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40화 (540/608)

제540화

“있잖아. 라피스! 나 좋은 소식이 있어! 드디어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낸 것 같아!”

그 말에 그의 표정이 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또 헛발질하고 있다는 시선이라 얼른 변명을 시작했다.

“아냐, 이번엔 확실해. 이게 만들어진 기억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엘뤼엔이 알려준 단서라고. 신빙성이 있어. 아무튼 그래서 내가 처음 도착했던 그 장소로 다시 가보려고 해. 그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널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널 만나는 꿈까지 꾸는 걸 보니까 진짜 예감이 좋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짜증이 잔뜩 어린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혼잣말로 뭔가 중얼거리는 듯하던 그가 나를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놀랍게도 내게 말을 걸었다.

“…옆……어.”

“어? 뭐라고?”

뭐야, 대화도 할 수 있는 거였어?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초조해지는 마음에 다급히 되물으니 그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난 네 옆에 있다고, 이 멍청아!”

한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잠들기 전에 봤던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한동안 어리둥절해하다 꿈에서 깨어난 거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지만 역시나 라피스가 있을 리가 없었다.

“……있긴 어디에 있다는 거야.”

허탈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좋으면서도 이상한 개꿈이었다.

* * *

세이크 제국 황제가 집요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사이에 내가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이른 아침부터 근위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도주한 진혼 마스터를 찾는 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금발을 중심으로 검문하고 있는 게 누구를 찾는 건지 목적이 빤했다.

“내가 먼저 알릴 생각은 없는데, 아이기스가 입수한 정보는 어쩔 수 없어.”

이미 라미아스에게 들은 경고도 있어서(이럴 때만 충신이다) 황제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여기긴 했다. 선뜻 보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나마 수색 인원보다 인파가 더 컸기에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고 감시의 눈길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벌어졌다.

“운행을 안 한다구요?”

몰래 떠나려면 제도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관건이다. 오늘 당장 출발하는 기차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비조를 탈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든 비조 운영이 중단됐다는 청천벽력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매표소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뭐가 문제인지 근래 비조들이 몹시 흉포해졌어요. 사람이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어젠 비행사가 억지로 운영하려다가 추락해서 목숨을 잃었고요. 그래서 상황이 해결될 때까진 당분간 비조 운영을 중단하기로 했어요.”

“으음,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이렇게 되면 편한 여정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나. 한숨을 삼키고 다음 노선을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지척에 있는 제복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근위대 기사가 기어코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용모를 확인해야 하니 잠시 후드를 벗어주시겠습니까?”

“…….”

“협조하지 않으시면 강제로 시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망설임을 느꼈는지 기사의 시선이 엄격해졌다. 잠시간 수만 가지 생각이 맴돌았지만 일단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나를 지켜보던 기사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들고 있는 마법 탐색기를 바라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일지 않았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봐.”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내 일행한테 무슨 일이지?”

성큼 다가온 남자가 불쾌한 시선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후드를 벗으니 길쭉한 귀가 드러났다. 한눈에도 인간이 아닌 외형에 당황하는 듯하던 기사가 곧 수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신원 확인을 했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훌쩍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 괜찮아?”

옆에서 함께 안도하던 남자, 시벨리우스가 내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속삭였다.

“눈치 못 챈 것 같지?”

“응, 전혀.”

“유심히 바라보길래 들키는 줄 알았어.”

“네 외모가 워낙 눈에 띄긴 하니까. 다행히 엘프 혼혈로 생각한 것 같아.”

머쓱한 기분으로 짧아진 검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정말 통할까, 솔직히 나조차 긴가민가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 * *

짐을 꾸려 나오는 길에 시벨리우스를 마주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부랴부랴 달려온 건지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로 서 있었다.

“시벨리우스.”

“엘, 네가…… 제국을 떠난다고 들었어.”

“아, 응. 그렇게 됐어.”

“나도 같이 가.”

곧바로 이어진 말에 잠시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시벨리우스의 푸른 눈동자가 초조한 빛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나도 같이 갈래.”

“……내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어디든 상관없어.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으음, 나랑 다니면 추격자에게 들킬 가능성이 커지잖아. 세피온 공작 저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야. 지금 생활 즐겁지 않아?”

