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 쪽으로 들어갈 거라 괜찮을 거예요.”
“그렇구나. 하긴, 네가 어련히 알아서 정했겠냐만은. 어쨌든 떠난다니 너무 아쉽네. 네 계획이 있을 테니 차마 붙잡진 못하겠다만…… 어디에 있든 소식은 꼭 보내줘.”
“네, 그럴게요.”
“정말이지? 약속한 거다. 나 아직 너한테 신세 진 거 제대로 갚지도 못했다. 이대로 연락 끊으면 원망할 거야.”
“안 그래요. 그리고 갚긴 뭘 갚아요. 신세 진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어디 비교가 가당키나 하냐. 너 아니었음 난 다시 일어날 생각도 못 했어. 그대로 술에 찌들어 살다 어디서 객사나 했을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크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채였다.
“크리스, 설마 우는 거 아니죠?”
“아니거든? 그냥 눈에 뭐가 좀 들어간 거야.”
목소리까지 물기에 잠긴 주제에 돌아오는 대답만큼은 꿋꿋했다. 그는 오늘따라 날이 덥다면서 연신 손 부채질을 하기 바빴다. 초겨울에 진입한 날씨는 매우 쌀쌀했지만, 아니라고 우기는 그의 체면을 위해 그냥 못 본 척해주기로 했다.
“이대로 보내긴 너무 아쉬우니까 우리 송별회 하자.”
“뭘 송별회까지…….”
“아냐, 아냐. 해야겠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후 크리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둘러 기별했다. 잠시 후 그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소식을 듣고 온 델라와 시몬, 그리고 다비안이었다.
“엘이 제국을 떠난다고?”
“아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우리 길드 간판이자 복덩이가 떠난다니!”
당황한 사람들은 연신 호들갑을 떨었지만 억지로 붙잡으려 들진 않았다. 내가 이전부터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덕분인지, 그들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며 서로 악수와 포옹을 나누고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함께 즐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떠들다 다들 취해 뻗었을 땐 어느새 새벽이 깊어져 있었다.
어지러운 식탁과 바닥을 대강 치우고, 여기저기 뻗은 사람들을 편하게 눕혔다. 얼굴이 벌게진 채 잠꼬대를 흘리는 사람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런 방식의 작별은 또 처음이네.’
한국의 친구들과는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기회도 없이 헤어졌고, 내 시대의 아크아돈에서도 다녀오겠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정식으로 송별회를 해본 건 처음인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대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들이라 더더욱. 아마 돌아간 후에도 이 순간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동안 구경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을 나서니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엘. 벌써 가시는 겁니까?”
“아, 다비안. 깨어 있었어요?”
돌아보니 다비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물의 정령사가 된 영향인지 멀끔한 얼굴에선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길드 가입은 고민 중이에요?”
“예, 크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수련에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긴 그의 정령술은 아직 기초만 겨우 쌓은 수준이었다. 원래 재능이 없는 몸에 강제로 길을 낸 거라, 그가 계약한 운디네와 원만히 교감할 수 있게 되려면 한동안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부어도 부족했다. 게다가 그는 입검의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마법처럼 상충할 정도는 아니지만 검기와 정령술은 마나 활용법이 조금 다르다. 서로 다른 능력에 적응하는 것만도 꽤 오랜 수련이 필요할 터였다. 언젠가 둘 다 능숙해지게 되면 내 뒤를 잇는 정령검사로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참, 그렇지. 마침 잘됐네요. 이거 받아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검이 고정된 허리띠를 얼른 풀어냈다. 검집째 그에게 내밀자 얼결에 건네받은 다비안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가 쓰던 검인데, 그래 봬도 정령검이에요.”
정령검이란 말에 다비안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 정확히는 정령검에 가까운 에고 소드지만. 기능은 같으니 굳이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예요. 불의 정령이 깃들어 있죠. 아직 봉인된 상태라 지금 당장은 그냥 좀 튼튼한 검에 불과하지만요. 그래도 몇 년쯤 쓰면 봉인이 풀릴 거예요. 그땐 제대로 정령검의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이걸 왜 제게…….”
“다비안한테 줄게요. 소중하게 아껴주세요.”
안 그래도 지난 일 때문에 생각해두던 부분이었다. 라피스를 찾으면 난 곧바로 귀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장소가 번화가일지, 아무도 오지 않는 오지일지는 알 수 없었다. 저번처럼 파이어 버스터 혼자 남겨질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미리 아는 사람한테 맡겨두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다비안 정도면 정령검의 첫 주인이 되기에도 적합했다. 내심 후련해하는 나와는 달리 다비안은 몹시 혼란한 얼굴이었다.
