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이게 대체…….”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동한 근위대인 것 같았다. 주변을 돌아보는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신음을 삼키기 바빴다. 나 역시 그들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엘뤼엔 덕분에 건물 잔해는 대부분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무너진 골격이 남아 있는 터전은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히려 잔해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드러나면서 더 처참해졌다. 온 사방에 보이는 것이 전부 시신이었다. 개중엔 생존자도 있었으나 시신과 별 차이를 못 느낄 만큼 참혹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 단장님…….”
“이, 일단 생존자부터 추려내라!”
통솔자로 보이는 기사가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겁먹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이 그 말에 겨우겨우 몸을 움직였다.
“엘!”
흩어지는 병사들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아는 얼굴이 달려오고 있었다. 크리스였다.
“크리스.”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달려들다시피 뛰어온 그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온몸에서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울렸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만 봐도 그가 얼마나 놀란 상태인지가 보였다.
“너 나가고 나서 얼마 후에 온 사방이 흔들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하늘은 온통 새카맣지, 간신히 와보니까 건물은 다 무너져 있지. 사방에 시신이 늘어져 있질 않나. 젠장,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저 위에 있는 거 설마 바람의 정령왕이야?”
크리스가 하늘에 떠 있는 미네르바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거의 투명할 정도로 흐려져 자연체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직 보이는 상태인 것 같았다. 저대로는 계약자들도 위험하지 않을까, 뒤늦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 코가 더 석 자였다.
콰과광! 그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미네르바를 옭아맸던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기운이 튕겨 나오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다급히 엎드리며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나를 감싸던 크리스도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일단 피하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 폭주가 더 진행될 거란 걱정은 들지 않았다. 내 시대에서 미네르바가 무사했던 걸 보면 이 상황이 어떻게든 잘 수습된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아나이스는?”
일단 크리스라도 대피시키려는데 불쑥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엔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서 있었다. 내가 알던 때보다 인상이 더 성숙해지고 머리가 길어진 루시엘 왕세자였다.
“내 동생은 어떻게 된 거지?”
채워진 기억에서 그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동생 때문에 덩달아 제도에 머무는 중이었다. 마신전과의 전쟁이 이렇다 할 결과도 없이 시간만 질질 끌고 있는 중이라 전쟁터보다 제도에 머물 때가 더 많았다. 지금도 근방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텐데,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다. 덕분에 화를 면했지만 그걸 본인이 다행으로 여길지는 모르겠다. 늘 뻔뻔하게 여유로웠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파리했다. 함께 따라온 수행원들도 모두 굳은 얼굴이었다.
“아나이스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괜찮은 건가? 지금 그 아이는 어디에…….”
“왕녀는 이미 사망했어.”
누군가가 급하게 숨을 삼켰다. 하지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 비슷한 표정이긴 했다. 주먹을 움켜쥔 왕세자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폭발이 일어나기 전부터 왕녀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어.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듣지 못했어?”
“말도 안 돼.”
단호한 음성이 내뱉어졌다. 사망 연유를 따로 묻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
연거푸 고개를 저은 왕세자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어수선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아이는 여기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단 말이야!”
이윽고 방황하던 눈동자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멈췄다. 쓰러져 있는 아인 이드리스를 발견한 거다. 왕세자는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의식이 없는 걸 보면서도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일어나, 아인 이드리스!”
마구 흔들어 깨워도 축 늘어진 아인 이드리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깨어나기엔 부상이 너무 위중했다. 누가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으나 왕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나이스를 어떻게 한 거야!”
“저하! 그러다 죽습니다!”
“심문을 하시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 합니다!”
기겁한 수행원들이 다급히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혼란한 광경을 잠시간 바라보다 시선을 떼어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이보다 더 최악일 수가 없게 끝났다. 이제 저쪽은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콰과광!
때마침 현실을 상기시키는 소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이번엔 상황이 더 심각했다. 바람을 감싸고 있던 빛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프리트와 트로웰이 억누르던 힘이 완전히 풀어진 듯했다.
결박에서 풀려난 미네르바는 이제 거대한 폭풍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뇌우를 잔뜩 머금고 흉포해진 회오리바람이었다. 그 강대한 소용돌이의 힘이 결국 지상에 미치기 시작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바람의 세기가 심해지며 똑바로 서 있는 게 불가능해졌다. 차가운 빗물이 채찍처럼 온몸을 후려쳤다. 지면까지 우르릉 흔들렸다.
“으아악!”
“크리스!”
