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37화 (537/608)

제537화

한 나라의 후작이 무참히 살해됐다. 최근 가세가 기울었다곤 하나 대귀족의 일원이자 전(前) 외무대신이었다. 심지어 가해자가 정령왕 엘퀴네스였다.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먹잇감이 있을까. 목격자도 있었기 때문에 제도가 시끄러워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미아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능한 공작이었다.

넋을 잃고 서 있던 그는 돌아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라스포 후작의 시신을 인계해 부검하게 했고, 사인(死人)이 심장마비라고 공표했다. 원래 후작에게 지병이 있었는데 그가 지레 겁먹는 바람에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평가였다. 실제로 사인 자체는 심장마비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서도 엘뤼엔이 후작을 해쳤다는 증거는 없었으니까.

덕분에 살인 사건이 아닌 단순 사고로 처리되어 상황 자체는 원만히 마무리됐다. 엘퀴네스가 라스포 후작의 요청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치료를 부탁하는 편지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이뤄낸 라미아스는…….

“엘퀴네스가 그 녀석 얼굴을 쓰다듬어 줬어. 얼굴을 쓰다듬고 웃어줬어…….”

여전히 그날 목격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하얗게 탈곡한 듯한 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집요한 계약자는 인기 없어요.”

“시끄러워.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네가 뭘 알아. 나한테는 그런 식으로 얼굴 쓰다듬어 주거나 따뜻하게 웃어 준 적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건 치료한 거고요. 그리고 따뜻하게 웃었다기보다는 실소에 가깝지 않았나요…….”

“젠장, 다비안 그 자식, 정령 계약도 운 좋게 하게 된 주제에 복에 겨운 호강을 하다니. 절대 그냥 안 둬. 두고 봐. 누굴 건드렸는지 절절히 깨닫게 해주겠어.”

“저기요. 지금 저 누구랑 대화하는 거예요?”

콩깍지가 씐 사람의 일방적 오해가 이렇게 무섭다. 뭘 어떻게 해도 말릴 수 있는 기세가 아니라 그냥 다비안의 앞날에 행운이나 기원해주기로 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요.”

“뭐, 내가 수습하지 않았어도 일이 어렵게 가진 않았을 거야. 황제도 정령왕과 척 지기는 싫을 테니까. 사실 이번 일이 빠르게 마무리된 것도 그래서고.”

황제는 진상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공식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그 하나만은 아닐 터였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함부로 건드릴 생각은 못 하겠지. 하지만 그래서 넌 더 위험한 존재가 됐어. 무슨 말인지 이해해?”

“네.”

이번 일로 황제는 정령왕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을 거다. 안 그래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검이 이제 언제든 자신의 목을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겠지. 제국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이가 그런 위협을 그냥 내버려 둘 리는 없었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지어야 해. 황제 놈이 망할 혼사를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거 진짜예요?”

“왜 아니겠냐. 그나마 태중 혼약은 효력이 약해서 밀어붙이지 못하는 거야. 황실에 네 또래의 애가 하나도 없는 게 지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안 그랬으면 벌써 혼인 증서 들이밀었을걸?”

아득한 기분을 삼키다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한창 하늘을 붉게 채워가고 있었다. 어스레한 땅거미가 드리운 대지는 평온한 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할 시각이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비가 다시 내릴 예정인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바라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희뿌연 달이 그 안에 삼켜졌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하는 걸 한동안 가만히 구경했다. 그렇게 얼마간 있으려니 잠시 후 골목 사이로 마차 하나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차는 근처에 있는 기차역 앞에서 멈춰섰다. 지금 역에 정박해 있는 야간열차를 타려는 목적인 듯했다.

기차역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혼자 분주한 마차의 움직임이 더 눈에 띄었다. “좀 더 서둘러!” 일정이 촉박한 상황이었는지 안에서 내린 남자가 허둥지둥 화물칸에 짐을 옮기는 마부를 다그쳤다. 연신 주위를 살피는 걸 보면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인 것 같기도 했다.

“다 옮겼습니다, 나리.”

“좋아, 넌 바로 돌아가라.”

굽신거린 마부에게 남자가 돈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는지 주머니 안을 힐끔거린 마부가 헤벌쭉 웃었다.

“넌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날 보지도 못했고 수상한 행색을 느낀 적도 없다. 알겠지?”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굽신거린 마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차를 다시 몰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투덜거렸다. 기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피울 생각인지 그가 주머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젠장, 게이트를 이용하면 이런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럼 내 행적을 고스란히 알리는 꼴이니.”

