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33화 (533/608)

제533화

“특히 엘퀴네스는 치유의 능력도 있잖아. 무조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려고 할걸. 당장 조금 이따 만나자고 할지도 몰라. 아니, 아예 본인이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지.”

“왜요? 황제가 어디 아파요?”

“왜긴? 황태자가 그 꼴로 있잖아.”

아, 설마 아직도 황태자가 자리에 누워 있는 건가. 기억을 짚어보려 하니 기다렸다는 듯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역시나 황태자는 지난 2년간 계속 깨어나지 못했다. 굶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간이었지만, 황제가 수많은 신관과 의원을 대동한 덕분에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는 중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저주는 엘퀴네스도 정화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닌데요. 그리고 왕녀가 죽었으니 이제 저주도 풀렸을 거잖아요.”

“그래, 맞아. 좀 전에 깨어났어. 좋아 죽겠는데 여론 의식해서 차마 한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황제 얼굴 꼴이 아주 말이 아니었지.”

누군가의 불행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상황이 이렇게 극명히 드러나는 일도 흔치는 않을 거다. 이번 일로 다들 정령사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지만 황제만은 그 반대일 거라고, 이어진 라미아스의 설명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그럼 해결된 거 아니에요?”

“아니지. 지난 몇 년간 잠만 자고 있던 애 몸 상태가 어떻겠냐.”

“아…….”

과연, 그런 거라면 임자를 제대로 찾은 거긴 하다. 엘퀴네스의 치유력이면 쓰러지기 전보다 더 건강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내가 엘뤼엔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거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니 벌써 한숨이 흘러나왔다. 간단한 정황 조사를 위해 동행해달라는 부탁도 무시했던 그가 과연 세간의 주목을 받을 상황을 달가워할까. 아니, 그보다는 인간을 치료할 생각 자체가 아예 없을 거다.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조차 처음엔 거절하지 않았던가. 라미아스의 말대로 태연하게 있을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불러도 안 가면…….”

“될 거 같냐?”

물론 안 되겠지. 품어보기도 전에 무너진 희망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괜찮아도 내가 몸담은 여명의 길드는 괜찮지 않을 거다. 앞으로 제도에서 활동하는 건 물 건너간다고 봐야 했다. 지난 시간 동안 국제정세가 달라졌다면 또 모르겠지만 살펴보니 딱히 기대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마신전과의 전쟁이 무의미하게 시간만 끌면서 온 세간에 비웃음을 사고 있다곤 하나 세이크 제국은 여전히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게 없다는 소리였다.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럼 이렇게 해요. 먼저 제가 제시한 조건이 지켜진다는 전제라면 부탁해볼게요.”

“오, 너도 그런 계산을 할 줄 알아?”

눈을 휘둥그렇게 뜬 라미아스가 씩 웃었다. 사실 그냥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뜻에 멋대로 휘둘리긴 싫었다. 어차피 겪어야 한다면 최대한 이 상황을 활용하는 게 낫다. 그리고 라미아스도 그게 더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좋아, 황제한테 그렇게 전해볼게. 무슨 조건인데?”

이미 방음 마법을 펼쳤으면서도 라미아스는 비밀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몸을 더 내 쪽으로 기울였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나 역시 지그시 웃어 보였다.

“조건이 여러 개여도 괜찮으려나요?”

* * *

내가 황제에게 제시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치료 과정이 전부 비공개로 이루어질 것.

둘째, 마신전과 전쟁을 끝낼 것.

셋째, 다비안의 누명을 벗겨줄 것.

첫 번째 조건은 괜히 공식 일정으로 잡아 떠들썩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저지르고도 남을 만한 짓이라 사전에 반드시 명시할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는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나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나 필요한 일이었고, 세 번째는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아직도 다비안이 수배 중이라니.’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건가. 이왕 시간이 흐른 김에 알아서 잘 해결된 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상황이 더 많았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움브라의 상황 역시 정리된 게 없었다. 당시 이중첩자로 몰렸던 다비안의 누명도 벗겨지지 않았고, 마신관들 또한 여전히 라미아스의 저택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알아서 진행되고 결말을 맺은 거라곤 내가 아는 과거의 상황들뿐이었다. 정말 단지 그것만을 위해 시간이 당겨진 것처럼.

시선을 내려 장갑을 낀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카노스가 가루로 흩어버린 기억이 선명한데 여기서 정신이 든 이후부턴 다시 차고 있었다. 꽉 잠긴 단추를 풀어내고 조심스럽게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새겨진 박쥐 날개 문양이 보였다. 멀쩡히 자리 잡은 마신의 문장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가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게 아직 남아 있다는 건 적어도 그가 내게 다시 연락할 의사는 있다는 소리였다.