거꾸로 들어 올려지는 그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하지만 당겨지는 힘이 더 세서 이대론 나까지 끌려갈 기세였다.
“귀찮게 하는군.”
어디선가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순간 거대한 물결이 솟아올랐다. 출렁이는 파도가 상식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그 굳건한 물의 지붕이 매섭게 지면을 장악하던 하늘의 기류를 차단해나갔다. 마치 땅과 하늘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듯했다. 험악하게 몰아치던 비바람이 사라지고, 들썩이던 땅도 천천히 잠잠해졌다.
“…….”
누구의 작품인지는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엘뤼엔이 방어해 준 거다. 기적 같은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멍하니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모두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널브러진 중에 온전히 멀쩡히 서 있는 그는 홀로 눈에 띄었다. 청옥으로 빚어낸 것 같은 외모 때문에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엘, 저 사람, 네 양아버지 아니야?”
“네, 뭐…….”
얼빠진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크리스가 한참 만에 의문을 표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엘뤼엔은 하늘의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들었다. 일렁이는 물의 표면에 너머의 광경이 비쳤다. 평화를 되찾은 지면과 달리 경계선 밖의 하늘은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멀찍이 밀려나 있는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제기랄! 안 다치게 제압만 하려니 진짜 쉽지 않네. 폭주하면 중간계에서도 본신의 힘을 다 발휘한다더니. 반이나 약해진 상태면서 이 위력은 대체 뭐야? 블레스터를 만들길 다행이네. 안 그럼 우리가 뒈졌겠어.
―그 입 다물어, 이프리트.
―답답하니까 하는 소리 아냐. 야, 엘퀴네스! 구경만 하지 말고 너도 와서 좀 도와!
“내가 왜.”
이번에도 엘뤼엔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너희 아버지 지금 누구한테 대답한 거야?” 정령왕들을 보지 못하는 크리스가 작게 속닥거렸다. 뭐라고 답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환장하겠네, 진짜! 여기서 폭주가 더 진행되면 정말 다 끝난다고! 아크아돈이 송두리째 파괴된다니까!
“그래서?”
―저저저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냐는 저 재수 없는 표정 좀 봐! 넌 괜찮아도 도련님 생각도 해야지! 엘을 망가지고 황폐한 세계에서 살게 할 거야? 네 아들이라며! 아버지라면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한 거냐!
“……정말 귀찮게 하는군.”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한 손을 들었다. 그에 따라 지붕에서 일어난 물결이 폭풍의 중심을 빠르게 휘감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점점 넋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전엔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다들 긴가민가한 기색이 강했는데, 지금 누가 이곳을 보호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그가 대놓고 증명한 셈이었다.
“엘, 너희 양아버지도 정령사였어?”
크리스 역시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으음, 그게요…….”
“와, 정령사는 보통 혈통으로 계승된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진짜 엄청 강하시다. 아니, 근데 정령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물을 막 다루시는데? 누가 보면 본인이 정령인 줄 알겠다. 하하하…….”
“…….”
농담이라고 한 말인데 본의 아니게 정답이라 따라 웃지 못했다. 미묘한 반응을 읽어낸 크리스도 어설픈 웃음을 멈췄다.
“……진짜 정령이야?”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뒤섞인 채 얼어버린 크리스를 내버려 둔 채로 다시 하늘의 상황에 시선을 돌렸다. 엘뤼엔이 합세한 덕분인가. 도저히 손 쓸 수 없을 것 같이 심각해지기만 하던 기류가 눈에 띄게 잡혀가고 있었다. 새하얗게 발하는 폭풍의 핵 안에서 사라졌던 미네르바의 형태가 다시 나타나는 게 보였다. 굳어 있던 트로웰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반대로 오만 인상을 찌푸린 이프리트는 꽥꽥거렸다.
―아씨 짜증 나!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면서 고생시키고 있어! 이 나쁜 새끼야! 너 진짜 그렇게 살지 마!
“내가 손을 떼도 상관없는 모양이군.”
―아니, 형님! 제발 우리 사정 좀 굽어 살펴봐 주십쇼! 다 아는 처지에 왜 이러십니까! 형니임!
“너 같은 거와 형제 할 생각 없다고 했을 텐데.”
―누군 네가 좋아서 형님이라고 한 줄…… 악! 힘 줄이지 마!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너 혼자 다 해 먹어! 제발 좀 통촉해주시라고! 이러면 되겠냐, 이 상전 놈의 새끼야!