공간 이동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선 황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공무에 관련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용 내역이 기록된다. 출발한 시간부터 도착지까지 전부 상세하게 적히기 때문에 행적을 숨기고 싶은 사람은 꺼리는 수단이었다. 남자에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나려는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떠나지 못하겠지만.’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크리스가 알겠다는 표시를 한 후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능숙한 사냥꾼답게 산만 한 덩치가 떨어졌는데도 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후미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도 자신에게 다가서는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다 못 해 비행선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좀 좋아? 왜 갑자기 운영을 안 한다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아마 너처럼 몰래 도망가는 놈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여전히 시근덕거리는 남자의 혼잣말에 크리스가 경쾌한 말투로 대꾸했다.

“뭐? 무슨……!”

흠칫 놀라 돌아본 남자가 그대로 헛숨을 들이켰다. 모자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씩 웃은 크리스가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양 손을 들어 올렸다.

“이야, 이런 데서 널 다 만나네. 이 밤중에 어딜 급하게 가시나?”

“너, 너, 네가 어떻게……?”

“내가 널 하루 이틀 아는 게 아니거든. 네놈 행동거지 따위는 다 꿰고 있다는 말이지.”

그래도 설마 진짜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크리스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웃었다. 분노와 경멸이 안도감과 기쁨에 뒤섞인 혼란한 웃음이었다.

“아내와 새끼들도 버리고 혼자 야반도주라니. 진짜 어떻게 된 게 하나도 예상을 벗어나질 않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이죽거린 크리스가 등에 메고 있던 봉을 뽑아 들고 남자의 모자를 쳐냈다. 훌렁 벗겨진 모자가 떨어지고 가려져 있던 얼굴이 나타났다. 남자, 진혼 길드 마스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버, 버리긴 누가 버렸다는 거야? 먼저 정착해서 연락할 생각이었어.”

“아, 그러셔? 야반도주하려던 건 맞다는 거네.”

“그, 그건…….”

말끝을 흐린 진혼 길드 마스터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는 중에도 연신 뒤에 있는 기차 쪽을 향해 눈길을 보내는 게 빈틈이 생기는 대로 튈 기세였다. 물론 크리스가 그런 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성큼 다가선 그가 진혼 마스터의 뒷덜미를 붙들고 강제로 끌어갔다.

“이, 이거 놔! 여기 누구 없나?”

“닥치고 따라와.”

원래 진혼 마스터는 헌터로서의 실력은 떨어지는 자였다. 크리스의 힘을 당해낼 리가 없는 그는 속절없이 끌려나갔다. 다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애초에 후미진 곳을 택한 것이 실책이었다. 기차 안에선 이쪽이 잘 보이지 않는 구조였고, 한창 기관사랑 대화 중인 역장은 구석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기차에서 울리는 소음이 너무 컸다. 결국 기차역에서 벗어나 으슥한 숲에 끌려올 때까지 그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거칠게 떠미는 힘에 바닥으로 넘어진 진혼 마스터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크리스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얼씨구,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우리?”

이쯤에서 내 존재도 알려야 할 것 같아 뒤쪽에서 지켜보던 걸 그만두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를 알아본 진혼 마스터의 얼굴이 더욱 경직됐다.

“당신은…….”

“오랜만이네요. 이런 식으로 마주쳐서 유감이에요.”

담담히 건넨 말에 겁에 질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탈출로를 찾으려는 듯 주위를 힐끔거리는 그를 향해 크리스가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고작 그것만으로 진혼 마스터는 쇳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마, 말로 합시다. 우리, 제발 말로 하자고요.”

“지금 충분히 말로 하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크리스가 거칠게 대하는 건 이해하세요. 솔직히 화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길드전을 앞두고 상대 마스터가 사라져버리면 우리도 좀 곤란하거든요.”

세피온 공작이 임시 협회장을 맡은 헌터 협회는 이번 길드전 신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진혼 길드 측에서 항변하며 재고를 요청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순조롭게 길드전 일정까지 잡힌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진혼 길드원이 줄줄이 탈퇴했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으나 우리가 알 바는 아니었다.

길드 간판인 아인 이드리스는 아직 병동에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고, 믿을 만한 실력자들은 길드를 떠나려는 상황. 궁지에 몰린 진혼 길드 마스터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외국 용병이라도 고용할 줄 알았지, 설마 돈 되는 것들만 홀랑 챙겨 혼자 야반도주를 감행하려 할 줄은 몰랐다. 크리스가 이런 상황도 대비해둬야 한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닭 쫓다 지붕을 바라보는 신세가 될 뻔했다. 크리스가 이를 갈며 진혼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오늘 일은 못 본 거로 할게. 얌전히 돌아가서 길드전이나 준비해.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고이 접어. 알겠어?”

