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0화
정신 차리고 보니 몇 년이 훌쩍 지나 있는 건 무슨 경우일까.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던전에 갇혔을 때였던가. 체감상으로는 며칠 정도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한 달이 지나 있었다. 던전 안의 시간을 멈춰뒀다고 했었지. 그때도 카노스 짓이었다. 신의 영역이란 생각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넘겼는데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자세히 캐물었을 거다.
주변의 모든 광경이 어수선했다. 폭발에 피해를 본 건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외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휘말렸고, 인근에 있던 다른 건물들까지 무너졌다. 사방에서 생존자의 신음과 곡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참혹한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뻐근한 두 눈을 문질렀다. 아직도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이해한 건 카노스가 시간을 앞으로 감았다는 거다. 내가 바꾸려던 사건들만 골라서, 그 모든 일이 전부 끝나는 시점으로.
물론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전부 다 끝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 결과가 어느 쪽이든 홀가분할 거라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내기 내용 기억해?”
트로웰이 물었다. 낮게 깔린 음성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예지를 바꾸지 못하면 네가 가장 먼저 죽을 거라고 했었지.”
멈췄던 걸음이 다시 시작됐다. 마른 숨만 넘기는 채로,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앙상한 겨울나무 같은 눈빛이 닿았다.
원래 이 내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날이 오면 내가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변명이든 설득이든, 어떻게든 그를 위로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게 내가 알고 있던 과거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 순간의 트로웰을 눈앞에 두고 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여서. 바스러지는 모래성처럼 건드리는 대로 흩어질 것만 같아서.
무심함을 가장한 표정 아래에 있는 건 지독한 허무였다. 미네르바가 소멸할 때도, 내 어깨에 기대어 울던 때조차 그는 이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얼마나 오만한 판단이었던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사실은 트로웰이 받은 상처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거다. 미네르바가 다친 만큼 그 역시 다쳤다는 걸. 해지고 구멍 난 상처에서 이미 진작부터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프진 않을 거야.”
그래서 그의 손이 내 목에 닿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무심코 움츠리자 반사적으로 힘을 빼는 게 느껴져서 더 속이 시렸다. 이런 순간에조차 그는 다정하다.
“야 인마, 트로웰…….”
당황한 이프리트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 트로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동안 애쓴 걸 생각해서 빨리 끝내줄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금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저항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잠시 꿈틀거린 손끝이 이내 피부를 지그시 파고들었다. 점차 목이 눌리는 감각이 차올랐다. 하지만 괴롭다고 느낄 수준이 되기도 전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치워.”
팽팽하던 공기가 한순간에 깨어져 나갔다. 깊은 물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목에 가해지던 압력이 느슨해졌다. 경고하듯이 명령한 사람은 엘뤼엔이었다. 눈을 뜨고 돌아보자 살벌하게 응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멈췄던 숨을 내쉬듯 거친 호흡을 삼킨 트로웰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건 나와 그의 약속이야. 왜 방해하는 거야?”
“눈앞에서 계약자를 죽이려는 걸 그냥 보아 넘기는 자도 있나?”
“이럴 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3년간 기다려 주겠다고 동의까지 했잖아.”
“그건 계약을 끝낸다는 전제였지.”
“그럼 지금 바로 계약을 끊으면 되겠네. 원래 그럴 생각인 거 아니었어?”
“마음이 변했다.”
담담한 대꾸에 트로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그가 낮게 실소했다.
“정말 낯서네, 엘퀴네스. 어떻게 네가 이렇게 변하지? 가족놀이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나 봐. 아버지라고 병아리처럼 따르니까 네가 진짜 이 애의 아버지라도 된 것 같아?”
“그렇게 사리 분별 하지 못하고 날뛰니 네가 아직 애송이인 거다.”
“내가 애송이라고?”
되묻는 얼굴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불이 튀는 듯한 금안이 사납게 달아오르며 내 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엘뤼엔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몄다. 그 순간 황급히 달려든 이프리트가 트로웰을 내게서 강제로 떼어냈다.
“그만해, 트로웰! 너 진짜 이럴 거야?”
“너까지 방해하지 마, 이프리트.”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도 엘퀴네스 편이야. 설마 싶어서 그냥 지켜봤는데 이게 진심이라면 말이 다르지. 넌 이제부터 엘 머리카락 하나 못 건드려. 괜한 힘 빼지 말고 포기해.”
“이프리트!”
