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4화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군. 이렇게 바로 괜찮아질 줄은…….”
눈시울이 붉어진 황제는 기쁜 만큼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면서도 엘퀴네스의 치유력이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엘뤼엔을 돌아보는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으로 혼란했다.
“정말 고맙소.”
“내가 내 계약자 얼굴을 봐서 베푸는 건 여기까지다.”
이어진 대답은 서늘했다. 덕분에 하염없이 감동적으로 흘러가던 분위기가 빠르게 진정됐다. 한창 정신없이 울던 사람들이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엘뤼엔은 차가운 눈동자로 황제를 응시했다.
“지위 덕분에 득을 얻었으니 이제 그 자리가 네게 합당한지를 증명해야 할 거다.”
주위의 온도가 한층 더 낮아졌다. 숨을 삼킨 황제가 굳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해했소.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겠소.”
엘뤼엔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나도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냥 사라져도 충분한 그가 굳이 걸어서 이동하는 건 나를 위해서였으니까. 다행히 우리 뒤를 쫓아 나오며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라미아스가 막아준 듯했다.
밤이 깊어진 시각이라 출구로 향하는 복도는 매우 한산했다. 유리 창 밖의 세상은 여전히 짙은 비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며칠간은 더 쏟아질 기세였다. 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다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 고마워, 아버지. 내가 너무 귀찮게 하지….”
“상관없다.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귀찮기는 하단 소리구나. 역시, 우리 아버지. 빈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귀찮아도 상관없다고 하니 나도 마음의 양심을 묻어놔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와서는 지킬 양심도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점점 더 뻔뻔해져서 큰일이다. 그때 앞서 걸어가고 있던 그가 우뚝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 정말 마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냐?”
“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여기서 카노스 얘기가 나오지? 설마 내가 시간을 건너뛴 걸 눈치챈 건가? 당황해서 얼어 있자 엘뤼엔의 시선이 내 아래쪽을 향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가 보이는 것에 멈칫했다. 장갑 위에 처음 보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발테움의 빛이 내리는 날에
오르는 발걸음이 붉은 비로 흩날리네.
어리석은 자의 눈물이 바닥을 적시니
라데카의 시계가 길을 찾으리라.
“……이게 뭐지?”
원래 아무런 문양도 없는 갈색 민무늬 가죽이었다. 문장을 확인하기 위해 벗어봤을 때만 해도 이런 글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엘뤼엔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처럼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확인했는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진 말엔 내 기분도 같이 복잡해졌다.
“신탁이다.”
“……어?”
멍하니 고개를 들자 엘뤼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 만나기 전에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 적당히 해라. 넌 부정해도 마신의 생각은 다른 것 같으니.”
말을 마친 그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는 나름대로 정리가 된 모양인데,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멍청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간격이 벌어지자 엘뤼엔이 다시 멈춰섰다.
“안 오려는 거냐?”
“어? 어어, 아니! 가!”
멀어진 정신을 다급히 챙겨 들고 허둥지둥 달려가 그의 옆에 섰다. 보폭을 맞추고 나서야 간신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카노스가 내게 신탁을 내렸다는 소리였다.
* * *
약속대로 황제는 대대적인 국무회의를 열고 종전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저주가 풀렸으며 조만간 건강한 모습으로 정무에 복귀할 거라는 공표와 함께였다. 제도가 어수선한 와중에 시기상조라는 여론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오랜만의 좋은 소식을 반가워했다. 이제 막 깨어난 황태자가 건강해진 이유가 엘퀴네스의 치료를 받은 덕분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비공개로 진행했어도 말이 새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네르바의 분노가 임했다며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다른 정령왕이 황태자를 도와줬다는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비극적인 사고가 있긴 했지만 든든한 새 아군을 얻었다고. 그 정령왕이 사건 당시에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을 구한 전적이 있다 보니 더더욱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계약자인 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헌터 엘이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니. 두 가지 초월 능력을 통달한 사람은 세피온 공작님 다음으로 처음이지 않아?”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굉장하지. 제국 태생은 아니라고 했었지? 대체 어느 나라 출신이래?”
“몰라. 헌터 엘은 워낙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잖나. 지금까지 신원을 제대로 캐낸 이가 아무도 없다더군. 하지만 출신이 무슨 상관인가. 제국에서 살면 제국인이지.”
