그만큼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다는 말인데, 그때부터 의식이 있었다면 너무 괴로웠을 거다.
“왜? 내가 몇천 년간 혼자 떠들고 있었을까 봐 너무 안쓰러워?”
이 와중에도 태연한 소리나 해대는 라피스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넌 네가 죽었다는 데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지 않을 건 뭐 있어? 딱히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것 같은데?”
담담한 대꾸에 속이 다시 울컥했다. 라피스는 마나 하트가 깨졌을 때 이미 제 죽음을 예감했을 거라고, 트로웰이 그렇게 알려주긴 했었다. 그게 맞기는 한 모양이다. 아니, 아예 그 정도가 아니라 한 톨의 기적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확실히 알았으면서.
“왜 말 안 했어?”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말을 해. 어차피 치료도 안 되는 건데. 시한부 취급받으면 뭐가 달라져?”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아, 알겠어, 알겠어. 나중에 화내는 거 다 들어줄 테니까 그건 일단 나중에 얘기해. 그보다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거든? 그거부터 묻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녀석은 날 다루는 방법을 너무 잘 안다. 열 받아서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데 이 와중에도 궁금한 게 있다고 하니 그게 더 신경 쓰였다. 결국 심호흡하며 속을 가라앉혔다.
“……뭐가 궁금한데.”
“내가 죽은 것도 알겠고, 영혼의 보석이 된 것도 그렇다 쳐. 명계 놈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처하는 건가 싶긴 한데, 그땐 여러모로 재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수긍해볼 수는 있어.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너야.”
“내가 뭘?”
“몰라서 물어? 여긴 과거 시대잖아. 근데 네가 왜 여깄어?”
“당연히 널 찾으러 왔지.”
척하면 척이지 않나. 뭘 이런 당연한 걸 묻냐는 생각에 어리둥절해하려니 잠시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라피스?”
“날 찾으러 왔다고?”
“그렇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여기에 있겠어.”
“아, 그러셔? 내가 어디에 떨어진 줄도 몰랐을 텐데. 그런 날 찾으려고 손수 시공간을 넘어왔다 이거지?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 줄도 모르는데 무작정? 정령왕의 육체를 버리고?”
“응.”
“미쳤어, 너?”
순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일반적인 고성이라면 귀를 막으면 될 텐데,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소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야, 좀 작게 말해. 머리 아파.”
“내가 지금 그런 거 따지게 생겼냐! 너 정말 제정신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럼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넌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너도 멋대로 나 구하고 사라져 버렸잖아. 나도 내 멋대로 한 거야.”
“너랑 내가 처지가 같냐?”
“다를 건 또 뭔데? 누가 그러더라. 구하고 싶은 녀석도 구하지 못하면 절대자의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말했잖아. 네가 위험에 처하면 도우러 가겠다고.”
“하, 정말…….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허탈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왠지 라피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으면 솔직히 좋다고 할 것이지,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는 녀석이다.
“아무튼 난 널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다는 게 너무 충격이야. 대체 화석 안에 영혼의 보석이 있다는 걸 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 난 그렇다 쳐도 정령왕들까지 몰랐다니.”
“내 혼이 강해서 그런가 보지.”
대꾸하는 라피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하면 더 눈에 띄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강하니까 자신을 보호하는 힘도 더 강하잖아.”
“아, 그렇네?”
“원래 방랑 혼은 강할수록 더 기운이 안 느껴져. 쉽게 눈에 띄면 어중이떠중이들 손에 들어가 악용될 확률이 높아지잖아.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종의 보호색을 띠는 거지. 덕분에 명계에서 회수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화석이 되도록 발견하지 못했던 거였냐. 이 정도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큰 거 같다. 아, 설마 내가 영혼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명계에서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나? 운명이 없는 아이라 망자의 기운도 서리지 않았다곤 하지만, 장례식장을 대놓고 서성거렸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건 좀 이상하긴 했다. 이제 보니 내가 정령왕의 혼이라 기척이 더 가려진 탓도 있었나 보다. 뒤늦은 깨달음에 조용히 수긍하고 있으려니 라피스가 어딘지 불만스러운 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그만큼 강하다는 건데 왜 감탄을 안 해?”
“네가 강한 건 원래 당연하다는 느낌이라 별로…….”
“넌 가끔 그런 식으로 기특한 말을 하더라.”
“넌 자주 말을 막 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니 피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이게 웃겨? 왠지 아까부터 나만 휘둘리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너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무슨 말?”
“고맙다고 해야지! 기껏 찾으러 와 줬더니!”
“아, 그래. 고맙다, 고마워. 근데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야?”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온 건 아니겠지?’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어감에서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엎드려 절받기 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도 성에 안 차건만. 이 녀석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책 없지는 않거든? 당연히 돌아갈 방법까지 다 마련해두고 온 거지.”
“그래? 그럼 돌아가자.”
“어? 지금?”
“그럼 여기서 뭘 더 하려고? 날 찾으러 온 거라며. 찾았으니 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내가 알기론 아직 내가 여기서 겪어야 할 일이 더 있거든? 그런데 지금 네가 돌아가자고 해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버렸어.”
“그게 뭔 소리야?”
<부작용이 있을지도 몰라.>
명랑하게 답하던 목소리가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카노스는 내가 과거를 바꾸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시간조차 강제로 흘러가게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라피스가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게 분명한데도?
<네가 돌아가려고 마음먹으면 귀환의 주문이 저절로 떠오를 거다.>
떠나오기 전 엘뤼엔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주문을 외우면 그가 나를 끌어당길 거라 했었지.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난 지금 맹렬히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연거푸 중얼거렸다. 시험 삼아 시도해보는 거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엘뤼엔의 원래 모습을 많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사한 백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이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여기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다정한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립다 못해 벅차도록 아픈 감정이 물씬 차올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떡하지, 라피스?”
“뭐야. 아아, 됐어. 그냥 안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눈치 빠른 라피스는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나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너무나 분명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환의 주문이 안 떠올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로 황량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릴 듯이 차가운 공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