“그래, 트로웰. 이성을 잃은 모습이 진귀하긴 한데 진짜 눈 뜨고 못 봐주겠거든? 너답지 않게 멍청하게 굴지 말고 일단 하늘이나 봐. 미네르바를 저대로 내버려 둘 거야?”
그제야 가시를 세우던 트로웰의 기세가 주춤거렸다. 입술을 깨문 그가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네르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 매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새카만 하늘이 강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출렁거렸다. 풍랑이 일어난 밤바다가 하늘 위에서 파도치는 것 같았다.
“저게 터지면 끝이야. 막을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럴 시간 없다고.”
“…….”
“뭐, 마음대로 해. 그대로 두면 네가 원한 대로 인간은 확실히 멸족하겠네. 인간만이 아니라 아크아돈 전체가 박살 날 것 같지만, 가끔은 그런 것도 나쁘진 않지. 덤으로 미네르바도 소멸하겠지만 그것도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다음 미네르바가 태어날 텐데. 그렇지?”
“……날 화나게 하지 마.”
“이해했으면 지금 해야 할 일을 해. 애먼 애한테 괜한 분풀이하지 말고.”
마주 선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트로웰만큼이나 이프리트의 시선도 엄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해, 트로웰.”
움찔한 트로웰이 고장 난 기계처럼 느릿하게 시선을 보내왔다. 일렁이는 눈동자에 창백한 내 얼굴이 비쳤다.
“정말, 미안해.”
“…….”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결말을 알면서도 이 내기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사죄인지, 결국 그를 실망하게 한 것에 대한 것인지. 그런 주제에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게 된 이 상황에 대한 사과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를 상처입힌 인간을 대표한 것인지. 그냥 떠오르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혼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 트로웰이 이내 돌아섰다. 꾹 움켜쥔 주먹이 수많은 감정을 억지로 집어삼키는 듯했다. 직후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확히는 육체를 벗고 정령 본체로 돌아간 거였다. 반투명해진 그가 미네르바를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독이듯 내 어깨를 한 번 꾹 짚은 이프리트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이윽고 양쪽으로 마주 선 두 정령왕에게서 붉은빛과 황금빛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줄기의 기운이 나선으로 엮어지며 미네르바를 감쌌다. 그의 힘을 강제로 억누르려는 듯했다.
―미네르바!
―정신 차려, 미네르바!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하지만 굳게 눈을 감은 미네르바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억누르는 기운이 강해질수록, 두 정령왕이 발산하는 색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엘뤼엔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안 가?”
“내가 왜.”
……참 그다운 대답이라고 해야 할지, 이럴 때조차 그다운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세계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태연한 그를 보니 나까지 덩달아 침착해지는 것 같아 나쁘진 않았다. 지금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안심이 되기도 하고.
“넌 괜찮은 거냐?”
“어? 아, 응. 아무렇지도 않아.”
머쓱한 기분으로 목을 문질렀다. 애초에 살의를 담은 손길도 아니었다. 상처는커녕 자국조차 남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엘뤼엔이 가볍게 혀를 찼다.
“몸이 아니라 기분을 묻는 거다.”
“아…… 그것도 괜찮아.”
“잘도 괜찮겠군. 형제로 여기며 따르던 녀석이 목을 졸랐는데 그게 아무렇지 않다고?”
“으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데. 상황이 워낙 그렇잖아.”
솔직히 말하면 흐름을 따라가기만도 벅차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좀 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면 이 순간이 더 힘들었을까. 아니, 잘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었든 트로웰이 상처받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엘뤼엔은 어딘지 못마땅해하는 표정이었다. “이해심이 하해와 같으니 누가 정령이고 누가 인간인지 모르겠군.” 혼잣말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아버지. 그보다 혹시 뭐 이상한 점 없어?”
“무슨 말이지?”
“지난 2년간의 기억이 흐릿하다거나.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거나.”
“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보니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눈치는 빨라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너, 혹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제 뭘 했는지 말해봐. 일주일 전에는 뭘 했지?”
아무래도 내가 질문할 대상을 잘못 고른 모양이다. 적당히 둔한 사람을 골랐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끝판왕을 선택했다. 이제 뭐라고 말하지? 카노스가 시간을 감아버린 것 같다고 답해도 되는 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냥 당황하고 말 텐데, 정령왕들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무섭다. 그동안엔 내가 아무리 수상하게 굴어도 대충 넘어가 주고 있었던 건데 이런 일까지 그냥 넘기진 않을 거다. 이조차도 카노스의 뜻에 휘둘리는 것 같아 심란했지만 당장은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주시하는 눈길을 외면해봤자 통할 리가 없어서 뭐든 변명할 거리를 고심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 낯선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는 시장을 구경하러 갔지. 오랜만에 전통 야시장이 열렸잖아. 일주일 전에도 평범하게 보냈고. 아, 라미아스가 영혼의 보석을 새로 구해왔는데, 이번에도 내가 찾던 게 아니었어.”