“엘, 이건 너무 과분합니다.”
“아뇨, 다비안이 적임자예요.”
단호히 결론짓는 말에 다비안이 다시 숨을 삼켰다. 한동안 일렁이는 눈으로 들고 있는 파이어 버스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차분히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엘.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알고 기회로 여기겠습니다. 언제가 돌려드릴 날이 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굳이 돌려줄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꼭 돌려드릴 날을 기다릴 겁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하다면 그렇게 해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긴장하고 있던 다비안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마주 웃은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잘 지내요, 다비안. 크리스와 다른 사람들 좀 잘 부탁할게요.”
“네, 다른 이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다비안도요.”
마주 축복한 후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나설 때만 해도 침침했던 주위가 이동하는 동안 조금씩 환해져 갔다. 어슴푸레한 색이 넘실거리는 하늘이 어느새 아침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었다. 새로운 출발에 걸맞은 시간이었다.
* * *
쏴아아―
짙은 바람이 날뛰는 들판은 거센 몸살을 앓았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흉포한 기운이 때려 붓는 듯이 할퀼 때마다 대지를 채운 것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사납게 흔들렸다. 그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소년의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어휴, 아주 난리네, 난리.”
그때 소년 옆으로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나타났다.
“바람의 영역이 날뛰니까 에바스 에덴까지 엉망이네. 어딜 봐도 죄다 폭격 맞은 수준이야. 누가 여길 보고 그 아름다웠던 천상의 정원이라고 믿겠냐. 애들 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난리다.”
호들갑을 떠는 말에도 어딘가를 응시하는 소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투덜거린 붉은 머리칼의 남자, 이프리트의 시선이 소년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그 방향에 있는 건 바람의 영역이었다. 바깥에서 보는 바람의 영역은 도자기로 빚어놓은 듯 청아하고 고아한 궁전이었지만, 지금은 강렬한 회오리바람에 휘감겨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폭주한 바람이 갇혀 있는 탓이었다.
봉인되었어도 폭주의 영향은 컸다. 불안정한 바람의 흐름은 정령계 전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힘이 넘칠 만큼 커질 땐 합이 맞는 상성도 덩달아 널뛰기 십상이라 이프리트 역시 자신의 힘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이미 추방의 충격에서 벗어났음에도 그가 다시 아크아돈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대론 당분간 정령계를 떠나긴 힘들겠는데.” 이프리트가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넌 안 힘드냐?”
자신이 이럴 정도면 반대 상성인 땅의 정령왕은 더욱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바라보는 소년, 트로웰은 그저 건조하기만 했다. 귀염성 없긴. 이프리트가 다시 투덜거렸다.
하기야 귀염성이 없기로는 거의 혼자서 미네르바를 거뜬히 봉인한 엘퀴네스야말로 가장 심했다. 바람과 물은 서로 중립에 가까운 성향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형과 유형의 차이가 있는 만큼 맞부딪히면 물 쪽이 조금 불리해지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엘퀴네스는 그걸 전부 가볍게 무시할 뿐만 아니라 모두를 내쫓기까지 했다.
‘그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너무 대단해서 감탄이 나는 건 감탄이 나는 거고,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려서 이프리트는 애써 시선을 환기했다.
“저 녀석, 언제쯤 진정될 것 같냐?”
“글쎄……. 알 수 없지. 1년이 걸릴지 1백 년이 걸릴지.”
소년, 트로웰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백 년?” 뜨악하게 소리친 이프리트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쏴아아― 이 순간에도 할퀴는 바람은 마치 서러운 울음을 삼키는 듯했다. 짧게 욕설을 뱉은 이프리트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 그래도 인마. 엘한테 그러는 건 아니었어. 걔가 널 얼마나 따랐냐.”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난 해야겠어. 난 진짜 널 그렇게 좋아한 애는 처음 봤다. 너한테 착하다고 한 애도 걔가 처음 아냐? 너도 나름대로 엘 아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있냐? 그날 우리가 말린 거 원망하지 마. 죽였으면 너 나중에 분명히 후회했을 거야.”
“…….”
굳게 닫힌 입에선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래, 무시하고 싶으면 무시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켜보다 이프리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갈수록 자신의 위치가 매우 하찮아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계약자 놈은 아직 혼수상태인 것 같더라.”
트로웰이 다시 눈길을 보내왔다. 아, 그래, 이 화제엔 관심이 있다 이거지. 속으로 발끈했지만 꾹 인내한 이프리트가 이죽거렸다.