“미, 미안하지만 길드전은 열리지 않을 거야.”

움츠려 있던 진혼 마스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헛소리야?”

“이미 늦었다는 소리야. 폐업 신고했거든.”

“……뭐?”

“잘들 모르는 편법이지. 길드전 일정이 잡힌 중에도 폐업 신고는 접수된다는 거 말이야. 임시 협회장만 믿은 모양인데, 신고 담당자는 내 쪽 사람이라 이미 처리됐을 거야.”

당황한 크리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얼굴을 굳히고 크리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본 진혼 마스터가 히죽거렸다.

“이제 진혼 길드는 세상에 없다는 뜻이야. 너희가 아무리 대단해도 없는 길드와 길드전을 할 수는 없지 않겠어?”

“……하, 좋게좋게 끝내려 했더니.”

피식 웃은 크리스가 쥐고 있던 봉을 어깨에 걸쳤다. 우뚝 선 채 내려다보던 자세를 흩트린 그가 천천히 몸을 굽히고 진혼 마스터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길드전을 하는 건 우리를 위한 게 아니었어. 그냥 마지막 예의를 갖춰준 거였지.”

“뭐, 뭐?”

“폐업했으면 뭐. 그럼 내가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넘겼을 것 같냐? 길드전에서 졌으면 그냥 개망신당하고 재산 좀 잃고 끝났을 텐데. 굳이 죽겠다고 목을 내미네?”

반격했다는 듯 기세등등하던 진혼 마스터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눈치가 아무리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 크리스의 눈에 실린 살기가 진심이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주춤거리며 뒤로 몸을 뺐다.

“나, 날 죽여봤자 좋은 일 없을걸? 누가 죽였는지 다들 알아차릴 게 뻔해. 길드 마스터가 살인죄로 잡혀가면 네 길드가 멀쩡할 것 같아?”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지. 그러게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크리스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공포에 얼룩진 진혼 마스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민의 말을 잊은 거야?”

이어지는 말에 위협적으로 다가서던 크리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늘진 얼굴에 형형한 눈길이 타올랐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너, 넌 지금까지 아무리 화나도 날 죽이려 하진 않았어. 라민이 더는 살인하지 말라고 해서지. 그 녀석이 네가 평범한 사람으로 살길 바랐기 때문이잖아. 아니야?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말을 어기겠다고? 심지어 나는 라민의 형인데?”

“그걸 아는 새끼가……!”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크리스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다. 털썩 엎어진 진혼 마스터가 비명을 내질렀다. 크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다시 걷어찼다. 그렇게 몇 차례 사나운 폭행이 이어졌다. 크리스가 축 늘어진 진혼 마스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엉망이 된 얼굴로 강제로 일으켜진 진혼 마스터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 한 번 더 지껄여봐.”

“흐으, 사, 살려…… 살려줘…….”

“꼴에 살고는 싶냐?”

이를 가는 크리스에게서 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이 거칠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내하고 있었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 어지간하면 손에 피 묻힐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길드전을 택한 거였고. 그 선을 네가 넘은 거야. 내가 언제까지고 그냥 참기만 할 것 같았냐?”

“잘못, 내가 잘못했…….”

“거짓말 마.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잖아.”

“아냐! 진심이야! 내가 다 잘못했어!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할게! 무릎 꿇고 빌게! 제발 살려줘!”

비굴할 정도로 매달리는 진혼 마스터는 이미 내가 알고 있던 뻔뻔한 그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본 크리스가 다시금 숨을 깊게 삼켰다.

“……좋아. 마음 같아선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내가 인내심 하나는 정말 강하거든.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면 죽이진 않을게. 이게 너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야. 선택을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말할게! 뭐든지 다 말할게!”

“네가 라민 님을 죽인 거 맞지?”

순간 움찔한 진혼 마스터가 경직된 숨을 삼켰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서릿발 같은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하.”

고개를 떨군 크리스가 낮게 실소했다. 진혼 마스터의 멱살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전 여명의 활 길드원들에게 손을 쓴 것도 너지? 루크가 객사한 것도, 달리아가 눈이 먼 것도, 엘시드가 다리 불구가 된 것도 전부 네가 한 짓이지?”

지난 동안 크리스가 어떤 세월을 겪어왔는지가 보이는 말들이었다. 진혼 마스터는 다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멱살을 잡아당긴 크리스가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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