경험한 적도 없던 일들이 마치 진짜 기억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와중에도 라피스는 못 찾다니, 쓸데없는 개연성까지 갖췄다. 덕분에 표정이 굳어진 탓인지 엘뤼엔은 계속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 말도 기억하나?”
“어, 음. 단서를 다시 짚어보라고 했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곳엔 왜 있었냐고.”
“그리고 그다음은?”
“내게 영혼의 보석을 찾아오라고 한 사람이 공간 이동으로 보내준 거라고 대답했었어. 내가 찾는 게 있을 법한 위치를 계산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장소로 보낸 거라고……. 어, 그러니까……그게 거기에 있단 말이네?”
기억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다 다다른 결론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야, 지금. 설마 라피스가 거기에 있다고? 내가 처음 떨어진 장소? 랑시와 시몬 일행을 처음 만났던 그 숲 말이야? 확률이 높은 장소라는 게 그냥 이 세계 자체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망연한 기분으로 고개를 드니 시선을 맞춘 엘뤼엔이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깨닫기는 했군. 그땐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더니.”
“아,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럼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나와 라미아스는 지금까지 뭘 한 거야?”
“그런 걸 허튼짓이라고 하지.”
맞는 말도 너무 정곡을 찌르니 뼛속을 후비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강제로 비워진 2년의 기간. 그 기억 속의 나는 카류안을 마계로 쫓아내는 데 성공하고 무사히 귀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엔 트로웰과의 내기에서 이기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미래를 바꾸려는 계획 따위는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은 내가 경험할 만한 상황들이 마치 구멍 난 빈틈을 메꾸듯 그럴듯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이런 식으로 채워진 걸까? 아니면 지난 2년간 내가 이런 식으로 조종되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한기가 돋아 두 팔을 끌어안고 문질렀다.
‘카노스. 카노스를 만나야 해.’
그를 다시 만나서 무슨 얘기든 들어야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도 그래야 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돌무더기 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 생존자! 치유술! 사람들을 구해야 해!”
이미 조금 전의 폭발로 사망한 사람만 몇십 명은 됐다. 여파가 미친 범위를 봐선 적어도 수백 명은 다친 것 같았다. 그런데 엘뤼엔의 반응이 건조했다.
“왜?”
“왜냐니!”
“미네르바를 저렇게 만든 건 인간이다. 내가 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일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각자 별개의 존재겠지만, 정령이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아인 이드리스가 태어난 땅이라는 이유로 트로웰은 한 대륙을 사막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시대의 인류는 연대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버려 둬. 어차피 폭주를 막지 못하면 다 죽을 거다.”
이어지는 냉정한 음성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굳게 숨을 내쉰 다음 다시금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전히 거칠게 파도치는 하늘과 전쟁하는 정령왕들, 그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미안, 아버지. 그래도 구할래.”
표정을 찌푸리는 엘뤼엔을 뒤로 하고 서둘러 신음하는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간 후에는 선뜻 구조할 수가 없었다. 돌덩이를 치워내야 하는데 워낙 마구잡이로 쌓여 있어서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더 위험해질 게 뻔했다.
“그대로 끌어내! 조금만 더 버텨!”
“이쪽으로 밀어봐! 아냐! 거기 말고 왼쪽! 좀 더 조심해야지!”
멀찍이서 한창 구조 활동 중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운 좋게 부상을 면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생존자 위주로 다급히 구조하고 있었다. 지금은 건물 잔해에 하반신이 깔린 사람을 꺼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일단 저들부터 돕는 게 좋을까.
내가 가서 도와주면 금방 꺼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도 급해 보이는 상황이라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정령을 보내면 되겠지만 왕인 엘퀴네스가 돕지 않기로 했다면 정령들도 따라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묘한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 같더니, 돌연 사방의 돌무더기가 한꺼번에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돌덩이에 애를 태우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숨을 삼키고 돌아보니 삐딱한 얼굴로 서 있는 엘뤼엔이 보였다.
“아버지…….”
“인간들은 너와 동족인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거다.”
왠지 이를 가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떠올랐던 잔해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일부가 바람과 섞이면서 잠시간 주위가 자욱해졌다.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나타난 건 모래바람이 거의 다 스러진 후였다.