“뭐, 지금은 계약 끊겼으니 전 계약자라고 해야겠네. 그놈은 대체 왜 살린 거야? 걔야말로 죽어야 하는 놈 아니었냐?”
“간단하게 죽으면 안 되니까.”
트로웰이 입을 열었다.
“쉽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속삭이는 듯한 음성은 여전히 건조했지만 비소를 담고 있었다. 짙어진 황금색 눈동자엔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찜찜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 이프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너 말이야.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쓸데없는 생각?”
가만히 눈을 깜빡인 트로웰이 단조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어떤 게 쓸데없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아, 정말. 낮게 탄식한 이프리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맞아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정말 실행하려는 거 아니지?”
“말도 안 되는 계획?”
“알아들었으면서 뭘 모르는 척이야? 인간을 멸종시키겠다는 그 허무맹랑한 계획 말이야.”
“그게 왜 허무맹랑해?”
“그럼 정말 멸종시키겠다고?”
더는 참지 못한 이프리트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너 진짜 왜 그러냐? 인간은 주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야! 걔네 하는 꼴이 다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그로 인해 돌아가는 균형과 생태계가 있어! 그렇게 다 죽여서 네게 남는 게 뭔데? 이 땅을 피로 물들여서 정령왕인 우리가 얻는 게 뭐가 있냐고!”
사납게 몰아치는 말에 트로웰은 피식 웃었다.
얻는 거?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냥 파괴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세계를, 그가 사랑하던 것들을. 전부 다 망가진 모습을 보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질지도 모르니까.
아니, 어쩌면 반대로 더 슬퍼지게 될까. 솔직히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예측되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미래는 혼탁한 어둠으로 가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결과만은 분명했다. 자신은 한없이 추해져 밑바닥까지 추락할 것이다. 그 추악한 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역겨웠다. 그런데도 왜 멈출 수 없는 걸까. 트로웰은 멍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정말……!”
“걱정 마. 그 앤 안 죽여.”
한마디 뱉으려던 말은 곧바로 이어지는 말에 가로막혀 그대로 삼켜졌다. 고개를 든 트로웰이 혼란한 표정을 짓는 이프리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나라도 다른 정령왕이 지키고 있는 건 건드릴 생각 없어. 처음 계획과는 다르지만 하나 정도는 남겨둬도 상관없는 것 같아. 인간의 수명이야 한시적이니까. 그 애가 마지막 인간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넌 지금 내가 엘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그걸 제일 걱정하는 건 맞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아,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 언제는 네가 내 말을 들었냐.”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시근덕거리며 외친 후 이프리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사그라지는 불꽃을 눈에 담은 트로웰은 다시 바람의 영역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거친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일으키는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광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엔 누군가의 우는 소리로 들렸다. 그건 억눌린 신음으로 요동하는 통곡이었다.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는 흐느낌이었다.
“알아, 미네르바. 넌 이런 걸 바라지 않겠지. 그냥 내 분풀이일 뿐이야.”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모두가 바라지 않아도, 미네르바조차 그걸 원하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를 내 손으로 죽이고, 내가 아꼈던 이들을 상처 입히더라도.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쓰게 웃은 트로웰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닿지 않는 바람을 대신해서 자신의 무릎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퍼석한 모래와 다를 바 없는 허무하고 시린 감각이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나를 원망하길 바랄게, 미네르바.
그래야 나도 이 지독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 * *
주변을 의식했을 때, 나는 넓은 들판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저물어가는 석양의 붉은 빛이 들판의 황금빛과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색채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색을 본다고 느끼는 건 그저 착각인지도 모른다. 이건 꿈이었으니까.
오랜만에 꾸는 자각몽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런 상황도 워낙 익숙해져서 이젠 그러려니 싶다. 최근엔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또 이런 꿈을 꾸는 건지 조금 의아했지만.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판 저편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선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한 남자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장인이 혼신을 다해 조각한 듯한 화려하고 섬세한 외모가 멀리서도 빛을 발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은 석양보다 더 아름다운 붉은색을 지니고 있었다. 반가움보다 그리움이 더 큰 얼굴이었다.
“라피스!”
그가 나오는 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이번 꿈은 매우 친절했다. 한달음에 달려가니 그의 모습이 곧바로 가까워졌다. 붙잡아도 그대로 사라지거나 다른 광경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그는 팔이 잡혀 있는 상태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감동이 하염없이 밀려 들어왔다.
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마주 볼 수 있는 대신 그가 말을 하지 않는 형식의 꿈인가 보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사라지지 않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