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라미아스가 과연 공명정대했던가는 둘째치고. 이쯤 되면 진혼 길드는 우리더러 알아서 깨부수라고 자리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은 금방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도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다비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 괴로우니까 비열하게 웃지 마.”
“엘도 웃었거든?”
“엘은 무슨 표정이든 어울리시니까 괜찮아.”
“와, 이 자식 편애하는 것 봐! 그래, 엘은 비열하게 웃는 표정조차 예쁘다 이거지! 외모지상주의가 이래서 문제야!”
쏟아지는 비난에도 다비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성난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려대던 크리스만 먼저 지쳐서 소파에 늘어졌다. 이 모습만 봐도 다비안이 길드에 들어온 이후의 상황이 벌써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는 그에게 일거리를 미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같지만 과연 생각처럼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왠지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움찔한 크리스가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꽤 찝찝했나 보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뭘요?”
“지금 날 되게 불쌍하게 보는 얼굴이었어.”
“크리스도 참. 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래요. 아,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요. 길드 가입 희망자가 그렇게 많아요?”
“어? 어어, 그렇지. 하루에 십수 명은 되는 것 같아. 시몬이랑 델라가 서류 접수하는데 요즘 계속 철야야.”
다행히 크리스는 더 추궁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침 하고 싶었던 얘기였는지 곧바로 하소연이 쏟아졌다.
“솔직히 좀 골치 아파. 진짜 희망자도 있지만 단순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는 놈들도 꽤 많거든. 기자 놈들이 위조 신분으로 면접 보러 오기도 해서 그거 거르는 것만 해도 일이라더라. 헌터증을 위조하다니 다들 미친 거 아냐? 심사할 때 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맞다, 엘. 너 여기까지 오는 길은 괜찮았어?”
“평소랑 똑같았죠, 뭐. 다른 데 가는 척하면서 따돌렸어요.”
“갈수록 기승이네. 그 존재감 흐리게 하는 마도구는? 다시 못 빌리는 거야?”
“릴이 당분간은 바빠서 못 만나거든요.”
“제가 갖고 있던 것도 이미 반납한 상태라…… 죄송합니다.”
침울해진 다비안이 사과했다. 그가 갖고 있던 건 라미아스가 빌려준 거라 일을 그만두면서 같이 반납했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라미아스도 당분간 쓸 일이 많다고 해서 빌릴 수 없었다.
“왜 다비안이 죄송해요. 어차피 계속 마도구에 의지할 순 없죠. 그거 착용하고 있으면 눈에 안 띄어서 좋긴 한데, 식당 같은 데 가는 건 불편해요. 주문을 받으러 오질 않거든요. 매번 사람들 깜짝깜짝 놀라게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게다가 요즘 기자들은 마법 감지기 같은 도구도 쓴다. 특정 마법에 반드시 들어가는 수식을 찾아내는 거라 정확성도 꽤 높은 편이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피곤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소리였다. 내 시대에선 이런 걸 고민할 필요는 없었는데, 문명과 기술의 발달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외모가 이럴 땐 좋은 게 아니구나.”
“그래서 일단 머리를 염색하고 짧게 잘라볼까 하는데요.”
“헉, 진심이야?”
“염색약도 이미 사놨어요. 금발이 눈에 띄는 것 같아서 흑발로 바꿔보려고요.”
“……그게 소용이 있을까.”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은 무척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왠지 전에도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콰앙!
그 순간 큰 소음이 울렸다. 누군가가 크리스 집의 현관문을 강하게 내리친 소리였다. 담소를 나누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뻣뻣해졌다.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이 문 열지 못해!”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윽박질렀다. 얼굴을 굳힌 크리스가 곧바로 내게 눈길을 보냈다. “후드 쓰고 있어.” 조용히 이어진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후드를 깊게 눌러 썼다.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가 문으로 다가가는 동안 다비안도 몸을 일으켜 내 앞쪽에 섰다.
“당신 누구요? 내 집엔 무슨 용건이오?”
크리스는 문을 조금만 열고 빈틈을 향해 물었다. 문밖에 있는 남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라케인 크리스인가?”
“그렇소만.”
“네놈에게 용건은 없다. 가서 네파스를 불러와.”
일순 다비안의 몸이 움찔거렸다. 굳어진 그의 뒷모습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네파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다. 그놈이 여기에 있다는 거 다 알고 온 거니까.”
“대체 무슨 말인지…….”