“즐거워. 내가 바라던 삶이었어.”

“그런데 왜…….”

“그래도 너와 같이 갈래.”

시벨리우스는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물러설 기미가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그의 차림새에 시선이 미쳤다. 이제 보니 누가 봐도 여행복 차림이었다. 이미 작정하고 떠날 작정으로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나온 게 분명했다.

‘라미아스와는 의논한 건지 모르겠네.’

사실은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시벨리우스와는 작별 인사를 따로 하지 않았다. 그가 들려줬던 과거의 이야기만 봐선 우리가 함께 지냈던 것 같은데, 제국에서의 생활은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간 우리 사이에 교류라고 해봤자 라미아스에게 용건이 있어 저택을 방문할 때 겸사겸사 만나는 정도가 다였다. 건너뛴 기간 속의 기억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라, 제대로 된 동행은 이곳을 떠난 후에나 이뤄지겠구나 싶었다. 설마 이렇게 곧바로 쫓아올 줄은 몰랐지만.

일단은 동행인의 의향도 고려해야 하므로 옆을 돌아보았다. 시벨리우스도 그제야 내 옆에 있는 존재를 의식한 것 같았다. 그 역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정령왕 엘퀴네스?”

돌아가는 상황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엘뤼엔이 느릿하게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소개한 적이 없었던가. 서로 아는 게 당연한 사이였다 보니 잊었는데, 여기선 첫 만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령왕들 쪽에선 시벨리우스를 알지만(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간간이 살피다 보니), 시벨리우스는 정령왕들을 정식으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동행을 허락해줘. 폐 끼치지 않을게. 이래 봬도 도움이 될 거야.”

엘뤼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분명히 표현할 텐데, 굳이 반응하지 않는 건 내 마음대로 결정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시벨리우스, 일단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지. 뭐든지 다 할게. 내가 뭘 하면 돼?”

고개를 끄덕인 시벨리우스가 각오를 굳힌 얼굴로 물었다. 그를 데리고 사람이 오지 않는 공터로 장소를 옮겼다. 그런 다음 주머니 속에 있던 것들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건네받은 시벨리우스가 손에 있는 것들을 살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향해 생긋 웃어 주었다.

“혹시 이발도 잘해?”

그 뒤의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가위와 칼, 염색약을 건네받은 이후로 시벨리우스는 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 머리칼을 쥔 손길엔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는 몇 번이나 가위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엘, 나 도저히 못 하겠어.”

“아냐, 넌 할 수 있어.”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아니, 이게 최선이야. 너 아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 다짐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거였어?”

“그치만…….”

“네가 못하면 그냥 내가 한다?”

“아, 아냐! 내가 할게! 내가!”

결국 협박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나서야 분주한 손길이 닿았다. 이게 왜 협박이냐면, 바로 조금 전에 망설이는 그를 보다 못한 내가 직접 한쪽 머리칼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눈에도 어설퍼 보였는지 시벨리우스가 경악해서 바로 가위를 빼앗은 참이었다. 차마 내가 엉망으로 자르는 꼴을 보느니 자신이 하는 게 낫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시벨리우스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까운 금발을 자르고 염색을 해야 한다니. 꼭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야.”

“그냥 머리카락일 뿐인데 수선스럽긴.”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야. 이렇게 예쁜 금발이 얼마나 드문데. 이만큼 기르려면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텐데, 짧게 자르는 거 정말 아깝지 않겠어?”

“전혀. 머리카락이야 내버려 두면 또 자라잖아.”

“그렇게 태평하게 말하는 건 너뿐일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다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손재주가 좋으면 타고난 예술혼도 뭔가 남다른 건가. 하도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하니 덩달아 내 마음까지 무거워지려고 했다. 내 생전 이발하려다 죄책감을 느껴보기는 또 처음인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모처럼 굳힌 결심을 뒤바꿀 생각은 없었다. 시벨리우스도 항복했는지 얌전히 가위질을 시작했다. 한동안 서걱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잘린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후엔 차가운 염색약이 치덕치덕 발리는 느낌이 들었다. 충분히 물들기를 기다린 다음 독한 향이 가실 때까지 여러 번 물로 헹궈냈다. 이 과정은 나이아스가 도와줘서 한결 수월했다.