이프리트가 분노할수록 입이 험악해지는 거야 익히 알지만. 저건 오히려 도발하는 거 아닌가. 다행히 그만둘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는지 엘뤼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모습이 희미해졌다. 육신을 벗은 거다. 아무래도 소환된 상태로는 편하게 힘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사방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일 테니 당황할 만도 했다.
“사, 사라졌어.”
크리스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엘! 네 아버지! 아니 아버님! 아니, 아니, 아무튼 그분이 사라지셨다고!”
“진정해요. 어디 간 거 아니니까.”
“뭐? 하지만…….”
그 순간 거세게 솟구친 파도가 미네르바를 뒤덮었다. 마치 해일이 일어나 하늘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아, 정말 안 가셨나 보네…….”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된 크리스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미네르바를 삼킨 물은 그 기세를 무한대로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보였다. 이젠 바람보다 물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억? 아니, 잠깐만!
이프리트가 소리쳤다.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음성이었다. 그 순간 삽시간에 덮쳐드는 물결 속에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모습이 고스란히 삼켜졌다.
―야, 이 미친놈아!
그게 내가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였다.
쿠웅! 콰지직!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들이닥치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먹먹한 감각과 함께 온 사방이 진동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다시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쏟아지는 비명은 그보다 더 큰 소음에 순식간에 파묻혔다.
정신을 차렸을 땐 폭우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얼굴을 뒤덮는 차디찬 빗줄기를 느끼고서야 내가 잠깐 의식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꺼풀을 몇 번 깜빡여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하늘은 더는 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거대한 회오리바람도, 미네르바도,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쏟아지는 비를 가르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물이 흐르는 땅에 저벅거리는 소리가 묵직이 울려 퍼졌다. 이 사나운 폭우 속에서도 여전히 조금도 젖지 않은 엘뤼엔이었다.
세상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빗줄기가 닿을 때마다 빛이 더해지는 것 같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정령왕일 때도 남들이 보기에 이런 느낌이었을까, 무심코 생각했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는 것 같다.
“다친 곳은?”
이어진 음성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어, 없어. 아버지는? 괜찮아?”
“내 평생 괜찮냐는 질문을 들어보는 일도 다 있군.”
시큰둥한 대꾸이긴 했지만 그는 확연히 지친 모습이었다. 정령왕의 폭주를 진정시키는 일이 그에게도 벅차긴 했던 모양이다. 진귀한 구경이란 생각에 빤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샐쭉한 시선이 와 닿았다. 뜨끔해져서 얼른 말을 돌렸다.
“어, 근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폭주는 수습한 거야?”
“그대로는 정신 차릴 것 같지 않아서 일단 봉인했다. 더 진행되지는 않을 거다.”
“그, 그렇구나. 그래도 진행이 멈췄다니 다행이야. 그럼 이제 미네르바는 괜찮은 거지?”
“나도 모른다.”
“모른다니?”
“내 역할은 봉인한 거로 끝났으니까.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진정되면 풀릴 테니 그땐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난 몸이 괜찮은지 물었는데 이번에도 엘뤼엔은 마음을 말한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좋았다. 헤헤 웃고 있으려니 눈을 가늘게 뜬 엘뤼엔이 내 옷의 후드를 잡아당겨 머리에 강제로 씌웠다. 갑자기 가려진 시야에 당황해하자 피곤이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쓰고 있어라. 분란을 일으키는 외모로 괜한 인간들 홀리지 말고.”
“……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뭐라고?”
“아하하, 착실히 쓰고 있겠다는 소리였어. 어, 그보다 왜 아무도 안 보여?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보냈다.”
……그게 혹시 정령계는 아니겠죠. 마지막 순간 처절하게 울려 퍼지던 이프리트의 비명이 떠올랐다. 미네르바만이 아니라 다른 두 정령왕까지 한데 묶어 강제로 추방해버린 모양이다. 이게 평범한 상황인 건가 싶었지만 나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얌전히 정정하기로 했다. 이제 보니 지치기만 한 게 무서운 거였다.
“저건 왜 저러고 있지?”
“어? 아…….”
엘뤼엔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았다가 머쓱해졌다. 크리스가 사시나무처럼 덜덜거리고 있었다. 하늘 한 번, 나 한 번, 그리고 엘뤼엔을 한 번. 방황하는 눈동자가 좀처럼 고정될 곳을 찾지 못하고 옮겨 다니기 바빴다. 그리곤 마침내 필사의 각오를 다진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 그러니까! 혹시, 설마, 그, 에, 에, 에, 엘퀴네스 님?”
엘뤼엔이 힐끗 그를 응시했다.
“왜.”
대꾸와 동시에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가 기절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