“네파스 유바 라스포! 네가 언제까지 이 아비를 능멸할 작정이냐! 당장 이 문을 열고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크리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나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라스포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했는데 모두의 반응을 보니 어디서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비안의 생물학적 부친이 라스포 후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비안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당황한 기색의 크리스에게 괜찮다는 시선을 보낸 후 문을 열었다. 그러자 화려한 복식의 전형적인 귀족 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일전에 연회에서 봤던 라스포 후작이 분명했다.
외무 재상이었던 그는 황태자가 저주를 받고 쓰러진 후 이러저러한 이권 다툼에서 밀려나 지금은 사임한 상태였다. 벌려둔 사업도 족족 망하는 바람에 재산도 거의 다 잃고 원래 살던 1구역의 그레난 지구를 떠나 거주지도 옮겼다. 그가 막아서는 크리스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비안을 노려보았다.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구나.”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진상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리더구나. 움브라를 그만뒀다는 게 사실이냐?”
“네, 맞습니다.”
“반역도를 막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약속하신 포상도, 승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걸 전부 거부하고 그만뒀다고?”
“네.”
“네? 네라고?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다! 공신이 되어 복권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단 말이다!”
길길이 날뛰는 후작에 비해 그를 지켜보는 다비안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크리스가 기가 막힌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게 이 녀석의 공로지 왜 가문의 공로요? 가문이 얘한테 뭘 해줬다고?”
“네파스가 라스포의 이름을 달고 있는 한, 내 가문의 일원이다. 이놈은 가문의 명예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
“헛소리하고 있네.”
“뭐, 뭐라고?”
“그 명예란 놈은 당신이 제일 많이 내버리고 다녔잖소. 지금 누가 누구더러 책임을 지래? 그리고 얜 다비안이거든? 네파스라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도 없고, 사용한 적도 없소. 은근슬쩍 갖다 붙이지 말지?”
라스포 후작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돌연 사납게 치켜뜬 그의 시선이 내 쪽에 닿았다.
“저자는 누구지?”
후작을 마주한 이후로 고요한 나무처럼 서 있던 다비안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크리스의 얼굴도 굳어졌다.
“실내에서 후드를 쓰고 있다니 몹시 수상한 자로군.”
“남이 사 그러든 말든. 왜 갑자기 엉뚱한 사람한테 시비요? 내 손님이니 상관하지 말고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시오.”
“당황하는 걸 보니 꽤 중요한 자인 모양이야. 라케인 크리스 주변 인물 중에 요즘 모습을 감추고 다닐 만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혹시 저자가 정령사 엘인가?”
내모는 기세에도 라스포 후작은 꿋꿋했다. 게다가 골치 아프게 내 정체를 알아차리기까지 했다. 침묵이 흐르자 라스포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가 다비안을 비난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정령사 엘과 아는 사이냐 물었을 때 모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
“내가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을 때 넌 분명 모르는 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적인 만남을 가질 정도면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구나.”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 다비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후작이 다비안의 얼굴을 후려친 소리였다.
“사생아 따위가! 감히 나를 능멸해!”
“다비안!”
경악한 크리스가 비틀거리는 다비안을 얼른 부축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사생아의 주제를 알게 해준 것이다!”
“이 새끼가! 너 지금 말 다 했어?”
“일개 헌터 따위가 귀족에게 이 무슨 천박한 말버릇이지? 널 귀족을 능멸한 죄로 끌어가겠다!”
“후작님!”
경악한 다비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내 죄인처럼 얌전히 있던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강한 반응인데도 라스포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밖에 다들 뭐 하고 있나! 당장 들어와서 이놈을 끌어내!”
그가 명령하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수행원들이 움직였다. 누가 겁낼 줄 아느냐며 크리스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돌아가는 꼴이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더는 지켜보기도 뭐해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한테 용건이 있는 것 같은데 저와 대화하시죠.”
“엘!”
“크리스도 일단 진정해요. 라스포 후작님? 얘기나 들어볼 테니 앉으세요.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크리스를 끌고 가려는 목적은 아니지 않나요?”
앞자리를 권하며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제야 멈칫한 후작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수행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려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자신 있게 내 앞에 앉는 그는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랬냐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이거 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소. 가주로서 일가를 다스리는 과정이 쉽지 않다 보니 때로 거친 언행이 오가기도 한다오. 양해해주시길 바라겠소.”
“……그러죠. 절 만나려 하신 이유는요?”
“그대의 정령왕이 황태자 전하의 건강을 치료했다 들었소.”
마치 소유물을 칭하는 것 같은 말투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비안과 크리스의 시선도 차게 식었다. 후작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알아차렸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느긋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요?”
“알다시피 정령왕 미네르바가 폭주했을 때 중상자가 많이 나왔소. 그 안에 내 첫째 아들도 있소.”