‘카노스, 대답해요. 내 말 듣고 있죠?’

문장에 의식을 집중하고 물었다. 지켜볼지 모르는 정령들을 피해 속으로만 조용히. 행여 그가 날 알아차릴까 봐 그동안엔 무의식적으로도 피했던 일이었는데 이젠 도리어 간절해지다니. 정말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연결되지 않은 건지, 그가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알 방법이 없으니 갑갑할 노릇이었다. 헛소리라도 좋으니까 뭐든 답이 왔으면 좋겠다. 이러다가는 그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내 망상이었을까 봐 무서웠다.

때마침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다시 장갑을 찼다. 안으로 들어선 건 황제를 만나기 위해 본성으로 입궁했던 라미아스였다. 그가 나간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이른 귀환이었다. 설마 제안하자마자 퇴짜를 맞은 건가 머쓱해지는데 전혀 다른 답이 이어졌다.

“황제가 승낙했어. 조건을 전부 수용하겠대.”

“이렇게 빨리요?”

다른 건 몰라도 종전은 선뜻 결정할 일이 아닐 테니 결정을 굳히기까지 적어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하지만 라미아스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사실은 황제도 이 전쟁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는 거다.

어느 세계에서든 전쟁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처음엔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에 보였던 모양이다. 천문학적인 비용은 계속 들어가는데 전쟁 양상은 변하질 않지, 세피온 공작의 반대를 비롯해 회의적인 여론이 많으니 마음껏 공격적으로 밀고 나가지도 못했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이 서로 연합하는 빌미만 던져주고 있으니 제국으로선 여러모로 손해만 보는 일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리고 있었던 건데 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거지, 뭐. 황태자가 깨어났으니 이제 더는 저주를 없애려 한다는 명분도 통하지 않을 거고.”

“다행이긴 하네요.”

“근데 조건은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여러 개 제시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좀 싱겁네. 황제는 네가 봉토를 달라고 해도 내줬을걸?”

“그런 건 별로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그게 아니고서야 아직도 여관에서 궁상맞게 살 리가 없지.”

여관 생활이 뭐 어때서. 고급 여관이면 어지간한 저택이랑 별반 다르지도 않다. 오히려 저택 관리비용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고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여관이었다.

“이러니까 더 희한하다는 거야. 네게 무슨 사정이 있건 아예 정착하지 않고 지낼 건 아니잖아. 근데 넌 영혼의 보석을 찾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어 보여. 그다음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유희하는 건 난데 가끔은 네가 더 여행자인 것 같단 말이지.”

“아하하,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냥 어렵고 복잡한 건 생각하기 싫은 것뿐이에요.”

단숨에 정곡을 찌르는 말을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라미아스도 내 정체를 의심해서 한 말은 아닌지 집요하게 파고들진 않았다. 다만 내가 아직 젊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여긴 듯 한동안 이런저런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물 흐르듯이 살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느니, 네가 언제까지 젊을 것 같냐느니, 훗날 꾸릴 가정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계획적이어야 한다느니, 할아버지가 손자를 앉혀두고 할 법한 타박의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네에, 듣고 있습니다아…….”

누가 봐도 건성인 태도로 대꾸하니 얄미워 죽겠다는 시선이 닿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건 라미아스였다.

“어쨌든 황제는 오늘 당장에라도 종전 선언할 기세야. 다비안의 수배령은 이미 풀었어. 황태자 치료 일정도 네가 편한 시간 아무 때나 정해도 된대.”

“정말 마음이 급했나 봐요.”

“하나뿐인 후계자 일인데 당연하지. 그러니까 조건이 너무 소박했다니까.”

다시금 이어지려는 잔소리를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럼 이제 내가 엘뤼엔에게 부탁할 차례인가.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막상 감당할 차례가 되니 막막하긴 했다. 한동안 엘뤼엔이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진짜 크게 혼날지도 모르겠다. 정령사라는 게 원래 정령과 본 종족 사이의 중재자나 마찬가지라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실감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질투하고 보는 라미아스조차 이번만은 나를 동정했다.

“수고해라. 네가 하필 아인 이드리스와 같은 세대에 태어난 업보려니 해야지, 어쩌겠냐. 인간사라는 게 특히 어지르는 놈 따로고, 치우는 놈 따로더라고.”

“하하, 네…….”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 중간에서 네가 곤란해질 일이 한두 개가 아닐 거야. 실버랑 그린 애들만 해도 뿔이 단단히 났거든. 정령 친화적인 종족들과는 전부 다 척을 지게 됐다고 보면 돼.”