“다 됐어.”

마침내 기다렸던 한마디가 들렸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설레는 기분으로 손거울을 들었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짧은 흑발을 지닌 내 모습이 비쳤다.

“오.”

이 세계에서 태어난 후로는 머리 모양이 짧아진 것도, 흑발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늘 보는 얼굴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긴 금발의 모습이 한눈에도 화려하고 화사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차분하고 차가운 느낌에 더 가까웠다. 왠지 어려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더 분위기가 다른 듯했다.

“나 어때?”

“확실히 인상이 확 달라졌어. 이런 분위기도 잘 어울리긴 하네.”

시벨리우스가 속이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금발에 미련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것 같았다. 시무룩해진 얼굴을 무시하고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이리저리 살폈다. 머리를 쓸어 올려도 잡히는 감촉이 거의 없는 게 어색했다. 무엇보다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좀 더 일찍 시도해볼걸.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 나 이렇게 하니까 트로웰 닮은 것 같지 않아?”

물끄러미 돌아본 엘뤼엔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음, 아닌가 보다. 사실 나도 아닌 거 알면서 그냥 해본 말이라 상처받지는 않았다. 아들을 위해 빈말조차 해주지 않는 이 시대 아버지의 냉정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을 뿐.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시벨리우스는 어딘지 멍한 얼굴이었다.

“왜, 시벨리우스? 뭐 할 말 있어?”

“아, 그게 ……네가 정령왕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얼핏 듣긴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싶어서…….”

“뭐? 아아, 맞아. 아버지라고 불러.”

“친애의 표현 같은 거야? 다른 호칭도 있을 텐데, 왜 아버지라고…….”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선뜻 답하는 말들에 시벨리우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렇게 불러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오히려 이젠 당연하게 여기는) 엘뤼엔의 태도를 더 놀라워하는 것 같긴 했다.

“둘이 사이가 참 좋구나.”

“뭐, 그렇지.”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이건 전부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모진 서러움을 겪어야 했는지 그는 모르겠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참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벨리우스가 과거의 엘을 언급할 때마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게 바로 이 ‘아버지’라는 호칭이었다. 지금 내가 그 앞에서 보이는 모든 행동이 훗날 미래의 나를 괴롭히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땐 참 힘들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 나니 그조차 전부 추억이 되었다는 것도.

어쨌든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참 순조로웠다. 흑발로 변한 내 모습도 마음에 들었겠다, 출발 조짐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난관이 따르는 운명은 이번에도 나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비조가 운행을 중단할 줄은 몰랐어.”

설마 가장 빠른 이동 수단들이 줄줄이 다 막힐 줄이야. 변신한 내 모습이 불시 검문을 통과할 정도라는 것도 확인하고 나니 이 상황이 더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비행선도 중단했다고 하지 않았나. 진혼 마스터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비행 수단이 전부 먹통이라…….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로운 것 같아 엘뤼엔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말이 돌아왔다.

“앞으로 인간은 하늘을 누빌 수 없을 거다.”

“아…….”

역시 그렇게 되는 건가. 하긴 하늘은 바람의 영역이다. 미네르바를 배신한 인간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아인 이드리스 하나의 잘못으로 모두가 피해를 본다는 게 좀 안타깝긴 했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지. 기차는 닷새 후에나 온다는데 여기서 계속 머물 순 없고. 역시 산을 타야 하려나.”

솔직히 산이라기보다는 벼랑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말이나 마차는 흔적을 남기는 데다가 따라잡히기 쉬워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수단이었다. 사실 피하고 싶기로는 산행이 더하긴 한데, 길이 위험한 만큼 추격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장점도 분명했다.

‘그 고행이 다시 시작되겠구나.’

이번엔 신발을 몇 켤레나 버리게 되려나. 이젠 체력도 월등해져서 크게 고단하지는 않을 텐데 한숨부터 나오는 걸 보면 일전의 산행이 내게 단단히 트라우마가 되긴 한 모양이다. 솔직히 정말 힘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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