“첫째 아들?”
무심코 다비안에게 시선이 향했다. 다비안은 담담하게 받아넘겼지만 후작의 얼굴은 왕창 찌푸려졌다.
“정부인이 낳은 진짜 첫째 아들을 말하는 거요. 가문을 이을 적법한 후계자지.”
“아, 그래요…….”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삼켰다. 후작이 그 적법한 첫째 아들을 지키기 위해 다비안에게 저주를 대신 받게 했다는 사실도 새삼 상기됐다. 크리스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내 아들이 아주 위중한 상태요. 신관의 치료를 받았지만 평생 불구로 지내게 될 거라 했소.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불구라니, 이 무슨 끔찍한 일이겠소? 그대가 그 아이를 치료해주시오.”
“제가 왜요?”
“지금 사람을 치료하는 데 이유를 묻는 거요?”
“다친 사람이 그 댁 아들만 있는 것도 아닌데, 특혜를 베풀 이유도 없죠.”
웃으며 답한 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런 요청이 비단 오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한 후로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중상자는 아직도 대부분 퇴원하지 못한 상태였다. 황태자가 건강해졌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 그들은 엘퀴네스가 자신들도 치료해주길 바랐다. 가진 게 많은 자일수록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황태자만 치료받은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지금도 매일 꾸준히 관련 편지를 받는 중이었다. 설마 라스포 후작의 아들도 휘말렸을 줄은 몰랐지만. 이 경우엔 신이 살아 있음을 사람들 앞에 증명한 셈이라고 해야 하려나. 내가 태연히 넘길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후작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내 아들만 치료하는 게 특혜라면 모두를 치료하면 되는 일이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시네요. 후작님이 무슨 권리로 그런 걸 요구하시죠?”
“억지라니!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번 일로 다친 이들은 전부 치료해줘야 마땅한 거 아니오?”
“어째서요?”
“애초에 바람의 정령왕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게 아닌가! 같은 정령왕이 책임을 져야지!”
……와,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와 다비안 역시 크게 숨을 삼켰다. 라스포 후작은 참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정말 정령왕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면 지금 그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됐다. 지금 이 순간엔 특히 더더욱.
“꽤 재밌는 주장이군.”
자연체 상태로 내 옆에 앉아 있었던 엘뤼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정령왕의 모습에 라스포 후작이 숨을 멈췄다. 크리스와 다비안도 경직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놀라서 눈을 부릅뜬 얼굴들에 경악이 차올랐다. 대체 언제부터 계셨던 거야? 크리스가 눈으로 묻는 것에 나 역시 눈으로 대답했다. 처음부터요. 크리스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같은 정령왕이니 책임을 지라고 했나?”
서늘하게 미소 지은 엘뤼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움찔한 라스포 후작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소파에 앉은 상태였기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마치 천적을 앞에 둔 시궁쥐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인간 때문에 바람이 그리되었지. 그렇다면 넌 같은 인간으로서 책임질 마음이 있는 거겠군.”
“그, 그, 그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지금 그 책임을 져라.”
엘뤼엔의 시선이 닿는 순간 라스포 후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헐떡이던 입에서 그르륵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움을 청할 땐 겸손한 자세부터 갖추도록 해라. 이제 다음 기회는 없겠지만.”
충고가 이어졌으나 이미 숨을 거둔 시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주위가 급격히 고요해졌다. 문 앞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후작의 수행원들이 허둥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제 곧 정령왕이 후작을 죽였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겠구나. 앞으로 닥칠 상황이 훤히 보이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불만인가?”
“아냐, 아냐. 솔직히 속은 시원하네.”
죄질치곤 너무 편하게 끝내줘서 그렇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엘뤼엔이 시선을 틀었다. 그의 눈길이 향한 건 얼어 있는 다비안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후작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가족의 죽음이 안타까운가?”
“……아닙니다.”
떨리는 숨을 내뱉은 다비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동요가 가득하던 눈빛은 이미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외람되지만 가족이라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던 엘뤼엔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벼운 손길이 스치자 퉁퉁 부어 있던 뺨이 순식간에 나았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비안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물의 정령사라면 함부로 맞고 다니지 마라.”
“아, 죄, 죄송합니다. 이제 절대 안 맞겠습니다. 아, 아니. 안 맞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안 맞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얗게 굳어 있던 얼굴이 급격히 붉어졌다. 혼란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뤼엔이 피식 웃었다.
“엘이 어디서 저 같은 걸 주웠군.”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떨떠름한 기분으로 투덜거리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문 앞에 라미아스가 세상을 다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앞으로 다비안의 인생이 상당히 고달파질 거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