가는 곳마다 들리는 소리가 전부 다 내 얘기였다. 검성인 게 밝혀졌을 때도 화제가 되긴 했지만, 그땐 황태자가 쓰러진 상황이기도 해서 금방 사그라졌었다. 이번에도 워낙 굵직한 일들이 많아서 쉽게 잦아들 줄 알았는데 그러긴커녕 점점 더 말이 불어나는 것 같았다. 라미아스의 경고대로 확실히 이전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하긴 잠깐 끓어오르고 말기엔 그날 엘뤼엔이 선보였던 힘이 너무 강렬하긴 했다. 하늘이 바다로 뒤덮인 광경은 일평생 쉽게 잊힐 기억이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거 아나? 황제 폐하께서 헌터 엘과 에클레어 공작 가문과의 혼사를 추진한다는 말이 들리더군.”
……뭐라고?
너무 놀라는 바람에 집어 들려던 물건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떨어진 물건이 쌓여 있던 무더기 위에 떨어지면서 잠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점원에게 얼른 사과하며 무너진 배열을 고쳤다.
“그게 정말인가? 잘되면 좋겠군.”
“맞아, 헌터 엘도 작위를 거부할 수 있으니 말이야. 지금까지 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걸 보면 출세엔 별로 관심이 없는 게 아니겠나. 역시 제대로 정착하게 하려면 혼사만 한 게 없지.”
‘누구 맘대로.’
멋대로 떠들어대는 말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혼사라니. 그날 했던 황제의 아무 말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에클레어 공작 가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황제의 동생이 그 가문과 혼인했다고 하던가. 그래서 공작 부부가 낳는 아이들도 황위 계승권을 지니게 된다고 들었다.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얼마 전 그 공작부인이 첫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잉태한 상태다.
“근데 공작 부부의 후사는 아직 복중에 있는 거 아닌가? 아이의 성별도 모를 텐데 혼사부터 추진하는 건가?”
“뭐, 귀족들이 그런 걸 신경 쓰겠나.”
“하긴, 어차피 정략혼인데.”
나는 신경 쓰거든?
어떻게든 혼사를 추진하려는 속내가 이렇게까지 발휘될 일인가. 아찔해지는 머리를 가만히 짚었다. 가까이 다가온 점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거 하나 주세요.”
“네, 2루아입니다.”
더 듣고 있다간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 고른 물건값을 치르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상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 조금 걸어가는 척을 하다 훌쩍 담벼락 위로 뛰어올랐다. 그 상태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나타나 허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내 뒤를 밟고 있던 잠복 기자들이었다.
“젠장, 어디로 갔지?”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설마 위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내려다보다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시 후드로만 가리고 다니는 건 한계가 있나. 날이 갈수록 기자들의 추적이 교묘해지는 게, 따돌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신탁은 아무리 알아듣기 쉬운 내용이라도 해석이 필요하다. 하물며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에 해석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받은 카노스의 신탁이 그랬다.
엘뤼엔에게 물어봤지만 가르쳐줄 마음이 없는 것 같기에 아이라와 에디스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신학을 배우고 자란 그들이 일반인보다는 나을 테니까. 마신의 신탁이라는 건 밝히지 않았지만, 신탁이라는 것 자체에 두 사람은 큰 흥미를 보였다.
“이건 찬미의 시입니다.”
“그게 뭔데요?”
궁금해하는 내게 아이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줬다. 멋 옛날 한 왕국에 있었던 베루스라는 남자의 일화였다.
“그는 왕의 장자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할 거라는 예언을 받습니다. 장자의 존재가 장차 분란이 될 거라 근심한 국왕은 그를 시골로 보내어 평범하게 자라도록 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베루스는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예언 때문에 장자로서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에서 박탈된 걸 몹시 억울해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분투했다. 기적의 신 발테움에게 제물을 바친 그는 수많은 전쟁을 불사한 끝에 마침내 왕관을 쟁취한다. 원하는 대로 운명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베루스는 많은 것들을 잃기 시작했다. 유년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온 아내는 왕비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의 모략에 휘말려 폐위된 후 병사하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하다 나라를 떠나 객사한다. 가장 의지하던 친우가 배신하여 그의 등에 칼을 꽂았으며, 정략혼으로 얻은 아이는 성장하여 내란을 일으켰다.