“아, 설마 엘프족이 인간과 교류를 끊은 이유가…….”

“응? 아직 교류를 끊은 건 아닐걸?”

“아하하, 혹시 그렇게 되려나 싶어서요.”

“차차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

역시 내 시대에서 엘프가 인간을 배척하는 건 이번 일이 원인이 된 모양이다.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삼키며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었다. 이런데도 과거의 상황을 바꾸지 않은 게 더 나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선 뭘 어떻게 할 것도 없이 다 끝나버렸지만.

“난 솔직히 트로웰이 제일 걱정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부터 인간을 멸족한다고 공언하고 다녔잖아. 당장이야 정령계에 갇혔으니 얌전하겠지만 그 계획을 철회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겠죠.”

“각오 단단히 해둬. 마음 돌리게 하기 쉽지 않을 거다.”

쓰게 웃은 라미아스가 위로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 역시 억지로 의연하게 웃었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 * *

연락을 받은 엘뤼엔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온갖 구박과 면박을 각오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간 나한테 너무 적응한 모양이다. 이왕 황궁에 와 있는 김에 일정도 바로 그날 밤으로 정해졌다. 라미아스가 직접 우리를 본성 안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드시면 됩니다.”

마중 나온 시종들이 황태자의 방까지 인도했다. 기사들이 문을 열자 침대 곁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중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녀와 젊은 여성이었다. 황제 부부와 황태자비인 것 같았다.

“폐하, 귀빈들을 모셨습니다.”

시종장으로 보이는 이의 말에 황제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긴장해서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짐이 이 나라의 황제인 루멘이오.”

누가 들어도 엘뤼엔을 의식한 인사였으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시선에 황제가 무안해지기 전에 얼른 내가 앞으로 나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령사 엘입니다.”

“아아, 그래. 그대의 위명은 많이 들었네.”

다행히 (그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시작한 사람치고) 황제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불쾌한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정령사라니, 처음엔 그대가 정령왕인 줄 알았지 뭔가.”

“과, 과찬이십니다.”

“아니, 아닐세. 정말 너무 아쉬울 정도야. 나한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아니, 자네는 남성이라고 했던가? 그럼 딸만 하나 더 있었어도…….”

단지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긴 했다. 자식이 하나 더 있으면 뭘 어쩌려고. 마구잡이로 튄 화제에 어안이 벙벙해져 적당히 대응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미아스는 물론이고 시종들조차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황태자를 바로 봐줄 수 있겠는가?”

보다 못했는지 황후가 점잖게 용건을 이끌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 바로 그에 따랐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니 새하얀 캐노피 커튼 안쪽에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기운이 없는지 눈꺼풀만 멀거니 깜빡이는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보는군. 이렇게 누워서 맞이하는 걸 용서하시오…….”

“아닙니다, 전하. 편히 계세요.”

솔직히 처음엔 황태자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쓰러졌을 때만 해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훤칠하고 생기로 반짝이던 황태자는 그사이 바짝 마르다 못해 미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정말 시간이 흐르긴 했구나. 이 시대의 찬란한 마법 문화로도 잠들어 있는 동안 쇠약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왕세자의 길어진 머리를 봤을 때도 당황스러웠지만, 이번만큼 지나버린 세월을 실감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깨어나긴 했지만 걷지도 못하는 상태일세. 의원과 신관들 말로는 재활에만 몇 년은 걸릴 거라고 하더군. 회복된 후에도 예전만큼 건강하지는 못할 거라고 했네.”

설명하는 황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자가, 내 아들이 온전히 건강해질 수 있겠소?”

황제가 조바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미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황태자비 역시 간절한 얼굴이었다. 그 시선을 한몸에 받은 엘뤼엔의 얼굴엔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지금 그걸 내게 물은 건가?”

그와 동시에 새하얀 물거품이 황태자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얼굴까지, 온전히 물에 감싸진 황태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황태자비와 황제 부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뼈마디가 거의 다 드러나 있던 앙상한 몸에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거진 광대뼈가 쑥 들어가면서 마른 껍질처럼 딱딱해 보이던 피부가 부드러운 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푸석해진 머리칼에 윤기가 흐르는 순간, 그를 뒤덮은 물거품이 씻겨나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태, 태자.”

“전하…….”

다시 본 황태자는 이제 더는 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물기가 완전히 걷힌 침대 위엔 누가 봐도 건강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숨을 삼킨 사람들은 아무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본인조차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멍하니 있던 황태자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팔로 천천히 더듬어 보기도 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상기된 얼굴에 한껏 격양된 감정이 떠올랐다.

“리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황태자비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황태자가 자신의 아내를 향해 팔을 뻗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후와 시종들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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