“베루스는 절망하고 왕이 된 걸 깊이 후회합니다. 그러다 눈을 떴는데 그 모든 게 다 꿈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어린 왕자였고, 자신이 성장하던 시골 저택에 있었죠. 그래서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성장한 베루스는 훗날 공작 작위를 받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무사히 혼인을 치렀고, 그들 부부의 삶은 모든 국민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다. 사랑 아래 태어난 자녀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부모의 자랑이 되었고, 그의 가문은 왕국을 이끄는 5대 세가 중 하나로 굳건히 이어진다. 그건 왕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이었다. <찬미의 시>는 베루스가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읊었다고 알려진 시였다.
“좋게 해석하면 삶에서 불합리하다 여기는 것이 알고 보면 최선일 수도 있다는 교훈입니다. 신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는 길로 인도하니,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구요.”
“나쁘게 해석하면요?”
“……애써도 소용없으니 일찌감치 단념하라는 의미죠. 꼭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냐는 조롱의 의미로도 씁니다.”
“…….”
이 양반이 진짜.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을 꾹 내리눌렀다. 왠지 카노스는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로 썼을 거라는 근거 높은 확신이 든다. 그러고도 남을 신이었다.
“하지만 이 일화엔 또 다른 해석도 있어요.”
그때 듣고 있던 에디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해석이요?”
시선을 받은 에디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의 비화는 이러했다. 꿈에서 깨어난 이후 베루스는 결심한 대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막상 평범하게 살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왕은 정적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만큼 베루스의 주위엔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이가 넘쳐났다. 꿈에서는 발판이 됐던 이들이 왕이 되지 않으려는 베루스에겐 오히려 역경이 됐다. 그가 아무리 왕위에 뜻이 없다고 말해도 형제들은 늘 그의 진위를 의심했다.
“그건…….”
“주어진 길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는 거죠. 지켜야 할 것들을 잃지 않으려면 이 또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노력하지 않으면 지켜야 할 것을 잃는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이미 내가 바꾸려던 것들은 전부 틀어졌다. 남은 건 내가 알고 있는 흐름을 따라가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거운 기분을 삼키고 있는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이상할 정도로 눈빛이 초롱초롱한 에디스와 아이라가 보였다.
“왜, 왜요?”
“아뇨,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황제나 왕처럼 국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사가 아니고서야 개인이 신탁이 받는 일은 드물거든요. 그런데 엘에겐 이런 게 당연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야 엘도 국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잖아요. 정령왕의 계약자인데.”
“그렇네요. 정령왕의 계약자니까.”
“말 안 해서 미안하다니까요…….”
분명 웃는 얼굴인데 화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흘기듯 바라보는 시선에 식은땀을 흘리려니 금세 표정을 바꾼 두 사람이 장난한 거라며 깔깔거렸다.
“사실 별로 놀라지도 않았어요.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느낌이었죠.”
“그, 그래요?”
“엘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수긍이 간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이 정도가 되어야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전에 크리스가 했던 말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티 내고 다녔나. ……좀 그랬나 보다. 적어도 할 수 있는 걸 못하는 척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다들 편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비록 이어진 말에는 따라 웃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 황제가 엘의 혼사를 추진한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
“에클레어 공작 가문과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작가에서도 매우 반겼다고 하던데요.”
설마 여기까지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졌던 건가.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아 머리를 짚었다.
“혼약 당사자가 아직 태중에 있으니 나이 차이가 굉장하겠네요. 그런데 태어나는 아이가 아들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이크 제국인은 특히 혈통 문제에 민감하던데, 남성 간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협의를 따로 하는 겁니까?”
“하아, 글쎄요. 어느 쪽이든 애초에 혼인할 일이 없어요.”
“아, 역시 그렇죠? 세피온 공작님이 굉장히 화가 많이 나셨더라고요. 금쪽같은 남의 새끼를 넘본다면서, 황제가 제정신이냐고 황족 모독 발언을 서슴없이 퍼부으셨어요.”
그 드래곤은 또 왜 그래. 정령왕이 폭주하면 다른 사람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아무래도 다들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다. 폐부까지 차오르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